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206화
PBS 신관 공개홀.
관객들이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우와…….’
방청을 처음 온 이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주변을 살폈다.
무대에는 ‘도전, 명곡 발굴단!’이라는 판넬이 붙어 있고, 널찍한 무대 뒤에서는 음향팀이 악기를 점검하는 중이었다.
녹화는 시작도 안 했지만 벌써 설레는 느낌이었다.
“진짜 신기하다. 이게 방송국이구나.”
“오늘 누구누구 나오는 거야? 차우현이랑 또 누구?”
“악기 엄청 많네. 저 마이크 서 있는 거는 코러스 넣는 그거지? 사람들 어깨 춤 추면서 우우우.”
방청객들은 들뜬 얼굴로 지인들과 수다를 떨었다.
“와.”
뒷좌석을 훑어보던 맨 앞줄의 관객은 입을 떡하니 벌리고 친구에게 속삭였다.
“대박. 야. 사람 진짜 많아.”
“아까 보니까 티켓 없이 서 있던 고딩들도 있던데, 현장에서 자리 비면 바로 들어오려는 거래.”
“……첫 녹화인데?”
‘도전, 명곡 발굴단!’은 이번에 시작하는 프로그램이라 인지도가 높은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 숫자라니.
단체 관람객이 곳곳에 보였지만 첫 방송도 안 한 프로를 보러 온 사람들이 이리 많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오, 여기 봐. 오늘 뭐 하는지 써 있어.”
“어디?”
“3페이지.”
핸드폰을 보는 것도 잠시, 사람들은 들어올 때 받은 팸플릿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오늘 누가 무슨 노래를 부르는지 써 있었다.
“라인업 쩐다……. 차우현이 이런 프로그램 잘 안 나오지 않아?”
“다 아는 가수들이네.”
“근데 노래는 잘 모르겠다. 아는 노래가 하나도 없어.”
생소한 노래 때문인지 대부분 가수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뮤지컬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리사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인디밴드를 좋아하는 사람은 조유리 밴드를 눈여겨보았다.
나이대가 있는 어른들은 송보형의 얼굴을 알아보았고.
차우현은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는 대한민국 대표 보컬리스트였다.
그런데…….
“얘넨 누구래?”
[뉴블랙 : 노재현 ‘인생’]이라고 되어 있는 팸플릿 문구와 사진을 보면서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곤 눈을 돌렸다.
슬라이드 쇼처럼 무대 배경 화면에 가수들의 화보가 지나갔다.
캐주얼한 차림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5인의 아이돌.
“뉴블랙?”
자리에 앉아 있는 이 중 하나가 눈을 깜빡였다.
‘누구더라?’
어디선가 본 것 같기는 한데…….
기억은 가물가물하고.
스마트폰을 검색하던 누군가 말했다.
“얘네 그거네. 그… 주세한!”
“아…….”
“추석 특집에 나왔던 걔네잖아. 그 염소랑 싸우고 효도 잔치했던 애들.”
국민 예능으로 불리는 주세한의 추석 특집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곳곳에서 나왔다.
몇몇 방청객의 얼굴에 반가움이 살짝 스쳤다.
하지만 그 얼굴을 알아본 것과 달리 의문은 여전했다.
“근데 얘네 신인 아니야? 여기에 올 그게 되나?”
“그러게.”
예능에서 큰 인상을 남겼던 건 알겠는데, 왜 경연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된 건지는 의문이었다.
아이돌이 끼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TNT처럼 전국민이 다 알 정도는 아니더라도 가창력으로 유명한 데이드림이나 플레이리스트 정도는 나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뭔가 있나?’
누군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우스갯소리를 속삭였다.
“알고 보면 노래 개잘하는 거 아니야? 화음 막 현란하게 쌓고 옥타브 끝까지 올라가고.”
“설마.”
그 말을 들은 이도 피식 웃으며 무대 배경에 시선을 돌렸다.
잔잔한 음악 사이로 뉴블랙의 화보가 다시 한번 지나갔다.
‘잘생겼네.’
눈길을 끌 만한 미모를 지니고 있지만 뉴블랙에 대한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주말 예능을 통해 봤던 얼굴을 다시 보니 약간 반갑기는 했지만, 가수로서 뉴블랙에 대해선 잘 모르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누군가 무대 위로 올라오면서 포커스는 금세 옮겨갔다.
익살맞은 표정의 남자.
마이크를 쥔 사람이 성큼성큼 올라오면서 시선이 집중됐다.
-안녕하세요옷~!
힘차게 인사한 남자가 관객들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갑자기 놀라셨죠? 웬 모르는 놈이 올라와서 인사하고. MC인가? 하실 텐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리셨습니다.
약장수가 말하듯 웃긴 말투에 관객들에게서 가벼운 웃음이 나왔다.
-저는 오늘 녹화에 앞서 사전 MC를 맡게 된 PBS 개그맨 공채 출신 김철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이어서 제작진 대신 주의사항을 전달하던 사전 MC가 분위기를 띄우기 시작했다.
-자, 다 같이! 함성 소리 한 번 들어~ 볼까요! 에이, 작습니다. 작아. 이걸로는 턱도 없어요! 더 크게! 다시 한번 소리~ 질러!
“와아아-!”
-10점 만점에…… 9점. 제가 9점 드리겠습니다. 아직 10점짜리가 되려면 멀었어요.
“아아!”
박수와 함성을 유도하면서 방청석의 공기가 서서히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사전 MC는 방청객들을 대상으로 가위바위보나 이런저런 게임을 하며 경품을 증정했다.
바로 오늘 공연에 참가한 가수들의 사인이었다.
그리고…….
‘뉴블랙인가?’
방금 전, 친구와 뉴블랙 가창력 드립을 쳤던 이가 경품으로 받은 사인을 찬찬히 훑었다.
다섯 가지 필체로 적힌 사인.
홀로 외딴 구석에 자리 잡은 궁서체의 ‘서리혁’을 지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
이내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뭔데? 뭐… 푸핫!”
옆에서 고개를 들이밀던 친구도 그만 웃었다.
바로 정가운데 위치한 사인 때문이었다.
영문으로 ‘Woojoo Sun’으로 휘갈긴 글자 옆에 부록이 달라붙어 있었다.
꽁무니에서 불을 뿜으며 날아가는.
[ ˘ᗜ˘ ]
어딘가 모르게 귀여운 표정의 우주선이었다.
* * *
저녁 7시 30분.
마침내 녹화가 시작됐다.
사전 MC가 분위기를 즐겁게 띄운 이후, 본격적으로 MC 백상중이 턱시도를 입고 무대에 섰다.
“와아아-!”
열광적인 분위기였다.
경연에 앞서 무대 위에 일렬로 선 가수들이 관객들에게 인사했다.
육백 명의 관객.
텅 비어 있을 때는 좁아 보였던 공개홀이 엄청나게 넓어 보였다. 수많은 시선이 여기저기 향하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수플레처럼 보이는 관객들을 빼면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는 분들은 없어 보였다.
그나마 몇 있어도 대충 우리의 얼굴만 흘깃거릴 뿐.
대부분은 차우현이나 조유리 밴드에게 관심을 보였다.
-안녕하세요. 조유리 밴드입니다.
방청객들이 커다란 환호를 보내 주었다. 조유리 밴드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우리한테 흘깃거리는 게 ‘봤냐’는 듯한 느낌이었다.
무시했다.
하지만 인지도의 차이라는 게 여실히 느껴지긴 했다.
“안녕하세요, 뉴블랙입니다!”
우리가 인사할 때 다들 ‘와아!’ 해 주었지만 어디까지나 의례적으로 인사를 해 주는 정도.
작년이면 ‘썸씽이 얘네 거래요!’ 하면서 MC가 소개를 해 줬겠지만 1년이나 지난 노래를 가지고 지금 홍보를 하는 건 좀 이상한 일이었다.
이 선배들 라인업 속에서 ‘저희 신인상 5관왕이에요.’하거나 ‘데뷔 1년 차에 음방 1위 해 봤습니다’하는 것도 뭔가 궁색하고.
주세한 때문에 알아보는 사람들도 꽤 있는 듯했는데, 타 방송 프로라서 얘기하기 난감했다.
그런 까닭인지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섭외된 연예인 패널들도 대부분 외모 이야기를 했다.
-너무 잘생겼다. 다들 나이가 어떻게 돼요? 흐어……. 지호 씨 열여덟 살이예요? 이모가 미안해요.
-전원 비주얼 그룹이네. 이거 피디가 얼굴 보고 섭외한 거 아냐?
-다들 얼굴 크기 좀 봐요. 원근법을 무시하네.
‘우리도 노래 얘기 좀 해 줘요’ 하고 싶은데 연예인 패널들이 외모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2주일 동안 죽기 살기로 연습했는데, 얼굴 얘기로만 거의 5분을 가까이 잡아먹다니.
그래서 우리는…….
“허어, 너무 감사합니다.”
즐겼다.
관심은 내가 원하는 것만 가려서 받는 게 아니다.
그냥 주면 주는 대로 냉큼 받아먹어야지.
프로 관종답게 우리는 겸양을 떨면서도 잘생겼다는 칭찬을 뇸뇸 받아먹으며 기분을 업시켰다.
-제가 아이돌에 대해서 잘 아는데, 저 친구들이 2014년의 신인이라고 불렸던 신인이거든요.
그래도 자칭 ‘아이돌 박사’라는 예능인 방문수가 우리를 알아보았다.
너구리를 닮은 외모의 남자가 관객들에게 말했다.
-작년에 대형 기획사를 비롯해서 신인들이 어마어마하게 쏟아져 나왔거든요. 전문가들이 ‘2014년에 대체 뭔 일이 있었던 거냐’ 할 만큼 실력적으로 뛰어난 신인들이 나왔어요. 뉴블랙은 그 경쟁을 뚫고 작년에 대표 신인이 된 친구들이예요.
아이돌에 관해 많이 알고 계시는 것 같아서 ‘누구지?’ 했는데 이내 얼굴을 알아보았다.
우리가 출연했던 HBS ‘아이돌쇼’의 경쟁 프로그램을 K-Net에서 진행하는 분이었다.
MC가 능글맞게 물었다.
-그럼 방문수 씨는 오늘 우승 후보를 뉴블랙으로 보십니까?
-어… 네, 그런 거죠!
얼버무리다가 ‘네!’ 하는 대답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나왔다. 너털웃음을 짓던 방문수가 우리를 바라보았다.
-뉴블랙! 내가 우승 후보라고 해 줬으니까 우리 프로에도 꼭 나중에 나와야 돼요! 알았지?
“불러 주시면 영광이죠.”
웃으면서 대답을 했다.
한편 우리 다음으로 차우현이 인사를 하자 객석에서 어마어마한 환호성이 쏟아져 나왔다.
프로그램 간판 가수답게 토크도 꽤나 긴 편이었다.
‘캬! 뉴블랙 작년 신인판을 뒤집어 놓으셨다’ 이러던 방문수 씨도 우승 후보라는 말에는 ‘엄……’ 했던 우리와 달리 차우현은 그야말로 오늘의 유력한 1위 후보였다.
토크도 진지한 분위기였고, 그를 바라보는 관객들의 시선도 많아 보였다.
우리 때와 공기가 완전 달랐다.
뉴블랙이 그냥 귀여운 막내라면 그는 한 명의 프로 아티스트로서 대우를 받고 있었다.
워낙 그만큼 대단한 사람이니 그러려니 했지만, 다른 가수들을 소개할 때도 우리와는 느낌이 좀 달랐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제작진이 자꾸 그런 쪽으로 유도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원격으로 MC에게 지시 사항을 내리는 작가진도 그렇고, 연예인 패널들도 그런 쪽으로 몰아갔다.
방청객들에게 어떤 이미지를 심어 주려는 것 같달까.
내 추측일 뿐, 확실하진 않았다.
다만 관객들이 우리를 그저 신인 아이돌 그룹 중 하나로 생각한다는 건 확실했다.
당연하기도 하고.
-네, 가수 여러분은 이쯤 돼서 내려가겠고요. 저는 그동안 오늘 투표 규칙에 관해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담담한 얼굴로 내려가고 있는 가수들에게 방청객들이 시선을 두는 게 눈에 들어왔다.
여길 봐도. 저기를 봐도.
어디를 보아도 몇몇 사람들을 빼면 우리에게 관심을 주는 시선은 얼마 없었다.
“형. 왜 그래요?”
내가 잠시 멈춰서자 비주가 물었다.
“아냐, 아무것도.”
별일 아니라는 얼굴로 웃으며 걸음을 옮겼지만, 머릿속으로는 생각이 이어졌다.
방청객들의 반응 때문일까.
불현듯 그런 욕심이 고개를 들었다.
이따가 있을 무대에서 우리가 저 육백 명의 시선을 모조리 가져왔으면 좋겠다고.
* * *
본격적으로 경연이 시작됐다.
방식은 간단했다.
연습이라든가 편곡 과정이 어떤 식으로 진행됐는지 간단하게 보여 주는 VCR.
그리고 가수가 해당 노래를 소개하는 VCR이 재생된 후 본무대가 시작됐다.
숨겨진 명곡을 찾아 원곡자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영상은 애초에 본방을 위한 것이기도 하고, 방청객들의 평가에 영향을 줄 수 있어서 나오지 않았다.
“와…….”
대기실에 옹기종기 모여 TV를 바라보던 우리는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노래 대박이다.”
“노래 부르실 때 손짓하는 거 봐여. 표현력 진짜 대단하다아…….”
관찰 카메라가 보고 있어서 일부러 리액션을 하는 게 아니라 정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살아있는 보컬 교과서들이라고 해야 하나.
동요였던 ‘또롱또롱’을 편곡해서 뮤지컬의 한 장면처럼 멋지게 공연한 리사.
원곡자가 눈을 글썽이며 좋아할 만큼 멋진 공연이었다.
큰 퍼포먼스 없이 제자리에 서서 잔잔하게 노래를 부를 뿐인데, 목소리만으로 관객석에서 눈물을 뽑아내는 차우현.
음정 잡기 까다로운 노래를 마치 제 집 드나들듯이 자유자재로 부르는 모습에 리혁이가 일어나서 박수를 쳤다.
그리고 조유리 밴드.
가사를 많이 바꾸기는 했지만 트렌디한 곡을 뽑아내어 젊은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우리의 호불호와 별개로 정말 연주나 보컬 실력 하나는 최고였다.
클라이맥스에서 조유리가 마이크를 머리 위로 든 채 고음을 끝까지 올려대는 장면에는 연예인 패널석과 방청석에서 떡하니 입을 벌릴 정도였다.
그렇게 가수들의 공연이 끝나면 연예인 패널들이 호들갑을 떨며 노래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그 후에는 두 작곡가와 유명 가수로 구성된 심사 위원들이 마이크를 잡고 평가했다.
-저는 처음에 동요라고 들었을 때, 이런 식으로 편곡이 될 거란 생각은 못했거든요. 정말 쉽지 않은 도전인데 완벽하게 성공했네요.
호평도 있고.
-과연 차우현이다, 하는 말이 나오는 무대였습니다. 고마워요.
대호평도 있고.
-조유리 밴드 정말 잘했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가 아쉬워요. 편곡이 너무 기교에 치중한 느낌이에요. 보컬 테크닉은 대중에게 놀라움을 줄 수 있지만, 감동은 별개거든요. 외줄타기를 하는 곡예사를 볼 때 대단해서 박수를 치지만 그걸 보고 감성에 젖어들지는 않잖아요?
예리한 지적도 있었다.
가수들이 저마다 기쁘거나 후련한 얼굴로 내려가면 다음 경연 준비가 이어졌다.
그동안 우리는 가사지를 보거나, 이어폰으로 MR을 들으며 목을 풀었다.
“오백 원 오백 원…….”
“오백 워어언…….”
메인 보컬의 주도로 다 같이 목을 풀고 있을 때, 노크 소리와 함께 인터컴을 낀 스탭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뉴블랙 스탠바이 할게요!”
“네에-!”
TV 화면 속에서 ‘배반의 꽃’을 부르는 송보형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대기실을 나섰다.
긴장된다.
백스테이지까지 가는 길이 어찌나 멀게 느껴지는지. 시간이 느리게 가는 느낌이었다.
송보형의 노래가 끝나고 연예인 패널들이 수다를 떠는 동안 우리는 어두운 무대 뒤편에서 몸을 풀었다.
“후우…….”
ENG 카메라를 든 제작진이 우리 모습을 찍었다.
작가님이 물었다.
“떨려요?”
“네, 엄청요.”
우리가 옹기종기 모여 ‘으으!’ 하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내가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정말, 실수만 안 했으면 좋겠어요.”
“저두여. 이거 연습 엄청 했는데 실수하면 막 억울해서 눈물 나고 그럴 것 같아여.”
카메라 앞에다 대고 인터뷰를 하면서 잔뜩 긴장한 입가를 풀었다.
‘푸르르’하면서 말처럼 입술을 풀기도 하고, 생수병도 벌컥벌컥 들이키고, 서로 어깨를 주물러 주기도 하고.
원석이 형이 물었다.
“너희 물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야?”
“괜찮아요. 형.”
자꾸만 갈증이 나서 물을 마셨다.
매니저 형들과 우리 스탭들이 화이팅 하듯이 주먹을 쥐어 보이며 우리를 격려한 후.
무대로 올라가는 계단에 서 있던 FD가 곧 올라갈 때가 됐다는 듯 준비 신호를 보내 왔다.
가슴이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온몸이 초조함과 긴장감으로 물들여지는 가운데 내가 마른침을 삼키며 손을 뻗었다.
동생들도 진지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얘들아, 우리 올라가기 전에 화이팅 한 번 가자. 2주 동안 다들 연습하느라…….”
“올라갈게요. 뉴블랙.”
“그냥 하던 대로 하자! 화이팅!”
바쁘게 화이팅을 하고 나서 무대 계단을 올라갔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 소리에 심장이 미칠 듯이 뛰었다.
* * *
무대 위로 뉴블랙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스웨터, 재킷, 터틀넥 등의 단정하고 깔끔한 차림새의 겨울 옷차림을 한 다섯 명의 아이돌 멤버들.
“와아아-!”
그들이 올라오면서 의례적인 함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바로 앞무대였던 송보형의 열정적인 무대가 남긴 잔향 때문인지 어딘가 열띤 분위기였다.
전 무대에서 터뜨린 폭죽의 화약 냄새가 서서히 잦아들 때.
암전된 무대에서 뉴블랙 멤버들이 저마다 흩어져서 자리를 잡았고, 곧바로 VCR이 재생되었다.
-네, 여기는 제 작업실이고요.
수려한 외모의 아이돌 리더가 제작진을 어디론가 데려간다.
온화한 인테리어의 작업실.
그 속에서 우주가 마우스를 딸깍거리면서 제작진에게 편곡 의도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 옆에서 같이 작업을 하다가 인터뷰 대상자로 불려온 A&R팀 서필근 대리.
-우주요…?
잠시간 서글픈 침묵.
-노래에 관해 정말 진심인 친구예요. 적당히 진심이었으면 좋겠다고 저희 팀원들이 농담을 할 만큼요.
장내에 웃음이 감돌았다.
이내 장면이 전환된다.
노래만 하는데도 땀에 푹 젖을 만큼 열정적으로 연습하는 뉴블랙 멤버들의 모습.
-아, 목 아파. 형 저 목캔디 좀 주세여.
-내 거야.
라면서 하나를 새침하게 챙겨 주는 멤버의 모습까지.
연습장면이 끝나고 오늘 대기실에서 찍은 인터뷰 VCR이 흘러나왔다.
인사와 함께 이어지는 노래 설명.
-방금 전 영상에서도 보셨겠지만 저희가 부를 노래는 노재현 선생님의 ‘인생’이란 곡이예요.
래퍼가 보스를 모시는 부하처럼 녹음 마이크를 드는 동안 리더가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저희가 평균 연령 20.4세인 그룹이기도 하고, 저부터가 21살이거든요.
주변의 날카로운 시선에 ‘만으로요. 만으로.’ 하는 덧붙임이 이어졌다.
-아직 인생의 절반도 살지 못한 만큼, 처음에 저희가 소화할 수 있을까 걱정도 많이 됐어요. 인생이라는 게 하나의 길도 아니고 정말 여러 갈래가 있어서 다양한 거잖아요.
리더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 무게감과 감성을 살리는 것에 주력해서 편곡과 연습에 최선을 다했어요. 부족할 수도 있지만, 이번 경연에 참여할 기회를 얻은 만큼 저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 볼 생각입니다.
-기대해~ 주세요!
다 같이 시청자와 방청객에게 인사를 마친 후 VCR이 꺼지면서 무대의 막이 올랐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멤버들.
메인 조명을 받고 있는 것은 맨앞에 홀로 서 있는 새하얀 얼굴의 멤버였다.
피아노 멜로디가 흘러나오는 동안,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끄덕이는 메인 보컬.
하지만 그는 노래를 하지 않고 있었다.
건반이 멜로디를 연주하다가 서서히 잦아들 때.
스러지는 파도의 뒤에 또 다른 파도가 밀려오듯이, 한 목소리가 그 자리를 절묘하게 파고들었다.
바로 뒤편에 서 있는 리더였다.
파란 빛의 미약한 조명이 그 얼굴을 물들이는 동안 부드러운 허밍이 공연장을 울렸다.
그걸 시작으로 옆자리 금발의 멤버가 소리를 하나 더 얹었고.
그 옆에 래퍼와 막내가 하나씩 마이크를 잡았다.
은은한 푸른 조명처럼 네 멤버가 화음으로 관객들의 귀를 촉촉하게 적시면서 단숨에 무대에 시선이 집중됐다.
듣고 있다 보면 따스해지는 느낌의 화음이었다.
그런데 멤버들이 소리에 강약을 주어서 그런 걸까.
무언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기묘하게도 그 소리를 따라서 시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약을 주면서 어딘가 멈추도록.
관객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멈춘 곳은 바로 정가운데서 눈을 감은 채 서 있는 메인 보컬이었다.
피아노 멜로디. 화음.
단계별로 여러 소리가 서서히 관객을 유혹하고 있을 때, 다시 화음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메인 보컬의 입술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