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117화
이른바 돼지송의 작업을 함께할 파트너로 지호를 지목한 이유는 간단했다.
“네 말 덕분에 내가 가면무도회 꿈을 꾼 거잖아. 노래에 심상을 담으려면 그 발상을 떠올린 사람에게 직접 듣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제 발등을 제가 찍었네여.”
“발등이라니. 그런 표현은 좀 이상하고, 음… 복권이 당첨된 거지.”
“복권이여?”
“나랑 작업할 기회라는 복권.”
“…….”
얘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그동안 중현이나 리혁이가 나랑 곡 작업할 때마다 네가 부러워하기도 했고.”
“전 그런 적이 없는데여.”
지호가 고개를 저었다.
“전 언제나 행복한 마음으로 살고 있단 말이에여. 막내라는 역할에도 만족하고 있고.”
“정말?”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이상하다. 분명 맥날에서 감튀 먹으면서 그랬는데. ‘형들이 연말평가 준비할 때나, 노래 부를 때, 작곡할 때나. 저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맨날 뒤에서 있었잖아여’라고.”
“…그걸 기억해여?”
“너희가 하는 얘기는 한 귀로 흘려듣지 않고 다 담아 두거든.”
“…….”
“그러니까 자꾸 도망가려고 하지 말고, 형이랑 즐겁게 작업하자.”
문 쪽으로 빙그르르 의자를 돌리는 녀석을 모니터 쪽으로 딱 붙잡아 두었다.
작곡 프로그램을 로딩하는 내 모습에 지호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납치당한 인질 같은 모습에 웃음만 나왔다.
“지호야, 왜 그렇게 무서워해?”
“중현이 형이나 리혁이 형 모습이 막 떠올라서.”
“걔네가 왜?”
“형이랑 작업하고 올 때마다 막 악몽 꾸고 그랬거든여.”
“…….”
“중현이 형이 악몽 꾸는 거 처음 봤어여. ‘흐어어…!’ 하면서 몸부림쳐서 그날 저 침대 2층에서 굴러 떨어질 뻔했거든여. 밤바다 때는 옆에서 리혁이 형이 잠꼬대로 욕을 중얼중얼하고.”
“그 정도로 힘들었나?”
“형들 다크서클 장난 아니었어여.”
사실 기억이 잘 안 난다.
나는 한 가지 목표에 몰두하면 그거 하나만 보고 달리는 타입이라, 주변 풍경에 대해 소홀한 면이 있었다.
그 정도로 나랑 일하는 게 힘들었나?
불꽃놀이나 밤바다 때를 떠올렸다.
-중현아, 어때. 재밌었지?
-어… 근데요, 형. 제가 얼마 전에 TV에서 봤는데 이런 창의력 쓰는 작업은 혼자 해야 된대요.
흐음.
-리혁아. 작업하느라 고생 많았어.
-…….
흐으음.
시시각각으로 변해 가는 내 표정을 바라보던 막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난 카메라를 향해 말했다.
“편집 부탁드릴게요, 피디님.”
“안 돼여. 이거 꼭 넣어 주세여. ‘동생들 부려 먹는 악덕 사장’ 그런 자막도 반드시 넣어 주시구여.”
“야, 나도 이미지란 게 있는데.”
“그럼 이미지를 생각해서 ‘어린이를 괴롭히는 늙은이’ 이런 걸로 해주세… 아아! 이거 보세여, 이 형이 사람 잡아여!”
누가 보면 내가 애를 때리는 줄 알겠다.
뺨을 쭉 잡아당긴 걸 가지고, 카메라를 두고 기자회견을 하는데 어이가 없었다.
나도 카메라를 보고 말했다.
“다른 동생들이 자꾸 이상한 얘기로 막내에게 겁을 준 것 같은데, 여러분, 제가 오늘 지호에게 작곡이 얼마나 재미있는 건지 알려 주겠습니다.”
“우주 형.”
“응?”
“저 이제 안 도망갈 테니까 손 좀 놔주면 안 돼여?”
“아직은 안 돼.”
그러곤 카메라를 향해 빙긋 웃어주었다.
* * *
리얼리티 분량을 위한 토크를 끝내고, 곧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내가 중점을 둔 포인트는 노래의 색이었다.
데뷔곡이었던 불꽃놀이가 뉴블랙이라는 그룹의 색을 팬들에게 소개하는 곡이었다면 이번에는 좀 더 개개인의 색을 나타내고 싶었다.
특히 이번 수록곡 같은 경우는 가면무도회라는 발상을 떠올린 막내에게 포커스를 두고 있었다.
“좋아하는 음악이여? 저는 딱히 가리지 않는 거 같아여. 친구들 듣는 거나 요즘 유행하는 거면 듣고. 평소에도 망고 차트 100 랜덤 플레이 눌러 두고 놀아여.”
“게임 좋아하는 이유여? 별 거 없는데. 현질하는 재미도 있구 그냥 재미있구. 게임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여?”
“좋아하는 색깔은 빨간색! 이것도 별 이유 없는데. 빨간색은 되게 잘생긴 사람 아니면 소화하기 힘들잖아여. 나만의 스페셜한 느낌? 제가 그래서 핑크도 좋아해여. 형… 근데 이런 거랑 이번 수록곡이 무슨 상관이에여?”
상관이 있었다.
이번 수록곡에서 내가 의도하는 바는 우리 그룹이 지닌 색깔 중 하나를 두드러지게 보여 주는 것이었다.
모두의 색을 조화롭게 섞은 것이 불꽃놀이였다면 이번에는 각각의 색에 포인트를 맞추는 것.
그러려면 멤버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지금은 우리 막내를 주인공으로 그 색을 잘 나타내는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
시기의 문제였을 뿐, 사실 이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일이었다.
뉴블랙은 그룹 활동이다.
그러하기에 나는 우리 수플레들이 멤버 개개인보다는 나와 동생들 모두를 좋아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최근의 활동을 거치면서 나 혼자 너무 주목을 받고 있었다.
뮤직카페 때부터 지금까지.
언젠가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팬 카페 내에 올라오는 게시물을 보는데, 게시판이 온통 ‘우주’로 도배되어 있었다.
다른 동생들의 게시글들을 다 합친 것과 맞먹는 지분이었다.
그걸 확인했을 때는 가슴이 철렁했다.
불길한 징조였으니까.
연습생 때부터 선배 가수들을 지켜본 바, 어느 멤버의 개인 팬이 불균형적으로 늘어나는 건 좋은 징조가 아니다.
자칫했다간 신인 때부터 팬덤이 싸우고 난리가 날 수 있으니까.
그런 분위기는 정말 사양하고 싶었다.
내가 원했던 건 내 개인의 성공이 아니라 내가 속한 우리 그룹이 성공하는 거였으니까.
그랬기에 이번 수록곡을 통해 다른 멤버들도 주목을 받게 하고 싶다는 게 내 목표였다.
그래서 조규환 이사가 앨범 프로듀싱을 제안했을 때 덥석 받은 거기도 하고.
아무래도 이번….
“지호야.”
“넹.”
“어디 가니?”
“…저 물 마시러 가여.”
“정수기가 안에 있는데 왜 밖으로 나가. 안에서 마셔.”
“따뜻한 거 마시려구.”
“온수도 나와.”
“생각해 보니까, 목이 좀 따끔따끔한 거 같아서 티백도 챙겨 오려구여.”
“아, 티백?”
“네.”
“두 번째 서랍 열어 봐. 비주가 종류별로 넣어 놨어. 강문식 할아버지가 주신 꿀도 있으니까, 목 아프면 꿀물해서 먹어.”
“…….”
‘ㅠㅠ’라는 이모티콘을 얼굴로 표현하는 막내를 보며 나는 턱을 괴고 생각을 이어 갔다.
어떻게 하면 쟤의 매력을 무대에서 100퍼센트 살릴 수 있을까.
지호의 실력은 무난하다.
아니, 잘하는 편이다.
예전에 울면서 ‘저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여! 이잉잉!’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우리한테서 밀린다는 거지, 다른 그룹에 간다면 충분히 에이스로 불리고도 남을 실력이다.
소위 말하는 밸런스형.
춤이랑 노래도 빠지는 거 하나 없고, 무엇보다 비주얼이 훌륭했다.
가만히 세워만 둬도 사람들이 좋아할걸.
하지만 춤이나 노래로 주목을 받게 하기에는 애매하다.
나랑 비주가 양옆에서 추는데 센터 세워 두면 쟤가 스트레스 받아서 못 버틸 거고.
아무래도 2절과 3절을 이어 가는 브릿지 구간에 임팩트를 줘야 할 텐데.
…역시 표정 연기 쪽을 살려 봐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마우스를 딸깍거렸다.
구간 별로 재생을 하면서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그렸다.
PBS 공개홀의 무대.
양쪽에서 지미집 카메라가 돌아가고, 메인 카메라 셋을 앞둔 그곳에서 동생들과 함께 선 모습을.
퍼포먼스에 대한 부분은 내버려 둔 채 파트 별로 구상을 시작했다.
그런데.
“으음.”
“뭐가 잘 안 돼여?”
옆자리에서 페퍼민트 티를 호로록 들이키는 막내에게 말했다.
“일단 색부터 칠해야 할 것 같아. 노래의 전반적인 톤도 조정하고.”
고개를 갸웃하는 녀석을 보며 나는 1집 앨범 때 우리의 컬러로 지정되었던 색깔을 떠올렸다.
당연하게도, 내가 떠올린 색은 빨간색이었다.
* * *
-‘비주형’ 님이 ‘왕지호’ 님을 초대했습니다.
비주형 [지호야]
비주형 [기분이 많이 상했어?]
지호 [몰라요]
지호 [모두 절 버렸어요]
-왕지호 님이 채팅방을 나갔습니다.
-‘중혀니형’ 님이 ‘왕지호’ 님을 초대했습니다
중혀니형 [ㅎㅇ]
지호 [초대하지 마ㅅㅔ여]
-‘왕지호’ 님이 채팅방을 나갔습니다
-‘중혀니형’ 님이 ‘왕지호’ 님을 초대했습니다
중혀니형 [ㅎㅇ]
지호 [하지 말라구여]
중혀니형 [ㅎㅇ]
비주형 [지호야 형이 도와주고 싶어도 지금 레슨 중이야]
지호 [중현이 형도요?]
중혀니형 [ㄴㄴ 난 끝남]
중혀니형 [수고]
지호 [와]
지호 [와ㅏㅏ]
지호 [진짜 실망이에요]
지호 [글고 리혁이형은 왜 저 안 초대해요?]
서리혁 [ㅋ]
서리혁 [내가 널 왜 초대함?]
서리혁 [신인배우 해봐라 우리처럼 아껴주는 사람 만나나]
서리혁 [밖에 나가서 찬바람 좀 쐬봐야 고생을 하지 ㅉㅉ]
지호 [녜 척척박사님]
지호 [ㅗ]
서리혁 [ㅗㅗㅗㅗ]
지호 [ㅗ x 200]
왕지호는 핸드폰을 내렸다.
그러곤 작업실 테이블에 턱을 괴고 앉아 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선우주가 모니터를 뚫을 기세로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참 신기한 형이라고 생각했다.
벌써 두 시간째였다.
물 한 모금도 안 마시고, 뭔가에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갑자기 마우스를 미친 듯이 딸깍거리거나, 아니면 신디사이저 건반을 누르며 턱을 쓰다듬기도 하고.
예전에 영화에서 봤던 초콜릿 공장이 떠올랐다.
저 형의 머릿속에선 움파룸파 족이 뛰어다니면서 자신은 이해할 수 없는 기계를 돌리는 것 같았다.
지금도 저런 식으로 잔뜩 노래를 만진 다음이면.
“지호야.”
“넹.”
“이거 한 번 들어 볼래? 둘 중에 어떤 게 더 나은 것 같아? 일단 A버전이랑 B버전 들려줄게.”
“음… 저는 B가 더 나은 것 같아여. 뭔가 더 간지나는 느낌?”
“오케이.”
거기다가 가끔씩 딴 생각하다가 성의 없이 대답하면, 그걸 귀신 같이 알아차리곤 했다.
“뭐가 더 나아?”
“A여.”
“둘 다 똑같은 버전이었는데.”
“…….”
“집중해야 돼. 지호야.”
“와, 이거 꼭 방송에 나오게 해 주세여. 함정까지 파고 저러잖아여.”
솔직히, 이렇게 선택하는 게 어떤 도움이 되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었다.
처음에는 말이다.
그런데 점점 바뀌는 곡을 듣고 있으면… 뭔가 느낌이 계속해서 달라지고 있었다.
익숙함? 편안함?
곡 자체가 뭔가 자신이랑 딱 잘 맞는 그런 느낌이라고 할까.
마치 수제 양장점에서 맞춤 정장이 완성되는 걸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느낌이었다.
최종 버전을 듣고 눈을 휘둥그레 뜬 그에게 선우주가 씩 웃었다.
“어때?”
“아까랑 비슷한 거 같은데 느낌이 완전 달라여. 형, 이거 어떻게 한 거예여?”
“음… 1집에서도 그랬듯이 네가 상징하는 색이 빨간색이잖아. 그래서 노래에 색을 칠해봤어.”
색을 칠하다니?
고개를 갸우뚱하는 그를 위해 선우주가 설명을 했다.
“사람마다 느끼는 게 다르겠지만, 소리에도 색깔이라는 게 있거든. 예를 들어서 소리가 이런 식으로 낮게 이동하면.”
선우주가 신디사이저의 건반을 두드렸다. 높은 음에서 낮은 음으로 기다란 손가락이 유려하게 움직였다.
“느껴지는 색이 어두워지는 게 보이지? 같은 색이어도 좀 더 짙고, 왠지 푸르스름한 느낌도 나잖아.”
“…….”
“음, 잘 이해가 안 되면 음계 말고 악기로 설명해 줄게.”
그러면서 컴퓨터로 다른 악기의 음을 들려주었다.
선우주가 몇 번 버튼을 딸깍이자 듣기 좋은 피리 소리가 나왔다.
“뭐, 이건 우리가 하게 될 음악에서는 안 쓰는 소리이긴 한데, 플루트 소리거든? 소리가 되게 투명하고 은은하지? 맑은 하늘이 떠오르고 말이야.”
“……?”
“그리고 이런 드럼 소리는 흰색이나 검정. 북소리가 칠 때마다 흰 바탕에 검은 점이 툭툭 퍼지는 느낌이지?”
진지하게 설명을 해주는 이를 보면서 왕지호는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소리에도 색이 있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은데 정말 그 색을 눈앞에서 보고 있는 듯 생생하게 설명하는 이의 모습에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그제야 예전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썸씽을 만들 때 혼자서 10분 동안 눈을 감더니 뭘 해야 할지 알겠다고 말을 한다거나, 차에서도 손가락으로 차창을 톡톡 리듬감 있게 두드리다가 ‘아, 이걸로 비트 찍으면 되겠다’하며 그에 맞춰 멜로디를 흥얼거린다거나.
그런 생각을 하자, 이전에 다른 형들이 선우주와 작업을 하고 돌아올 때마다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주 형은 진짜… 특이해.
김중현은 이 이상 적합한 표현이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서리혁도 혀를 내두르며 말했었다.
-진짜, 음악 쪽으론 타고난 인간이야.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모차르트냐며 웃어며 넘겼지만, 가까이서 작업하는 걸 지켜보니 왜 형들이 그런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신이 나서 설명하는 이를 보며 왕지호는 카메라를 흘깃거렸다.
같은 멤버가 봐도 좀 특이한데, 이게 나중에 방송에 나오면 팬분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 * *
그날, 막내를 부려 먹었던 작업은 수월하게 끝이 났다.
처음에는 따분한 얼굴로 괴로워하던 녀석이었는데, 어느 타이밍부터는 뭔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 느낌이었다.
뭔가 초롱초롱했는데.
정확히 이해는 못 하겠는데, 아무튼 어느 시점을 시작으로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 부분은 조금 짧았으면 좋겠어여. 네, 거기를 짧게 하면 퍼포할 때 빠르게 치고 들어올 수 있잖아여.
-후렴구에서 비주 형이 센터에 선다고 생각하면 음이 그거보다 좀 더 높아도 될 거 같아여.
그런 식으로 의견을 제시해 준 덕분에 제목 붙이기를 빼면 작업은 수월하게 끝이 났다.
이대로라면 추석이 끝난 후에 바로 A&R팀에게 완성본을 보여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11월 달 컴백이 목표니 일정도 여유로웠다.
그러는 동안 9월 초가 쏜살같이 흘러갔다.
연예계에서는 육아 예능에 나오는 애기들이 전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는 중이었고, 이런저런 사건사고도 많았다.
특히 유명 배우가 조직폭력배와 유착해서 경기도에 대마 농장을 만든 것이 발각되어 사회면에도 오르는 등 시끌시끌했다.
거기다 대마초를 공급받은 연예인들 리스트까지 밝혀지면서 연예계에 큰 충격을 주고 있었다.
그만큼 파장이 큰 사건이었지만 우리는 덤덤했다.
대부분 만나 본 적 없이 사진으로만 본 분들이기도 하고, 우리의 관심사는 곧이어 방송될 주세한이었기 때문이었다.
“잘 나오겠죠?”
추석 전날.
평소처럼 불백을 점심으로 먹고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손에 든 채, 회사로 들어가는 골목길이었다.
중현이의 물음에 내가 답했다.
“잘 나오겠지.”
“저, 지금 떠오른 건데 흑염소랑 뒹구는 게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잖아요.”
“그런 생각을 지금 하다니, 대단한 걸.”
“제가 대단하긴 하죠.”
“우주 형이 너 놀리는 거야, 중현아.”
“아하.”
하여간 나빴다며 리혁이가 나를 타박하는 가운데, 중현이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말했다.
“아무튼 부모님도 친척들이랑 다 같이 보실 건데, 제가 막 부끄럽게 나오면 안 되잖아요.”
“그래도 형은 한 아이의 생명을 구한 거잖아여.”
“그 흑염소 여덟 살이라던데요. 흑염소 수명이 보통 12년에서 15년이니까 사람으로 치면 중년이에요.”
“그러면 한 중년인의 생명을 구한 걸로 하자.”
내 정리에 그러기로 결정이 났다. 뭔가 이야기가 이상한 데로 흘러갔지만 평소의 우리 대화였다.
비주가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래도 명절에는 부모님이랑 같이 TV 보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나도.”
“뭐, 그래도 우리끼리 보면 되잖아요. 우리도 나름 가….”
리혁이의 말에 우리가 시선을 돌리자, 녀석의 귀가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헛기침과 함께 대답이 나왔다.
“가요.”
그런 말을 하면서 먼저 가는 녀석을 보며 우리끼리 웃었다.
쟤 방금 가족이라고 하려고 했던 거 같은데.
뭐, 그 말대로 우리끼리 이번 명절을 쇠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지이잉-
동생들 보고 먼저 가라고 하고는, 그 뒤를 따라 걸어가며 받았다. 활짝 미소를 지으면서.
“안녕하십니까. 언제나 고객님께 행복을 드리는~ 김덕순 전문 행복상담사 선우주입니다.”
-옘병하고 있네.
“아, 진짜.”
내가 미간을 모았다.
“이런 거 하면 좀 받아 줘야지.”
-적당히 옘병을 해야 받아주지. 그러코롬 요상한 목소리로 하면 누가 좋아혀냐.
“우리 팬분들은 좋아하거든.”
-하이고, 그 사람들도 이상허지. 얼굴만 그럴싸한 놈이 뭐가 좋다고.
앞서 가던 동생들이 입을 앙다물며 웃음을 참는 모습에 나는 볼륨을 몇 단계로 낮췄다.
하여간 목소리 짱 커, 김덕순.
“왜 갑자기 전화했어, 할머니?”
-어쩐 일이기는. 추석 전날이니 전화혔지. 아, 할매가 손주한테 전화도 못해?
“톤이 좀 이상하니까 그러지.”
-뭐가.
“이거 뭔가 숨기는 거 있을 때 톤인데.”
-아, 글쎄. 그런 일 없어.
…라고 말을 하지만 뭔가 수상한 걸.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나는 회사 건물로 들어갔다. 키 카드를 찍자 삐빅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그래서 지금은 어디 있냐?
“뭐, 연습하러 애들이랑 내려가는 중이야.”
-아, 그르냐.
내가 통화를 하는 것을 배려하는지, 지하 복도에서 동생들은 무언으로 자기들끼리 놀고 있었다.
춤을 추면서 걸어가다가 한 명을 손가락으로 찍으면 그쪽이 이어 받아서 춤을 추는 식으로.
몸을 흐느적거리던 지호가 비주를 지목하자, 비주가 가볍게 몸을 꺾으면서 춤을 추다가 나를 지목했다.
폰을 낀 채로 나도 춤을 추면서 연습실에 들어갔다.
우스꽝스런 브레이크 댄스에 동생들이 웃을 때였다.
“할머니.”
“왜.”
…응?
갑자기 연습실 한구석에 육성으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홱 돌렸다.
그 순간,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
우리 멤버들의 가족들이 연습실 벽 쪽에 모여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춤을 췄던 그 자세 그대로 굳은 나를 보며 김덕순 여사가 혀를 찼다.
“왔냐.”
“…….”
어안이 벙벙했다.
…할머니가 왜 거기서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