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114화
쓰러져 있는 서지형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괜찮으세요?”
“아, 뭐… 어. 괜찮지.”
민망한 얼굴로 먼 산을 바라보던 그가 내 손을 잡고 일어났다.
왠지 속상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염소한테 쫓기지, 여기 와서는 신인 아이돌한테 닭싸움도 지지. 처량한 그 모습이 짠해서 생수병을 건네주었다.
“선배님, 물 좀 드세요.”
“아…….”
“목이 타는 것처럼 보이셔서.”
물병을 훑던 그가 나를 올려다보더니 이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고마워.”
고개를 꾸벅 숙이고 VJ에게 다가갔다.
“감독님, 지금 순위는 어떻게 되나요?”
“어, 잠깐만.”
상대가 핸드폰을 보며 말했다.
“방금 얻은 두 개 반영해서 너희 팀이 지금 열다섯 개로 선두야.”
맥시와 내가 하이파이브를 했다.
이제 여기서 하나만 더 얻으면 우리의 승리였다.
하지만 그때, VJ가 말했다.
“그 뒤로 A팀이 지금 열 개… 에서, 뭐야. 열여섯 개가 됐는데?”
“네?”
“B팀한테 빼앗았대.”
“…….”
그러자 흐느적거리던 서지형이 벌떡 일어났다.
“뭐라고요? A팀이 지금 선두…?”
“네, 지금.”
“와, 대박이네.”
눈을 휘둥그레 뜨던 서지형이 내게 물병을 건네주고는 뒷산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얄미운 인사는 덤이었다.
“하하하! 먼저 갑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1분 후, 우리도 연락을 받았다.
“여보세…….”
-우주야아아아아!
“네?”
-이십팔! 이십팔!
아, 깜짝아.
여희연이 외쳤다.
-당장 뛰어어어어어! 이십팔 번 지점이야!
통화를 종료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달려나갔다.
어찌나 빨리 뛰었던지 먼저 출발한 서지형을 따라잡을 정도였다.
눈을 동그랗게 뜨는 이에게 나와 맥시가 환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얄미운 인사는 덤으로.
“지나갈게요!”
“먼저 갈게요. 총총..!”
* * *
같은 시각.
밤이 어두운 가운데 출연진들이 커다란 플래시를 들고 야산을 돌아다녔다.
달빛이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숲.
어디선가 부는 바람이 서늘했다.
하지만 그 을씨년스런 광경은 지금 오십 명이 넘는 이들의 열기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물론, 저마다 분위기는 달랐다.
“아무데나 파 봐!”
“여기 흙이 새 거 같긴 한데. 이거 팠는데 아무것도 없으면 어떡하죠.”
“아, 배고파. 왜 흙이 맛있어 보이냐.”
6개의 열쇠를 건 승부에서 패배한 B팀은 눈물을 머금은 채, 모종삽으로 흙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리고 보물상자의 위치를 파악한 A팀과 C팀은 열정적으로 땅을 파고 있었다.
“빨리 파요!”
“서둘러요! 따라잡히기 전에!”
A팀의 배우 이강진이 땀을 뻘뻘 흘리며 현장을 진두지휘했다. 큰 삽으로 흙을 푸는 그의 곁에서 다른 팀원들도 모종삽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들이 선두였다.
반면, 그 뒤를 추격하는 C팀은 여희연 혼자 고군분투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혼자라고 해도 그 속도가 남달랐다.
모델 한소라가 독촉했다.
“얼른! 더 빨리 해요! 저 사람 너무 빨라요!”
맹추격하고 있는 C팀과 격차를 벌리려고 A팀이 온힘을 다해 삽질을 할 때.
“저희 왔어요!”
마침내 C팀의 지원군이 도착했다.
셀럽 맥시와 뉴블랙의 리더 선우주였다.
“야! 더 빨리 왔어야지!”
“길이 너무 헷갈려서요. 여기까지 오는데 한참 동안 헤맸어요.”
“얼른 이거 받아.”
여희연이 선우주에게 삽을 건넸다.
그 광경에 A팀 사람들, 특히 주세한의 멤버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남이 일할 때마다 답답하다며 자기가 다 하려고 하는 캐릭터가 왜 저 아이돌 멤버에게 선뜻 삽을 건네준 걸까?
이내 그 의문이 해결됐다.
“뭐야, 쟤?”
“저거, 저, 뭐…….”
“왜 저렇게 빨라요?”
엄밀히 말해서 빠른 속도는 아니었다.
선우주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는 적당한 속도로 삽질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퍼올리는 흙의 양이 남달랐다.
저 여리여리한 아이돌 멤버 하나가 삽질 한 번에 퍼올리는 흙이, A팀 전체와 맞먹을 정도였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자세히 본다면 선우주의 삽질은 다른 이들과는 차이점이 있었다.
상체 힘만 써서 빠르게 체력이 고갈되는 이들과 달리 허벅지의 힘을 쓴다든가. 삽질을 할 때도 지렛대의 원리를 응용한다든가.
그러나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에 그런 걸 자세히 생각할 여유가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
숙련된 인부처럼 땅을 파는 아이돌의 모습에 넋이 나갔던 A팀은 순식간에 쌓이는 상대 팀의 흙더미를 보고 정신을 차렸다.
모종삽을 든 양옥분이 이강진을 독촉했다.
“얘! 얼른 파! 쟤네한테 우리 다 쫓기게 생겼다.”
다시 A팀이 힘을 다했지만 상황은 좋지 못했다.
C팀의 나머지 인원들이 속속들이 합류했기 때문이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비주가 어디로 사라져 버려 가지고. 길치래, 얘가. 지금도 계곡에서 혼자 울려고 하는 걸 우리가 데려온 거라니까.”
“됐고, 얼른 파! 우리 지금 2등이야.”
“감독님, 저희도 모종삽 주세여!”
마침내 A팀과 C팀의 모든 인원이 한 자리에 모이면서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됐다.
선우주의 초반 삽질 덕분에 두 팀이 판 깊이는 어느새 비슷해져 있었다.
치열한 접전.
한 팀이 더 파면, 다른 팀도 더 파고.
꼴찌인 B팀은 팝콘을 뜯는 듯한 얼굴로 구경꾼처럼 수다를 떨었고, 제작진은 그 치열한 두 팀의 경쟁을 카메라에 담았다.
“으아, 거의 다 왔다! 다 왔어!”
“힘 내요!”
“여행권! 이거 여행권 걸린 거예요!”
요란하게 외치는 가운데 거의 승부가 막바지에 이를 때, A팀과 C팀 모두 눈에 띄게 힘겨워 하고 있었다.
“이거 아무리 봐도 1미터가 아닌데.”
“힘 내요! 강진 씨, 아아! 퍼지지 말고요!”
서지형이 이어받아서 삽질을 할 때, C팀도 눈에 띄게 지쳐 있었다.
그리고 그때.
“저희 노동요 불러여!”
“노동요?”
“그 아까 할머님한테 배운 노래 있잖아여. 어른들이 고무줄 놀이 했다는 거!”
아, 하는 소리와 함께 C팀의 뉴블랙 멤버들이 삽질을 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무찌르자 공산당!
몇 백만이냐 대한남아 가는데 초계로구나!
엉뚱한 노래에 A팀 사람들은 잠시 정신 공격을 당한 듯 멈칫했고, C팀은 그 여세를 몰아 삽질을 더욱 호기롭게 했다.
이제는 다 같이 그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모습에 B팀과 제작진은 그만 웃음을 참지 못해 터뜨렸다.
그리고 그 찰나의 운명을 가른 노래와 누군가의 엄청난 삽질 덕에 두 팀의 희비는 얼마 안 가 결판이 지어졌다.
“우와아아-!”
선우주를 둘러싸고 방방 뛰는, 바로 C팀의 승리였다.
* * *
다시 돌아온 마을 회관.
A팀과 B팀이 아쉬움과 부러움이 뚝뚝 묻어나는 눈길로 보는 가운데, 피디가 우리를 호명했다.
“C팀, 나와서 보상 받아 가세요.”
“우주야, 네가 가!”
“그래, 네가 가서 받아와야지.”
왠지 모르게 떨리는 걸 느끼며 걸어 나갔다.
최고급 여행권.
그런 글씨가 적힌 판넬을 대표로 받아왔다.
다시 돌아오자 여기저기서 미련 가득한 시선이 그 판넬에 머물렀다.
축하해주지만 살짝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졌지만, 얼마 가지는 않았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식사하러 오세요!”
어디론가 자리를 비웠던 오태준 피디가 연예인들을 이끌고 근처 공터로 데려갔기 때문이었다.
“대박….”
그곳에는 낙원이 펼쳐져 있었다.
장작불이 세팅된 드럼통, 테이블마다 접시로 두둑하게 쌓여올린 삼겹살.
사람이란 참 단순하다.
불만이 싹 씻겨나감과 함께 곧바로 환호와 기분 좋은 대화가 오가기 시작했다.
곧바로 기름진 숯불 삼겹살 냄새가 매캐한 연기와 함께 사방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 냄새에 우리도 연신 침이 흘러나왔지만 안타깝게도 바로 먹을 수는 없었다.
1등에 대한 소감 멘트 때문이었다.
카메라에 대고 각자 한 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이견우는 매니저들을 이야기했고, 맥시는 부모님, 헤이션이 홀어머니를 이야기한 후 우리에게도 차례가 돌아왔다.
“저는 부모님 보내드릴게요.”
리혁이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복잡한 가족사를 언급하기 애매했던 탓인지 그런 식으로 넘긴 듯했다.
이어서는 지호였다.
“저는 누나들 보내 줄래여.”
근처에 있던 헤이션이 짓궂은 표정으로 물었다.
“부모님은 안 보내드려?”
“아, 부모님은 지금 하늘에 계셔서여.”
“…….”
헤이션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얼어붙은 가운데 지호가 아, 하며 말했다.
“지금 비행기 타고 계세여. 마카오 여행 끝나고 돌아오셔서.”
“아이, 진짜! 깜짝 놀랐네. 나한테 왜 그러냐, 정말….”
지호가 카메라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빠, 엄마. 살아 계시는데 제가 죄송해여. 근데 이거 방송 나가면 어떡하져. 혼나고 그럴 거 같은데.”
“감독님한테 편집을 해 달라고 해.”
“헐, 그래도 돼여?”
소심하게 묻던 막내에게 다른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곧바로 녀석이 해맑게 웃으며 감독님에게 양손 하트를 보냈다.
“사랑하는 감독님, 그럼 부탁드릴게여!”
촬영감독은 물론이고, 다른 스탭들도 웃음을 터뜨렸다.
잘했냐고 바라보는 막내에게 말없이 머리만 쓰다듬어 주었다.
“저는 부모님 보내드리고 싶어요.”
비주가 말했다.
“아무래도 고생을 많이 하셔서, 늘 여행을 보내 드리고 싶었는데 이번 기회로 효도를 할 수 있게 되어 정말 기뻐요. 감사합니다.”
우리 멤버들끼리 박수를 쳤다.
그러곤 돌아오는 비주를 가볍게 안아 주었다.
이어서 중현이도 부모님을 보내드리고 싶다는 의례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마지막으로 카메라가 내게 향했다.
“저는 저희 할머니를 보내드리고 싶어요. 그동안 저 키우신다고 엄청 고생 하셨거든요. 해외여행 한 번 꼭 보내드리고 싶었는데, 정말 기뻐요. 감사합니다!”
그러곤 카메라를 향해 우리 김덕순 여사를 향한 하트를 보냈다.
“방송에 나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할머니 손자가 정말 애정해요~”
“엇, 저희도 같이 할래요!”
“저두여, 울 아빠엄마누나들 러뷰예여!”
내 뒤에 서서 각자의 가족을 향해 큰 하트를 보내는 동생들을 보며 웃었다.
정말 기분 좋은 밤이었다.
* * *
밤 11시 30분.
마침내 모든 녹화가 끝났다.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강문식 할아버지의 집, 1층 방이 우리가 잘 곳이었다.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동생들이 한창 베개 싸움에 맛들려 있었다.
“중현이 형! 쟤 잡아요!”
“오케이.”
“아앗, 비겁하다! 왜 둘이 편먹고 그래여? 우주 형! 도와줘여!”
“…귀찮아.”
“에잇. 이렇게 된 거 우리 다 같이 저 대마왕을 공격해여!”
“우와아아!”
“뭐야, 왜 나한테 아아!”
졸지에 베개 공격을 당해서 나도 그 싸움에 참전하게 됐다.
그렇게 한참 동안 다섯이서 뒹굴거리고 있을 때, 바깥에서는 ‘아싸!’ 같은 소리가 흘러들어왔다.
강문식 할아버지네 식구들과 우리 C팀 사람들이 고스톱을 치는 중이었다.
할아버지가 껄껄 웃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는데, 낮에 말했던 화투 한 판이란 소원을 이루시게 되어 기쁜 것 같았다.
다행이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몸에 긴장이 쫙 풀렸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메인보컬도 뜨끈한 방바닥와 일체화가 됐다.
“아, 피곤하다… 씻어야 되는데.”
그리고 그런 리혁이의 등을 지호가 베개로 팡팡 치고 있었다. 어찌저찌 발차기로 대항하려 했지만, 결국 닿지 않았다.
다리가 짧아 슬픈 짐승이라는 드립을 치려다가 참았다.
너무 피곤했다.
새벽 서너 시부터 일어나서 짐 꾸린 거 확인하고, 상암동에서 오프닝 찍고, 차로 이동하는 동안 토크 뽑고, 연천에 와서는 뛰어다니며 재료 구하고. 요리하고, 마늘 까기도 하고.
그러다 안마도 하고, 마지막 미션 수행하면서는 삽질까지 했지.
여태 했던 스케줄 중에서 최고로 피곤한 날이었다.
바닥에 드러눕자, 눈이 스르르 감길 정도였다.
“얘들아, 가위바위보 해서 우리 이불 깔아 주는 건 어때?”
“제가 형 것까지 깔아 줄게요.”
중현이가 내 자리를 펴주었다.
다른 녀석들도 저마다 자리를 깔고 눕기 시작했다. 중현이가 내 자리에 와서 이불을 덮어주었다.
시골 이불 아니랄까 봐 엄청나게 무거웠다.
그래도 덕분에 잠이 솔솔 왔다.
“얘들아. 불끄기도 가위바위보 할까?”
“제가 할게요.”
“아유, 늙은이 배려하느라 우리가 고생이 많네여.”
“무슨 소리야, 진짜. 너 그런 얘기하다가 할아버지 할머니들한테 혼나 왕지호오…….”
“불 끌게요.”
삽시간에 어둠이 몰려왔다.
그런데 막상 불을 끄니 잠이 안 왔다.
몽롱하게 깨어 있는 느낌.
10분 동안 천장 무늬를 보며 멀뚱멀뚱 있다가, 달빛을 벗 삼아 그림자놀이를 할 때였다.
“저만 그래여? 잠이 안 오는데.”
“나도.”
“나도 그래.”
촙촙.
뺨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비주가 마스크팩을 하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우리 집도 아니고, 적응이 안 돼서 그런가 봐요.”
“그러게. 집이 아니라서 그런가.”
“저기, 형들. 집이 아니고 숙소예요.”
“아, 그러네.”
어둠 속에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난 이제 숙소가 집 같아.”
“형은 내무반이 더 익숙하지 않아여? 아…! 제 배에 다리 올리지 마여.”
“내 맘이거든.”
“저저… 하여간, 둘이 정신 연령이 똑같다니까. 유치하다. 정말.”
“응, 척척박사.”
“……나 잘 거니까 건드리지 마요.”
“저 형 항상 불리하면 말이 없어진다니까여.”
“아, 몰라. 잘 거니까 건드리지 마.”
“지금 중현이가 말이 없네. 중현이 지금 자니?”
“저 안 자요. 형.”
“뭐하고 있었어?”
“잠깐 딴생각하고 있었어요.”
“어떤 거?”
“아, 아까 헤이션 선배님이랑 음악 얘기하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앞으로 만들 믹스테잎? 그런 거 구상하고 있었어요.”
“아, 작업…….”
하루 동안 잊고 있던 현실감이 훅 하고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나도 서울로 내려가면 노래 작업해야 되는데.”
“오, 아이디어 떠올린 거 있어요?”
“아니, 뭐 비트 찍고 이것저것 멜로디까지 만든 건 많은데, 아직까지 딱 이거다 싶은 건 없더라. 조금 두고 봐야지.”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마요, 형.”
촙촙. 마스크팩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비주가 말했다.
“타이틀이 아니라 수록곡이잖아요. 저는 형이 좀 부담 없이 작업을 했으면 좋겠어요.”
“그러게, 그래야지.”
“참, 기왕 수록곡에 대해서 말 나온 김에, 우리끼리 한 번 얘기해보는 건 어떨까요?”
“오, 그거 좋네여.”
그와 함께 저마다 의견을 제시했다.
“난 다른 건 모르겠고요. 그 수록곡에 안무 들어가면 좀 빡셌으면 좋겠어요. 요즘 댄스 연습도 많이 하기도 했고, 맨날 나 하나 때문에 다들 피해 보는 느낌이라서 좀 세게…….”
“그루브한 느낌은 어때요?”
“파트 분배를 지난번보다 더 타이트하게 콕 찝어서 집중적으로…….”
그런 식으로 곡에 대한 의견을 나누니 기분이 묘했다.
좋은 쪽으로.
어두운 데서 목소리가 들려오고, 살짝 부끄러우면서도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기분도 들고.
그런 까닭 때문인지 한참 동안 몽롱한 상태로 수다를 떨었다.
점점 하나씩 잠이 들기 시작하고, 마지막으로 막내와 나만 남았을 때.
잠에 빠져들기 직전인 내게 막내가 조잘거렸다.
“사실, 저 오늘 되게 무서웠어여.”
“뭐가?”
“모르는 사람들도 많구, 막 다 무서웠어여. 제가 여기서 의지할 데가 형들밖에 없잖아여. 매니저 분들도 없고. 그래서 처음에 다른 선배님들이랑 재료 구하러 갔을 때여.”
“응, 그때.”
“너무 무서웠어여. 그니까, 그분들이 막 나쁘셔서 그런 건 아닌데, 가면 쓴 느낌이라고 해야 되나. 사실 방송이니까 당연한 거긴 하잖아여. 방송 모습이랑 실제랑 차이도 있고. 근데 저는 그게 좀 무서웠던 것 같아여. 아직 어려서 그런가.”
“그렇지, 어리지. 오렌지.”
“형, 졸리져?”
“…아니, 울 막내 얘긴 하나도 안 졸리지.”
“암튼 그래서 제가여. 아까, 마을 회관 앞에서 형 얼굴이 딱 보이는데 저는 그게 너어무 좋았어여. 그 뭐라고 그러지. 가면 쓴 사람들한테 둘러 싸여 있다가, 드디어 가면 안 쓴 사람 발견한 느낌?”
“…옹, 그랬구낭.”
“형, 듣고 있어여?”
“…….”
* * *
8월 말. 어느 무더운 밤.
바깥에서는 낯선 풀벌레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고, 집안에서는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시계 초침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피곤해서 곯아떨어진 다섯 아이돌이 코를 골고 있는 방에서 선우주는 꿈을 꾸고 있었다.
음악에 관한 꿈이었다.
* * *
꿈속에서 나는 가면무도회에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무도회장의 테라스였다.
달빛이 쏟아지는 정원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귓가로는 풀벌레 소리와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선가 의자를 끄는 듯한 불협화음도 들리고.
그런데 신기하게도, 꿈이 흑백이었다.
거기다가 주변 사람들은 죄다 가면을 다 쓰고 있는데, 나 혼자 거기서 아무것도 안 쓰고 있었다.
그리고 무도회의 참석자들은 아무것도 안 쓴 나를 아예 없는 존재처럼 여기고 있었다. 가까이서 말을 걸어도 대답도 안 하고, 손을 흔들어도 반응이 없고.
여러모로 이상한 곳이었다.
예전에 평양으로 가는 관광버스 꿈에서 만났던 돼지들이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었고, 천장 현수막에는 ‘김덕순 여사 2976번째 탄신기념일’이란 글씨가 중국어로 쓰여 있었다.
그리고 무도회장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옥좌에 우리 할머니가 앉아 있었다.
“김덕순 여사를 뵙습니다아아!”
가면을 쓴 이들이 우리 할머니한테 무릎을 꿇고 입을 맞추고 있는데, 김덕순 여사는 그들을 보며 우리 손자보다 잘생겼다며, 갑자기 그들한테 자기 인생 역정을 말하기 시작했다.
거기서부터 꿈인 걸 인지한 것 같았다.
우리 김덕순이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 잘생겼다고 할 리가 없지.
그런 생각을 할 때.
무도회장의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들어왔다.
그 순간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마치 물감이 퍼지듯, 그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으로부터 빛이 퍼지며 색깔이 번졌기 때문이었다.
그와 함께 갑자기 무도회장이 초콜릿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으어어!”
그리고 난 꿈에서 깨어났다.
* * *
“헉, 허억….”
꿈이었구나.
다시 현실로 돌아온 것을 자각함과 동시에 나는 주섬주섬 머리맡의 핸드폰을 찾았다.
녹음.
녹음해야 되는데 이거.
꿈속에서 돼지들이 연주했던 멜로디를 입으로 중얼거렸다.
머릿속이 잔뜩 엉켜 있었다.
이거 날아가기 전에 기록해야 하는데.
경황이 없어서 일단 통화 녹음을 생활화는 인물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어, 형.”
-이 시간에는 어쩐 일이야?
“석환 형. 나 미안한데… 이거 녹음되지? 내가 부르는 노래 좀 들어주라. 이거 자작곡이야.”
-뭐라고?
내 멋대로 허밍을 하듯이 노래를 불렀다.
머릿속이 몽롱했다.
다시 잠에 빠져들려는 가운데 황당해 하는 이에게 내 입이 아무 말을 내뱉었다.
“석환 형, 미안해. 내가 돈까스 사 줄게.”
그러곤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 * *
평창동의 어느 고급 주택.
-석환 형, 미안해. 내가 돈까스 사줄게.
책상에 앉아 방금 들었던 멜로디의 음표를 그리던 남자는, 통화가 종료된 핸드폰 화면을 보며 웃었다.
“얘도 참.”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지만 이내 자기도 모르게 피식거리는 웃음이 나왔다.
못 말리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난 석환이가 아니고 규환인데…….”
그런 말을 중얼거리던 조규환은 노트에 그려진 멜로디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새벽 3시 반.
선우주가 윤석환 실장이라고 착각하고 전화를 걸었던 이는 바로 레몬 엔터의 제작이사이자 작곡가, 조규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