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190)화 (190/1,031)

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190화

-아, 글쎄 누구인지 말을 해야…….

-잠시만요!

낯선 목소리가 끼어 들었다.

초인종에 설치된 카메라로 우리 모습을 봤는지 ‘어머’하는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만요! 열어드릴게요!

곧바로 부산스러운 소리와 함께 아주머니 한 분이 나왔다. 그러곤 자기소개를 했다.

“저는 여기 할아버지 돌봐드리는 사람이에요.”

“안녕하세요.”

제작진과 함께 집안으로 쭈뼛쭈뼛 들어갔다. 마룻바닥에 다섯 쌍의 양말이 꼼지락거리며 전진했다.

우리가 두리번거리면서 물었다.

“선생님은 어디에……?”

“거실에 계세요.”

하지만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주머니가 고개를 갸우뚱할 때 다른 방에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를 따라 카메라가 같이 움직였다.

이윽고 서재에 갔을 때 우리는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인물을 마주쳤다.

불만스러운 탄식이 들렸다.

“아이고.”

“선생님, 지금 방송…….”

“지금 방송이 중요한 게 아니야.”

햇빛이 들어오는 서재에서 한 노인이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노재현.

오래된 영상이나 사진으로만 마주했던 대선배 가수는 은퇴했을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야성미 가득한 얼굴에 잘 정돈된 하얀 수염.

방송 출연 때문인지 평상복보다는 더 차려입은 니트 차림이라 노신사 같은 느낌을 주었다.

다만 휠체어에 앉은 몸은 마른가지처럼 앙상했다.

근데 뭘 하시는 거지?

방송 카메라에는 별다른 관심도 주지 않은 채 노재현 선생은 다른 곳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책꽂이에서 뽑은 책을 애지중지 바라보고 있었다.

‘침묵의 봄’이라는 제목에 리혁이가 반가운 표정을 짓더니 내게 소곤거렸다.

“저거 레이첼 카슨 책인데. 명작이에요.”

서재 가득한 책들을 보며 설레는 표정에 나와 동생들이 웃음을 삼켰다.

그나저나 언제 인사를 드려야 하지?

적절한 타이밍을 노리고 있을 때 노재현 선생이 책 표지를 탁탁 두드리면서 먼지가 흩날렸다.

“청소가 제대로 안 됐잖아.”

“제대로 해놨어요.”

아주머니의 항변에 노재현 선생이 투덜거렸다.

“아냐. 내 말이 맞아. 덜 됐어.”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 휠체어가 서재를 누비기 시작했다.

화병에 묻은 먼지를 스윽 만지더니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보이나? 먼지가 가득하잖아.”

“누가 거기까지 치워요?”

“당연히 사소한 곳까지 다 해야지. 이대로 두면 이 먼지가 다 내 폐에 들어오게 된다니까. 이런 환경에서 책을 보면 없던 병도 걸리겠어.”

“어휴, 잔소리 좀 그만하세요.”

“잔소리가 아니라 건설적인 조언을 하는 것이지. 강 여사. 누누이 말하지 않았나. 건전한 몸에 건전한 정신이 깃드는 것처럼, 건강한 환경이 건강한 사람을 만드는 법이야.”

청소의 중요성을 설파하는 이를 보며 우리는 눈을 깜빡였다.

‘……리혁이다!’

이건 리혁이야.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원로 가수의 얼굴 위로 누군가 겹쳤다.

심지어 잔소리를 하찮게 듣는 아주머니의 표정도 우리가 리혁이에게 반응하는 것과 똑 닮았다.

“…….”

우리가 누군가를 돌아보자, 상대도 우리를 보며 뚱한 표정을 지었다.

‘뭐요.’

그때 잔소리를 퍼붓던 노재현 선생의 시선이 가정부 뒤에 서 있는 우리에게 향했다.

“자네들은 방송에서 나온 사람들인가?”

“네, 선생님.”

허옇고 부리부리한 눈썹이 우리를 훑었다.

그러더니 휠체어에 앉아서 우리를 바라보던 가요계의 거목이 입을 천천히 열었다.

“왜들 그렇게 멀뚱멀뚱 서 있나?”

나지막하고 우렁우렁한 목소리.

우리가 어색하게 서 있자 노재현 선생이 버럭 성을 냈다.

“아, 얼른 소파에 가서 편하게 앉아! 올려다보기 불편하니까.”

대선배 가수의 첫인상은 우리가 알고 있는 누군가와 똑같았다.

*   *   *

“귤 좋아하나?”

“네.”

“먹게.”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이 귤을 건네면서 우리가 황송하게 받아들었다.

오물오물.

햄스터 무리처럼 귤을 먹을 때 노재현 선생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재차 물었다.

“차는? 차도 좋아하나?’

“아, 괜찮…….”

“강 여사아아! 차 좀 갖다줘!”

차도 다섯 잔 나왔다.

“빵도 좋아하나?”

“어, 저…….”

“강 여사아아아!”

감귤 케이크도 한 조각씩 나왔다.

“초콜릿은?”

“어…….”

“강 여사아아!”

부엌에서 바쁘게 일하던 아주머니가 소리를 질렀다.

“어유! 일을 한꺼번에 시켜요! 한꺼번에!”

웃으면 안 되는데 휠체어에 앉은 노인이 ‘강 여사아아~!’ 할 때마다 우리는 물론이고 스탭까지 웃음을 삼켰다.

계속 투덜거리면서도 아주머니의 눈치를 소심하게 살피는 모습이 왠지 귀여우셨다.

그런 것 때문인지 아주머니도 ‘으이구……’ 하며 눈을 흘기면서도 웃으면서 해줄 것을 다 해주셨다.

노재현 선생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오해하지 말게.”

“네?”

“손님 대접을 해주고 싶어서 그런 거지, 나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닐세.”

남이 호의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것 또한 누군가와 닮아 있었다.

“이래 보여도 내가 평소에 잘해주네. 전국에서 우리 강 여사보다 더 월급을 많이 받는 사람은 없을 거야.”

“그건 사실이에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던 아주머니가 타박했다.

“그렇지만 저 아니면 누가 우리 선생님 비위를 맞춰주겠어요?”

“내가 뭐 어떻다고 그러는가.”

“입맛 까다로워서 음식 타박하고. 청소할 때마다 같이 하겠다면서 따라와서 잔소리하고…….”

“흠흠, 거 몇 마디 했다고.”

아주머니가 더 대꾸를 하려고 하자 얼른 가서 쉬라며 노재현 선생이 손을 휘휘 흔들었다.

“불리하면 저러세요.”

그런 말을 하면서 쟁반을 챙겨 떠나는 아주머니의 모습에 우리가 슬그머니 웃음을 삼켰다.

알죠.

저희 팀에도 그런 애가 하나 있거든요.

“에잉, 맛 없어.”

노재현 선생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투덜거리더니 우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네들이 이제 뭘 한다고?”

“선생님 노래를 현대적으로 편곡해서 공연할 예정이에요.”

“가요제 같은 대회라고 했나?”

“네.”

내가 대표로 말했다.

“선생님 노래를 맡게 되어서 정말 영광이에요. 저희가 평소에 존경…….”

“그런 말은 됐고.”

상대가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1등하게. 1등.”

“……노력하겠습니다.”

“그거로는 어림도 없네. 내 노래로 나가면 무조건 1등을 해야지.”

“그럼 1등 할게요.”

그제야 노재현 선생님이 만족한 얼굴로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내 노래 중에 어떤 노래를 한다고 했나?”

“1990년에 발매하신 음반 수록곡 중에서 ‘인생’이라는 노래예요.”

“인생?”

노재현 선생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런 노래가 있었던가?”

“…….”

“이해해 주게. 내가 노래가 하도 많아서 그래.”

그건 사실이었다.

노재현 선생은 싱어송라이터로서 지금까지 수백여 곡을 작곡해 왔다.

히트곡만 수십 개가 넘는 상황에서 앨범에 수록된 노래 하나쯤은 기억이 잘 안 날 수 있었다.

그때 우리 메인보컬이 나섰다.

“이런 노래예요. 선생님.”

곧바로 감정을 잡은 리혁이가 노래를 짧게 불렀다.

그대의 햇살은

나의 기억이 되어

고즈넉한 밤에

위로가 될 테니

넓은 거실에 청아한 목소리가 은은히 울려 퍼졌다.

듣기만 해도 귀가 맑아지는 느낌.

우리는 물론이고 주변에서 지켜보던 작가님도 저도 모르게 고개를 까딱였다.

조용히 노래를 감상하던 노재현 선생이 말했다.

“노래에 감정을 담을 줄 아는 친구구먼. 제대로 배웠어.”

“…….”

“이름이 뭔가?”

“저, 서… 서, 리혁입니다. 선생님.”

ENG 카메라가 삽시간에 붉어진 리혁이의 얼굴을 클로즈업했다.

노재현 선생이 고개를 저었다.

“부끄러워하지 말게. 칭찬 받을 자격이 있는 실력이야.”

“가, 감사합니다.”

고개를 푹 숙이는 홍당무.

그 장면이 찍히는 동안 또 다른 카메라가 흐뭇하게 웃는 우리의 모습을 담았다.

아무렴. 우리 애가 성격만 나쁘지 노래는 참 잘한다니까요.

“저…….”

리혁이가 어버버하면서 말했다.

“선생님 영상 많이 보, 보고 왔는데 노래도 자, 잘하시고 존경합니다.”

“헛, 흠, 허헛.”

당황한 노가수가 허공을 바라보면서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토마토들이 사이좋게 익어가는 듯한 풍경이었다.

“어이구, 히터가 왜 이리 덥지.”

원로가수가 테이블에 놓인 종이를 들어 부채처럼 흔들었다.

우리도 비주와 중현이가 양옆에서 손을 파닥거리며 리혁이의 얼굴을 식혀주었다.

그때 생각에 잠겨 있던 노재현 선생이 입술을 뗐다.

“인생이라.”

그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조금 기억이 나는구먼. 20년 전이었나. 막 나이 오십 먹었을 때 만든 노래였던 것 같은데. 어디 보자. 그 기록이…….”

이윽고 아주머니를 불러 서재에 있는 공책을 한 권을 가져오게 했다.

노재현 선생이 돋보기안경을 쓰고는 우리에게 다가오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지호가 그 내용물을 보더니 감탄했다.

“우와, 글씨 되게 이쁘시당. 저희 아빠가 글씨에는 사람 인격이 드러나는 거라구 했거든여.”

“어흠흠.”

노재현 선생이 헛기침을 했다.

“그, 뭘 이런 걸 가지고 칭찬을 하고 그러나. 누구나 이렇게 쓰는 걸.”

…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잘 썼다.

정갈한 글씨로 노래에 관한 아이디어, 작곡 중 시행착오 등이 꼼꼼하게 적혀 있었다.

“여기 있군. 인생.”

색인으로 ‘인생’이라고 적혀 있는 파트였다.

일기장을 보며 기억을 되새기듯 그것을 한참 읽던 노가수가 안경을 다시 벗었다.

“읽어보게.”

노래에 대해서 이런저런 설명을 논리정연하게 해주던 노가수가 물었다.

“편곡은 누가 하나? 작곡가한테 의뢰라도 주나?”

“제가 할 거예요. 선생님.”

“그렇구먼.”

그가 물었다.

“그럼 하나 물어볼 것이 있네. ‘인생’이란 노래 말이야. 자네가 듣기에는 어땠나?”

“음…….”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폈다.

상대는 허심탄회하게 말하라는 듯했지만 정말 솔직하게 말해도 되는지 고민됐다.

사석이라면 상관없겠지만 이건 방송이다.

자칫했다가 감히 원로가수의 노래를 평가하는 건방진 아이돌 가수처럼 비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대답을 재촉했다.

“솔직하게 말해 봐.”

“정말 좋았어요. 잔잔하면서도 후렴구에서 감정을 터뜨리는 부분도 좋고. 노래가 정말 좋아서 경연곡으로 이 노래를 뽑았을 때 운이 좋다고 생각했어요.”

동생들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상대는 내 대답에 만족하지 못한 눈치였다.

“그게 다인가?”

“음…….”

“노래에 어딘가 허점 같은 게 보이지는 않던가?”

내가 주저하며 말했다.

“조금, 아주 조금이지만… 약간 밋밋한 느낌이 들기는 했어요.”

“그랬을 테지. 어디가 그랬는가?”

“전체적으로 멜로디 하나가 비어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설계도로 비유하면 분명 기둥이 네 개 있어야 하는 집인데 세 개밖에 없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처음 노래를 들었을 때는 ‘와, 이런 숨겨진 명곡이…’ 하면서 감탄했다.

하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미묘하다.

뭔가 비어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처음 불꽃놀이의 기반이 된 소스를 보았을 때와 같은 경우였다.

겉보기에는 완벽하지만, 잘 보이지 않는 문제점이 내재되어 있다고 할까.

노재현 선생님의 ‘인생’이라는 노래는 군데군데 채색이 되지 않은 풍경화처럼 보였다.

잠깐만.

처음에는 단순히 나의 개인적인 감상으로 여겼지만, 상대가 이렇게까지 물어보는 것까지 고려하니 생각이 어느 한 지점에 이르렀다.

“혹시 일부러 이렇게 만드신 건가요?”

“정확하네.”

상대가 입술을 뗐다.

“이 노래의 미완(未完) 상태는 내가 의도한 바야.”

*   *   *

거실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우리가 불러야 할 경연곡이 ‘미완’이라는 이야기에 동생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고 제작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날벼락을 맞은 것처럼 충격적인 분위기까지는 아니었다.

원곡자가 미완 상태라고 공언했지만 ‘인생’은 지금 상태만으로도 훌륭한 퀄리티였으니까.

다만 조금 놀랐을 뿐이다.

우리가 불러야 할 노래가 미완곡이라니.

이미 완성된 풍경화의 스케치에 색깔만 다르게 칠하려고 했더니, 원작자가 슥 다가와서 ‘님 이거 미완임. 사실 저기 텅 빈 곳에 구름이랑 나무 그려야 함.’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목이 타서 찻잔에 더듬더듬 손을 뻗었지만 잔은 비어 있었다.

“강 여사.”

노재현 선생이 침묵을 깼다.

“여기 손님들한테 음료 좀 내오게. 내가 얼마 전에 만든 거 말야.”

곧바로 감귤 주스가 나왔다.

맛이 조금 특이했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상대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때 당시에 노래를 만들다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구먼. 십 년만 지나도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나이 쉰 먹을 때 보이는 인생이랑 예순, 일흔 먹을 때 보이는 것과는 다르지 않을까 하고.”

“…….”

“불과 쉰밖에 안 됐는데 벌써부터 인생이 어떤 것인지 확정 짓는 것도 아니다 싶더구만. 그래서 노래를 구성하는 멜로디 라인에서 일부를 빼 두었네. 나중에 필요할 때마다 빈 부분을 채워놓을 수 있도록.”

내가 주스를 홀짝이며 물었다.

“그러면 혹시 미완 부분을 채워넣을 멜로디는.”

“없네.”

상대가 단호하게 말했다.

“막상 또 건드리려고 드니 이래저래 난처한 부분이 있더구먼. 원래는 음반에도 수록하지도 않으려고 했는데 당시 회사 대표가 꼭 실어야한다고 고집을 부렸거든.”

그럴 만했다.

숨겨진 명곡을 찾는다는 방송 프로그램의 첫 회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만큼 좋은 노래였으니까.

이 상태로도 완성도는 충분히 높았다.

“자네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는 법이지. 하나는 이 상태로 편곡을 하고 그대로 부르거나.”

우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전한 선택지.

조금 밋밋하다는 원곡의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하지만, 현대적으로 잘 재현하기만 해도 좋은 평을 받을 터였다.

“또 하나는 자네들 나름대로 그 안에 멜로디를 새롭게 덧붙이는 방법도 있겠지.”

우리가 침을 꿀꺽 삼켰다.

두 번째는 도박.

잘하면 굉장한 호평을 얻겠지만 자칫하면 ‘저 좋은 노래에 뭔 짓을 한 거냐’는 비난을 받을 수 있었다.

확률 상으로 후자의 가능성이 더 크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이쪽이 더 끌렸지만 감당하기 위험한 리스크였다.

내가 아무리 좋은 멜로디를 추가한다고 해도 원곡자가 하는 것과는 느낌 차이가 벌어질 수밖에 없으니까.

이번 경연은 해당 곡을 얼마나 ‘내 노래’처럼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 명곡이 돋보이도록 해주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니 내가 자의적으로 덧붙여 뉴블랙의 노래로 만들면…….

어?

잠깐만.

불현듯 한 가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내가 지금 원곡자를 앞에 두고 왜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거지?

그냥 하면 되는 거잖아.

“선생님, 저 혹시…….”

“말해보게.”

“제가 여기서 그 안에 채워넣을 멜로디를 생각해내면 선생님께서 어떤지 의견을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동생들이 눈을 빛냈다.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건 안전한 도박이었다.

이 자리에서 노재현 선생님에게 이런저런 멜로디를 들려주고 컨펌 받기.

정 안 되면 원안대로 가면 되고.

그리고 만약에 원곡자의 마음에 드는 멜로디를 만들어 낸다면 일석이조였다.

노래를 더 풍성하게 만들 수 있고 더불어 사람들의 트집도 피할 수 있다.

원곡자가 마음에 든다고 하는데 누가 안 어울린다고 토를 달겠어.

원래는 노래에 대한 비하인드만 짧게 찍고 갈 예정이었기에 제작진을 돌아보았다.

조연출이 물었다.

“짧은 시간 동안 가능하겠어?”

“네.”

“오케이, 내가 피디님한테 연락 드려볼게.”

어차피 모두 내일 돌아가는 일정이기도 하고. 제작진의 반응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중립이었다.

남은 것은 당사자의 선택.

다행히도 상대가 고개를 차분하게 끄덕였다.

“나쁠 것 없구먼. 그렇게 하지.”

“감사합니다.”

“음… 대신 나도 부탁이 하나 있네.”

노재현 선생이 말했다.

“집안일 좀 도와줄 수 있겠나? 강 여사 힘으로는 하기 힘든 일들이 몇 가지 있어서 말이야.”

“네, 저희 일 엄청 잘해요.”

자신감을 보이는 우리 모습에 상대가 비죽 웃음을 흘렸다.

분위기가 조금 가벼워졌을 때, 중현이가 감탄한 얼굴로 주스 잔을 들어보였다.

“근데 주스 진짜 맛있어요, 선생님. 이건 무슨 주스에요?”

“주스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예?”

노재현 선생이 말했다.

“이건 칵테일일세.”

“…….”

“칵테일이요?”

술이라는 말에 동생들의 고개가 기계적으로 돌아갔다.

정확히는 잔을 들어 올려 마시는 중인 내 모습을.

“아, 안 돼요!”

비주가 다급하게 뺏더니 자기가 벌컥벌컥 마셨다.

내가 놀라서 물었다.

“비주야. 왜 네가 마셔?”

“……어, 저도 모르게.”

뜬금포 흑기사에 내가 눈을 멀뚱멀뚱 뜰 때, 비주가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형? 괜찮아요?”

“나?”

“괜찮아요? 제가 누구예요?”

그때 리혁이가 내 옷을 붙잡고 흔들었다.

“아저씨, 기절하는 거 아니에요?”

“……나 괜찮은데?”

칵테일이라서 그런가.

생각보다 취했다거나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혹시…….

“아!”

내가 방금 깨달은 사실을 말했다.

“대박. 얘들아, 나 술이 늘었나 봐.”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헛소리하는 거 보니까 취한 거 같은데여?”

“형.”

중현이가 내 어깨를 꾹 눌렀다. 어찌나 힘이 센지 곰에게 꾹꾹이 당하는 느낌이었다.

“이럴 때가 아니에요. 형, 누워 봐요.”

“아니야, 나 괜찮…….”

어어.

그때였다.

알콜 때문일까. 눈이 솔솔 감기기 시작했다.

갑자기 잠이 쏟아져오는 듯한 느낌도 들고.

눈을 끔뻑거리는 내 모습에 동생들이 놀라서 아우성을 쳤다.

그 신박한 개판에 제작진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들 그래? 무슨 일이야?”

“큰일 났어요. 우주 형이 알콜고… 아니, 술에 진짜 약하거든요.”

“주량이 한 방울이에여.”

지호의 목소리와 함께 눈이 스르르 감겨왔다.

몸에 힘도 슬슬 빠진다.

그때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촌극을 가만히 바라보던 노재현 선생님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거실에 울렸다.

“무알콜일세.”

“……?”

“자네들이 마신 그 칵테일, 무알콜일세.”

“…….”

“정신이 몸을 지배한다더니, 책에서만 보던 플라시보 효과가 이렇게 증명이 되는구먼.”

잠시간의 정적.

눈을 감고 있지만 모두의 고개가 내 쪽으로 돌아가는 게 느껴졌다.

리혁이가 내 멱살을 짤짤 흔들었다.

“아저씨. 눈 감은 척하지 말고 얼른 떠요.”

“…….”

“눈꺼풀 아래로 눈알 굴러가는 거 다 보여요.”

아.

눈 어떻게 뜨냐. 이거.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