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197화
선수석에 선 비주가 자세를 잡았다.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고른 후 섬세한 손짓이 춤을 추듯이 활시위를 나긋하게 퉁겼다.
8점. 7점. 8점.
안정적인 자세에 걸맞는 고득점이었다.
“잘했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돌아오는 비주에게 나와 지호가 하이파이브로 답해주었다.
이윽고 TNT의 막내 석지훈이 7점, 7점, 6점을 연속으로 쏘았다.
지난 특집 때보다 퇴보한 성적.
석지훈 혼자만 그런 게 아니라 전반적으로 TNT 3인방은 작년보다 저조한 성적을 거두고 있었다.
특히 태현이는 멍한 표정이다.
“…….”
TNT 3인방은 내 얼굴을 무슨 귀신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은근히 민망하다.
처음에는 이 정도까지 반응을 보일 건 없지 않나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럴 만했다.
나를 리혁이로 치환해보니까 단박에 이해가 갔다.
갑자기 리혁이가 양궁의 신이 되어서 돌아오는 상상을 하니 얘네 심정이 절절하게 이해가 된다고 할까.
그때 지호가 7점, 8점, 7점을 쏘고 돌아왔다.
“고생했어.”
“칭찬해 주세여.”
“우. 와. 대. 단. 해.”
엎드려서 절 받기 식으로 칭찬을 해줬는데 그걸 또 좋다고 받는 녀석의 모습에 웃었다.
마지막으로 한태현이 화살을 쏘고 난 후 내 차례가 됐다.
TNT 3인방의 시선이 내 일거수일투족을 쫓는 가운데 지호와 비주가 눈을 빛냈다.
“잘하고 와요.”
“형, 마무리 샷 멋지게 날리구 와여.”
팀의 에이스를 대하듯 응원하는 모습에 잠시 웃음이 나왔다.
기분이 묘하다.
내가 운동을 잘해서 이런 대우를 받아보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언제나 팀의 구멍이었고, 초등학교 때도 체육대회만 하면 축구에 못 껴서 응원단 활동을 했는데.
연습생 때도 몸 쓰는 일만 생기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때가 많았고.
운동을 하면서 이렇게 마음 편하게, 그리고 자신감 있게 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뿌듯하고 설렜다.
이게 운동신경이 좋은 사람들이 몸을 쓸 때 느끼는 기분이구나.
활력이 돌고 자신감이 넘친다.
방송 녹화를 하면서 이렇게까지 한 순간이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느낌이 드는 건 처음이다.
자세를 갈무리하고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손끝을 타고 팽팽한 감촉이 느껴지면서, 내 몸은 자동으로 필요한 동작을 구현했다.
눈이 과녁을 뚫어지듯이 바라보고, 숨을 들이키고 내쉬는 호흡이 활 쏘기에 최적화되어 나왔다.
활시위를 부드럽게 놓자 화살이 과녁에 정확히 명중했다.
10점.
온몸에 짜릿한 소름이 돋았다.
“와아아-!”
가슴이 들뜨는 기분을 느끼며 나도 모르게 웃었다.
그날 우리는 작년에 준우승을 거둔 TNT를 가볍게 제치고 4강에 진출했다.
* * *
양궁 본선.
걸그룹과 보이그룹 부문으로 나뉘어 준결승과 결승전이 진행됐다.
“와아아-!”
아이돌 멤버들이 이런저런 화제의 장면을 만들 때마다 여기저기서 열띤 반응이 돌아왔다.
-이야! 과녁을 아예 빗겨났네요. 세트에 맞았습니다.
-설 선물 세트인가요?
-전유빈 선수 실수를 귀엽게 모면하네요.
과녁 바깥을 쏘아버린 후 ‘아콩’ 하면서 자신의 머리에 앙증맞은 꿀밤 시늉을 하는 라비앙로즈의 전유빈.
그리고 소속사인 DNS 미디어의 임현식 사장이 뒷목을 주무르는 장면.
-이야! 10점. 10점을 맞췄네요.
-뉴블랙 이후로 두 번째 카메라 렌즈 깨기예요!
10점을 맞추고 환호하는 스트릿 보이즈의 한조와 그 이후로 10점을 맞춘 데이드림의 한석.
한편 그런 볼거리 속에서도 가장 큰 관심을 받은 이가 있었으니.
-네, 뉴블랙의 우주 선수가 올라왔습니다.
-분위기가 확 달라졌어요. 데이드림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네요.
-작년 준우승자인 TNT를 이기고 올라온 다크호스거든요.
마치 대마왕이 강림하는 걸 바라보는 농민 같은 표정을 짓는 데이드림의 모습이 전광판에 잡혔다.
그들의 시선을 따라 누군가 저벅저벅 걸어나왔다.
다시 봐도 적응이 안 되는 비주얼에 객석이 술렁거릴 때, 뉴블랙의 우주가 차분하게 활을 들었다.
‘우와…….’
보고 있다 보면 절로 감탄이 나오는 동작.
모든 동작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고 막힘이 없었다.
정확히 뭐가 올바른 동작인지는 모르지만 저 신인 아이돌의 동작이 가장 정석에 가깝다는 것이 절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동작에 걸맞게 점수도 놀라웠다.
-10점!
화살 세 발이 과녁 정중앙을 촘촘하게 수놓았다.
-……미쳤네요. 정말.
-연속 10점이라니 아이돌 운동회 사상 최초네요. 양궁부 출신 아이돌이 나오지 않는 이상은 깨지지 않을 기록이에요!
-타고난 재능이 돋보이네요.
양궁 국가대표 출신이 재능이 보인다며 공언할 정도의 실력.
우주가 10점 과녁을 쏘아 맞힐 때마다 상대팀의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타들어 갔고.
객석에 앉은 박규호 대표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올랐다.
“핫핫핫! 임 대표, 보이나? 저게 우리 애야.”
“…….”
“자네 회사에는 저런 애 없지? 핫핫!”
“…….”
DNS 미디어의 임현식 사장이 속으로 참을 인을 되새기는 동안.
현장에 쪼그려 앉아서 구경하던 아이돌 멤버들은 저마다 손으로 입을 가리며 소곤거렸다.
“돌았네. 진짜.”
“쟤 뭐야?”
“계속해서 10점만 쏜 것 같은데, 저게 가능한가? 양궁 센터에 계신 쌤도 가끔 실수로 8점 쏘고 그러던데.”
기가 질린 듯한 반응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잘생긴 신인 남자 아이돌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무슨 생태계 교란종이었다.
마치 꽃미남 황소개구리를 보는 기분이었다.
“데이드림 선배님들 불쌍하다, 진짜.”
“인정. 나도 쟤네랑 붙었으면 멘탈 털렸을걸.”
“……다른 애들도 잘하는데?”
우주가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고 있긴 하지만, 다른 멤버들도 준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었다.
올해 돌림픽에 첫 데뷔한 뉴블랙이 양궁계의 다크호스로 부상하는 순간이었다.
‘우승은 쟤네가 하겠네.’
‘어떻게 한 번을 10점을 안 놓치냐…….’
‘사람이냐. 화살 쏘는 기계지.’
처음에 속으로 혀를 내두르고 있는 이들은 이내 편안한 시선으로 경기를 관람했다.
평소 같았다면 질투라도 좀 느낄 법한데, 이번엔 그런 것도 없었다.
‘저 정도면 리스펙해야지.’
거의 돌림픽 하나만을 위해서 반 년 가까이 연습해야 나올 만한 실력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반응이 느껴질 때마다 객석에 있는 수플레들의 콧대는 끝을 모르고 올라갔다.
10점 과녁에 화살이 안착할 때마다 어깨가 으쓱으쓱하고 뺨이 씰룩거린다.
“너무 좋다아…….”
“기분이 묘해요. 올 때까지만 해도 우리 애들 다치지만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또 잘하니까 뭔가 흐뭇한…….”
“갸륵한 느낌이예요.”
뉴블랙 멤버들이 전광판에 비칠 때마다, 쌍안경으로 그 미모를 확인할 때마다 그들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새벽부터 줄을 서고.
대기를 서너 시간 하고.
시큐리티로부터 불쾌한 말들을 들어오면서 쌓였던 피로와 짜증이 사르르 녹아내리고 있었다.
‘진짜 좋다…….’
본업인 음악에서 인정 받는 것도 좋지만, 색다른 분야에서 활약하는 모습이 너무나 좋았다.
마음 같아서는 전국 동네방네에 ‘우리 애들이에요!’ 하면서 벽보를 붙여서 자랑하고 싶은 느낌.
누군가 물었다.
“근데요, 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어떤 거요?”
“우주 있잖아요. 왜 다 쏘고 날 때마다 저렇게 놀란 얼굴로 좋아하는 걸까요?”
“……그러게요?”
화살을 쏠 때는 누구보다 프로 같은 표정인데 차례가 끝나면 행복한 비명을 지르는 이였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양뺨에 손을 올리며 좋아하는 모습.
그 이유에 관해서 이런저런 추측이 나왔지만 길게 이야기가 이어지지는 않았다.
“표정이 너무 예뻐요.”
“그러네요.”
긴 시간은 아닐지라도 데뷔 때부터 함께 해왔던 팬으로서 자신의 가수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정확히 이유는 몰라도 엄청 행복해하고 있다는걸.
“우리 이럴 때가 아니에요.”
“맞아요. 어서 응원해요.”
그들 역시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열심히 플래카드와 슬로건을 흔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
다섯 황금 궁예가 그려진 슬로건이 물결칠 때마다 근처에 있던 타 그룹의 팬들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 * *
“와아아-!”
우리 셋이서 부둥켜 안고 방방 뛰었다.
“얘들아!”
“우리가.”
“금메달이다아!”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제작진이 건네준 금메달을 걸고, 우승자 특전으로 3층에 있는 팬석으로 올라가 팬들과 기념사진 촬영을 했다.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한참 동안 그 순간을 만끽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남녀 양궁을 끝으로 오전 녹화가 종료됐는데도 경기장에서 계속 머무르고 싶은 기분이라고 할까.
아쉬움을 머금고 경기장을 나섰다.
마주치는 이들마다 우리에게 축하나 칭찬을 건넸다.
“축하해요!”
“아까 활 엄청 잘 쏘던데, 어디서 배웠어요?”
“우우, 활 메이커를 공개해라. 선우주!”
자꾸 질척거리며 비밀을 공개하라는 이들을 떨쳐낸 후.
평소에 음방이나 연말무대로 안면만 텄던 이들과 새롭게 친분을 다졌다.
그리고 우리와 친한 이들도 말을 걸어왔다.
“크으. 뉴블랙이 금메달이라니.”
“민초단의 일원으로서 저희는 단장님이 해낼 거라고 믿고 있었어요.”
흰색 유니폼을 입은 스트릿 보이즈가 흐뭇하게 말했다.
우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네?”
“저희는 이제 뉴블랙이 아니거든요.”
나와 비주, 지호가 동시에 금메달을 들어올렸다.
“저흰 이제 뉴골드예요!”
“…….”
흐뭇하게 ‘그러하다’ 하는 미소를 짓는 중현이 옆에서 리혁이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LB가 배신당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뉴골드 하면 우리 민초단은 어떡하라구요?”
“나무 씨.”
내가 답했다.
“안타깝지만 민초단의 시대는 끝났어요.”
“……허어.”
그때 한조가 짐짓 슬픈 얼굴로 끼어들었다.
“우주 씨. 저희 이거 밖에 안 되는 사이였어요?”
“우리가 무슨 사이였는데요?”
“민트와 초코 사이요.”
“처음부터 안 될 조합이었네요. 피자와 파인애플처럼.”
스트릿 보이즈가 아우성을 쳤다.
“단장님 맛알못이네.”
“하와이안을 모독하다니, 저거 중죄로 다스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우리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러네. 조심하자. 잘못하면 활 맞아.”
내가 웃음을 삼키는 동안 LB가 공감한다는 듯 ‘역시 단장님 참입맛’ 하다가 민초를 추종하는 무리에게 박해를 받았다.
나무 씨는 오늘도 열심히 불타는 중이다.
우리 막내가 엣헴 하며 금메달을 들어보였다.
“저희 뉴골드는 오늘부로 아몬드 봉봉단으로 갈아탈 거예여.”
“헐, 저희도 가입할래여.”
“일단 금메달부터 따고 오세여.”
지호가 막 날리는 드립에 양쪽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노잼 패밀리가 화기애애하게 인사를 나누는 동안 나와 한조도 나란히 복도를 걸었다.
상대가 감탄한 얼굴로 물었다.
“양궁을 얼마나 연습을 하신 거예요?”
“저희 한 이틀 정도요.”
“……이틀이요?”
“네.”
“그럼 평소에 취미가 양궁이라거나.”
“아뇨. 이번에 처음 해봤어요. 여러모로 운이 좋아서…….”
상대가 요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애써 납득했다.
“그, 춤 추시는 모습도 그렇고. 운동을 평소에 잘하시나 봐요.”
“아니에요. 저 운동 잘…….”
잠깐만.
이제 잘하나?
“예전보다는 나아진 것 같아요.”
“참, 그러고 보니 이따가 농구도 나가죠?”
“맞다. 저희 같은 팀이네요.”
아이돌 멤버 10명으로 구성되어 있는 농구 팀에 한조와 나는 신인으로서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상대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이러다가 농구도 엄청 잘하는 거 아니에요?”
“잘 모르겠어요. 양궁이랑 다르게 그건 팀워크도 중요하고. 여러모로 해 봐야 아는 거라…….”
중현이랑 밤 늦게 농구 코트에 나가서 1대 1로 연습하기는 했는데 실제 경기에서 얼마나 먹힐지는 잘 모르겠다.
양궁 같은 종목과 달리 이건 팀워크가 중요한 단체전이라서.
잘할지 긴가민가하다.
그래도 중현이가 지난 번에 ‘대박, 슬램덩크 같아요.’ 했으니 나쁘지는 않겠지.
그래. 이젠 좀 자신감을 가져 보자.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조와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었다.
오늘 개막식에서 같이 도수체조를 했는데 몸이 상쾌해졌다는 이야기나 양궁 본선 이야기를 한 후.
어느덧 화제는 점심 식사 이후 있을 단거리 달리기에 맞춰졌다.
“참.”
한조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이따 뉴블랙 분들 중에서 누가 나가요?”
“아.”
내가 대답했다.
“저희 중에 성격 제일 나쁜 애요.”
“아, 리혁 씨구나.”
곧바로 알아듣는 모습에 내가 웃음을 삼켰다.
* * *
점심 식사 후.
촬영 장비가 세팅되는 동안 우리는 한 사람 앞에 둥글게 모여 앉았다.
“후우…….”
눈사람처럼 창백한 이가 가슴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했다.
“후우.”
곁에 쪼그려 앉은 우리도 따라했다.
“후우욱.”
“후우…….”
“후우욱.”
“후우…….”
“후우욱.”
“아, 진짜 따라하지 마요. 경기 앞두고 염장 지르는 거예요?”
불퉁한 얼굴이 내뱉는 말에 우리끼리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신이 난 얼굴로 누군가를 따라했다.
“뜨르흐즈 므~”
“…….”
뾰로통한 표정을 짓는 녀석의 모습에 우리가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깔깔 웃었다.
상대가 한숨을 쉬었다.
“진짜 어떻게 보탬이 하나도 안 되냐. 다른 팀은 막 옆에서 배려해주고 토닥여주… 아, 만지지 마요.”
“토닥여달라며.”
“말이 그렇다는 거지. 누가 진짜 하래요?”
경기를 앞두고 있어서 그런 건지, 평소보다 열 배는 더 까칠한 녀석이었다.
“내 긴장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좀 꺼주세요. 나 마인드 트레이닝 해야 돼.”
“알았어.”
우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등을 돌리자, 리혁이가 눈을 30초 정도 감고 있다가 눈을 홱 떴다.
“그런다고 진짜로 관심을 꺼요?”
“…….”
잔뜩 신경이 예민해진 녀석으로부터 한창 구박을 받았다.
어찌나 트집이 심한지 드라마에서 구박을 받는 며느리가 된 심정이었다.
그런 까닭에 리혁이가 스탭으로부터 부름을 들었을 때 우리 모두 행복하게 배웅을 했다.
“뭐야. 그 표정은?”
“너에게 행운을 빌어주기 위한 웃음이야.”
“맞아여. 크흡, 너무 좋네여.”
녀석이 쳇 하며 말했다.
“……나 그럼 다녀올게요.”
뭐라고 응원을 해줄까 하다가 고민하던 우리가 훈훈하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우승 못하면 돌아올 생각하지 마라.”
“열심히 해. 리혁아.”
“이렇게까지 구박하고 가는데 1등 못하고 오면 가만 안 둘 것이에여. 무슨 말인지 알져?”
“……으아아. 몰라몰라.”
듣기 싫다는 듯 귀를 막으며 도망치는 녀석.
“다녀와. 리혁아…!”
훈련소로 떠나는 아들을 배웅하듯 손수건을 흔드는 비주의 모습에 우리 모두 웃음을 삼켰다.
동생들과 옹기종기 모여 앉으니 남자 60미터 달리기 예선이 시작되었다.
이번 달리기는 각조의 예선 1위를 뽑아서 그 라인업으로 결승에서 만나는 구조였다.
곧바로 1조에서 스트릿 보이즈의 LB가 미칠 듯한 속도로 1위를 거머쥐었다.
내가 감탄했다.
“나무 씨, 엄청 빠르네.”
“들어 보니까 저기 팀에서 제일 빠르대요.”
“그것도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다들 엄청 빠른데…?”
내 생각 이상으로 수준이 높았다.
중간중간 육상부 출신이라는 이들도 있고. 그랬기에 걱정이 들었다.
“……괜찮으려나.”
내 무릎을 베고 있던 지호가 물었다.
“뭐가여?”
“리혁이 말이야. 저렇게 가냘퍼서 제대로 달릴 수나 있을지 모르겠네.”
“걱정 마여. 리혁이 형 빠르니까.”
“……그래?”
“형이 아직 못 봐서 그래여.”
지호가 강조하듯이 달리는 시늉을 해보이며 말했다.
“진짜, 진짜 빨라여.”
“……?”
“게임 보면 힘은 엄청 약한데, 스탯 민첩만 찍어서 빠른 캐릭 있잖아여. 파바박 움직이면서 때리는데, 겁나 약해서 때릴 때마다 막 1, 1, 1 뜨는 얍삽한 캐릭들. 그게 리혁이 형이에여.”
“쟤가 그렇게 얍삽… 아니, 빠르다고?”
비주와 중현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리혁이가 유일하게 잘하는 운동이에요.”
“무슨 일 생기면 자기 혼자 도망치고 싶어서, 다른 건 몰라도 달리기는 열심히 한대요.”
하지만 매치가 잘 안 된다.
리혁이가 잘 뛴다고?
평소의 둔한 운동신경을 생각하던 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게 바로 태현이가 나를 바라보면서 느꼈던 기분인가.
“어, 레인에 섰다.”
우리 애가 3번 레인에 섰다.
워낙 날씬해서 그런지 주변 사람들에 비하면 종이인형처럼 느껴지는 모습.
추리닝 지퍼를 목끝까지 올린 채 건방진 표정.
ENG 카메라를 든 제작진이 차례차례 옮겨가면서 주자들의 얼굴을 담았다.
저마다 포즈를 취하는데 자기 순서가 되자 수줍게 웃으며 브이를 하는 우리 애의 모습에 한바탕 데굴데굴 구르며 웃었다.
수플레들도 우리와 똑같은 반응이었다.
그 반응을 눈치 챘는지 귀가 삽시간에 불타오른 리혁이가 조그마한 얼굴을 체육복 안으로 숨겼다.
하지만 웃음도 잠시.
우리 모두 양손을 모은 채 리혁이를 응원할 준비를 했다.
자리에 선 주자들도 저마다 웅크리고 심호흡을 할 때.
삐익-!
휘슬 소리와 함께 주자들이 땅을 박찼다.
“와아아아-!”
그러나 내 예상과 달리 리혁이는 선두주자가 아니었다.
가장 빠르게 치고 나간 건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데뷔했던 소울식스의 케일럽이었다.
185가 넘는 장신의 키에 타조 같은 달리기 솜씨.
역시 리혁이는 무리인 건가 싶었을 때.
2초대부터 갑자기 웬 검은 체육복을 입은 하얀 얼굴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어찌나 빠른지 무슨 미친 빼빼로가 달리는 듯한 모습이다.
“……뭐야.”
무슨 모터 달린 종이인형 같다.
팔을 팔락팔락거리면서 미친 듯한 속도를 내고 있는 리혁이가 총알처럼 튕겨나왔다.
……진짜 빠른데?
“와아아!”
우리가 벌떡 일어나 응원을 하기 시작했다.
“리혁아 뛰어!”
“리혁아아아! 죽지 마!”
“더더더! 1등하면 청소기 사줄게여!”
그런 염원이 닿았던 걸까.
미친 듯이 달려가던 리혁이가 결승점에 1등으로 골인했다. 우리 모두 박수를 치면서 방방 뛸 때.
“……어?”
파바박 달리던 리혁이가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고 쿠션 벽에 부딪히더니 픽 쓰러졌다.
어. 뭐야.
내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뭐야. 쟤 어떻게 된 거야?”
“아, 별 거 아니예요.”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뜬 나와 달리 동생들은 일상적이라는 듯 대수롭지 않은 눈치였다.
지호가 부연설명을 해 주었다.
“워낙 체력이 약한 형이라서 금방 방전돼여.”
“아하.”
“학교 선배들한테 들었는데 리혁이 형 체력장할 때 별명이 그거였대여.”
“뭔데?”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벽을 짚고 일어나는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을 때, 지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루살이여.”
나도 모르게 그만 웃음을 터뜨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