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232)화 (232/1,031)

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232화

“팝콘.”

“준비 완료.”

“콜라.”

“준비 완료.”

“제로?”

“예스.”

내가 박수를 쳤다.

“훌륭하다. 졸개들. 드디어 준비가 끝났어.”

“TV 틀게요. 형.”

비주가 진지한 얼굴로 GTV 채널을 틀었다.

나와 중현이가 태블릿 PC에 실시간 라이브톡과 각 커뮤니티를 띄우는 동안 리혁이는 테이블에 핸디캠을 세팅했다.

막내의 반응을 찍기 위함이었다.

“으아…….”

지호가 양손을 뺨에 올리고 괴로워했다.

“형들, 그냥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해주면 안 돼여? 저 진짜 부담 돼여.”

“에이, 그럴 수가 있나.”

우리가 화사하게 웃었다.

“우리 막둥이가 드디어 드라마에 나온다는데 그걸 놓칠 수는 없지.”

“맞아요. 꼭 본방 사수해야 돼요.”

“으아아, 혼자 있고 싶어.”

지호가 소파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모습에 우리가 키득거렸다.

놀려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늘 놀림당하다가 반대 입장이 되니 신이 난다고 할까.

비주가 사과를 깎으며 물었다.

“그렇게 부끄러워?”

“넹…….”

지호가 데굴데굴 구르다 멈추고 딱 천장을 바라보았다.

“약간 유체이탈하고 싶은 느낌이에여. 저 천장에 붙어있는 한 마리의 전구가 되고 싶은? 다들 날 안 봤으면 좋겠구. 으이, 몰라여. 암튼 아… 으이! 아!”

‘으아악!’ 하며 티라노처럼 손을 오므렸다가 피기도 하고.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난리가 났다.

소음 만들기 예술이 있다면 우리 막내는 무형문화재쯤 될 거다.

분명 1시간 전만 해도 덤덤해 보였는데 막상 방송 시작을 앞두고 불안증이 폭발한 모양이었다.

“저 엄청 못하고 왔거든여. 막 촬영장에서는 어리다고 어화둥둥 해 주고 잘한다고 해 줬지만…….”

“네가 봤을 때는 별로였고?”

“네…….”

시무룩한 표정을 보며 조용히 웃을 뿐이었다.

얘가 뭐를 모르네.

우리가 대중적으로 이름을 알리는 중이라 해도 피곤에 찌든 드라마 스탭들까지 환호하게 할 인기는 아니었다.

비위를 맞춰 줘야 할 톱스타도 아닌 우리 막내한테 티가 날 정도로 칭찬을 했다는 건 정말 잘하고 왔다는 뜻이다.

못했으면 싸늘한 눈초리가 날아들었을걸.

카메오 때문에 간단한 장면을 몇 차례나 다시 찍어야 하냐는 뒷담과 함께.

그렇게 말해 줘서 안심시켜 줄까 생각도 했는데.

“흐어엉, 누나……. 나 어떡해, 이러다가 학교 가서 망신당하는 거 아냐?”

첫째 누나한테 전화를 걸어서 대성통곡하기도 하고.

“누나, 누나! 나 드라마 나오는데 너무 떨려! 말동무 좀 해줘.”

“누나, 남자친구한테도 보라고 했어? 대체 왜 그런 거야? 됐어. 누나랑 통화 안 할래. 아니, 진짜 안 한다는 건 아니구. 내 기분을 표현한 거야.”

둘째 누나와 셋째 누나한테 전화도 걸어서 조잘조잘 떠들고.

“아빠 전화네. 안 받아.”

부담 팍팍 줄 게 분명하다면서 흥 하다가 이내 ‘으아아!’ 하면서 자기가 걸어 ‘아빠아아!’ 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내비뒀다.

솔직히 너무 재미있었다.

한자 1급 책을 공부하던 리혁이가 노트에 ‘희로애락’을 쓰더니 지호를 보면서 암기했다.

“…….”

이윽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혹세무민’을 연습장에 적었다. 세상 사람을 미혹하여 속인다는 뜻의 성어였다.

“야, 혹세무민이 뭐냐. 군계일학이라고 써야지.”

코웃음을 치던 리혁이가 ‘과대망상’이라고 적었다.

저것이 정말…….

스트레스 방지를 위해 종이컵에 계량한 팝콘 하나를 조심스럽게 녹여 먹었다.

그러곤 핸드폰을 들었다.

오늘 첫 방송을 하는 GTV 금요 드라마 ‘슬립’에 대한 기사가 주르륵 올라와 있었다.

방영 전부터 관심을 끌어모은 장르 드라마답게 댓글도 만선이었다.

-이게 얼마만의 장르물이냐 진짜ㅠㅠㅠ

-덕후는 운다 울어ㅠㅠ

-배우 라인업 좋네. 여주 역에 개인적으로 타배우 소취하긴 했는데 서노을도 마스크가 잘 어울리는 듯요.

-예고편 보자마자 1화 대기타는중

-현대 배경에 타임슬립한 원시인이 저지른 살인이라니 이건 어그로가 안 끌릴 수가 없잖어

-작가 신인이라고 걱정되는거 나만 그런가?? 드라마로는 첨 입봉이라 들었는데..

-여우구슬 작가 있잖슴. 그 사람도 신인임. 편견 ㄴㄴ해

작가가 극을 이끌어 갈 역량이 되냐는 드라마 팬들의 걱정이 있긴 했지만, 그리 많지는 않았다.

먼저 방영한 PBS 드라마 ‘여우구슬’이 성공적인 반응을 얻고 있기 때문이었다.

신인작가의 입봉작인 여우구슬은 초반부터 호평을 받았다.

20대 주연들의 연기력 문제가 입방아에 오르긴 했지만 좋은 CG와 연출에 힘입어 여우구슬은 기존 수목 드라마 1위를 밀어내고 왕좌를 차지하는 저력을 보였다.

이미 해외에서도 판권 관련한 논의가 오가고 있다나.

거기다 번화가에서 여우구슬을 주운 남주와 여주의 눈이 마주치며 끝났던 2회의 메인 OST는 벌써 차트에 진입한 상태였다.

바로 차우현 선배의 노래였다.

선택지 중 하나였던 여우구슬이 잘 돼서 ‘잘못 골랐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차피 우리가 부를 OST는 최소 10회가 넘어서 나올 정도로 뒷 순서였다.

일단은 바람개비 OST를 안 해서 다행이지.

-HBS ‘바람개비’, 바람처럼 날아간 시청률 … 뭐가 문제였나?

검사들의 일과 사랑을 다룬 ‘바람개비’는 바람처럼 시청률이 증발했다.

인기 있는 배우들과 유명한 감독을 기용했지만 대본이 문제라는 게 주된 평이었다.

구시대적인 서사와 대사, 1화부터 과한 PPL.

부장검사가 검사실에 놓인 안마의자에 앉아 ‘후우…’ 하며 안마 받는 장면과 검사들이 작전 회의할 때마다 샌드위치 집 가게에서 만나 식사하는 장면은 벌써부터 개그짤로 돌아다녔다.

덕분에 시청률은 바닥을 뚫고 역대 최저를 찍는 중.

저거 했으면 진짜 큰일이었을 텐데.

다행히 우리가 처음부터 우선순위에서 뺐던 거였다.

‘이 드라마 OST 뭔가 쎄해요.’

리혁이가 그런 말을 했다.

‘드라마 방영이 얼마 안 남았는데. 가이드 녹음까지 된 곡이 나한테 올 때까지 계속 표류했다는 거잖아요.’

나 역시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노래 자체는 나쁘지 않고 드라마도 겉보기에는 모든 조건이 좋았다.

다만 그런 드라마의 OST가 긴 시간 끝에 우리한테까지 왔다는 건, 뭔가 우리가 모르는 문제가 있다는 추측이었다.

매니저도 같은 생각이었다.

석환 형이 배우 팀에게 수소문하더니 아니나 다를까, 향후 전개를 두고 간판 배우와 작가가 계속 기싸움을 하는 중이라나. 괜히 가요계 선배들이 피한 게 아니구나 싶었다.

결국 우리 대신 조유리 밴드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쯤 무슨 표정일지 궁금하다.

어쨌거나.

현장 분위기 악화와 더불어 시청률 내리막의 새로운 신화를 쓰고 있는 HBS 바람개비.

해외 판권 이야기가 나올 만큼 화제성을 보여주고 있는 PBS 여우구슬.

그리고 명품 드라마로 유명한 GTV 채널에서 새롭게 런칭하는 장르물 ‘슬립’이 있었다.

과연 슬립은 어떤 반응을 얻을까.

기왕이면 우리 OST가 더 주목을 받을 수 있게 드라마 퀄리티가 잘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우리 애가 며칠 밤을 새워 가며 카메오 연습까지 했으니까.

학예회를 기다리는 할머니의 심정으로 두 손을 모았다.

오늘도 우리 막내 예쁘게 나오게 해주세요, 덕순.

“저게 마지막 광고인 거 같아요.”

비주의 말에 TV를 바라보니 스냅백을 쓴 한태현이 춤을 추며 ‘This is it’ 하며 의류 브랜드 광고 대사를 외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풉 웃음이 나왔다.

미튜브 영상 링크를 당사자에게 보내니 오늘부터 차단하겠다는 답장이 돌아왔다. 밥 사 주냐고 물었더니 바로 답하는 걸 보면 정말 차단은 안 한 모양이다.

그 동안 막내가 팝콘을 입에 녹이면서 물었다.

“근데, 제가 아까부터 궁금한 게 있는데. 형들은 왜 이렇게 느긋해여?”

“뭐가?”

“아니. 거기서 비주 형도 막 쩨임스! 이러고, 중현이 형도 출석일수 드립치고 그랬잖아여.”

우리가 피식했다.

“대본만 봐도 진지한 분위기가 느껴지는데 설마 그 대사가 그대로 나가겠냐.”

“맞아요. 형. 감독님이 어차피 웅성웅성으로 나갈 거니까 아무 말이나 하라고 하셨잖아요.”

“기억력 좋네. 우리 제임…….”

“사과 먹어요. 형.”

막내가 ‘흥, 자기들은 잘 안 나온다고’ 하면서 입술을 비죽거리며 베개에 턱을 괴었다.

“어어, 시작한다!”

암전된 화면 위로 ‘본 드라마는 실제 인물…’ 하는 자막이 흘러나왔다.

검은 화면 위로 천천히 하얀 글씨가 왼쪽에서부터 ‘S L I P’ 하며 한 글자씩 떠올랐는데, 지호가 어느 외계인 영화에서 오마주한 거라고 설명해 주었다.

이윽고 밀림에 나올 법한 음산한 피리 소리와 함께 카메라가 어두운 갈대밭을 담았다.

초저녁.

검푸른 하늘 아래 흔들리는 갈대밭. 전신주가 묘비처럼 서 있고, 가로등이 주홍빛을 뿌리고 있는 도로.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영상미였다.

도망자의 거친 숨소리와 함께 마침내 ‘슬립’이 시작됐다.

*   *   *

슬립은 대본과 똑같이 진행됐다.

대본을 읽을 때도 머릿속에 영화 한 편이 그려진다고 생각했는데, 화면으로 보는 슬립은 그보다 더했다.

영화처럼 고운 영상미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지금 슬립 보는 분 계시나요?? 영상미 대박입니다 ㄷㄷㄷ

-슬립 1화 지금 보는데 몰입감 쩌네요

-때깔 대박

-일단 오프닝은 역대급인데 지켜봐야겠습니다

-이거 원탑물인가요? 아님 투탑인가요? 드라마 소개 보는데 비중이 모호하네요

-뭔탑인진 모르겠고 재미있네요; 간만에 수작 발견한 느낌

할머니랑 주말 드라마 보면서 ‘저기서 누구 욕하면 돼?’, ‘뭐? 시아버지가 할아버지야?’ 했던 게 고작인 나로서는 평하기 어려웠지만, 내가 보는 모든 사이트에서 호평을 하고 있었다.

장면 중에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우와…….”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모니터링도 까먹고 5분에 한 번 꼴로 팝콘을 녹이며 보는 중이었다.

탄산 기포가 다 빠질 때까지 그러고 있기를 한참.

구석기 시대의 뗀석기와 닮은 살인 흉기에 주인공 박철진이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까슬까슬한 수염을 긁적이던 그에게 마침내 실마리가 주어지는 장면이었다.

“나온다. 나온다.”

“으아아…….”

막내가 리혁이가 먹던 고구마 말랭이를 뺏어들어 두 눈을 가리는 동안, 드디어 기다리던 귀한 분의 뒷모습이 나왔다.

“우와아아!”

축구팀이 골을 넣었을 때처럼 우리가 환호하자, 지호는 한국 서포터 사이에 낀 외국팬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이야, 우리 막내 뒷모습부터 존잘이 뿜뿜이시다.”

“저거 캡처해야지.”

“오. 지호. 저 제복 핏 잘 받는데?”

옆구리에 서류를 낀 의경대원이 등장했다.

키가 엄청 큰 편은 아니지만 다리가 진짜 길어서 그런지 비율이 좋다. 경찰 제복을 무대의상처럼 소화한 우리 막내가 밝게 웃으며 인사를 한다.

“생각보다 분량이 있네?”

스쳐 지나가는 수준으로 나올 줄 알았는데 경찰서 내부에 ‘안녕하십니까’ 하고 들어오는 우리 막내의 상반신이 정면으로 나왔다.

대놓고 얼굴을 보여 준다는 건 비중이 있다는 얘기였다.

미남 의경의 등장에 벌써부터 여러 게시판에서 ‘쟤 누구냐’며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한편 의경의 시선이 하찮은 고등학생 무리에게 향한다.

그리고 이내 우리가 얼어붙었다.

-넌 액면가가… 왜 얘네랑 같이 끼어 있어?

-1년 꿇었습니다.

초반 떡볶이 대사까지는 그러려니 했는데, 우리가 애드립으로 친 대사들도 흘러나오고 있었다.

“뭐야.”

내가 벌떡 일어났다.

동생들도 웅성거리며 일어났고 막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야, 저게 왜… 왜 나오는 거야?”

“감독님이 소리는 안 나올 거라고 하지 않았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특히 제임스가 된 비주는 사색이 돼서 ‘민준아, 얼른 TV 멀티탭 전원 눌러!’ 하는 톡을 보내고 있었다.

‘키라는 거야 끄라는 거야?’ 하는 답장이 오는 동안 제임스는 화면에 등장했다.

-진정해, 제임스.

비주가 ‘아으이아으……’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얼굴을 부여잡는 동안 나와 리혁이가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평온한 것은 ‘역시 왼쪽 얼굴이 더 잘생겨 보이나’ 중얼거리는 풍뎅이뿐.

“푸하하하! 하하하하!”

여태까지 기가 죽어 있던 막내는 방방 뛰면서 ‘에헤헤헤, 저거 보래요~’ 하고 있었다.

딱밤 한 대만 때리고 싶다. 진짜.

댓글에서는 ‘ㅋㅋㅋ’의 물결이 지나가고 있었다.

자칫하면 쭉 우중충하게만 보일 드라마에 잠깐 분위기를 느슨하게 풀어주는 역할을 했다며 호평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냥 ‘ㅋㅋㅋㅋㅋ’였다.

-얘네 뉴블랙 맞죠? ㅋㅋㅋㅋㅋㅋㅋ

-방심하다 개터ㅕㅆ네 제임슼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연말이면 시상식 씬스틸러상각이다

-진정해제임스ㅋㅋㅋㅋ오늘부터 내 웃음벨

-진지 먹자면 미국 애가 한국경찰에 겁먹는 건 설정오류긴 하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양아치 연기 이렇게 못하는애들 처음봄. 그래서호감이긴 한데..

-다른 건 몰라도 쟤네한텐 돈 안뺏길 것같아요

-빌려가도 일주일 내로 갚을 거 같아요

-저 드라마에서 일진연기 보면 속으로 좀 겁먹는 타입인데 애네 보면서 그냥 웃음

-ㅋㅋㅋㅋㅋㅋ친구가 외고 나옸는데 걔가 자기 고딩때 야자 쨌다고 양아치라고 하는 느낌이네요

다들 우리의 하찮음을 비웃고 있었다.

“아니, 우리가 얼마나 위협적으로 연기를 했는데.”

“정석 매매 때 못 느꼈어요? 우린 저쪽이랑은 애초에 궁합이 안 맞는 거예요.”

“괜히 초등학생들한테 지는 게 아니었구나. 우리.”

축 늘어진 우리의 시선이 잠시 수플레들이 모인 커뮤니티로 향했지만 거기는 넣어두기로 했다.

우리는 마음의 휴식이 필요했다.

게다가 일단 막내의 연기를 놓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으으.”

우릴 놀리던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중현이 등짝에 숨어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가 자기 얼굴이 나오면 ‘으아’ 하고 숨는다.

“저기서 표정 실수했는데, 대사랑 약간 안 어울리구.”

소심하게 꿍얼거리는 목소리에 우리가 반응했다.

“무슨 소리야. 잘하기만 했는데.”

“…그래여?”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배우 이름 누구냐고 묻더라. 모르는 사람들은 가수라고 생각 안 하나 봐.”

“오. 진짜여?”

“직접 봐.”

이윽고 화면 가득한 호평을 보던 막내의 눈망울이 반짝거렸다.

뽀얀 얼굴 위로 그려지는 미소에 우리가 웃었다. 일부러 기운을 복 돋으라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정말로 잘했기 때문이었다.

본인의 기준치가 높아서 만족을 못한 것 같긴 했지만, 우리가 보기엔 대단하기만 했다.

아침에 소시지를 많이 먹인 보람이 있다며 비주가 소곤거렸다.

“진짜 잘하네요. 지호.”

“그러니까. 왜 연기 얘기만 나오면 못한다고 하는지를 모르겠다니까.”

화면 속에 나오는 지호는 대사 치는 것부터 배우 같았다.

연기력이 뛰어나구나 하는 느낌보다는 실제 경찰서에 있는 의경을 데려다 놓은 느낌.

카메오 장면이 끝나자 절로 박수가 나왔다.

‘저 나쁘지 않았어여? 진짜져?’ 하면서 몇 번이고 확인을 하던 막내는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이 다음에 네가 나오는 장면은 뭐야? 대본에 추가됐다며.”

“아. 그거여?”

우리의 물음에 지호가 해맑게 웃었다.

“보면 알아여. 되게 재미있는 장면.”

*   *   *

허 의경은 전봇대 아래를 터덜터덜 걸었다.

이곳은 오성구.

그가 걸을 때마다 무전기가 치익, 하며 시끄러운 무전을 토해 냈다.

-여기 상황실.

-지금 내성동 일대 순찰중인데 특이사항 없는…

-지금 보호자도 같이……

-상황실에서 다시 한 번 미 귀가자 인상착의 알림. 10살 무렵에 검은 머리, 파란 옷을 입고……

쉴 새 없이 어깨에서 진동하는 무전기 소리에 허 의경은 손으로 볼륨을 띡띡 줄였다.

옆에서 그와 함께 걷고 있던 후임이 말했다.

“오늘 밤새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러다 놀이터에서 발견되고 그러면 낭비 아닙니까?”

“낭비가 아니라 다행이지.”

부드럽게 웃으며 지적한 허 의경은 긴 숨을 내뱉었다. 추운 날씨에 허연 입김이 흘러나온다.

‘춥다.’

내가 추우면 그 어린 아이는 얼마나 더 추울까.

지금 그들이 순찰을 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사라진 9살짜리 여자아이를 찾기 위함이었다. 평소였다면 순찰차 한두 대가 돌아다니고 말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경우가 달랐다.

지역에서 강력 살인사건이 발생한 상태.

하필이면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성이 울렸던 그 동네에서 사라진 아이였다.

벌써부터 먹잇감을 문 언론에 윗선에선 비상이 걸렸고, 그 결과는 오성구 전 경찰력과 의경을 동원한 순찰로 이어졌다.

해가 지고 벌써 세 시간째.

허나 정말 찾을 수 있을지는 모두가 회의적이었다.

‘그래도 찾아 봐야지.’

그의 후임이 물었다.

“그런데 얘 찾으면 표창이나 외박 받을 거 같습니까?”

“글쎄. 받기는 하겠지.”

대답을 흐리며 허 의경은 볼륨을 높였다.

근처에 지나가던 순찰차가 특이사항 없냐는 물음에 없다고 보고한다.

그 동안 허 의경의 시선이 차량 안에 있는 포장음식으로 향한다. 떠나는 차량을 바라보던 후임이 혀를 끌끌 찬다.

“저 속도로 달리면서 순찰하는 건 아예 어린애를 발견할 생각이 없는 거 아닙니까?”

그도 말없이 공감을 표했다.

‘힘들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자.’

왠지 발걸음이 축 처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어둠 속에서 벌벌 떨고 있을 아이를 생각했다.

“…….”

따뜻한 떡볶이와 어묵 국물이 있는 가게를 지나가면서 후임이 멈칫한다.

허 의경은 그 모습에 이따가 마지막에 돌아갈 때 시간이 된다면 몰래 사 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마침 근처에서 홀로 수색을 하고 있는 강력계의 박철진 팀장이 보였다.

허 의경이 반갑게 경례를 하며 인사한다.

“고생하십니다. 팀장님.”

“……어, 너. 그래. 세준이. 수고해라.”

하지만 상대는 그의 이름을 몰랐다.

대충 잠바에 붙은 이름을 보고 읽었지만, 그건 그가 다른 동기한테 빌린 잠바일 뿐.

허 의경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래도 이름 정도는 아실 줄 알았는데.’

뭐. 바쁘셔서 그런 거겠지.

살짝 처졌던 얼굴에 밝은 웃음을 흘리며, 그는 ‘힘내자, 힘’ 하면서 순찰을 이어갔다.

그리고 실마리가 등장했다.

“어린 여자애? 저쪽으로 가는 거 봤는데?”

“그래요?”

그들이 들뜬 얼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경기도와 서울을 가르는 외곽 지대.

순찰 지역의 경계선을 벗어난 거긴 했지만 일단은 가 보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윗선에다 보고할까 고민했지만 혹시나 잘못된 정보라면 너 때문에 시간 낭비를 얼마나 한 거냐고 욕을 바가지로 먹을 게 분명했다. 일단 좀 더 확인하고 보고하자고 생각했다.

후임이 경찰 잠바를 여미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데 여기 살인 난 지역이랑 가깝지 않습니까? 근처 야산이 현장이라고 들었는데.”

“아마도 맞을 거야. 왜, 무서워?”

“안 무섭습니까?”

“무섭지. 엄청. 나 뭐 나오면 뒤도 안 돌아보고 튈 거니까 알아둬라.”

농담을 던지며 그들이 걸음을 옮겼다.

어두운 밤.

갈대밭이 으스스하게 흔들리고, 마치 누군가 그들을 지켜보는 것 같은 느낌이 서서히 들기 시작했다.

“……돌아갈까?”

그런 말을 할 때.

“흑… 흐윽…….”

갈대밭을 가로지르는 도로 아래, 하수구에서 소녀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   *   *

“안 돼!”

“야야야! 멍청아! 가까이 가지 마라고. 왜 가냐고 대체. 위험한데!”

“형, 어떡해요. 우리 막내.”

“지호야. 왜 위험한 데를 가려는 거야?”

여기저기서 그를 갈대처럼 흔들어 대는 멤버들의 모습에 왕지호는 하하 웃을 뿐이었다.

‘형들.’

왜 이렇게 과몰입한 거예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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