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204화
27장. 첫 번째 경연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 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해 주냐는 친절한 안내음을 들으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안 받으시네.”
“누구요? 할머님?”
중현이의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 대표님.”
어제 돌림픽 끝나면 바로 연락을 달라고 하셨는데.
아마 고생했다는 치하의 말씀 겸 작곡 장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 그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안 받으시네…….”
지호가 옆에서 말했다.
“이따가 한두 번 더 해 봐여. 지금 엄청 바쁘신 걸 수도 있잖아여.”
“아냐. 됐어.”
대표님이 내 친구도 아니고.
내 전화를 안 받는다고 계속 부재중 전화를 남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비주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거 때문 아닐까요. 대표님이 어제 작곡 장비 가격 보신 다음에 충격을 좀 받으셔서…….”
“에이, 설마 대표님이 그럴.”
…리가 있겠냐고 말하려던 내 머릿속으로 평소 대표님의 모습이 스쳐가기 시작했다.
고급스럽지만 낡아 보이는 외투와 일수 가방.
카페에서 음료를 사 주실 때 무료 쿠폰 도장이 다 찍혔다며 행복해하시던 얼굴.
틈날 때마다 회사 화장실을 돌아다니며 불을 끄러 다니던 모습까지.
“…….”
대표님이라서 함부로 말할 수가 없었지만 동생들과 내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러실 수도 있겠네.”
워낙 절약 정신이 투철한 분이라서 작곡 장비 가격에 조금 충격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지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근데 그게 그렇게 비싸여? 울 아빠한테 생일 선물로 사 달라고 해도 될 정도 가격이던데.”
“그치? 그 정도는 아닌데. …음?”
누군가 수첩으로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고개를 돌리니 하얀 얼굴이 정갈한 글씨가 적힌 수첩을 들이밀었다.
[그게 안 비싸다고요? 양심 어디?]
“새삼스럽게 왜 그래. 내 양심은 이미 사라졌다는 게 중현이의 정설이야.”
“맞아요.”
중현이가 흡족하게 동의하는 가운데 리혁이가 샤프로 메모를 빠르게 썼다.
슥삭슥삭.
내가 물었다.
“근데 너 언제까지 그 수첩으로 대화할 거야?”
“…….”
기다리라는 듯 손가락을 들어 올린다.
이미 쓰고 있던 내용을 지우개로 꼼꼼하게 지우던 녀석이 다시 샤프로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또 물었다.
“목이 그렇게 많이 아프냐?”
“…….”
쓱싹쓱싹!
어딘가 살짝 짜증스러운 기색으로 내용을 지우던 리혁이가 다시 샤프를 놀리기 시작했다.
지호가 짓궂게 물었다.
“형. 저 이 부분 어떻게 노래를 불러야 하는지 좀 알려 주세여. 저 하나도 모르겠어여.”
“……!!!”
“입 모양으로 욕하지 마여. 되게 못생긴 금붕어 같아여.”
“…….”
그런 식으로 나와 지호가 리혁이에게 내용을 몇 번이고 다시 쓰게 만드는 장난을 쳤다.
뚝.
“…….”
샤프심과 함께 리혁이의 인내심이 뚝 부러졌다.
녀석이 답지 않게 사근한 미소를 지으며 페이지를 하나 넘기더니 깨끗한 여백에 글씨 하나를 썼다.
그러곤 지호에게 들이밀었다.
[ㅗ]
“와.”
막내가 호들갑을 떨면서 비주를 붙잡았다.
“비주 형. 저 형이 저 욕해여.”
“리혁이가 힘들어서 그런 걸 거야.”
리혁이가 수첩에 한 획을 더 긋고는 이번에는 내게 향했다.
[ㅗㅗ]
“오.”
내가 미소를 지었다.
“우리 리혁이 정말 상냥하구나. 형을 위해 두 엄지를 들어보이다니, 형은 정말 기뻐.”
“……!!”
“현란한 입 모양을 보니 형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있구나?”
장난스러운 내 물음에 상대가 가슴팍을 팡팡 치며 ‘아오!’ 하는 입 모양을 표현했다.
그때쯤 비주가 내 팔에 손을 슥 올리며 웃었다.
“형, 리혁이 그만 놀려요.”
“알았어.”
내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울화통이 치민다는 듯 하늘을 향해 불을 뿜어대던 리혁이에게 비주가 보온병을 건네주었다.
텀블러에 보리차를 따라 마시는 녀석에게 물었다.
“너 진짜 하루 종일 말 안 할 거야?”
끄덕.
“노래할 때만 목 쓰고?”
끄덕끄덕.
목 상태가 별로 안 좋다는 듯 목을 톡톡 두드리던 녀석을 보며 나는 말없이 웃었다.
본인이 그렇게 판단을 하면 어쩔 수 없지.
다른 동생들도 둘러보며 말했다.
“너희도 중간에 몸 상태가 안 좋다 싶으면 바로 말해 줘. 내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그럴게요. 형.”
비주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긴장을 너무 해서 그런지 아픈지 안 아픈지도 모르는 것 같아요. 아마 끝나면 몸살이 걸릴 것 같긴 한데…….”
그 말에 우리 모두 공감했다.
오늘은 화요일.
어제 돌림픽을 마치고 내일 있을 ‘도전, 명곡 발굴단!’의 1차 경연을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컨디션이 최악이다.
어제 농구도 양궁도 하고, 달리기도 하고.
오전 7시부터 다음날 새벽 1시까지 경기장에서 방긋방긋 웃으며 쪼그려 앉아 있다 보니 삭신이 쑤셨다.
몸이 어찌나 결리는지 우리 김덕순 여사가 왜 뚱한 표정으로 다니는지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다들 몸살에 걸리기 일보직전이었다.
“이따 점심에 뭐 먹을까나.”
꿀단지를 뒤지듯 배달 어플 메뉴를 보며 콧노래를 부르는 우리 근육쟁이를 빼면 말이야.
“…….”
“형, 오늘 뭐 시켜 먹을까요? 제육볶음 vs 돈까스 중에서요.”
“돈까스.”
얘는 내 생각에 바이러스가 들어가도, 들어간 바이러스가 이건 바이러스가 할 짓이 아니라면서 학을 떼고 도망갈걸.
한편 나를 비롯한 다른 애들은 모두 골골대고 있었다.
특히 우리 최약체는 유달리 힘에 부친 얼굴이다.
지금도 눈은 열심히 가사지를 훑고 있지만 얼굴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리혁아, 이것 좀 먹을래?”
“……?”
녀석에게 홍삼을 내밀었다.
큰맘 먹고 내린 결정이었다.
리혁이가 봉지를 받아가서 꼴깍꼴깍 마시더니 감사의 의미를 담은 시선을 짧게 보냈다.
평소 같았으면 됐다고, 안 먹는다고 튕겼을 텐데 오늘 컨디션이 안 좋기는 한 모양이다.
“…….”
넷째가 받은 홍삼을 아닌 척 계속 흘깃거리는 셋의 시선에 내가 웃으며 홍삼을 추가로 꺼냈다.
네 개의 팩이 건배를 한 후, 다 같이 잠시 드링킹의 시간을 가졌다.
“으아, 써.”
막내가 오만상을 쓰며 말했다.
“진짜 버티기 위해 이런 쓴 것까지 먹어야 한다니… 저 내일 경연 끝나고 나면 하루 종일 푹 쉴 거예여. 진짜로여.”
“그래, 그러자.”
웃으면서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런 식으로 동생들의 컨디션을 예의주시하며 관리했다.
내일 경연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기회다.
수플레들과 함께 한 돌림픽도 중요한 행사였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부가적인 활동일 뿐.
우리 활동에 있어서 핵심은 이번 고정 음악 프로그램이었다.
불참해서 받게 될 불이익만 아니었다면 아이돌 운동회는 진즉 스킵했을 만큼 중요도가 높았다.
그런 까닭에 우리 동생들도 정말 체력의 한계까지 버티고 버텨 가면서, 연습을 하는 중이었다.
내가 지켜보고 있지만 동생들의 진지한 눈빛이나 이를 악물고 버티는 모습을 보니 걱정은 덜어도 될 것 같다.
이제는 다들 프로니까.
“자, 이제 그만 쉬고 연습 들어가자!”
손뼉을 치고 동생들을 불러모았다.
연습실에 세팅된 의자에 앉은 동생들의 앞에 서서 내가 MR을 틀었다.
“이번 경연에서 우리가 살려야 할 포인트는 퍼포먼스야. 순수하게 노래로만 붙으면 우리가 열세지. 노래 하난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하는 선배님들이니까.”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연습하기 전에 퍼포먼스 중에서 살려야 할 포인트들을 간략하게 다시 한번 짚어줄게. 꼭 기억해.”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잔잔한 반주를 들려주며 나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 * *
드디어 대망의 경연 날이 밝았다.
오전 10시.
여의도 PBS 방송국 앞에 차량이 멈춰섰다. 내리기 전에 마스크를 쓰던 우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람이 많은데?”
이곳은 신관 공개홀.
같은 PBS라서 그런지 평소 음악방송 뮤직온에 출연할 때와 비슷하게 출근길이 꾸려져 있었다.
카메라를 든 기자들도 상당히 많아 보였다.
“기자분들이랑 다른 선배님들 팬인가 봐요.”
“마스크 벗어야겠다, 그럼.”
쓰고 있던 마스크를 다시 벗었다.
기초 메이크업만 한 상태에서 서로의 얼굴을 체크해 주던 우리가 내리자 함성 소리가 울렸다.
“아하.”
우리 팬들이었네.
초췌한 고양이 같은 표정을 하던 우리가 얼굴에 함박웃음을 띠며 종종걸음으로 걸어갔다.
자리에 있는 사람 중 절반은 연예부 기자들이고, 절반은 가수들을 기다리는 팬들이었다.
그중 90퍼센트가 우리 팬들이었다.
웃으며 손 하트를 보내는 동안 기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여기 인사해 주세요!”
“하트도 한 번!”
“포즈 한 번 취해 주세요. 매니저님은 거기 있지 말고 나오시고!”
원석이 형이 머쓱하게 옆으로 비켜선 후 우리가 포즈를 취했다.
단체로 브이를 하고 있을 때, 어느 기자가 물었다.
“오늘 목표 순위가 어떻게 돼요?”
다 같이 브이를 하고 있는 손가락을 접어 검지만 들어 보였다.
우리 막내가 능청맞게 어깨춤을 추며 ‘무조건 1위~’ 하자 팬들 사이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여기저기 고개를 숙이며 공개홀 안으로 들어섰다.
벌써부터 가슴이 뛴다.
“기자분들이 생각보다 많은데?”
“맞아요.”
“프로그램 런칭이라서 그런가? 음방 출근길 때보다 더 많아 보이는 거 같아요.”
PBS 방송국에서 야심차게 홍보를 하는 프로그램답게 출근길에 나선 취재진의 규모가 꽤 컸다.
첫 녹화라는 상징성을 감안해도 큰 규모.
그제야 이번 경연에 나간다는 것이 다시 한번 실감되기 시작했다.
중요한 시험을 앞둔 것처럼 떨리면서도 한편으론 그간 연습한 결과물을 보인다는 생각에 들뜨기도 하고.
“안녕하세요!”
복도를 지나는 스탭들에게 활기차게 인사를 하면서 대기실을 향해 걸어갔다.
* * *
신관 공개홀.
매번 음악 방송 무대에서 설 때마다 왔던 곳이 오늘따라 굉장히 낯설게 느껴진다.
“오, 신기하다.”
“평소에 보던 거랑 느낌이 좀 다르네여.”
공연 순서 추첨을 하러 나온 우리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붉은 쿠션감이 돋보이는 관객 좌석은 평소와 똑같았지만 카메라 배치가 달랐다.
객석 앞 공터.
생방 때 스탠다드 카메라 3대와 지미집 2대가 어지럽게 배치된 곳에는 간이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관객을 더 채우기 위해 그리 배치한 듯했다.
그리고 두 군데가 눈에 띄었다.
“저기가 원곡자분들이 앉는 데인가 봐요.”
무대 옆에 따로 가설된 객석에는 경연을 보러 온 원곡자들이 앉을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따 노재현 선생님도 저 자리에 앉아서 우리의 공연을 보실 터였다.
리혁이가 의문을 품었다.
“자리가 생각보다 많아 보이지 않아요?”
“심사 위원분들 자리인가.”
“그분들 자리는 저기예요.”
리혁이의 손가락을 따라가 보니 정말 그랬다.
오늘 경연에 대해서 평가나 코멘트를 하게 될 심사 위원들이 앉을 자리는 객석에 추가로 마련되어 있었다.
우리가 의문을 품을 때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긴 연예인 패널들이 앉는 데야.”
“엇, 안녕하세요. 선배님.”
“안녕.”
우리에게 사근사근한 미소를 짓던 리사가 설명을 해주었다.
“진지하게 경연만 하면 사람들도 재미 없잖아. 다른 가수나 예능인들이 이제 저기서 우리 무대를 보고 리액션을 해 줄 거야. 중간중간에 웃긴 코멘트도 던지고.”
“아아…….”
우리가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리사가 그때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
“리사조아 님은 어디 있어?”
“저기 작가님 옆에요.”
“아, 저기 계시구나.”
리사가 작게 손을 흔들어 주면서 웃었다.
곧이어 최애의 팬 서비스을 바라보는 우리 서 매니저님의 콧잔등과 광대가 승천하기 시작했다.
모든 걸 다 이뤄냈다는 듯 행복한 얼굴을 보며 우리가 뺨을 씰룩였다.
“와. 우리한테는 저렇게 안 웃어주면서.”
“우리는 평소에 손을 안 흔들어 줘서 그런 거 아닐까요.”
중현이의 말을 듣고 다 같이 민기 형에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
되돌아온 건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징그럽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모습에 옆에서 리사가 키득거렸다.
우리는 매니저를 향해 눈을 흘겨주었다.
“두고 보자.”
“우리도 뉴블랙조아 생기면 마음껏 부러워하게 해줄 거예여.”
“……딱히 안 부러워할 것 같은데요?”
누군가의 논리적인 말을 꿋꿋이 무시하면서 우리는 눈을 흘겨주었다.
그러곤 리사와 대화를 나누었는데 경연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준비는 많이 해 왔어?”
“네. 그런데 시간이 좀 빡빡했어요.”
“엄청 빠듯하더라. 나도 지금 준비하고 있는 뮤지컬 연습이 있어서 시간 조율도 어렵고.”
“저희는 돌림픽이 끼어 있었어요.”
“으, 그거 진짜 싫은데.”
한때 슈가피쉬로 아이돌 활동을 했던 만큼 상대도 돌림픽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린 그녀에게 고충을 토로할 수 없었다.
“우리 때는 여름에 야외에서 했거든…….”
“앗, 아아.”
임진각 연말 무대도 그렇고.
야외 돌림픽이라니.
새삼스럽게 선배 아이돌에 대한 존경심이 무럭무럭 솟는 순간이었다.
리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우리는 속속 도착하는 다른 가수들에게 인사를 했다.
“다들 밥 먹었어요? 밥?”
유쾌한 미소를 지닌 30대 남자.
반짝이 정장 대신에 차분한 캐주얼 의상을 갖춰 입고 도착한 트로트 가수 송보형.
“……뭐. 안녕들 하세요.”
여전히 호감이 안 가는 말투.
초강력 스프레이로 머리에 힘을 주고, 오토바이 바이커 집단처럼 등짝에 무늬가 그려진 가죽재킷.
조유리 밴드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무대 위로 올라왔다.
“다들 오랜만에 보네.”
경찰이나 군인 느낌이 나는 굵은 외모.
차우현.
이 자리에서 가장 경력이 많은 선배 가수가 덩치를 이끌고 올라왔다.
트로트 가수, 인디밴드, 발라드계의 강자까지 도착하고 나서 마침내 MC인 백상중까지 도착했다.
무대에 서 있는 배치를 간단하게 하고 나서 곧바로 녹화가 시작됐다.
-네. 도전, 명곡 발굴단! 그 대망의 첫 경연 날이 밝았습니다.
아나운서가 익살맞은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에 시선을 던졌다.
-다들 긴장되시나요?
“네.”
-긴장한 것치고는 다들 편안해 보이는데, 아직 실감은 안 나시죠? 오늘이 첫 무대다 보니까.
우리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닌지 대부분 공감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백상중이 웃었다.
-이제 곧 저 객석에 육백 명에 달하는 관객들이 들어서게 될 겁니다.
모두의 시선이 텅 빈 객석을 향했다.
-그리고 여러분은 이 앞에서 무대를 통해 서로의 실력을 견주고, 오늘의 승자를 가리게 될… 겁니다.
말끝을 차분하게 내려서 미래의 시청자들과 참가자들의 이목을 끈 MC가 능숙하게 진행을 이끌었다.
큐카드를 흘깃 본 그가 힘차게 말했다.
-자, 이제 리허설을 앞두고 순서를 정할 텐데요. 순서의 중요성은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알고 계시겠죠?
모두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오늘 경연에서 1위 투표를 하는 것은 바로 리모컨을 들고 있는 600여 명의 관객들이다.
청중들은 AI처럼 완벽하게 객관적인 점수를 부여하지 않고 저마다 주관적인 판단을 내린다.
그러하기에 순서는 중요하다.
아무리 잘해도 앞 순서인 사람이 압도적이면 상대적으로 못해 보여서 박한 평가를 받을 것이고, 못해도 지난 사람이 더 못했으면 상대적 선녀로 보일 테니까.
거기다 컨디션 문제도 있다.
뒷순서에 배치되면 목이 잠기는 것을 피하기 위해 계속 긴장한 상태로 목을 풀어 줘야 해서 피로도가 올라간다.
당연한 얘기였다.
리허설은 낮에 하는데 공연은 밤 10시에 하면 누구든 피곤할 수밖에 없으니까.
MC가 참가자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저마다 희망 순서를 들어 볼까요? 송보형 씨, 오늘 몇 번째 순서로 공연을 하고 싶으세요?
“글쎄요.”
송보형이 능글맞게 웃었다.
“컨디션 생각하면 최대한 앞에 하는 게 좋긴 한데, 중간도 나쁘지 않을 것 같네요. 무엇보다… 우리 차우현 선배님보다 앞에 하는 게 목표예요.”
작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우리는 물론이고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고 있는 생각이었다.
주관적이고 뭐고, 그걸 씹어먹을 만큼 가창력이 출중한 가수는 기피대상 1호였다.
-차우현 씨는 어떠세요?
“저는 언제 하든 상관 없습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 덤덤하게 말하는 차우현을 보며 리혁이가 선망의 눈빛을 보냈다.
리사와 조유리 밴드도 차례대로 희망 순서를 앞순서나 중간 등으로 꼽은 후 우리도 인터뷰 기회가 왔다.
-뉴블랙은 어때요? 이렇게 쟁쟁한 선배 가수 분들이 있는데 신인으로 떨리겠어요?
내가 대표로 답했다.
“네, 워낙 대단한 선배님들이 계셔서… 저희는 첫 번째 순서로 공연을 하고 싶어요.”
돌림픽으로 인한 컨디션 난조가 심해지기 전에 후딱 공연을 하는 게 최선이었다.
안 되면 어쩔 수 없고.
MC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자, 그러면 이번에는 지난 번에 노래를 뽑았던 순서에서 역순으로 가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노래를 뽑았던 뉴블랙이 순서를 처음으로 뽑게 될 거예요.
이내 마끼초밥처럼 제비가 꽂혀 있는 상자가 도착했다.
1번부터 5번.
-이번엔 누가…?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동생들이 내 등을 콕 찌르거나 ‘이 사람이요! 이 사람!’하듯이 손가락질을 했다.
‘왜 나야?’
억울한 듯 바라보니 훈훈한 미소가 돌아왔다.
‘힘든 건 리더가 해야지.’
‘고. 노비. 고.’
얼른 가라는 듯 턱짓을 하는 녀석들을 보며 웃고는 제비 뽑기 앞으로 나섰다.
“후우…….”
심호흡을 하며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제발.
맨 앞 순서를 하게 해 주세요. 부처님. 저는 오늘 1위를 해서 덕순아를 차지해야 해요.
열심히 안 올리던 기도도 하면서 눈을 감고 손을 이리저리 휘저었다.
이거다 싶으면 느낌을 주세요.
“……!”
그런 식으로 손을 움직이다가 느낌이 와서 딱 멈췄다.
-오, 느낌이 왔나요?
“네, 이거예요. 제 생각엔 이게 맨 첫 번째 같습니다.”
내가 4번을 쏙 뽑아서 내밀었다.
MC가 진지한 얼굴로 끈을 풀고 제비를 펼쳤다. 그러곤 내용을 읽던 그가 웃으며 마이크를 잡았다.
-네! 축하 드립니다.
역시.
-마지막 순서예요! 뉴블랙!
“…….”
여기저기서 나오는 웃음을 들으며 눈을 깜빡거렸다.
기도는 부처님한테 한 것 같은데 정작 응답을 해준 건 흑역사의 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