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226)화 (226/1,031)

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226화

배우 이강진.

GTV ‘슬립’의 주인공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확실히 분장의 힘은 대단했다.

훈훈한 외모로 유명한 30대 배우가 지금은 이목구비 뚜렷한 형사로 밖에 안 보였으니까.

덥수룩한 머리에 거슬거슬한 수염. 낡아 보이는 가죽잠바까지.

오기 전에 미리 슬립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지 않았다면 못 알아볼 뻔했다.

“여기서 보니까 반갑네!”

“안녕하세요. 선배님!”

상대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두 번째 만남이죠?”

“음, 세 번째 같아요.”

“그래?”

“주세한 추석 특집에서도 한 번 뵙고, HBS 어워드 때도 신인상 시상자로 나오셨잖아요.”

“아아, 맞다. 어이구. 그러고 보니까 인연이네!”

하하 웃는 상대를 따라 같이 웃었다. 그 동안 동생들이 몰래 SOS를 보냈다.

‘뭐예요?’

‘왜 저분이 우리한테 이렇게 인사하는 거예여…?’

대답해주고 싶었지만 나도 모르겠다.

10년지기 친구처럼 구는데 이 사람이랑 엮인 시간을 다 합해도 10초지기도 안 될걸.

주세한에서도 별다른 대화를 나눈 기억이 없었다.

그나마 중현이한테 대길이 레이드에 실패한 경험자로서 몇 마디 충고를 해준 것 정도? 연말가요대상에서도 트로피를 주면서 ‘축하해요’ 했던 기억밖에 없다.

아무한테나 사교성이 좋다고 하기엔 다 같이 모여 있던 주세한 오프닝 때는 눈길도 안 주던 사람이었다.

추측이 가는 게 하나 있지만…….

“하하하!”

“흐하핫!”

“꺄르르!”

일단 상대가 반갑게 굴어주니 우리도 장단을 맞춰 흥겹게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어느 순간부터 말을 편하게 놓은 상대가 친근하게 물었다.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이야? 뭐, 카메오라도 나와?”

“저희 음악감독님 만나러 왔어요. 제가 OST 작업을 하기로 했거든요.”

“잘됐네. 기왕 우리 OST에 들어오는 거 곡 좀 잘 뽑아줘.”

열심히 하겠다고 하니 이강진이 웃으면서 핸드폰을 꺼냈다.

“이렇게 촬영장에서 만난 것도 기념할 겸 사진이나 한 장 찍을까?”

“좋아요.”

“자, 그럼 다 같이 잠자는 포즈로.”

왜 잠자는 포즈냐고 물으니 ‘슬립’이니 ‘sleep’ 아니냐는 물음이 돌아왔다.

리혁이가 충격 받은 표정을 숨기며 조심스럽게 얘기하니 이강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래?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나 잘못했다가 제작발표회에서 개망신 당할 뻔했네.”

이내 주연 배우와 셀카를 찍고, 연락처를 교환하면서 헤어졌다.

자기 SNS에 인증샷 올려도 되냐고 하는 물음에 우리 매니저들이 좋다고 대신 답해주었다.

가죽점퍼를 휘날리면서 사라지는 뒷모습에 감탄했다.

“오…….”

확실히 배우는 배우다.

걸음걸이를 엄청 연습했는지 걸음에도 투박한 형사 느낌이 배어나왔다.

무미건조한 주인공 ‘박철진’이 진짜 대본 속에서 톡 튀어나온 것 같다고 할까.

하드보일드 소설의 주인공처럼 멋지게 사라지는 모습에 감탄할 때였다.

“멋있…….”

“아이고, 감독님! 오셨어요!”

감독님이 현장에 나타났는지, 두 손을 열심히 비비면서 달려가는 이강진의 모습.

“…….”

‘우리 감독님 오늘 좋은 일 있으세요? 아주 광채가 형광등 백만 개시다!’ 하는 배우의 모습과 핫핫 웃는 총감독님.

중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오래 살아남는 분들은 다 이유가 있네요.”

“선배님이라서 되게 불경한 소리 같기는 한데, 음…….”

리혁이가 말끝을 흐렸지만 뒤에 나올 말이 짐작이 갔다.

연기력 출중하기로 유명한 배우라서 뭔가 무게감 있는 이미지를 예상했는데 뭔가 느낌이 좀…….

한편 저렇게 감독님에게 찰싹 달라붙어서 비위를 맞추는 모습을 보자니 우리에게 친근하게 굴던 게 새삼 신기했다.

비주가 쓴웃음을 지었다.

“주세한 오프닝 때 기억이 나네요.”

“그러게.”

데뷔 2개월차였나.

TBC 방송국 앞에 모여 있는데, 비슷한 처지인 출연자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우리에게 말을 걸지 않았지.

우리가 인맥이 안 된다고 판단을 했으니까.

뭐, 그래도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는 게 좋았다.

각자의 핸드폰에 저장된 ‘이강진 선배님’이라는 연락처를 보면서 잠시 묘한 기분을 느꼈다.

*   *   *

(뉴블랙 멤버들과 배우 이강진이 턱받침으로 해바라기 포즈 하고 있는 사진)

♡ Promis.Jang님, Real_HanTH님 외 387명이 좋아합니다

LeeKang 슬립(slip) 촬영장 방문한 뉴블랙 친구들! 응원해줘서 고마워요~

#드라마대박기원 #GTV슬립 #꽃꽃꽃아저씨꽃꽃

*   *   *

“둘 셋.”

“안녕하…….”

“앉아요.”

‘세요. 뉴블랙입니다아……’를 중얼거리듯 화음을 맞추며 앉았다.

촬영장 한켠에 마련된 사무실.

음악감독님은 차분한 인상에 안경을 쓴 중년인이었다. 차라도 한 잔 마시겠냐면서 주전자에 담긴 따뜻한 녹차를 하나씩 따라주셨다.

“반가워요. 강만석이라고 합니다.”

우리도 다시 한 번 소개를 했다.

말씀 편하게 하시라고 했더니 ‘이게 편해요’ 라며 거절하셨다.

차분한 얼굴로 우리를 훑어보는 모습에 나도 조심스럽게 상대를 살폈다.

-강만석 PD?

-좋은 분이지.

함께 작업할 음악감독님이 어떤 분인지 A&R팀에 먼저 수소문을 한 터였다.

-좋은 분이야.

-에이. 좋은 정도인가. 강 PD님 정도면 음악감독 중에서 선녀가 아니라 옥황상제 급이지.

-그건 인정.

기껏 곡을 만들어갔더니 자기 딸을 작사가로 집어넣으라고 한다거나, 저작권 일부를 가져가려고 하는 음악감독들이 많다나.

그런 업계라서 그런지 더 돋보이는 분이라고 했다.

-다만 엄청 까다롭다는 게 문제지.

-OST는 정말 잘 뽑으시는데, 내가 한 번 그 과정에 갈려버릴 뻔한 적이 있어서.

-네가 1이라면 그분은 3우주 정도.

-선우주와 삼우주인가.

A&R팀의 이야기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나저나 삼우주 드립 누구였지. 서 대리님 같은데 돌아가서 곡 작업이나 같이 해야겠다.

“드라마 시놉은 보고 왔어요?”

“네, 재미있게 봤어요.”

내가 덧붙였다.

“그리고 감독님이 작업하신 OST도 다 듣고 왔어요. 제가 감히 평할 수준은 아니지만… 너무 좋더라고요.”

“그래요?”

“추리사극에서 나왔던 스코어도 너무 좋았어요. 처음에 손뼉 치는 소리로 딱 치고 나오다가… 그 다음에 현악기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예전에 인기를 끌었던 추리 사극.

고위공직자를 타깃으로 하는 조선 시대의 살인마에겐 특이한 습관이 하나 있었다.

바로 살해 전 손뼉을 치는 것.

겁에 질린 피해자가 두리번거릴 때 새카만 어둠 속에서 두 손이 스윽 뻗어나와 손뼉을 ‘짝!’ 하곤 했지. 은근 웃겨서 패러디도 많이 됐는데 소름 돋는 연출 때문에 OST도 같이 흥했었다.

이런저런 좋았던 점을 이야기하자 상대가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준비를 많이 해 왔네. 마침 나도 우주 씨가 작곡한 노래 듣고 왔거든. 우리 드라마랑 색이 잘 맞을 거라고 얘기는 들었는데 정말 좋더라고.”

그러면서 우리 보이스 컬러도 마음에 든다는 이야기에 모두의 안색이 환해졌다.

서로의 작업물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 받은 후 상대가 본론을 꺼냈다.

“뭐, 당연하겠지만 이번에 내가 부탁하려는 건 스코어가 아니라 송이예요.”

OST는 흔히 스코어와 송으로 분류한다.

의사들이 정치싸움하는 드라마에 나오는 ‘빰빰빠바밤!’처럼 가사 없는 것이 스코어(score), 노랫말이 담긴 것이 송(song)이다.

“보고 나서 궁금증이 들었을 거예요. 대본만 보면 송이 들어갈 구석이 없으니까.”

“네, 맞아요.”

“그래서 하는 얘기인데. 어떤 장면에 들어갈지 미리 알려줄게요.”

곧이어 대강의 스토리가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들었다.

스토리텔링 솜씨가 좋으신 덕에 들으면서 ‘오’, ‘대박, 그래서 그 다음은 어떻게 되나요?’ 하는 호응이 절로 나왔다.

강 PD가 말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들어갈 송을 작곡하면 될 거예요. 주인공이 갈대밭을 거닐 때 나올 노래로.”

“네, 이해했어요.”

“이것 때문에 제작사 통하지 않고 따로 불렀어요. 그 장면이 어떤 맥락에서 나오는지 이해해야 곡을 뽑기 수월하니까.”

스포일러 조심해달라는 이야기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노트에 필기를 하던 내가 물었다.

“감독님, 혹시 저희 노래 중에서 ‘밤바다’라고 아시나요?”

“들어봤어요.”

“비슷한 느낌으로 가보면 어떨까요? 주제는 다르지만, 더 서글프면서도 담담한 느낌으로.”

“음… 그거 괜찮네요.”

차분히 생각하던 그가 물었다.

“그럼 스트링은 어떤 식으로?”

“기타를 살짝 섞는다거나… 혹시 작중에서 주인공의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주인공이 더 젊었을 때 유행하던 악기를 섞어서…….”

“그거 좋네요.”

상대가 반색을 했다.

동생들이 어딘가 불안한 눈빛으로 나와 음악감독님을 번갈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허밍으로 이어가는 거죠. 중현이 같은 중저음 목소리로 차분하게…….”

“빵 터지는 부분 없이 가자는 거구나. 감정을 더 정돈하는 식으로. 그래요. 어쩌면 그게 더 나을 수도 있겠네.”

“네, 맞아요. 기존 스코어랑 연속선상에서…….”

“오호.”

“여기서는 이런 식으로…….”

“그럼 이건 어떨까…?”

“오, 좋아요. 좋아.”

몇 마디 대화가 끝나고 난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감독님, 어떻게 제가 말하고자 하는 걸 이렇게 다…….”

“우주 씨, 내 마음을 읽었어?”

서로를 바라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척하면 척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최근에 이 정도로 음악적인 견해가 일치하는 분은 처음인걸.

설명을 듣고 나서 무언가를 말하면, 상대가 찰떡같이 알아듣고 대안을 제시하는 식이었다.

그 동안 동생들이 어딘가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뭔가 자기들끼리 열심히 눈빛을 주고 받았지만 그런 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시간이 가는 것도 모르고 감독님과 영혼의 대화를 할 뿐.

그리고 1시간 후.

“우주야!”

“감독님!”

“대체 어디 있다가 이제야 온 거니!”

“존경해요, 감독님!”

서로의 손을 붙잡고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

“하하하!”

그러는 동안 막내의 속삭임이 귓가에 들렸다.

“우리 망한 거 같지 않아여…?”

*   *   *

“음흠흠.”

신이 나서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이토록 음악적 견해가 맞는 분을 만나다니. 행복한 기분을 공유하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

한 시간 사이에 푹 삭아버린 동생들이 보였다.

“어떡하지. 우주 형이 둘이야. 둘…….”

“저 소리 들려여?”

“또 무슨 소리. 왕지호.”

“우리가 갈리는 소리여.”

“…….”

중현이가 ‘오, 진짜?’ 하며 귀를 기울이던 때, 지호가 나를 불렀다.

“형, 제가 문득 생각난 게 하나 있어여.”

“뭔데?”

“OST라는 건 일관성이 중요하잖아여. 한 가수가 같은 목소리로 해야 어울리지, 계속 목소리가 바뀌면 부자연스럽지 않을까여? 그런 의미에서 메인 보컬인 리혁이 형 단독으로…….”

“에이, 그래도 다 같이 해야지.”

웃으면서 동감을 표하는 비주를 흘깃 보고는 다시 지호에게 말했다.

“목소리 톤은 걱정하지 마. 맞추면 되는 거잖아.”

“…….”

“노력하면 다 돼.”

“…….”

“비주야. 왜 그래? 눈에 뭐 들어갔어?”

“아니에요. 형… 좋아서 그래요…….”

눈가가 촉촉해진 비주를 보며 웃었다.

한편 우리는 한창 촬영이 이루어지는 현장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오오오—”

스탭들에게 모기 목소리로 인사하고는 자리를 잡았다.

-촬영장으로 부른 이유 중 하나는 현장 분위기를 느껴보라는 거였어요. OST에서 송은 사실 캐릭터의 대사나 속마음을 노랫말로 치환한 거거든요.

그러니 주연 배우가 연기하는 캐릭터를 보고 갔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형. 지호 눈에서 불 나와요.”

“그러게.”

촬영 현장에 도착하자 누구보다 눈을 부릅 뜨고 현장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우리 막내였다.

여기서 보는 모든 광경을 눈에 담겠다는 듯 눈은 반짝이고, 귀가 쫑긋거린다.

마치 전국 최고의 산책로에 도착한 강아지처럼 들떠 보였다.

스탭들의 키가 커서 잘 안 보이는지 신발까지 벗고 중현이의 발등 위로 올라서는 녀석이었다.

‘다들 비켜봐 나 완전 진지해’ 하는 얼굴로 바라보는 모습에 매니저 형들과 우리가 웃음을 삼켰다.

나 역시도 촬영장 가운데로 시선을 던졌다.

이강진이 형사팀 사무실 한복판에서 서류를 들고 서 있었다.

배경은 해질녘.

빗금처럼 사무실 가운데를 갈라놓은 노을빛.

밝은 쪽에는 같은 팀 형사들이 있고, 주인공은 상대적으로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서류를 뒤적거린다.

온화한 빛 속에서 느긋하게 저녁 메뉴를 논하는 형사들.

어두운 곳에서 맹금류처럼 눈을 빛내는 주인공.

사각사각.

종이를 하나씩 넘길 때마다 주인공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그러곤 외투를 챙긴다.

“어디 좀 다녀오겠습니다.”

“다녀 와.”

데스크에서 서류를 보던 팀장은 관심도 없다는 듯 말하고, 주인공이 외투를 걸친다.

툭.

동시에 열쇠가 떨어진다.

팀원들의 시선이 향하지만 아무도 그에게 차키가 떨어졌다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

서에서 문제아로 낙인찍힌 주인공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내 주인공이 허전한 주머니를 뒤적이고는 다시 돌아와 열쇠를 주워 간다.

무미건조한 반응.

감정이라는 게 존재는 하는 건가 싶은 덤덤한 표정이다.

그런 캐릭터를 보면서 머릿속으로 내가 만들어야 할 OST의 느낌을 더 구체화해갔다.

고개를 끄덕이는 내 모습에 중현이가 물었다.

“왜 그래요. 형? 예감이 좋아요?”

“아. 깜짝아.”

내가 다시 물었다.

“중현아. 방금 의문문이었어, 평서문이었어?”

“의문문이요.”

“다행이다. 큰일날 뻔했네.”

“…….”

흥 하는 녀석에게 웃으며 말해주었다.

“맞아. 예감이 좋아.”

*   *   *

다음 날부터 난 곧바로 OST 작업에 들어갔다.

드라마 중반부는 지나야 나올 노래니 급하게 작업할 필요 없다고 했지만 촬영장에 다녀오고 나서 감을 잡은 터였다.

빠르게 노래의 뼈대를 쌓아올렸다.

음악감독님도 중간중간 전화해서 의견을 교환하는 것을 빼면 내 작업에 대해 특별한 코멘트를 하지 않았다. 네가 뭘 만들든 좋은 성과를 낼 거라고 믿어주시는 눈치였다.

그리고.

“우와아아-!”

마우스를 딸깍거리는 내게 다가와 자꾸 ‘우와아!’ 외치는 빨간 털의 생명체가 하나 있었다.

“지호야. 형, 일하잖아.”

“기쁘니까 그러져. 우와아아-!”

“그건 알겠는데. 하루 종일 기쁘니…? 이제 슬슬 안 기쁠 때도 됐잖아.”

“와아! 카메오!”

막내가 아침부터 계속 이러는 이유는 바로 카메오 출연이 성사됐기 때문이었다.

이강진 씨가 올린 SNS 글 때문에 기자들이 프로덕션과 우리 회사에 ‘뉴블랙이 카메오로 출연하는 거냐?’ 하는 질문을 계속 했다나.

마침 레몬 엔터의 배우도 드라마에 출연하기도 하고. 드라마 홍보에 있어서 좋겠다고 양측에서 판단했다고 한다.

문제는 석환 형으로부터 카메오 소식을 들은 막내의 반응이었다.

물론 우리도 처음에는 신이 나서 ‘우리 막내가 연기다! 연기!’ 하면서 강강수월래를 같이 췄지만 설마 여섯 시간 넘게 얘가 하이텐션일 줄 누가 알았겠어.

“우와아아.”

“…….”

“바탕화면은 왜 갑자기 바꿔여?”

바탕화면으로 막내의 뮤직카페 움짤을 지정했다.

하얀 찹쌀떡이 눈콧물을 쏟아내는 모습이 재생되자 내 곁에 맴돌던 막내가 ‘우와아아’ 소리를 내며 도망갔다.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후우…….”

심호흡을 하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모든 일이 순풍을 타고 흘러간다.

명곡단의 성공으로 3집 투자 규모도 커져서 뮤직비디오와 컨셉샷에도 돈을 퍼부을 예정이고.

기대를 모으는 케이블 신규 드라마의 OST도 메인 급으로 들어가고.

쏙쏙 역사탐험대의 조회수 추이도 좋고.

그런 기쁜 소식 중에는 우리와 방송에 나왔던 노재현 선생님도 화제를 모았다는 거였다.

PBS에서도 이 틈을 타서 노재현 선생님을 주제로 휴먼 다큐를 특집으로 기획한다고 하던데.

우리한테도 인터뷰 요청이 들어왔다고 들었다.

비주가 말했다.

“형, 이번에는 우리 진지한 컨셉으로 가요.”

“그래. 그러자.”

굳은 결심을 했다.

요즘 들어서 사람들이 우리를 자꾸 웃기거나 특이한 애들로 인식을 하고 있었다.

노재현 선생님이 출연하는 다큐에는 조금 진지한 모습으로 나가자고 다 같이 결의를 했다.

*   *   *

제주도.

원로가수 노재현의 자택.

“그러니까 통화를 하면 된다. 이건가?”

“네, 뉴블랙 멤버들과 자연스럽게 우애를 다지는 모습을 보여 주시면 될 거 같습니다. 손자와 할아버지처럼요.”

“그런 거라면 적임자가 하나 있지.”

그가 흔쾌히 스마트폰을 들었다. 곧이어 영상통화 속에 새하얀 얼굴이 나타났다.

‘방송인 건 모르게 해주세요. 자연스럽게.’

PD의 요구에 맞춰 원로가수가 능청스럽게 통화를 하는 동안 카메라가 멀리서 그 모습을 담았다.

-잘 지내셨어요? 건강은 어떠세요?

“잘 지냈네. 리혁 군. 이메일로 보낸 편지도 잘 받았지.”

-어, 음……. 저도 답장 잘 받았어요. 리혁군에게로 시작하는.

“헛, 흠흠.”

서로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보며 제작진이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원하던 훈훈한 장면이었다.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이어질 이야기를 기다릴 때였다. 갑자기 두 남자가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니, 글쎄. 이 사람아. 그건 잘못된 해석이야.”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건 수정주의적 시각이에요. 이 부분은 기존 정설을 따라야죠.”

“나는 자네 의견에 동의할 수 없네. 새로운 시대가 됐으면 새로운 해석이 필요한 거야.”

백분 토론처럼 날선 어조로 역사를 논하는, 그러면서 얼굴이 벌겋게 물드는 노인과 청년이었다.

“난 인정할 수 없네.”

-저도요. 동의할 수 없어요.

목에 핏대를 세우며 한참 동안 쉭쉭하던 이들이 통화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방긋 미소를 지었다.

“오늘도 유익하고 좋은 토론이었네.”

-저도요. 쌤. 저희 내일 또 해요.

“기대하겠네. 핫핫.”

‘무알콜 군과 졸개들에게 안부 전해주게, 리혁군’ 하는 안부인사를 마지막으로 노인이 통화를 끝냈다.

그러곤 말없이 서 있는 제작진에게 물었다.

“어떤가?”

“…….”

“이 정도면 따뜻하고 일상적인 대화로 나가기에 충분한가?”

기획안을 들고 있던 PD의 손이 달달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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