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171화
거실에 선 비주가 내게 물었다.
“아무 춤이나 춰도 돼요?”
“상관없어. 네 머릿속에 들어 있는 노래에 맞춰서 안무를 만든다고 생각해 봐.”
“잠시만요, 생각 좀 할게요.”
비주가 골똘히 고민에 잠겼다.
그동안 스마트폰 카메라 어플을 켜서 거실이 화면에 담기는지를 확인했다.
오케이. 확인 완료.
남은 건 우리 댄서님의 신호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묵념하듯 고개를 숙이고 있던 비주가 머리를 들고는 차분하게 말했다.
“준비됐어요. 형.”
내가 촬영을 시작하자 곧바로 비주가 나긋하게 다리를 뻗었다.
처음에는 사뿐한 발걸음.
실제 무대 위를 움직이듯 맨발이 카페트를 부드럽게 쓸었다.
희미한 조명이 비추는 거실에서 늘씬한 실루엣이 나른한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와…….”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흘렸다.
즉흥 안무만으로도 이런 게 가능하구나.
아무리 머릿속에 어떠한 느낌이 있다고는 해도 지금 보이는 건 엄연히 즉석으로 지어 낸 안무였다.
신기했다.
나는 좌측으로 세 번, 우측 한 번 식으로 머릿속으로 생각을 해야 움직일 수 있는데, 얘는 본능적으로 춤을 추고 있었으니까.
물론 난이도가 어려운 건 아니었다.
하지만 느낌이 달랐다.
춤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에게서 엿볼 수 있는 특유의 신비로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함께 춤을 추고 있었다.
바람이 불면 잔잔한 물결이 일듯이, 팔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주변 지물이 따라서 너울거렸다.
허공에 손가락을 놀리거나 목을 움직일 때마다 빈 공간이 생기면, 머리카락과 그림자들이 살랑이며 그 빈 공간을 메웠다.
마치 어두운 거실에 녹아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대단했다.
나도 모르게 그 움직임을 멍하니 쫓게 된다고 할까.
넋을 빼놓고 있는 것도 잠시.
비주가 즉흥적으로 만들어 내는 안무를 보면서 나도 노래에 대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 방법이 먹힐까 의문이었는데, 효과가 아주 제대로였다.
미디 프로그램에 음을 찍으며 몇 시간 가까이 설명했던 것보다 이게 더 알아듣기 쉬웠다.
안무를 보자마자 뭘 하고 싶다는 건지 바로 알아들었다.
캐논 변주곡 같은 느낌.
아름다운 멜로디가 변주되면서 반복되고 듣고 있는 이를 따스하게 안아 주는 듯한 그런 음악.
봄철에 내리쬐는 햇살처럼 따뜻한 노래였다.
나긋하게 움직이는 실루엣을 쫓는 동안 머릿속에서는 하나의 노래가 순식간에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 * *
춤을 끝낸 후 김비주는 눈을 멀뚱멀뚱 떴다.
“……형?”
선우주가 소파에 앉은 채 우뚝 멈춰 있었다.
여전히 촬영 모드인 폰을 들고는 있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형, 제 말 들려요?”
“…….”
“제 말이 들리면 눈을 깜빡여 주세요.”
“…….”
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뭐라고 말이라도 더 할까 싶었는데 진지하게 생각에 잠긴 눈치였다.
경험상 선우주가 저럴 때면 내버려 두는 게 상책이었다.
한 5분 정도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와서 흥분한 얼굴로 ‘비주야! 비주야! 아이고, 내가 해내고 말았다!’ 하면서 그를 붙잡고 뭘 만들어 냈는지 이야기를 할 터였다.
‘사과라도 깎아야지.’
상대가 멍 때리고 있는 동안 김비주는 부지런히 사과를 깎았다.
예상대로 얼마 안 가 선우주가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어땠어요, 형?”
“네가 뭘 하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아.”
“진짜요?”
그건 그도 잘 모르고 있었다.
머릿속에 해 보고 싶은 어떤 느낌의 노래가 있기는 했다.
방금 춘 춤은 만약에 그 노래를 바탕으로 안무를 짠다면 어떨지 만들어 본 것이고.
그런데 안무만 보고 노래를 만드는 게 가능한가?
다섯 시간 가까이 대화를 나누면서도 서로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해서 어려웠는데.
상대가 작곡에 재능을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게 가능할지는 의문이었다.
톡. 톡톡. 톡.
선우주의 손가락이 테이블을 리듬감 있게 두드렸다.
“비트는 이런 식으로 가고.”
곧바로 그가 부드러운 허밍을 하기 시작했다.
이미 있는 노래의 후렴구를 부르듯이 자연스럽게 부르고 있었지만, 처음 들어 보는 노래였다.
“…….”
김비주는 할 말을 잃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불과 5분 남짓한 시간 동안 이렇게 빠른 속도로 멜로디를 만들어 내는 것이 정말 가능한 일일까.
그리고 이 노래는 그가 원하던 느낌을 똑같이 재현하고 있었다.
마치 솜씨 좋은 의사가 머리를 열어서 그것만 쏙 빼내 상대에게 건네준 것처럼 똑같았다.
선우주가 눈을 반짝거리며 물었다.
“어때, 이거 맞지?”
“네.”
얼떨떨했지만, 이내 그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제가 원하던 바로 그 느낌이에요.”
* * *
서로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던 둘은 폭풍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우와아.”
김비주가 입을 막으며 말했다.
“대박, 형. 이게 바로 제가 원하던 바로 그 느낌이에요.”
“그렇지? 그럴 줄 알았다니까.”
“어떻게 이렇게 딱 맞출 수 있었어요? 완전 신기하다.”
“네가 춤을 느낌 있게 춰서 가능했던 거지. 어떻게 내가 잘해서 가능한 거겠어.”
“아니에요. 형이 잘한 거예요.”
“아니야. 우리 춤신 덕분에 가능했던 거지.”
그렇게 10분 가까이 형님 최고, 아우님 최고 하던 두 멤버는 작업을 위해 자리를 떴다.
“…….”
2층 난간에서 커피를 들이켜며 그 모든 상황을 보고 있던 조규환 이사는 턱밑을 긁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갑자기 한 명은 다음 타이틀곡 안무라고 해도 손색없을 춤을 거실에서 혼자 추더니.
한 명은 그걸 보고 멍 때리다가 타이틀곡이 될 수밖에 없는 멜로디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10분 동안 벌어진 일은 누구든 놀라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한편 조규환 이사는 다른 이유로 당황스러웠다.
‘이걸 어떻게 포장을 한다.’
애가 곡이 막히는 것 같길래, 삼겹살을 먹으면서 조언을 해 줬는데.
갑자기 둘이서 북 치고 장구 치더니 노래를 만들었다.
‘……라고 언론에다가 얘기를 할 수가 없잖아.’
사실대로 얘기한다면 컨셉에 심취했냐는 이야기만 들을 게 뻔했다.
골치가 아팠다.
방금 있었던 일을 어떻게 포장하면 좋을지 고민하면서 그는 서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삼겹살.’
걸음을 우뚝 멈춰 서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삼겹살은 빼자.’
다른 건 몰라도 그건 빼야겠다.
* * *
조 이사님의 집에서 보낸 일주일은 그야말로 황금 같은 시간이었다.
행복했다.
데뷔 이후로 이렇게 한 번에 이어서 푹 자는 것도 오랜만이었고, 말짱한 정신으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았다.
그런 컨디션 덕분일까.
6일째 아침.
지하 작업실에서 나와 비주는 마침내 완성한 결과물을 보며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크흐흐.”
“흐히히.”
노트북 바탕화면에 저장된 ‘Untitled No.2’를 바라보면서 비주에게 물었다.
“다시 한 번 들어 볼까?”
“네네, 다시 들어요. 우리.”
“자, 간다.”
내가 재생 버튼을 누르자, 곧바로 1차적으로 완성된 노래가 스피커를 타고 울리기 시작했다.
“크으. 이거지.”
“으아. 다시 들어도 너무 좋다.”
내가 밝게 웃으며 물었다.
“좋지?”
“너무 좋아요.”
“크흐흐.”
“흐히히.”
꺄르르 웃으면서 좋아하는 우리 모습에 리혁이가 혀를 끌끌 찼다.
“둘이 그거 같아요.”
“어떤 거?”
“프랑켄슈타인 박사랑 조수가 자기들이 만든 인조인간이 깨어났다면서 웃는 거요.”
“무슨 소리야, 우리가 그렇게…….”
녹음 부스 유리창에 비친 비주와 내 얼굴이 보였다.
뺨을 씰룩이면서 히죽히죽 웃는 두 얼굴.
헛기침을 하며 근엄함을 되찾고는 리혁이에게 물었다.
“그래서 네 의견은 어때?”
“좋아요.”
리혁이가 핸드폰 메모장에 적은 것을 말했다.
“다만 몇 가지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다 말해 봐.”
“후렴 들어가기 전에 내가 고음 내는 부분 있잖아요. 거기 음 좀 깎아 주세요.”
리혁이가 모니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부분에서 쭉 올라갈 때요. 거기까지 못 올리는 건 아닌데, 우리 음방 뛸 때는 컨디션이 평소의 80퍼센트 정도잖아요. AR 깐다고 해도 안무도 끼어 있고. 그거 감안하면 음이 불안정할 수도 있어요.”
“알았어, 그 부분 수정할게. 그밖에는?”
“후렴구가 이거보다 조금 더 길어도 될 것 같아요. 우리끼리 화음 넣는 것도 감안하면…….”
그런 식으로 리혁이의 의견을 청취하는 시간을 가진 후, 마침내 평가의 시간이 되었다.
“예상 밖으로…… 좋네요.”
리혁이가 뺨을 긁적이면서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난번에 보컬 중심으로 가자고 해서 좋다고 하기는 했는데, 솔직히 이만큼 퀄 좋은 게 나올 줄은 몰랐어요.”
“좋아?”
“뭐, 네. 나쁘지는 않은 수준보다는 조금 더 나은…… 그런 느낌.”
비주와 내가 밝게 웃었다.
평소에 어지간히 좋은 게 있어도 ‘나쁘지 않다’로 말하는 애가 ‘좋다’고 긍정하고 있었다.
아직 믹싱과 마스터링을 거치지 않은 단계라서 노래가 제법 거친데도 이런 호평을 받다니.
예감이 좋았다.
축배의 의미로 주스가 담긴 종이컵을 부딪칠 때, 리혁이가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중현이랑 지호도 불러서 의견 들어 보고, 다 취합한 다음에 한 번 수정 쭉 들어가려고.”
그다음에는.
“이사님이 이따가 곡 들려 달라고 하셨거든. 장담할 수는 없지만 높은 확률로 타이틀로 가자고 밀 수 있을 것 같아. 그 뒤는 내가 A&R팀분들이랑 얘기해서…….”
하지만 내가 들려주는 계획은 리혁이가 원하던 내용이 아닌 듯했다.
녀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가사는 아직 계획 없는 거죠?”
“응. 작사가 분한테 외주 넣으려고 생각 중이긴 한데.”
“내가 써도 돼요? 그 노래 가사.”
대놓고 말은 안 하고 있었지만 비주와 내가 만들어 낸 노래가 어지간히 마음에 드는 눈치였다.
내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잘 쓸 자신은 있고?”
“원래 이런 건 잘 확답하지 않는 편인데…… 어느 정도는요.”
리혁이가 모니터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무슨 가사를 적어야 할지 느낌이 왔어요.”
* * *
그날 저녁.
“이사님, 오셨어요?”
“어, 그래.”
부모님 마중을 나온 꼬꼬마들처럼 우리가 현관에 서서 구두를 벗는 조규환 이사를 반겼다.
“식사는 하셨어요? 지금 저녁 준비 중인데.”
“괜찮아. 나는 이미 먹어서. 너희끼리 편하게 먹어.”
회사에서 힘든 일이 있었는지 어딘가 눈이 퀭하고 피곤해 보였다.
왠지 더 말을 걸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라서 우리끼리 눈짓을 주고받았다.
‘피곤하신가 보네.’
‘이사님 엄청 피곤해 보여요.’
2층으로 터덜터덜 올라가는 조 이사님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많이 힘드신가 봐.”
“에궁.. 누가 이사님을 저렇게 힘들게 한 걸까여. 누군지는 몰라도 엄청 나쁜 사람들이에여.”
“그러니까, 저렇게 선한 분을 누가…….”
이사님을 힘들게 한 누군가를 흉보면서 거실로 돌아갔다.
* * *
샤워를 마치고 나온 조규환은 곧바로 침대에 누웠다. 그러곤 손을 뻗어서 달력을 잡았다.
2015년 1월.
1월 1일부터 X자가 하나씩 쳐져 있었다.
마른침을 삼키며 1월 6일에 X자를 쳤다.
‘드디어…….’
이제 하루만 지나면 모든 게 끝난다.
‘내일 아침이면 혼자가 된다.’
퀭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그는 일주일 전을 회상했다.
뉴블랙을 들였던 다음 날 아침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일주일이 재미있을 거라고.
물론 처음에는 재미가 있었다.
조용하던 집이 복작거리는 것도 좋았고.
하지만 얼마 안 가 그것이 얼마나 큰 실수였는지를 깨달았다.
“흐하하핫!”
어찌나 그 소리가 큰지 뉴블랙 막내의 웃음소리는 어딜 가든 환청처럼 따라붙었다.
-우와, 형들 방금 저기 구름 봤어여? 대박! 되게 리혁이 형처럼 못되게 생겼어여.
-이사님! 이거 보셨어여? 인터넷에 나온 개그짤인데 흐하핫!
-우와아! 비누 냄새 대박! 형들, 형들 우리 이거 숙소 들어가면 꼭 하나 장만해여, 흐하핫!
거의 30초에 한 번 꼴로 웃는 것 같았다.
저 정도면 진지하게 뭔가 검사가 필요한 거 아닌가 싶었지만 지호만 그런 게 아니었다.
“깔깔깔!”
“흐히히!”
지금도 1층 거실에서 온갖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두 손을 들어 귀를 막았지만 무슨 초음파라도 되는 양 지호의 웃음소리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뭐가 그렇게 웃긴 거지?’
그제는 궁금해서 슬쩍 엿봤는데, 식탁 위의 콩나물을 가리키며 자기들끼리 웃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는 마당에 핀 개나리를 보고도 신이 나서 웃었다.
‘정상이 없어.’
시도 때도 없이 해맑게 웃어 대는 막내도 막내지만 다른 녀석들도 만만치 않았다.
-천국이야. 여긴 천국이야.
리혁이는 이상한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청소기를 밀었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는데도 주말에도 거의 1시간에 한 번 꼴로 청소를 하곤 했다.
위이이잉.
이제는 청소기 소리까지 환청이 들렸다.
깔깔깔과 위이잉이 합쳐져서 뀌이이잉 들리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가 두려워하는 소리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똑똑.
그런 소리가 들릴 때면 여지없이 서재 문이 열리면서 비주가 쟁반을 들고 왔다.
-엄마가 그러는데, 아침 사과가 좋대요.
-점심 많이 드셨잖아요. 블로그에서 봤는데 사과를 먹어야 소화가 잘 된대요.
-과학자들이 그러는데 저녁 사과도 좋대요.
어제는 처음으로 음료수를 가져다주기에 웃으면서 물었다.
-오늘은 사과가 아니네.
-질리실 것 같아서요.
비주가 수줍게 웃었다.
-오늘은 갈아봤어요.
-…….
-엄마가 알려 주신 레시피예요.
그놈의 사과.
조 이사는 뺨을 파르르 떨었다.
거실 쪽에서 다시 한 번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클래식 음악을 틀고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앞에서는 사과가 빙글빙글 돌고 있고, 귓가에는 여러 환청이 합쳐져 뀌이이잉 똑똑. 뀌이이잉 똑똑 하고 들렸다.
‘그나마 중현이가 조용하다만…….’
어딘가 이상했다.
화장실에 가려고 나왔는데 물구나무를 선 채 복도 한가운데 서 있는 중현이를 목격했었다.
그 상태로 눈이 마주쳤다.
-…….
-안녕하세요.
-…….
-저 지금 신기록이에요. 5분 39초. 40초. 41초…….
외면하고 화장실을 다녀왔다.
‘그리고 우주는…….’
가장 멀쩡해 보였지만 제일 이상했다.
‘도대체 뭘 하는 거지?’
새벽에 잠이 깨서 화장실이라도 갈라고 치면 거실 쪽에서 어렴풋한 노트북 불빛이 보였다.
무슨 동영상을 보고 있는 것 같았는데.
재생이 끝날 때마다 혼자서 거실에서 목을 이리저리 꺾는 봉산탈춤을 춘다거나 허공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뭐 하냐고 물어보니 이상한 대답을 했다.
-아이돌 운동회 준비하는 중이에요.
-그, 그렇구나.
혹시 벤치 클리어링이라도 준비하니? 라고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냥 더 이상 안 묻기로 했다.
궁금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저 눈물을 삼킬 뿐이었다.
‘분양 사기 당한 주인이 이런 느낌인가.’
천사 같아 보이는 비글 다섯 마리를 멋모르고 들인 주인의 심정이었다.
소파는 다 찢겨 있고, 강아지들은 미쳐 날뛰고, 주인은 봉두난발이 돼서 소주를 병째로 입에 붓는…….
‘애들이 착해서 더 문제야.’
조카들처럼 막 뛰어다니고 그러면 주의라도 줄 텐데 예의 면에서는 누구보다 철저했다.
최대한 집주인을 불편하게 해 주지 않으려는 마음이 엿보인다고 할까.
하지만 그런 배려에도 프로 내향러로서 불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슬슬 집에 가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이 집은 내 거인데…….’
뭔가 주인이 뒤바뀐 느낌이었다.
“하루만 참자.”
그렇게 되뇌자 목이 탔다.
갈증을 느끼며 1층으로 내려가자 거실 TV 앞에 옹기종기 모인 뉴블랙 멤버들이 보였다.
그의 표정을 흘깃 바라본 우주가 재빠르게 볼륨을 내렸다.
“이사님, 혹시 TV 소리가 시끄럽진 않으신가요?”
“아니야. 물 마시러 왔어.”
곧바로 멤버들 다섯이 우다다 다가와서 물을 따라 주는 모습에 그는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귀엽기는 한데 뭔가…….’
다시 거실 소파에 늘어져 TV를 보는 이들을 바라보던 조규환은 갑자기 멈칫했다.
‘잠깐,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광경인데.’
누군가의 무르팍에 누워 추파춥스를 우물거리고 있는 지호.
TV를 보며 커다란 미소를 짓고 있는 중현이, 하얀 얼굴에 심술궂은 표정을 짓는 리혁이, 빨간 티를 입고 사과를 깎는 비주.
그가 손가락으로 하나씩 짚었다.
‘희동이, 마이콜, 또치, 도우너…….’
꽃이 그려진 티를 입고 깔깔 웃고 있는 둘리까지.
불현듯 고개를 돌려 거울을 바라본 조규환 이사는 그 안에 들어 있는 퀭한 얼굴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일주일 만에 폭삭 늙어 버린 얼굴이었다.
‘고길동?’
……내가 고길동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