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205)화 (205/1,031)

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205화

뽑기 운 실화냐. 진짜.

수플레 일보가 있다면 내일자 1면은 분명 ‘리더 선모 씨, 꽝손 이대로 둬도 좋나’ 하는 기사가 실릴걸.

나라 잃은 표정을 짓는 동안 주변에서 웃음소리들이 들려왔다.

평소였다면 이쯤에서 나도 같이 즐겁게 웃었을 텐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이럼 안 되는데…….

녹화 시작은 저녁 7시 30분.

중간에 악기 세팅이나 패널 코멘트까지 고려하면 마지막 공연은 대략 밤 10시를 훌쩍 넘긴 후에야 시작될 것이다.

그때까지 멤버들 컨디션을 잘 관리할 수 있을까.

어떡하지. 이거.

내가 일부러 한 실수는 아니지만 동생들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잘 뽑았어야 하는데.

전광판에 뜬 [5번째 - 뉴블랙 ‘인생’]이라는 문구를 보고는 그저 방송용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네, 뉴블랙이 첫 번째로 뽑았고요. 차례대로 제비 뽑기를 이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가수들이 차례대로 제비를 뽑았다.

내가 했던 것처럼 예상 순서에 관한 인터뷰를 하고 본인이 뽑은 실제 순서에 대한 리액션이 찍혔다.

추첨이 끝나고 전광판에 글자가 떠올렸다.

[1] 리사

[2] 차우현

[3] 조유리 밴드

[4] 송보형

[5] 뉴블랙

마지막까지 1번이 나오지 않았던 탓에 지난번에 첫 번째로 노래를 뽑았던 리사가 1번이 됐다.

천상계 보컬 차우현의 바로 뒤에 공연을 하게 된 조유리 밴드는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변했고.

송보형은 선방했다며 생글생글 웃었다.

차우현은 덤덤한 얼굴로 ‘두 번째네요’하는 짤막하게 답할 뿐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추첨식이 끝나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저마다 매니저들에게 음료를 받아들고선 순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살짝 풀죽은 내 모습을 보았는지 민기 형과 원석이 형이 음료를 건네주면서 어깨를 토닥였다.

대기실로 돌아가는 길에 동생들에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미안하다. 진짜. 하필이면 내가 마지막을 뽑아서…….”

나 혼자 하는 공연이라면 별로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연습한 만큼만 보여 주면 된다는 마음으로 임하면 되니까.

다만 멤버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입장이 있다 보니 자꾸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괜찮아요. 형.”

비주가 웃으며 말했다.

“형이 원해서 뽑은 것도 아니고. 운이잖아요. 마지막 순서니까 오히려 좋은 점도 있어요.”

“맞아여.”

우리 막내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원래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거잖아여. 울 아빠도 회의할 때 맨 마지막에 들어가여.”

“형. 어깨 대 봐요. 어깨.”

중현이가 어깨를 조물조물 주물러 주는 동안 두 녀석이 ‘힘 내요! 힘!’ 하면서 다독여 주었다.

“뭐. 어떻게 보면 잘된 일이죠.”

리혁이가 말했다.

“원하는 건 못 뽑았지만 전략적으로 보면 나쁘지 않아요. 노재현 선생님한테 1위 하겠다고 약속했잖아요. 첫 번째로 하면 컨디션은 좋을지 몰라도 관객한테 잊히기 쉬워요.”

“그건 그렇지.”

“오늘 우승이 유력한 차우현 선배님도 비교적 앞 순서에 있고, 우리가 마지막이니까 잘하면…….”

녀석이 진지하게 말했다.

“가능성 있어요. 오늘.”

“…….”

“컨디션이라든가. 다른 무대 퀄리티라든가. 뭐 그런 변수가 있겠지만 마지막을 뽑은 게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단 말이죠.”

말이 되는 이야기였다.

설득력이 있어서 고개를 끄덕일 때 리혁이가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그러니까 죄 지은 사람처럼 축 늘어져 있지 마요. 늙은 사람이 그러면 보기 안 좋아.”

“…….”

“그리고 무슨 자기만 리더고 프로야?”

리혁이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우리도 컨디션 조절 알아서 잘할 수 있거든요?”

“맞아여. 저희 이제 어른이거든여.”

…라고 하면서 참으로 어른스럽게 초코 우유를 쭉쭉 빨아들이는 녀석들이었다.

푸루룹.

때마침 중현이가 빨대로 초코 우유 바닥을 훑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잠시 정적.

“…….”

그걸 든 채 서로 바라보다가 그만 웃음이 터져나왔다.

한참을 같이 웃다가 내가 동생들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래.”

방금 전까지 머릿속에 남아 있었던 제비뽑기에 대한 생각을 훌훌 털고 미소를 지었다.

“이제 리허설 준비하러 가자.”

*   *   *

신관 공개홀.

리허설이 한창인 이곳에서는 조명이 알록달록한 빛을 뿌려대고 있었다.

조명 감독이 지시를 내릴 때마다 조명 기기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네. 그럼 리허설 가 보겠습니다.

마이크를 든 메인 피디의 목소리에 가수가 올라온다.

간단한 동선 체크 후 노래가 시작됐다.

가수의 차분한 목소리가 공개홀을 울리는 동안 카메라가 그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담았다.

그 아래에서는 매니저들이 자기 가수의 공연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했다.

-고생하셨습니다.

짤막한 인사와 의례적인 박수.

그런 분위기 속에서 가수들이 올라왔다가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숨 막힐 듯 진지한 분위기.

오전에 세트 정리를 할 때처럼 욕설과 고성이 오가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엄숙했다.

도전, 명곡 발굴단.

PBS 예능국에서 야심차게 유능한 스탭들과 예산을 투입한 프로그램.

윗선에서 큰 기대를 보인다는 부담감도 있지만 무엇보다 오늘은 대망의 첫 경연 녹화였다.

앞으로 시청률과 화제성을 결정할 내용인 만큼 그 어떤 실수도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 긴장감을 불러 일으켰다.

“후우…….”

여기저기서 심호흡을 하거나 침을 삼키는 제작진의 모습.

그들의 얼굴에는 초조함과 긴장이 가득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제작진의 표정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다들….”

한 작가가 무대를 가리키며 혀를 내둘렀다.

“엄청 잘하는데요?”

“그러게.”

“……저희 예상보다 훨씬 잘하고 있어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리허설이 진행될수록 제작진의 얼굴에서 초조함이 서서히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방청객과 함께하는 녹화에 대한 긴장은 여전했지만 그 동안 품고 있던 불안감이 해소되었다.

아무리 기획과 편집을 잘한다고 해도 그것은 결국 판을 까는 행위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제작진이 깔아 준 판 위에서 출연자들이 얼마나 대중의 이목을 사로잡느냐였다.

그런 점에서 오늘의 무대는 모두 합격점을 한참 넘어설 만큼 좋았다.

리사, 차우현, 조유리 밴드, 송보형.

짜임새 있는 편곡과 더불어 가수들의 뛰어난 기량이 합쳐지니 연신 근사한 무대가 이어졌다.

“와…….”

유쾌한 미소를 지으며 백스테이지로 돌아가는 송보형의 뒷모습에 조연출이 감탄했다.

“리허설인데도 이 정도라니. 백 퍼센트 기량으로 하는 것도 아닌데 엄청나네요.”

그가 옆자리에서 큐시트를 살피는 메인피디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피디님, 어떠세요?”

“느낌이 좋아.”

첫 경연 녹화라는 이유로 잔뜩 굳어 있던 백성현 피디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 비슷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다들 제대로 준비해 왔네. 이대로 본 무대까지 가면 방청객 반응은 걱정 안 해도 되겠어.”

“그렇죠? 벌써부터 사람들 소리지르는 게 귀에 들리는 거 같아요.”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어느덧 마지막 리허설 무대가 다가왔다.

“……다음은 뉴블랙이네.”

제작진이 큐시트를 보고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필 얘네가 마지막이네.’

워낙 신인 아이돌 중에서 실력 좋기로 유명한 이들이지만 뉴블랙이 배치된 순서는 애매했다.

앞선 넷이 누구던가.

무대 경험이 많기로도 유명하고, 보컬 실력 하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자부할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이중에서 상대적으로 가장 약해 보이는 신인 아이돌이 피날레 무대를 한다니.

조금 미묘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연습 영상 정도만 해 줘도 좋겠다.’

카메라 동선을 짜기 위해 소속사로부터 무대 연습 영상을 받아 보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연습 영상이었다.

몇 번이고 잘 나올 때까지 찍는 그런 영상.

그런 까닭에 실전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 줄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공손하게 인사를 하며 무대 위로 올라가는 뉴블랙의 모습이 제작진의 눈에 들어왔다.

다양한 그림체가 섞인 미남들이 일렬로 섰다.

백 피디가 마이크를 들었다.

-리허설 시작하겠습니다.

그가 수신호를 보내면서 공연이 시작됐다.

암전된 공개홀.

조명이 하나씩 들어오면서 뉴블랙 멤버들의 목소리가 공연장을 차분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

예상치 못한 상황에 그들 모두 눈을 깜빡거렸다.

‘잘하는데?’

어느 정도 기본은 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무대 위의 뉴블랙은 노래의 분위기를 완벽하게 살리고 있었다.

특히 메인과 리드 보컬은 앞선 선배들과 큰 차이가 없을 만큼 기량이 뛰어났다.

“얘네가 이 정도로 잘했어요? 엄청 듣기 좋은데…….”

“잘하네. 연습을 빡세게 해 왔나 봐.”

모두가 놀라는 가운데.

이 자리에서 가장 놀라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뉴블랙을 직접 섭외했던 백성현 피디였다.

‘뭐지?’

실력 좋은 거야 알고 있었다.

PBS 뮤직카페에 출연해서 장소원과 무대를 보여 주었을 때나, HBS의 라디오 ‘원더풀 나잇’에서 보여 준 밤바다의 라이브까지.

보컬적인 측면에서 뉴블랙이 어떤 그룹인지 보여줄 만한 자료는 다 꿰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예상 밖이었다.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잘하는데…?’

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백 피디가 근처에 있던 뉴블랙의 매니저들에게 물었다.

“이번 경연곡을 많이 연습했나 봐요?”

“음…….”

매니저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 곡은 준비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어요. 피디님. 물론 멤버들이 열심히 하긴 했지만요.”

“그래요? 딱 봐도 잘하는데.”

“그건…….”

서민기가 서글서글하게 웃었다.

“워낙에 애들이 평소에도 죽을 둥 살 둥 연습을 해서 그런 걸 겁니다. 데뷔하고 나서는 매일 연습실에서 살다시피 하는 애들이라.”

백 피디는 그제야 자신이 무엇을 간과하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실력이 늘었구나.’

그가 보고 있던 자료들은 모두 지금보다 1년 전이거나 최소 6개월은 된 자료들이었다.

이미 완성된 다른 보컬들과 달리 성장하고 있는 신인 아이돌이라는 점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이 정도로 무대 퀄이 좋을 줄은 몰랐는데.’

놀람도 잠시, 이내 피날레 공연으로 보여 줘도 손색이 없을 거라는 생각에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 판단을 내린 것은 단순히 보컬 실력 때문만이 아니었다.

조연출이 속삭였다.

“편곡이랑 퍼포먼스 좋은데요?”

“응. 확실히 잘해 놨어.”

원곡을 2010년대 풍으로 되살려낸 편곡에 감탄이 나왔다.

‘이걸 쟤가 했다니.’

백 피디가 무대에 선 우주와 편곡자 명에 쓰여진 우주의 이름을 번갈아 보며 새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대단했다.

연습 영상 때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직접 이렇게 현장에서 퍼포먼스와 함께 보니 느낌이 또 다르기도 하고.

그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신인 아이돌의 예상치 못한 반전 무대라…… 사람들 눈길 끌어모으기 괜찮겠네.’

편집 방향이 머릿속으로 슥슥 그려졌다.

원래는 현장 반응을 보고 결정할 사안이었지만, 그는 주변을 둘러보고 확신을 얻었다.

“…….”

바쁘게 움직이는 스탭들과 달리 가만히 서 있는 이들은 모두 무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시선을 끌어모으는 무대.

리허설만으로도 제작진의 시선을 끄는 무대가 방청객에게 반응이 안 좋을 리가 없었다.

‘기대되네.’

그가 어렴풋한 미소를 지으며 마이크를 들었다.

-고생했어요. 뉴블랙.

그러면서 한 마디를 덧붙였다.

-본무대도 지금처럼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를 하던 뉴블랙 멤버들이 한숨 돌린 얼굴로 무대를 내려갈 때.

멀찍이 객석 맨 윗쪽, 출구 근처에 서 있던 한 무리의 인물들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로 지금까지 리허설을 구경하고 있던 매니저들이었다.

*   *   *

『 도전 명곡발굴단 - 경연 1차 편집본 』

[#1] ‘조유리 밴드’ 대기실

CCTV처럼 천장 모서리에 있는 관찰 카메라가 대기실을 찍고 있다.

가죽 재킷을 입은 채 다리를 쭉 빼고 앉아 있는 네 남녀.

다리를 떨고 있는 베이시스트에게 보컬 조유리가 타박한다.

-다리 좀 그만 떨어. 형. 복 나가.

-야. 떨리는데 어떡하냐.

누군가 공감한다는 듯 말했다.

-갑갑하잖아. 리허설 무대를 볼 수도 없고. 다른 사람들은 어떤 무대하는지 봐야 하는데.

-잠깐 TV 틀어 볼까?

-안 돼. 카메라가 찍고 있어.

곳곳에 배치된 관찰 카메라를 가리키며 드러머가 말했다.

그걸 보여 주듯이 화면이 4분할되며 여러 방향에서 조유리 밴드를 담는 관찰카메라 화면을 보여준다.

밴드 멤버들이 꺼져 있는 TV 화면을 바라보면서 갑갑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 음악 방송이라면 대기실의 TV를 통해 현장 카메라가 찍는 모습을 볼 텐데.

이번 프로그램에서 상대팀이 리허설을 보는 것은 금지였다.

-차우현 선배님이 제일 잘하셨겠지? 나 지난번에도 첫 소절 듣는 순간 소름 뽝 돋았잖아.

-난 그 트로트 가수 분한테 눈길 가던데.

-그래도 보컬 하면 차우현 선배님이지.

이런저런 추측이 나올 때, 조유리 밴드의 매니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들이 반가운 표정으로 물었다.

-형, 어때? 다른 사람들 리허설…….

-소감. 얼른 소감 말해 봐.

-어… 다들 잘하더라. 리허설인데도 에너지가 장난이 아니야. 몇몇 분은 소름 끼칠 만큼 노래도 잘하시고.

누군가 채근하듯 물었다.

-그래서 누구야? 어느 팀이 제일 잘했어?

-워낙 다들 잘해서….

카메라를 의식한 듯 말을 얼버무리던 매니저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답했다.

-뉴블랙.

정적이 감돈다.

-……뭐?

-다들 잘하기는 했는데, 이 친구들이 뭐라고 해야 하지. 기억에… 어, 기억에 좀 남네.

-…???

생각지도 못한 이름의 등장에 어리둥절해하는 조유리 밴드 멤버들의 얼굴이 관찰 카메라에 잡힌다.

[#2] 다른 대기실

조유리 밴드의 대기실에서 있었던 상황이 다른 대기실에서 비슷하게 재현되는 장면이 짧게 삽입됐다.

분할된 화면에서 여러 매니저들이 이구동성으로 ‘뉴블랙이 잘하더라’하며 다르게 대답하는 장면들이었다.

[#3] 출연자 인터뷰

검은 장막을 앞에 두고, 무대 의상 차림으로 앉아 있는 뮤지컬 배우.

리사가 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리사 : 기대되는 참가자요? (잠시 고민) 전 뉴블랙이요.

이유를 묻는 제작진.

◆ 리사 : 아까 매니저가 리허설을 구경하고 돌아오자마자 ‘우리 큰일났다’ 이러는 거예요. (웃음) 뭐가 문제냐고 물었더니 ‘뉴블랙 애들 보니까 아주 이를 박박 갈고 나왔다’고 겁을 주더라고요.

리사가 싱긋 웃으며 답한다.

◆ 리사 : 개인적으로 기대 중이예요. 과연 어떤 무대였기에 매니저가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   *   *

저녁 6시.

녹화 시작까지 1시간 반을 앞둔 현장은 그야말로 전쟁통을 방불케 했다.

스탭들은 복도를 거의 헤집듯이 뛰어다니고, 스타일리스트들은 퀵 배달로 받은 의상을 품에 가득 안고 달렸다.

경연을 앞두고 있다는 게 더 실감이 났다.

마치 어렴풋이 느낌으로만 감지하고 있는 거대한 톱니바퀴가 움직이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눈에 보이는 건 작은 톱니바퀴들뿐이지만 그것이 움직이면서, 거대한 무언가가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후우…….”

마른세수를 하며 복도를 걸어갈 때, 막내가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바깥을 가리켰다.

“형, 저기 봐 봐여. 사람들 겁나 많아여.”

“흐어어……. 뭐야?”

공개홀 입구 앞에서 사람들이 대기하는 공간.

티켓을 들고 있는 수백 명의 방청객들을 보고 있자니 절로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한겨울에 이 정도나 오다니.

입장을 30분 앞두고 대기줄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것을 보며 침을 삼켰다.

중현이가 말했다.

“저분들 앞에서 이제 공연해야 되는 거네요.”

“그렇지…….”

훅 들어오는 듯한 긴장감을 느끼며 내가 침을 삼킬…….

새도 없었다.

“비주야! 거기 아니야!”

“여기 아니에요?”

“거기 막다른 길이야. 중현아, 얘 좀 어디 못 가게 뒷덜미 좀 잡아라.”

“네. 형.”

중현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비주의 옷깃을 붙잡았다.

길도 못 찾는 게 자꾸 혼자 다른 길로 샌다니까. 비주를 붙잡은 채 우리가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다.”

출연자 대기실 앞.

노크를 하자 들어오라는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휠체어를 탄 노인이 버럭 성을 냈다.

“이번에는 또 뭔가? 가뜩이나 비행기 타고 와서 힘들어 죽겠……!”

“저희 왔어요, 선생님.”

“아.”

상대의 표정이 급격하게 온화해졌다.

특히 리혁이를 바라보는 얼굴이 잃어버린 손자를 보는 듯한 얼굴이었다.

“우리 리혁 군이 왔구먼.”

막내가 그 뒤에서 손을 흔들었다.

“쌤, 리혁이 형 뒤에 사람 있어여.”

“아, 그래. 무알콜 군과 졸개들도 함께 있고.”

“……선생님, 저도 우주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싶어요.”

상대가 비죽 웃었다.

그러곤 근처에서 다른 일을 하던 아주머니를 불렀다.

“강 여사.”

“기다려요. 선생님.”

“강 여사아아! 여기 애들한테 감귤 주스 좀 줘! 나도 한 잔 주고.”

“기다려요, 좀! 지금! 선생님 옷에다 마이크… 마이크 달고 있잖아요!”

“에잉. 맨날 바빠.”

투덜거리는 노재현 선생님을 보면서 웃었다.

경연을 보겠다고 제주도에서부터 비행기를 타고 오신다길래 걱정 많이 하고 있었는데.

혈색을 보아하니 엄청 건강해 보이셨다.

아주머니가 감귤 주스를 줄 때 그 비밀을 속삭여 주었다.

“오늘 이거 보러 오시겠다고 식단 관리도 엄청 열심히 하셨어요. 안 하던 운동도 하시고.”

그 말에 우리가 미소를 지었다.

잠시 선생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반갑게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참.”

내가 농담하듯 말했다.

“선생님, 이따가 저희 무대 끝나고 나면 반응 부탁 드릴게요. 놀라신 표정이라든가.”

“대견하거나 기특한 표정도 좋아여.”

“아, 이보게. 이 사람들아. 그건 노래가 정말 좋아야 그런 반응을 하지.”

…라고 퉁명스럽게 말하던 노인이 헛기침을 하더니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해 주면 되나?”

“이런 표정이요.”

나와 지호가 연기력을 살려서 감격하고 막 감읍해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상대가 따라해 보았다.

오랜 연예계 경력 덕분인지 척하면 척이었다.

“이렇게?”

“네, 그렇게요.”

작당 모의를 하는 사람들처럼 서로에게 엄지척을 날리다가 이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이후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우리를 부르는 매니저의 호출 때문에 아쉽게도 작별 인사를 해야 했다.

“그럼 이따 뵐게요.”

“고생들 하게. 이따 무대 기대하겠어.”

휠체어에 앉은 채로 문앞까지 배웅을 나오는 이에게 연신 꾸벅이면서 방을 나섰다.

창밖으로 어느덧 어둑어둑한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현재 시각 저녁 6시 30분.

설레는 얼굴로 입장하는 방청객들에게 시선을 두던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제 경연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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