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118화
메두사와 눈이 마주친 듯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
김덕순 여사가 스마트폰을 든 채 서 있고, 비주네 가족, 중현이네 가족, 지호네 가족, 리혁이의 동생이 서 있었다.
저마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진짜 뻘쭘하네.
아무 일도 없었던 척을 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때 비주가 센스 있게 가벼운 스텝을 밟으며 연습실로 들어왔다.
지호와 중현이도 마찬가지.
국적 불명의 춤을 추는 리혁이를 보며 웃는 가족들에게 비주가 말했다.
“놀라셨죠. 저희 맨날 이러고 놀아요.”
어색한 분위기가 삽시간에 화기애애해졌다.
비주에게 입 모양으로 고맙다고 말하자 가벼운 눈웃음이 돌아왔다. 그동안 홍시가 된 리혁이가 내게 속삭였다.
“나한테 빚진 줄 알아요.”
“좋은 청소기 하나 사 줄게.”
시크한 표정으로 떠나는 녀석을 보며 결심했다.
인터넷에서 봤던 헬로 키티 청소기 사 줘야지.
“엄마! 아빠!”
“누나아아!”
한편, 연습실에서 가족 상봉이 이뤄지고 있었다.
나도 김덕순 여사에게 다다다 달려가 푹 안겼다.
“할머니이!”
“아이고, 숨 막혀 뒤지겠네. 떨어져 있으면 얼마나 떨어져 있었다고, 이렇게 호들갑을 떤디야.”
“아, 할머니가 그만큼 보고 싶었으니까 그러지.”
“옘병. 네가 보고 싶었으면 연락을 했겄지. 요즘 들어 갖고….”
폭풍 잔소리가 이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몸을 수그려서 할머니를 폭 껴안고 있으니 기분이 몽글몽글했다.
따스한 기운이 온몸을 타고 전해져 왔다.
나도 모르게 눈물샘이 살짝 촉촉해졌다.
뭐 그리 큰 고생을 한 것도 아닌데, 포옹 한 번에 높게 걸어 놨던 감정의 빗장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듯했다.
“할머니, 나 너무 보고 싶었어.”
“그르냐.”
“응, 너무 좋다. 할머니 냄새도 좋고, 몸도 따뜻하고.”
“아이고, 이걸 깜빡혔네. 이거 핫팩을 떼다 부려야지 하고 있었는데 그 요상한 춤 때문에 까먹었어.”
“…….”
옷 아래로 손을 슥슥 넣어 핫팩을 배에서 떼 내는 할머니를 보며 눈을 깜빡거리다가, 이내 다른 사람들에게 안 보이도록 몸으로 가려주었다.
“핫팩은 왜 붙이고 다녀?”
“지난번에 보니까 서울 사람들은 차가운 거든 뜨거운 거든 중간이 없드라. 오면서도 버스에서 어찌나 찬바람을 틀어 대던지, 이거 아니었음 배때기가 꽁꽁 얼어 버렸어.”
너도 하나 줄까, 하길래 됐다고 했다.
새처럼 조잘거리는 그 모습이 귀여워서 다시 한 번 할머니를 안았다.
“넌 껴안는데 한이 맺혔냐.”
“응, 엄청 한 맺혔지. 내가 할머니 껴안으려고 몇 달을 기다렸는데.”
“…어이구, 지랄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할머니는 내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기분이 좋았다.
이제는 내가 더 크지만, 이렇게 안고 있으면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듯했다.
할머니 품에 쏙 들어갔던 그때 그 몸으로.
눈을 감고 그 기분을 즐겼다.
다시 한 번 느끼지만, 나는 세상에서 우리 할머니가 제일 좋다.
* * *
멤버 가족들의 추석 방문은 2주 전부터 예정되어 있었다고 했다.
집에 못 가는 우리를 위한 대표님의 특별 지시였다.
저녁에 다 같이 먹게 될 고깃집도 그렇고, 이따 밤에 할머니와 자게 될 호텔방도 그렇고.
애사심이 무럭무럭 솟아났다.
석환 형이 고깃집 예약을 위해 자리를 비운 동안 나는 멤버 가족들에게 회사 시설을 안내했다.
“여기가 저희 작업실이에요.”
TV에만 나오던 녹음 부스와 각종 기기들의 향연에 가족들이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덩치가 우락부락한 중현이 아버님이 유리를 두드렸다.
“튼튼하네, 이거 방탄이냐?”
“…아부지, 그런 것 좀 묻지 마요.”
어머님의 손을 잡은 채 중현이가 근엄한 얼굴로 말했다.
“당연히 방탄이겠죠.”
“그러냐. 역시, 최첨단 IT 시대를 선도하는 연예인 회사는 다르구먼. 핫핫핫!”
전직 씨름 선수셨다가 지금은 지역에서 농협 조합장을 하고 계신다나.
옛날 천하장사 그림에서 볼 법한 배불뚝이 체형이셨는데 최근에 누군가를 보고 이만큼 위압감을 느낀 건 오랜만이었다.
목청도 어찌나 좋으신지 호탕하게 웃을 때마다 유리가 흔들렸다.
“좀, 체신머리없게 그러지 마요.”
“쩝.”
하지만 어머님한테 꼼짝 못하시는 듯했다.
“어머, 이게 TV에서 나오던 그런 거구나. 신기하다. 여보, 나 저기 들어갈 테니까 사진 좀 찍어 줘요.”
“그럼 비연이랑 서 볼래요?”
비주네 가족은 여전했다.
어머님은 친화력이 좋아서 우리 할머니를 붙잡고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고 있고, 아버님은 여전히 스윗하시고.
그걸 본 어머님들이 남편들한테 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가 이런 걸 뭐 하러 찍냐는 반응에 눈썹을 세모로 모으셨다.
이따가 아버님들이 봉변 당하실 모습이 눈에 선했다.
“민준이도 안녕.”
“안녕하세요, 우주 형.”
배꼽 인사를 하는 민준이에게 무릎을 숙여 눈을 마주쳤다.
그러곤 웃으며 물었다.
“올해 학교 갈 준비는 하고 있어?”
“음. 아뇨. 몸이 낫는 게 생각보다 느려서 내년이 돼야 된대요.”
“에궁..”
아이고. 맥시한테 옮았네.
내 스스로 주둥이를 톡톡 치면서 말을 고쳤다.
“아쉽겠다. 많이 기대했을 텐데.”
“그래도 더 건강해져서 갈 거예요. 그때 되면 머리카락도 더 나서 빡빡이 탈출할 거예요.”
“그래, 민준이는 머리가 잘 자랄 거야.”
“근데요, 우주 형.”
“응.”
민준이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소곤거렸다.
“아까 복도에서 사진 봤는데, 여기 사장님도 어디 아프신 거예요?”
“대표님? 아….”
머리를 가리키는 민준이의 모습에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사레가 들렸다.
아, 진짜.
사람이 이런 거에 웃고 그러면 안 되는데, 방심하다 순간 터져버렸다.
“그, 대표님은 그런 건 아니고. 자연적으로 그 빠지시는…. 아, 뭐라는 거야, 선우주. 민준아, 형이 하는 설명은 잊어 줘.”
“아, 그냥 대머리신 거구나.”
“민준아, 그런 말 함부로 쓰면 안 된다고 했지.”
나긋나긋하면서도 엄한 목소리라 비주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눈매가 똑 닮은 누나분이었다.
곧바로 공손하게 인사를 나눴다.
이름은 김비연. 비주와 나이 차이가 꽤 나는 누나로 지금은 학원 강사로 일한다고 했다.
“연말평가 때 한 번 봤었죠?”
“네, 오랜만에 봬요.”
“동생이랑 통화할 때 이야기 자주 들어요. 정말 좋은 형이라고. 지난번 일도 그렇고, 정말 고마워요.”
“아니에요.”
상대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비주의 예의 바른 모습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머, 여기 인테리어 정말 예쁘다.”
우아하게 차려입고 오신 지호네 어머님은 소녀처럼 눈을 반짝이며 주변을 둘러보셨다.
그러더니 내게 물었다.
“이거 누가 한 거예요? 너무 예쁘다.”
“벽지부터 쿠션까지, 비주가 다 꾸몄어요.”
“어머어머, 나는 진짜 예뻐서 어디 업체에다 맡긴 줄 알았는데, 멤버가 한 거였구나. 신기하네.”
“네, 그리고….”
“형!”
내 설명은 갑자기 난입한 막내에게 끊겼다. 어머님의 등 뒤에서 팔을 두른 지호가 환하게 웃었다.
“울 엄마 짱 이쁘져?”
“어, 되게 우아하…….”
“그래? 엄마가 예뻐? 나도 울 아들이 세상에서 제일 예뻐.”
그러면서 둘이 서로 꺄악 하면서 막 수다를 떠는데, 나는 가만히 눈만 깜빡거릴 뿐이었다.
한참 동안 어머님에게 엉겨 붙던 막내는 내게 누나들도 소개했다.
“형! 여기는 우리 누나들이에여.”
“안녕하세요.”
연신 머리를 쓸어 넘기는 세 명의 누나들과 어색하게 대화를 나눈 후, 지호가 아버님도 소개했다.
“여긴 우리 아빠예여, 어때여. 제가 더 잘생겼져?”
“이놈의 자식이….”
“그래도 제가 울 가족 중에서 아빠를 제일 좋아해여. 돈도 짱 많구, 가끔 회사 일로 전화하면서 소리 지르는 것도 멋있구.”
“아주 동네방네 욕을 하고 다녀라, 이놈아.”
말은 그리하면서도 아버님은 아들이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르시겠다는 표정이었다.
“아무튼, 반가워요. 내가 얘기 많이 들었네.”
그러면서 ‘(주)HC 회장 왕현탁’이라고 쓰여 있는 명함을 건네주셨다.
호호치킨이라서 HC인가.
아버님이 은근하게 말씀하셨다.
“내가 유명해질 사람을 알아보는 재주가 있는데, 느낌이 좋아. 그 혹시 광고 한 편 찍어 볼 생각 없어?”
“아빠,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에잇, 우주 형 듣지 마여.”
아버님이 못내 아쉬운 얼굴로 우리 막내에게 끌려가셨다.
정신이 하나도 없네.
작업실 내부를 꽉 채운 사람들을 보며 눈에 안 보이는 이를 찾고 있을 때 뒤에서 누군가 팔을 툭 쳤다.
리혁이와 여동생이 서 있었다.
“내 동생이에요. 서예인.”
“안녕하세요.”
리혁이와 이목구비가 놀랍도록 똑닮은 인물이었다.
중학생이라고 했는데, 확실히 요즘 친구들이라 그런지 리혁이랑 키가 거의…….
‘키 얘기하면 죽일 거예요.’
…라고 뒤에서 성난 앵무새가 말하고 있었다.
내 시선에 서예인이 고개를 돌리자 리혁이가 방긋 웃었다.
뭐지. 저 미소는.
일찍이 본 적이 없는 풍경이라 다른 동생들도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 의문은 얼마 안 가 해결됐다.
리혁이에 대한 대화를 나누던 중에 상대가 오빠의 팔을 잡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오빠 진짜 착하죠?”
“아… 네.”
여러 의미로 그렇죠.
“진짜, 저는 우리 오빠처럼 착한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아, 그렇죠오…….”
멀찍이서 중현이가 잘못 들었냐는 듯 귀를 후비적거렸다.
그러다 손가락이 안 빠져서 어머님한테 혼이 났다.
“리혁이 참 착하죠.”
그렇게 대답을 하다가 뭔가 떠올랐다. 리혁이가 흠칫하는 가운데 나는 씩 웃으며 다가갔다.
그러곤 어깨동무를 했다.
평소였다면 눈으로 쌍욕을 하며 ‘만지지 마요’ 하면서 탁 쳐 냈을 텐데, 지금은 입가를 파르르 떨고 있다.
그래, 이거야.
내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저희가 뭘 하든 잘 받아 주고요. 진짜 착해요. 뭘 해도 싫은 척도 안 하고. 그치?”
“…으극, 네.”
“맞아여. 리혁이 형, 착한 걸로 세계 최강이에여.”
막내도 가세했다.
“제가 며칠 전에 외출할 때, 리혁이 형 옷장에서 티셔츠 하나 빌려 입었거든요.”
“으그그, 그런 일이 있었구나아. 처음 듣네에.”
“근데 이 형은 정말 너무 너그러워여. 성격 나쁘고 까칠한 사람이라면 막 욕하고 난리 났을 텐데. 그져?”
“맞아요. 우리 오빠 진짜 착해요.”
미국에 살아서 자주 못 만났다고 하던데, 그래서 오빠를 저런 유니콘 같은 존재로 생각하시나.
난 리혁이가 동생 얘기만 나오면 질색하길래 싫어하나 했더니, 평소의 김 첨지였던 모양이었다.
중현이도 가세했다.
“맞아요. 리혁이 정말 착해요. 제가 예전에 외출에서 돌아오자마자 리혁이 침대에 누운 적이 있었거든요.”
“…뭐, 뭐라고요?”
“근데도 용서해 주더라고요.”
이 기회를 틈타 각자 평소에 지었던 죄를 고해성사하는 가운데, 비주도 끼어들었다.
“여기서 밥만 잘 먹으면 완벽할 텐데.”
“우리 오빠 밥 안 먹어요?”
“네, 너무 조금 먹어서 걱정될 때가 많아요. 지금도 보면 이렇게 뼈도 가늘고.”
“제 뼈는 원래 가늘어요. 형.”
“…많이 먹어야 키도 더 잘 클 텐데. 아아, 아쉬워라.”
서예인의 눈망울이 리혁이에게 향했다. 리혁이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
“내가 입맛이 없어서 그랬어. 잘 먹어야지.”
“그래? 잘 먹을 거야?”
“…으그그, 네에, 형.”
비주가 사근사근한 미소를 지으며 리혁이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형이랑 그럼 약속할까?”
“…저 열여덟이에요. 형.”
“앞으로 밥 잘 먹기, 약속.”
입가를 파르르 떨며 손가락을 거는 녀석을 보며 웃음을 삼켰다.
지호가 속삭였다.
“저 동생 분, 이따가 꼭 연락처 받아 놔야겠어여.”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야.”
부들부들 떠는 리혁이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 * *
저녁 때까지 주어진 개인 시간을 맞이하여 나는 김덕순 여사와 가까운 백화점을 찾았다.
조명이 환한 여성 의류 매장.
마네킹이 가득한 곳을 돌아다니며 괜찮아 보이는 가게들을 찾았다.
“어이구, 정신이 하나도 없네.”
“할머니, 이건 시작이야. 옷 사고 나면 신발도 사고, 신발 사면 화장품도 사고. 살 거 엄청 많아.”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냐.”
“나 이제 부자야.”
아직 입금시기가 안 돼서 불꽃놀이와 밤바다의 음원 수익은 안 들어왔지만, 썸씽만으로도 이 정도 소비는 감당할 수 있었다.
어느 매장에 들어가 고급 코트가 걸려 있는 행거를 가리켰다.
“내가 여기서부터 저 끝까지 걸려 있는 거 다 사 줄 수 있어. 그니까 맘에 드는 거 있는지 한 번 봐봐.”
김덕순 여사가 코트를 조심스럽게 뒤적이는 동안, 나는 곁에 서 있는 점원 분에게 자신감 뿜뿜한 얼굴로 물었다.
“가운데 코트 예쁜데, 얼마인가요?”
“저희가 지금 행사 때문에 프로모션 진행 중이거든요. 저기서 30프로 할인 들어가면….”
상대가 머릿속 계산기를 두드렸다.
“팔백구십… 구백만 원 생각하면 되세요.”
“아, 그래요?”
나는 김덕순 여사를 불렀다.
“…할머니, 계획이 변경됐어. 끝에서부터 끝까지는 안 되고, 그 중간 부분 네 개 정도까지 가능해.”
점원 분이 입을 가리며 웃었다.
우리 할머니가 옷을 고르는 동안 상대는 내 정체를 궁금해하는 듯했다.
“모델이세요?”
“아뇨. 가수에요.”
“아하.”
“아이돌로 활동 중인데, 아… 거기다 우주라고 치시면 그 진짜 별 날아다니는 우주 나올 거예요. 뉴블랙이라고 검색하셔야 돼요.”
겸사겸사 우리 그룹에 대한 홍보도 했다.
이따가 저녁에 주세한에 나오니 꼭 봐 달라는 말도 한 후, 우리 김덕순 여사를 찾았다.
행거 한구석에서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거 마음에 드는구나.”
“아녀, 그 마음에 든다기보다는 이게 기능성도 좀 좋은 거 같구, 털도 조금 고급시러운 것이… 에휴, 됐어. 이것도 못할 짓이여. 다 늙은 할매가 손자 피 빨아서 살구.”
“이상한 소리하지 말고.”
할머니가 보고 있던 코트를 꺼내 들었다.
가볍네, 재질이나 안감도 좋고.
아니나 다를까.
이 가게에서 제일 비싼 옷이었다.
하지만 가격을 말하면 부담 가질까 봐, 일부러 아무 말 없이 점원에게 옷을 건네주었다.
그러곤 할머니 손을 잡았다.
“또 마음에 드는 거 없어? 겨울에 입고 다니려면 두 벌은 있어야지. 그래야 아이고, 저 할머니는 옷이 저거 하나밖에 없나 하는 소리 안 듣지.”
“없어.”
“마지막 기회야. 할머니.”
“그… 저기 저거 좋아 보이더라.”
개미처럼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는 할머니를 보며 웃었다.
그러곤 점원 분에게 말했다.
“이거랑 저거 주세요.”
“그, 우주야.”
“응?”
“저 모자도…….”
“털모자? 저거 쓰면 김좌진 장군님처럼 보일 텐데.”
“…….”
“사 줄게. 사 줄게.”
결국 코트 두 개와 모자 하나가 쇼핑백에 담겼다.
흐뭇했다.
그 무거운 봉투를 받아 드는 할머니는 세상 행복해 보였으니까.
나도 모르게 가슴 속에서 뭔가 올라왔다.
할머니한테 비싼 물건도 사 주다니. 나 성공했구나.
이따 여행권까지 안겨주면 완벽 그 자체였다.
그런 생각을 할 때, 매장을 나오자마자 우리 김덕순 여사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햇살 가득했던 정원에 비가 내리는 듯했다.
십수 년 만에 부려 보는 사치에 본인도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어딘가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근데 우주야.”
“응.”
“내가 이래도 되는 거 맞냐?”
“뭐가?”
“아니, 네가 쌔빠지게 코피 터져 가면서 번 돈인데… 이걸 다 내가 써 버리고 그러면, 이거는… 아이고, 내가 미쳤지. 지금이라도 이걸 환불을 해야.”
“서울에서는 환불 안 돼, 할머니.”
“누굴 멍텅구리로 아냐. 옘병할 소리하고 있네. 잔말 말고, 이거 얼른 다시…….”
“할머니.”
내가 그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이거 사도 돼.”
“…….”
“갑자기 왜 우는 거야?”
김덕순 여사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손으로 슥 닦아 냈다.
가슴이 먹먹했다. 돈이 뭐라고.
“내가 미안혀….”
“얼른 울음 뚝 그쳐, 할머니. 응?”
나도 울 것 같았지만 참으면서 한참을 달랬다.
이제 안 울 거냐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한숨을 돌리며 할머니를 엘리베이터로 데려갔다.
“이제 신발도 보러 가자.”
“…그, 우주야.”
“응.”
“내가 요즘 발이 아파서…….”
“쿠션감 좋은 걸로, 아주 비싼 거 사 줄게.”
할머니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본인이 말하고도 민망한 듯했다.
그 동안 내 시선은 할머니의 신발에 머물러 있었다.
흙이 묻어서 잔뜩 헤져 있는 신발.
“잠깐만.”
아까부터 은근히 덜렁거리길래 쪼그려 앉아 신발 찍찍이를 제대로 동여매 주었다.
“이 신발 좀 그만 신으라니까.”
“신발 자주 바꾸는 것도 좋은 게 아니라더라.”
“누가 그래? TV 건강 프로?”
“스님이.”
“…거기 절 이상하다니까.”
“아녀. 스님이 용해.”
스님이 용하다는 것부터가 이상한 말 같은데.
미신 얘기가 나오자 신이 난 우리 미신 덕후가 말했다.
“안 그래도 내가 요번에도 스님한테 점을 본 거 아니냐. 너 잘되냐고.”
“뭐래?”
“대운이 들어왔대.”
“아, 그래?”
“응, 아주 커다란 용이 들어왔다고. 지금까지도 좋았지만, 앞으로 훨씬 좋아질 거라구. 보살님, 앞으로 운수대통 길만 걸으실 거라고 하더라. 너 그래서 이번에 노래 만든다고 하지 않었냐.”
“응, 11월에 앨범 낼 거예요.”
“11월?”
“왜?”
“이상하다, 대운은 이번 달부터 들어온다고 그랬는데.”
“그래? 그럴만한 일이 없는데.”
뭐, 좋은 기회라도 들어오려나.
할머니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미신을 안 믿는 내 입장에선 별 감흥이 없을 따름이었다.
어차피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 엉터리 점보다는 다른 것이 머릿속에 가득했으니까.
성공.
지금까지의 다음 앨범이 잘돼야지 하는 소망 차원에서 벗어나 물질적인 성공에 대한 갈망이 일었다.
그 잔뜩 해진 신발을 보며 결심했다.
다음 앨범.
그야말로 제대로 만들어서 꼭 성공시켜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