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234화
“지호가 안에서 말하고 있다고?”
“네.”
열심히 귀를 기울여 보았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닫힌 철문이 도리어 우리에게 ‘뭔 소리야, 나한테서 소리가 난다고?’ 하며 묻는 거 같다.
중현이가 비상구를 가리켰다.
“안에서 조 실장님이랑 지호 목소리가 들려요.”
“그래?”
문에 귀를 가져다댔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과 함께 희미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을…….
배우팀 조 실장의 목소리였다.
“진짜네?”
“…진짜 안에 있어요?”
“너희도 와서 들어 봐.”
내 말에 두 동생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개인적인 대화니까 프라이버시를 지켜줘야 할 것 같아요. 엿듣기에는 좀…….”
“뭐 하러 그런 걸 들어요. 조금 이따 다시 와요.”
난 신경 쓰이는데…….
머릿속으로 여러 사실이 조합된다.
어제 슬립 1화에서 주목할 만한 연기를 보여준 지호. 토요일 아침부터 타 드라마 프로덕션 측에서 배역 섭외를 물어볼 만큼 좋은 관계자 반응. 시간여행이라도 해서 허 의경 좀 살려내라는 시청자들.
그런 상황에서 배우팀 매니저가 다른 날도 아니고 1회 방영이 끝난 다음 날 우리 막내를 찾아왔다?
하필이면 장소도 비상구.
빈 사무실도 많은데 굳이 여기라는 게 찝찝하다.
아무도 듣지 못하는 곳에서 몰래 할 이야기라면 내용이 뻔하지 않은가.
신경 쓰인다.
들어가서 ‘난 이 대화 반댈세’ 이렇게 외쳐 버릴까.
그러다 이내 생각을 접었다.
지호도 지호 나름의 생각이라는 게 있을 거고, 무슨 일마다 내가 대신 나서줘야 할 어린아이도 아니다. 비주 말마따나 프라이버시도 지켜 줘야지.
그래. 나중에 어찌 된 일인지 물어보기나 하자고.
“일단은 가고.”
다른 멤버들에게 말했다.
“이따 물어보기로 하자. 지금 안에서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건지.”
* * *
“그게 무슨 말씀이세여?”
“지금이 놓치면 안 되는 기회, 라는 거지.”
배우팀 조 실장이 말했다.
“어제 방송 끝나고 인터넷 반응 봤니?”
“넹.”
“노을이 연기 모니터링하려고 인터넷 검색했는데, 어떤 게시판 한 페이지가 허 의경으로 도배됐더라.”
상대가 태블릿 PC를 건네주며 말했다.
“한 번 봐봐.”
“우와…….”
여긴 또 처음 보는 사이트인데.
거기에 허 의경에 대한 이야기가 굉장히 많았다. 어제 너무 짠내 났다며 보정된 움짤까지 올려 준 사람까지.
눈을 휘둥그레 뜨는 동안 조 실장이 웃었다.
“어제 네가 나온 분량은 8분. 전체 분량에서 10퍼센트 남짓한 시간 동안 네가 이 많은 사람들을 연기로 사로잡은 거야. 물론, 연기력 좋은 톱스타들이 카메오로 나올 때도 이런 반응이 나오지만, 넌 너를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서 첫 연기로 이런 반응을 이끌어낸 거지.”
멍하니 고개를 들자 상대가 진지하게 말했다.
“너한테는 재능이 있어. 지호야.”
“알아여.”
“…어, 아는구나.”
잠깐 당황한 상대에게 그가 말했다.
“저도 제가 연기 잘하는 건 알아여.”
“그래? 현장에서는 자꾸 못한다고 울상이길래 모르는 줄 알았지.”
“아. 그건 좀 달라여. 제가 잘하는 건 아는데, 제 마음에 드는 거랑은 별개잖아여.”
잘한다는 건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유치원 학예회에서 했던 햇님반 연극이었나.
성냥팔이 소녀 역으로 부모님들의 눈물을 쏙 빼놓은 날, 왕지호는 자신에게 재능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연기가 너무 재미있다는 말에 아빠가 학원까지 끊어 주었다.
그가 연기를 할 때마다 쌤들의 칭찬과 주변의 시기 어린 시선이 날아들었기에 스스로도 재능을 알고 있었다.
다만 만족도는 다른 얘기였다.
완벽한 노래를 만들었는데 ‘이런 쓰레기를 수플레들한테 보여줄 수 없다구!’ 하면서 울적한 하모니카 연주를 하는 우주 형과 마찬가지였다.
아니면 ‘춤이 왜 더 안 늘지’ 하며 시무룩해 하는 비주 형이나, ‘하 씨, 뭐야 이게…’ 하면서 자기 목소리를 들으며 머리를 쥐어뜯는 리혁이 형이라든가. 중현이 형은 언제나 ‘마이 랩, 나이스 랩’ 하면서 만족하기에 해당이 없긴 했지만.
“제 마음에 든 적이 별로 없는 거 같아여. 사실 어제도 잘한다는 얘기 들어서 제 콧대가 5센치 정도 높아지긴 했는데. 기분이 좋은 거랑은 다르게, 복습하려고 다시 보니까 너무 괴로운 거예여.”
저기서 조금 더 자연스럽게 표정을 지을 수 있었는데.
저건 허 의경보다 우주 형 느낌이 나는데, 조금 다르게 할 걸.
미묘한 것들이 거슬렸다.
남들은 보석이라고 해 주지만 당사자가 보았을 때는 여기저기 스크래치가 가득한… 다이아. 아냐. 난 다이아는 별루야.
루비 정도로 해야지.
금세 생각이 산만하게 흐르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저었다.
“그런 불만족은 좋은 거야.”
조 실장이 미소를 지었다.
“그만큼 더 나아지고 싶다는 욕심이 네 안에 있는 거니까. 네가 좋은 배우가 될 수 있다는 증거기도 하고.”
조 실장이 계속해서 그의 연기에 대한 코멘트를 하고 있었다. 그 동안 왕지호가 고개를 갸웃했다.
‘내 연기가 그렇게 좋으셨나?’
상대가 찾아온 건 점심을 먹고 난 후였다. 진지한 얼굴로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중요하고 또 남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면 하는 용건이라기에 조용한 비상구로 자리를 옮겼다.
슬립 1회가 끝나고 따로 부를 때부터 뭔가 짐작이 가긴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비상구에 도착하자마자 상대는 제안을 꺼냈다.
‘연기 활동 따로 해 보지 않을래?’
레몬 엔터에서는 분야에 따라서 매니저가 달라진다.
예컨대 배우가 노래를 부른다면 가수팀 실무자가 현장 전반을 총괄하고, 가수가 드라마 현장에 가면 배우팀 직원이 관리하는 식이다. 그만큼 각자 환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조 실장이 제안한 건 그를 배우로 키워보고 싶다는 얘기였다.
그러면서 어제 연기를 얼마나 감명 깊게 봤는지, 앞으로 어떤 가능성이 보이는지 한참 이야기했다.
“이게 내가 아는 감독님들 연락처거든? 슬쩍 여쭤 보니까 어제 슬립에서 걔 누구냐, 정말 잘한다고 하신 분도 있고. 여기 송 감독님 문자 보이니? 영화 검은 꽃 알아?”
“오, 네. 알아여.”
검은 꽃이라면 조규환 이사가 회사 배우를 출연시키자고 했던 천만 영화였다.
“송 감독님이 요새 신인 배우들 기근이라고, 좋은 새싹 없나 하고 찾으시거든. 쓸 만한 배우 있으면 단역 오디션에 데려오라고 하셨어.”
“오오.”
“네가 원한다면 내가 말씀드려 볼 수 있어.”
“헛, 감사합니다.”
감사인사에 상대가 씩 웃었다. 그러곤 태블릿 PC를 옆구리춤에 끼더니 그를 슥 내려다보았다.
“어때, 네 생각은?”
이쯤이면 됐겠거니 하고 바라보는 상대에게 왕지호가 생긋 웃었다.
“글쎄여.”
“글쎄라니.”
태연한 대답에 조 실장이 눈매를 좁혔다.
“방금 내가 말한 거 기억하니? 놓치면 안 되는 기회라니까. 연예계는 타이밍이야. 톱스타도 좋은 기회 한 번 놓치면 무너지는 게 이 바닥인데, 네가 다음에 또 연기를 한다고 해서 이런 기회가 올지는 아무도 몰라.”
그가 경험담을 말해 주었다.
“예전에 관리하던 배우 얘기 들려 줄게. 드라마 섭남으로 대박 친 다음에 대본이 와르르 들어왔거든? 그런데 연기력 쌓겠다고 들어오는 기회 마다하고, 회사에서 뜯어 말리는데도 독립영화에 들어갔어. 어떻게 됐는 줄 아니. 영화는 쪽박. 그거 찍고 난 다음에 돌아오니까 비는 자리가 없더라. 걔 지금 빙수집 해.”
한 번 홈런을 쳤으니 다음에도 또 칠 거라는 생각은 접으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너도 허 의경으로 조금 이목을 끌었을 때,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기회를 잡으라고.
왕지호는 가만히 듣다가 입술을 열었다.
“만약에 제가 한다고 치면여.”
“음. 그래.”
“앨범 활동은 어떻게 돼여?”
“얘도 참. 내가 설마 너 가수 관두고 연기만 하라는 줄 알았어? 당연히 그 부분은 배려해야지.”
호언장담에 왕지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웃었다.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안 하는 게 나을 거 같아여.”
“뭐?”
“방금 제안하신 연기 활동, 안 하고 싶어여.”
“……너 원래 배우 하겠다고 이 회사 들어왔다며. 윤 실장님한테 그렇게 들었는데.”
“배우 하겠다고 들어온 것도 맞구, 연기하고 싶은 것도 맞아여. 그리고 앞으로 연기를 안 하겠다고 하는 것도 아니구여. 그치만 지금은 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여.”
상대는 답답하다는 기색이었다. ‘얘 진짜 말귀를 못 알아 먹네’ 하는 표정이다.
“그룹 활동 때문에?”
“네.”
“지호야. 길게 봐. 뉴블랙 멤버들도 좋고, 지금 잘 되어가고 있지만 미래를 생각해야지. 다른 멤버들 다 자기 길을 마련해두고 있잖아. 우주는 프로듀서가 있고, 중현이는 랩, 비주는 솔로, 리혁이도 OST나 각종 노래, 다들 길을 마련해두고 있는데 너도 뭔가는 해 둬야지.”
“할 거예여.”
그가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여.”
“왜?”
“다 같이 뜨자고 으쌰으쌰 하고 있는데, 갑자기 저 혼자 연기한다고 하기 싫어여.”
“…그 친구들도 이해할 거야.”
“당연히 제가 하고 싶다고 하면 응원은 해 주겠져. 그 형들 성격을 아는데.”
워낙 그런 형들이다.
“그렇지만 아직은 제 길을 챙겨야 할 때가 아니에여. 저희가 완전히 자리를 잡은 것도 아니구.”
연기에 대한 욕심이 왜 없을까. 다만 이런 식으로 연기 활동을 시작하는 건 반대였다.
“제 길을 생각하라고 하셨는데, 저 그래서 연기 연습도 하고 있고. 실장님한테 웹 드라마 대본도 알아봐달라고 부탁도 드렸어여. 저도 미래에 대해서 생각은 하고 있어여.”
차분하게 말했다.
“그룹 먼저 자리 잡고, 그 다음에 연기 활동이예여.”
“지호야. 연기돌이라고 부르는 애들 보면 걔네가 드라마에 나가서 같이 그룹 인지도를…….”
“그래여?”
왕지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음방 출근길에서 연기돌 선배님들 보면, 플래카드에 그 분 이름만 있는 경우 봤는데. 팬들끼리도 막 나눠서 서 있구.”
“…….”
“심지어 선배님들끼리도 서로 눈도 안 마주치는 경우도 있었어여.”
연기돌로 떴다고 그룹까지 같이 뜨는 케이스는 아직 보지 못했다. 연기 멤버 혼자 잘 된다면 모를까.
“가수 활동에도 지장 안 준다고 하셨는데, 실장님도 아니라는 거 알구 계시잖아여. 지금처럼 카메오나 짧게 나가는 거는 괜찮겠지만 제가 만약에 정말 확 떠서 본격 배우가 되면여?”
지금도 단역 비중인데 드라마 찍는데 엄청 시간을 소모했다.
조연, 주연급으로 올라가면 앨범에 대해서 확실히 시간을 못 쓸 수밖에 없었다.
회사에서는 연기로 뜬 멤버의 일정을 배려해서 그룹 활동 일정도 조정할 거고. 멤버끼리는 괜찮을지 몰라도 팬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저 노래도 좋아해여. 형들처럼 엄청 잘하진 않지만, 아이돌 활동도 진심으로 하구 있어여.”
“…….”
“팬들도 엄청 좋구여. 근데 그분들이 저 혼자 잘 되라고 응원해주는 게 아니잖아여.”
무엇보다.
“다른 건 몰라도 우주 형 얼굴 봐서라도 지금은 못하겠어여. 저희 데뷔 완전 초반만 해도 거의 우주 형만 주목받은 거 아세여? 그 형한테 개인적으로 들어오는 기회도 많았는데.”
매니지먼트 팀 사무실에 들어갈 때마다 멤버 ‘우주’만 따로 섭외 부탁한다고 하는 메시지들을 많이 봤다.
몇 개는 적당히 홍보 차원에서 나갔지만.
“대부분 딱 잘라서 거절했어여. 자기 혼자 주목받으면 안 좋은 조짐이라고.”
거기다 지금은 중요한 시기였다.
매일 밤만 되면 다음 앨범이 어찌 될지 걱정돼서 잠이 안 왔다.
다 같이 ‘어떡하지…?’ 하고 있는 판에 배우 활동을 생각하는 건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았다.
만약 다음 앨범이 성공해서 그룹이 성공적으로 도약을 하고 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최대한.
올라갈 수 있는 데까지는 같이 올라가 보고 싶었다.
지금처럼 팬들이랑 우리랑 다 같이 으쌰으쌰하는 이 분위기를 깨고 싶지가 않다.
데뷔 초에 이런 제안을 받았다면 꽤 흔들렸겠지만 이제는 더 이상 아니었다.
“음… 조금 답답하네.”
상대가 애써 웃었다.
“뭐, 지금이야 다 같이 사이도 좋고 그러니까 그러려니 한다만…….”
나는 기회를 주는데 안 받는 네가 참 안타깝다는 식의 시선을 보낸다. 그가 주절주절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들었다.
이 사람의 제안을 승낙할 수 없는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왕지호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제가 궁금했던 건데여.”
“일단 네가 ……음?”
“이거 저희 실장님이랑 얘기가 된 거예여?”
멈칫.
아주 짧은 멈칫이었지만 왕지호는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상대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아직 얘기가 정확히 된 건 아니지만 너한테 먼저 의향을 물어봐야지. 네 의사도 모르는데 내가 추진할 수는 없잖아.”
흠 잡을 곳 없이 매끄럽게 빠져나간다.
누가 봐도 구슬려서 빼 오려고 한 게 뻔했지만, 왕지호는 굳이 그 부분을 언급하지 않았다.
“다음부턴 저희 실장님한테 먼저 말씀해 주세여. 연예계 일은 저보다 그분이 더 잘 아니까.”
“……뭐, 그럴게.”
“제 연기활동 관련해서도 윤 실장님 의견에 따라서 할 거예여. 문제없으시다면 지금 일도 바로 말씀드릴 거구여.”
상대의 얼굴에 난처함이 떠오른다.
어린 애라 적당히 꼬드기면 넘어올 거라고 생각했던지 머쓱하게 뒷목을 매만진다.
“그럼 내 입장이 난처해지는데. 꼭 회사 팀끼리 분란을 만들 필요는 없지 않니?”
“……음?”
상대가 이상한 말을 한다.
“누가 들으면 제가 문제를 만드는 것처럼 들리는데여. 저희는 원래부터 일 관련한 대화는 모두 실장님한테 전달 드리고 있어여.”
할 말이 궁색한지 잠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조 실장이 ‘쯧’ 소리를 냈다. 어린 게 요망하다는 듯한 시선이다.
“……너도 보통은 아니구나.”
어른들은 꼭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자기가 먼저 ‘어리네’ 하면서 가벼이 대하다가 자기 예상과 다르게 나오면 ‘애답지가 않다’면서 저러곤 한다.
“그럼 일단 거절하는 걸로 알고 있겠지만, 혼자 생각은 해 봐. 혹시라도 생각 바뀌면….”
“네, 저희 실장님 편으로 말씀 드릴게여.”
“……그래.”
조 실장은 이내 짜증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윤석환 실장이 찾아와서 추궁하면 뭐라고 할지 고심하는 듯한 얼굴로 비상구 계단을 내려간다.
“안녕히 가세여.”
이게 마지막 만남이었으면 좋겠다.
배우 활동을 해도 저 사람 담당은 안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였다.
주섬주섬.
왕지호는 바람막이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녹음이 완료되었습니다.]
우주 형이 말해 준 대로 했다.
‘누가 갑자기 불러내서 얘기 좀 하자고 하면 꼭 녹음해. 내가 TJ에 있을 때 사람들 말 바꾸는 것 때문에 학을 뗐어.’
오, 나도 녹음을 하다니. 이제 어른이다.
흐뭇하게 웃으면서 왕지호는 아랫쪽에서 비상구 문이 쾅!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밖으로 나간 모양이다.
“후아…….”
그제야 긴장을 풀고 계단에 털썩 앉았다. 그러곤 방금 기억을 떠올렸다.
‘나 방금 꽤 멋있었던 듯? 히힛.’
연기 톤처럼 조금 더 멋있게 해 볼 걸 그랬나.
회사 직원들한테 이렇게 거절해 보는 건 처음이라 가슴이 콩닥콩닥했다.
하지만 흐뭇했다.
그룹 활동을 위해 굴러들어온 호박도 단호하게 걷어차는 나.
형들을 생각하는 기특한 나.
그런 자신에 심취해서 후훗 웃었다. 형들이 이걸 본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지져스 덕순, 우리 막내 너무 멋져……
는 개뿔.
‘야. 쟤 멋있는 척하는 거 봐라. 푸하하.’
‘어어… 그런 일이 있었어? 우리 지호가 다 컸네. 형이 초코 셰이크 만들어줄까? 애기 아니라고? 그래그래. 바나나 셰이크 해줄게.’
‘오. 존멋. 사슴벌레인 줄.’
‘멋있는 척하니까 좋냐? 좋아? 푸흡.’
에잇. 내가 이 사람들 생각을 말아야지.
내가 분명 여기서 이랬는데 돌아가면 또 ‘우리 대배우님!’ 하면서 놀려 댈 게 뻔했다.
나쁜 형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불현듯 입을 멍하니 벌렸다.
“잠깐만. 나 거절한 게 잘한 건가…?”
혹시 이거 엄청난 기회인데 놓친 거 아냐?
엄마가 점집에서 울 아들 올해 좋은 기회 들어온다고 들었다는데. 혹시 이거인데 내가 운을 걷어찬 건가?
산만한 머릿속에 장면 하나가 그려졌다.
먼 미래.
어느 촬영장에서 지팡이를 짚고 있는 잘생긴 존멋 노인과 그걸 바라보는 드라마 스탭들.
‘저 엑스트라 할아버지는 누구야?’
‘옛날에 드라마 카메오 한 번 나오고 주목 받았는데, 그 뒤로 아무것도 성공 못해서 한이 맺혔대.’
‘그래서 아직도 드라마 판에 서성이는 거구나.’
으아. 아니야. 아니라구!
“한다고 할 걸 그랬나.”
그러기엔 너무 싹퉁바가지 없게 거절했는데?
내가 정말 잘한 건가 고민이 들었다.
생각이 여기 갔다가 저기 갔다가.
비상구에서 혼자 이리 서성이고 저리 서성이면서, 웃다가 울다가 온갖 희로애락을 펼칠 때였다.
“에이, 몰라.”
왕지호는 고개를 저었다.
몰라. 이미 질렀다.
‘물컵을 엎었으면 남이 한 척 해라’는 아빠의 가르침을 떠올리면서 이미 물컵은 엎어진 거라고 생각했다.
괜히 기회를 놓친 건가 싶어서 내적 아쉬움을 느끼던 왕지호는 한숨을 쉬었다.
“난 잘한 거야.”
형들은 모르겠지만, 내가 그래도 잘했다고 생각하면 된 거지.
연기 활동도 윤 실장님이랑 얘기해서 차근차근 커리어도 쌓아 보고.
팬들도 더 많이 생겨서 뉴블랙 하면 다 아는 그룹이 될 때, 그래서 형들도 자기 개인 일을 시작할 때 연기를 해 보자고 생각했다.
‘그럼 그룹빨도 좀 받아야징.’
희희낙락하던 왕지호가 이내 비상구 손잡이를 돌렸다.
이제 돌아갈 때였다.
“형들이랑 초콜릿 먹…….”
콧노래를 부르며 비상구 문을 확 잡아당긴 그는 화들짝 놀랐다.
덜컹.
열린 문 사이로 무언가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흐아아악!”
“어푸푸!”
“쿠에엑!”
왕지호는 눈을 멀뚱멀뚱 떴다.
“……?”
바닥에 샌드위치처럼 차곡차곡 포개진 네 명의 형들을 보면서 잠시 멍한 기분을 느꼈다.
“김중현! 김중현! 나 숨 못 쉬어어…!”
“미안.”
“내 다리에 손 누구야! 당장 치워요!”
“야, 지금 내가 중현이한테 깔려 있는데 네 다리에 손을 뗄 수 있겠냐? 아이고, 내 허리야…….”
“잠시만요. 저 일어날게요.”
“으악! 가만히 있어! 가만히! 지금부터 아무도 움직이지 마!”
서로 팔다리가 엉켜서 악다구니를 쓰는 참신한 개판에 왕지호는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뭐지. 이건.’
문을 열었더니 형들이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