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245화
상암동 TBC 사옥.
불이 꺼진 1층 로비를 지나 3층 스튜디오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음흠흠.”
리사 선배가 마지막 경연에서 불렀던 명곡 ‘산들바람’이 내 뒤에서 흘러나왔다.
민기 형이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콧노래의 데시벨이 더 올라갔다. 음흠흠! 음흠흠! 하는 느낌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민기 형.”
“음흠… 응?”
“제가 잘못했어요.”
웃음을 터뜨리는 상대에게 말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사과부터 할게요. 형. 서운한 거 있으면 제가 맛난 거 사줄 테니까…….”
“에이, 서운하기는. 내가 너한테 서운한 게 뭐가 있겠냐.”
잔뜩 쌓였구만. 이 사람.
띵.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복도를 걷는 동안, 쩔쩔매는 내 표정을 보며 상대는 싱글벙글 웃었다.
이러다가 이따가 ‘안냐세여, 뉴블랙 매니저입니당~’ 하는 음성변조 목소리가 나오는 거 아닐까.
“서운한 게 뭐가 있겠어. 뭐, 작업한 노래 조금만 들으면 된다고 해서 갔더니 3시간을 붙잡았다든가…….”
“그날 고기 사 줬잖아요.”
“아, 그러네.”
이내 둘이 웃음을 터뜨렸다.
커피 박스를 나눠서 들고 가는 동안 매니저가 웃었다.
“농담이야. 나나 원석이는 서운한 게 뭐가 있겠냐. 너희가 얼마나 잘해 주는데. 물론, 비방용 흑역사야 많이 알고 있다만….”
“아. 형.”
“우리는 이따 전화통화 라인업에 안 들어갔으니까 걱정 마.”
휴. 다행이다.
그때 상대가 진지하게 말했다.
“물론 실장님은 어떠실지 모르지.”
깔깔 웃는 모습에 내가 눈을 흘겼다. 그랬더니 상대가 표정을 바꾸며 물었다.
“긴장은 좀 풀렸어?”
“네, 덕분에.”
“못하면 어때. 긴장 좀 풀어. 어깨에 부담감 팍팍 들어간 거 다 보인다.”
“티 나요?”
“너 부담되면 말수가 확 적어지더라.”
아무래도 지상파 예능에 혼자 나오는 건 처음이기도 하고.
분량 좀 따내야 하는데 못하면 어떡하지 하고 걱정하던 터였다. 상대가 웃으며 나를 다독였다.
“편하게 하고 와. 당장 네가 분량을 못 얻어내면 큰일 날 만한 시기도 아니고. 평소처럼만 해도 충분해.”
“그래야겠어요.”
“여유를 가져. 너희들은 가끔 보면 아직도 데뷔 초에 머물러 있는 거 같아.”
고맙다는 듯 내가 웃어 보이자, 상대가 내 눈을 보며 말했다.
“그리고 이건 진담으로 하는 얘기인데, 신토끼에서는 네 분량이 없을 수가 없어.”
“…그런 것 좀 진지하게 말하지 마요. 형.”
사이좋게 웃으며 걸으니 어느덧 목적지인 C 스튜디오가 가까워졌다.
“지금 대기실에는 한조만 있는 거죠?”
“어, 그쪽 매니저가 아직 자기들밖에 없다고 했으니까, 아마도? 녹화 시작하려면 꽤 남았잖아.”
스탭들에게 돌릴 커피 비용을 분담하기 위해, 미리 매니저들끼리는 연락을 하고 온 터였다.
저 대기실에 한조가 있는 건가.
간만에 만난다는 생각에 들떠서 문을 열고 들어갈 때였다.
“안녕하…….”
테이블에 앉아있는 두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당황했다.
“……?”
바로 둘 중 한 명 때문이었다.
스트릿 보이즈의 로드매니저는 예전에 봤던 그 얼굴과 같았지만.
한조로 예상되는 인물이…….
“안녕하세요. 우주 씨.”
반팔 티 아래로 굵은 근육을 자랑하고 있는 낯선 인물이 나를 불렀다.
* * *
매니저들과 함께 신토끼 스탭들에게 인사를 하며 커피를 돌렸다.
아직 호스트들이 도착하지 않은 터라 대기실로 돌아간 나는 상대를 붙잡고 앉혔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몸이 좋아졌죠?”
한조가 쑥스럽게 웃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진 수준이 아니라 그거 같아요. 슈퍼 마리오에서 버섯 먹으면 몸 커지는 거.”
상대가 웃음을 터뜨리자 근육이 꿈틀거렸다.
어우. 깜짝아.
마지막으로 본 게 1월 말 어워드 때였나. 그런데 고작 석 달 정도 사이에 이렇게 변해 버렸다.
성실하고 잘생긴 대학교 과대 같은 느낌의 외모가 지금은 올해의 소방관 화보처럼 변해 있었다.
피부도 살짝 그을려 있었고.
“적응이 안 되죠?”
“네. 진짜로.”
“저희도 가끔 새벽에 놀래요. 어두운 데 모여 있으면 골목길에 있는 무서운 형들 같아서.”
그 모습이 그려져서 웃었다. ‘나무가 진짜 통나무가 됐어요’ 하는 드립에는 또 한 번 웃음이 나왔다.
한조가 차분하게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작년 신인상 후보들이 다들 잘 되기도 했고, 저마다 포지션을 잡아가고 있잖아요. 블링크는 실력파, 세레니티는 비주얼…….”
데뷔 초에는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블링크와 세레니티는 올해 들어 4대 기획사의 저력을 보여 주고 있었다.
MOP의 세레니티는 비주얼 걸그룹으로 팬덤을 끌어모으고 있고, KM 엔터의 블링크는 퍼포먼스형 그룹으로서 음원 시장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중에서 압도적으로 잘된 우리를 제외해도 스트릿 보이즈 혼자 신인상 후보들 사이에서 붕 떠 있긴 하다.
물론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지만 다른 신인상 후보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는 그렇다.
“실장님이랑 회사 기획팀 직원 분들이랑 한참 토론을 했어요. 최근에 힙합이 음원시장에서 조금 부진하기도 하고. 이대로는 조금 어렵겠다 싶어서…….”
그래서 ‘힙합+짐승돌’ 컨셉으로 가보겠다는 이야기인 듯했다.
아직까지 우리와 같은 3세대 아이돌 중에서는 없는 포지션이니까. 아직 비어 있는 2세대 짐승돌 선배들의 자리를 채우겠다, 하는 계획 같았다.
“물론 잘 안 되면 다시 뺄 거예요…….”
근육 만드느라 죽는 줄 알았다며, 프로틴 셰이크를 눈물겹게 호로록 마시는 한조였다.
“다음 컴백이 언제예요?”
“아마 5월 말…? 내부적으로 계획이 딱 잡힌 건 아니라서.”
“우리 후속곡 할 때쯤 나오겠네요.”
“후속곡도 해요? …큰일 났다.”
진심으로 큰일이라는 근심 어린 말에 웃음이 나왔다. 누가 보면 우리가 TNT라도 되는 줄 알겠다.
한조가 프로틴 셰이크를 마시며 물었다.
“참, 그건 그렇고. 혹시 오늘 방송에 뭐 나올지 알고 있어요?”
“아뇨. 알고 싶긴 하죠.”
워낙 리얼리티를 중시하는 방송이라 출연자도 뭐가 나올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우주 씨는 방송 분량 걱정은 안 되겠네. 부럽다.”
“뭐가 부러워요…….”
“전 오늘 방송국 올 때도 동생들이 일단 우주 씨 옆에 붙어 있으라고 했어요. 형 혼자 있으면 노잼이라 편집 각이라고… 못된 것들.”
“저도 지금 톡으로 난리도 아니에요.”
내가 핸드폰 창을 잠시 보여 주었다.
지호 [사과해]
중현 [짝]
리혁 [사과해]
중현 [짝]
비주 [사과 같은 우주 형 화이팅]
중현 [휴]
한조가 키득거렸다. 왠지 남의 집 불구경을 하는 듯한 느낌이라 얄미웠다.
지호 [한조 형도 옆에 있어요??]
지호 [스보 형들이 컴터로 메시지 보냈는데 전달해달래요]
지호 [‘사과해’]
지호 [‘그간의 잘못을 사죄하지 않으면 녹화장에서 불벼락을 보게 될 것이야’]
지호 [‘나무는 가만히 있어.’ ‘난 또 왜?’]
이번에는 내가 손뼉을 치며 웃었다.
잠시 ‘고오얀,, 것들,,’ 하면서 동생들에게 부들부들하는 맏형들의 시간을 가지는 동안, 게스트들도 속속 도착했다.
“하이.”
묵직하고 선명한 목소리, TNT의 리더 구선웅이었다.
꾸벅 인사하는 한조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던 상대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여, 1위 가수.”
“선웅이 형, 오랜만이야.”
악수를 하며 어깨를 슥 부딪치던 이가 옆에 의자를 빼고 앉았다.
“어워드 이후로 얼마만이냐, 이게. 연락 좀 하고 지내.”
“번호를 알아야 하지.”
“아, 내가 바뀐 거 안 알려 줬나…? 사생 때문에 주기적으로 폰 번호 바꿔서 그래.”
다른 게스트들은 데면데면해서 친한 사람이 너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하는 이야기에 같이 웃었다.
얼굴을 오래 보긴 했지만, 사실 우리 둘은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라서.
TNT 데뷔조 때만 해도 형 라인이랑 동생라인이 별로 안 친했다.
다 같이 있을 때면 드립도 치고 깔깔 웃지만 단둘이 남으면 급격히 조용해지는 그런 사이라고 할까.
웃긴 건 그런 형 라인도 자기들끼리는 딱히 친한 편이 아니었고.
나도 오히려 밑에 4인방과 더 친했지.
지금이야 다들 사이가 어떨지 모르지만, 한참 전에 방출당한 나로서는 그 정도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만나면 ‘오, 친구야!’ 하면서 반갑게 대화하는 정도.
“방송 분량 어떡하냐. 나 개노잼인데. 너 미리 뭐 준비한 거 있냐? 있으면 합 좀 맞추자.”
“그런 준비는 안 했는데, 난 아마 주변에서 많이 준비했을 걸…….”
“아, 맞네. 네가 이쪽 계통에선 알부자지.”
“…….”
“분량 안 되겠다 싶으면 너한테 딱 붙어 있어야겠다.”
옆에서 한조가 키득거리며 웃자, 구선웅의 시선이 향했다.
“그쪽은 누구?”
“아, 저 스트릿 보이즈 리더 한조입니다. 선배님.”
“아하. 반가워요.”
…하는데 전혀 모르는 기색 같다.
‘그런 그룹이 있나?’ 하는 느낌. 그래도 ‘선배님’하면서 예의 바른 한조가 마음에 들었는지 둘이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저 형이 이런 대접 은근 좋아하는 타입이었지.
“안녕하세요!”
와일드의 우산도 도착했다.
일전에 돌림픽 농구팀에서 같은 팀으로 뛴 적이 있었다.
미리 검색한 결과, ‘잘생긴 도베르만’ 같이 생겼다고 해서 별명이 도베르만인데 상대가 웃을 때마다 자꾸 그 별명이 떠올랐다.
나와 한조를 보며 ‘우리 에이스들!’ 하면서 아는 척하는 상대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구선웅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 우산.”
“선웅이 형? 진짜 오랜만에 보네요. 연락 좀 하시지.”
“내가 번호를 알아야 하지.”
“제가 사생 때문에 번호를 자주 바꿔서…….”
한조와 내가 뒤에서 웃음이 나올 뻔한 걸 삼켰다.
안 친하구나.
넷이서 어색하고 낯선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할 때, 문이 거칠게 벌컥 열리면서 마지막 인물이 등장했다.
“아씨.”
라이더 재킷을 걸친 미소년이 목청 좋게 중얼거렸다.
“차 존나 막히네.”
뒤에서 매니저님이 해탈한 미소를 짓자, 다른 매니저들이 짠한 시선을 보냈다.
한결같은 캐릭터였다.
구선웅이 자리에서 또 일어났다.
“어, 휘연….”
“연락 안 해요. 귀찮아. 바빠 죽겠는데 연락을 뭐 어떻게 해.”
“…….”
“인사랑 사생 레퍼토리 좀 바꿔요. 진부해.”
거침없는 대사에 구선웅이 벙찐 표정으로 ‘어어, 그래…’ 하면서 소심하게 변했다.
휘연이 대충 의자에 걸터앉았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건데 나도 한 번 인생 저렇게 살아보고 싶다. 거침없이 하고 싶은 말 다하는…….
‘인생은 틴스피릿처럼’ 하는 구호가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
그리고 휘연의 등장을 끝으로 데면데면한 분위기가 더욱 더 어색하게 변해 버렸다.
이 분위기 어떡하지. 오늘 방송 괜찮으려나.
* * *
…하는 건 나 같은 아마추어의 걱정이었다.
카메라가 들어가기 시작하자, 아이돌미 뿜뿜하는 청년들이 한데 섞여 화기애애하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방금 전까지 ‘조명 존나 뜨겁네…’ 하며 중얼거리던 휘연이 내 옆에 앉아 카메라를 보고 인사했다.
“틴스피릿의 상큼발랄 리더! 휘연입니다! 잘 부탁해용~”
“…….”
열심히 표정관리를 하는 한편, 곁눈질로 스튜디오를 훑었다.
카메라 수십 대가 게스트들의 표정과 일거수일투족을 담고, 그 밑에서 작가님들이 열심히 스케치북 문구를 쓰고 있다.
뒤에 서 있는 매니저 무리 속에서 민기 형이 입모양으로 ‘화이팅!’ 하고 응원을 보냈다.
세트장은 전체적으로 술집과 비슷했다.
SNS에 요즘 뜨고 있는 술집, 하면서 나올 법한 알록달록한 조명과 우드톤의 인테리어.
네온사인으로 토끼가 절구를 찧는 로고 아래 ‘신개념 토크쇼 : 기억을 찾아줘’라고 쓰여 있었다.
커다란 원형 테이블에서 게스트들과 호스트들이 서로 마주보고 앉아 있는 구조였다.
“다음은 요즘 핫하디 핫한 분이죠? 최근 컴백하면서 주간 차트 1위를 거머쥔 것도 모자라 SNS에서 ‘예능인보다 더 웃긴 아이돌’로 유명한 그룹의 리더입니다!”
MC 중 하나가 나를 소개했다.
“뉴블랙의 리더, 우주 씨!”
“예, 안녕하세요!”
카메라에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이번에 미니 2집, 바람꽃으로 컴백하게 된 뉴블랙의 리더, 우주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게스트들이 다 같이 박수를 치는 동안, 호스트들이 리액션을 보냈다.
“이야, 잘생겼네.”
“아. 바람꽃 요새 잘 듣고 있는데 목소리가 너무 좋아.”
“우리 작가들 잇몸미소 봐요. 저렇게 웃는 거 진짜 오랜만에 보네. 우주 씨, 저기다 손 좀 흔들어줘 봐.”
내가 손을 흔들자, 작가님들이 스케치북을 응원봉처럼 흔드는 장면이 카메라에 담겼다.
그리고 잠시 3집을 홍보하는 시간을 가졌다.
바람꽃을 부르자, 방송인과 아이돌들이 ‘어맛, 세상에 이런 노래가…!’ 하는 리액션을 열심히 보여 주었다.
“노래 너무 좋다. 본인이 작사 작곡하셨다고요?”
“보니까 지금까지 타이틀곡을 전부 작곡했다고 되어 있네. 이번 앨범은 프로듀싱까지 했다고.”
“어우, 능력자네.”
와일드의 우산과 틴스피릿의 휘연이 흥미롭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작사는 저희 멤버 중에 메인 보컬인 리혁이란 친구가 했고요. 작곡도 멤버들의 도움이 많았어요.”
MC들이 살살 약을 올렸다.
“너무 예의 바르네. 우린 이런 거 싫어해!”
“너무 점잔 빼는 것도 좀 그렇지.”
“솔직히 말해 봐요. 내가 다 했다, 다 만들었는데 멤버들은 숟가락만 얹은 거다.”
“전혀 아니에요. 전혀 그런 생각은…….”
‘에헤이!’ 하는 호스트들의 성화와 함께 거짓말 충격기가 나왔다.
이거 오랜만에 보네.
워낙 게스트들이 현실 부정하기로 유명한 방송이라, 이런 식으로 소개할 때도 거짓말 충격기가 나오곤 한다.
“탐지기에 손을 올려야지. 이런 건.”
아. 탐지기구나.
예능인 유창현이 내 손을 탐지기 위에 꽁꽁 싸매는 동안 당황해서 물었다.
“아니. 왜 이런 얘기로 탐지기를…….”
“걱정 마요. 걱정 마. 다른 게스트들도 다 하게 될 거야.”
“질문에나 어서 답해 봐. 자, 우주 씨는 사실 작곡을 본인이 다 했다고 생각한다.”
“전혀 아닙니다.”
곧바로 쿠구궁 하던 탐지기가 진실이란 답을 내어놓았다.
“어, 뭐야. 재미없어.”
“이건 너무 당연한 얘기여서…….”
“그럼 질문을 바꿔봅시다. 나는 저작권료를 내가 다 가지고 싶다. 대답해 봐요. 하나, 둘, 셋.”
“어…… 아뇨? 당연히 분담을 했으니… 읏땃땄따!”
아. 따가워.
하지만 따끔한 손보다는 민망함이 컸다. 다들 박장대소하는 동안 시치미를 뗐다.
“기계가 오작동했네요.”
MC들은 전혀 듣지 않았다.
“괜찮아. 괜찮아.”
“저작권료는 인정해야지. 돈은 가족끼리도 나누는 게 아니에요.”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정신없이 몰아가는 통에 혼이 쏙 빠져나가는 거 같다.
정신을 차려 보니 동생들에게 해명하는 영상편지를 쓰고 있었다.
“우리 수플레 여러분, 그리고 우리 아해들아. 오해하지 마. 기계가 오류가 났어.”
“다시 한번 더 할까요?”
“이 기계는 고장 같아서요. 다른 기계가 있다면 할게요.”
“여분 있는데. 가져와!”
“아아아…! 죄송합니다. 제가 돈에 눈이 멀었어요……!”
기계를 새로 받아오려는 어느 MC의 손목을 붙잡고 말리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이어서 다른 게스트들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나와 비슷하게 몰아가는 식이었다.
“TNT 동생라인 솔직히 너무 컸다. 옛날에는 내가 리더고 맏형이어서 눈도 못 마주쳤는데. 맞습니까 아닙니까?”
“전혀 아닙… 뜨아야야야!”
구선웅 씨도 근엄한 이미지가 망가지고.
“스트릿 보이즈, 처음에 그룹명을 들었을 때 대표님이 과연 무슨 생각으로 지으신 건가 생각했다.”
“임현식 사장님, 사랑…하아악!”
‘예명 우산으로 한 거 후회 안 한다’거나 ‘나 스스로 멋있다고 생각 안 한다’고 발언한 이들도 차례차례로 격파 당했다.
신토끼에서 있는 의례적인 소개 시간이었다.
누구나 본심이 나올 법한 토크로 초반에 게스트들의 무장을 해제시키는 것이다.
그 덕에 후반에 갈수록 게스트들이 ‘될 대로 되라’ 하는 식이 된다고 할까.
자기소개로만 거의 30분을 끈 후 게스트 개인에 대해 탐구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 가장 기대를 모으고 있는 분이 바로 우주 씨인데요. 제작진이 인터넷에서 발견한 글입니다. ‘뉴블랙보다 잘생긴 아이돌 없다!’ 하는 인터넷 글인데요.”
제목부터 아찔하다. 욕먹기 좋은 제목이라고 생각할 때, MC 중 하나가 말했다.
“내용은 이렇네요. 미안하다. 이거 보여 주려고 어그로 끌었다. 뉴블랙의 흑역사는 세계 제일…! 이라네요.”
평범한 우리 수플레의 영업글이었다.
“뭐가 엄청 많네요. 팬클럽 이름부터가 말실수에서 비롯되기도 했고, 와… 이게 몇 개야. 고양이에게 질투하는 영상편지도 있고. 문제집 광고. 대만의 우젠민…….”
“미쳤다. 우리가 원하던 인재예요!”
“신토끼가 대학이었으면 저 친구는 수석 합격이야.”
하나하나 이어질 때마다 해명하는데 나 스스로도 이 정도로 많을 줄은 몰랐다.
고양이 영상편지 정도만 알던 한조도 이 정도라고는 생각 못했는지 감탄한 눈으로 쳐다봤다.
다른 게스트들도 ‘대박…’ 하며 손을 모으고 경청하는 동안 MC들이 금맥을 발견한 광부 같은 표정을 지었다.
“기대 되네요. 우주 씨.”
“그 나이에 한 인간이 십년은 걸려서 만들 흑역사를 다 기록했네. 하늘이 내린 재능이야.”
“아이고. 어디 있다가 이제 왔어요?”
전화 통화 준비가 끝났는지 피디가 OK 사인을 보냈다.
“드디어 첫 통화인데요. 바로 뉴블랙 우주 씨에게 걸려온 전화라고 합니다.”
“받아~ 볼까요?”
과연 누구일까.
MC 중 하나가 내게 물었다.
“어때요. 목소리 들으면 알 거 같아요?”
“예, 제가 아는 지인이라면 알 것 같아요. 특징을 잘 기억하는 편이어서…….”
“쉽지 않을걸. 우리가 음성변조를 빡세게 하거든. 지난번에 이견우 씨는 아버지 목소리도 못 알아봤어.”
곧이어 음성 변조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느끼하고 굵게 변조된 목소리.
-안녕~하세요~
“네, 자기소개 좀 부탁드릴게요!”
-네. 저는 뉴블랙과 가장 가깝게 지내고 있는 사람 중 하나~~ 입니다아.
느릿하고 굵은 목소리. 내가 조용히 듣고 있는 동안, MC 중 하나가 흥미로운 듯 물었다.
“멤버분인가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아.
“멤버인가 본데.”
게스트 중 하나가 중얼거릴 때, MC가 내게 물었다.
“어때요, 누군지 알겠어요?”
“네.”
-그럴 리가 없을 텐데에~? 후후.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매니저 중에 원석이 형이라고 있거든요. 그분 목소리예요.”
-…….
“원석이 형.”
“여보세요. 원석 씨?”
갑자기 말이 없어지자, 현장 사람들이 손뼉을 치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아닌데에… 그 사람 아닌데에에~~
“맞는 거 같은데요. 저분 목소리 특징이 느릿한데, 음절 첫 부분에 살짝 악센트를 줘요.”
-…….
“근데 저분이 이런 데 전화를 걸 만한 스타일은 아니시거든요.”
탐정의 추리를 듣는 것처럼 다들 흥미로운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았다.
“제가 봤을 때, 지금 옆에서 저희 멤버들이 코칭을 하고 있고, 대신 말을 전달해 주시는 거 같아요.”
-…….
“지금 애들이 손으로 엑스 자 그리고, 리혁이랑 지호가 미친 듯이 문자 타이핑 하고 있죠. 형?”
-어…….
“비주는 입에 손 모으고 있고. 중현이는 과자 먹고요.”
다들 손뼉을 치며 ‘귀신같네’ 하면서 웃는 동안, 수화기 건너편에서 목소리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음성변조된 느릿한 목소리들인데 누가 누군지 알 거 같다.
-끊어여! 일단 끊어~!
-방송인데 어떻게 끊어~~
-일단 전화기를 저희한테 줘 봐요. 저희가…….
갑자기 ‘띠록’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통화가 끝나 버렸다. 전화기를 가지고 옥신각신하다가 끊어진 모양이었다.
예기치 않은 사태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MC들이 감탄했다.
“이야, 눈치가 귀신이네. 우주 씨.”
“지인들도 다 저렇게 들으면 알아?”
“예, 특징만 잡으면 어느 정도는…….”
“대박인데? 우리 드디어 실명인증 방송 가나?”
워낙에 자주 만난 사람들이라 내가 잘 아는 덕분이기도 했다.
한편, 우리 애들은 조금 이따가 다시 통화하기로 하고 일단 스트릿 보이즈의 한조에게 바톤이 넘어갔다.
헬륨가스를 먹은 목소리처럼 변조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안냐세요!
-저희는 스트릿 보이즈의 메머드, 멤버들입니다아!
“오, 이렇게 신원공개해도 괜찮은가요? 저희 신토끼는 늘 말씀 드립니다마는 뒷일은 책임 안 지거든요.”
-상관 없어요!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왜냐하면 저희가 여덟 명이거든요! 이렇게 말하면 누가 누군지 절대 알~수가 없어요~
-그치 그치.
-와, 너어무 신난다아! 꺄꺄갸!
-한조 형, 우리가 누구게에?
…이라고 자기들끼리 신나서 얘기를 할 때, MC들이 한조에게 물었다.
“어때요, 누가 누군지 알 거 같아요?”
“아뇨. 정말 모르겠는데요. 이거 진짜 알아듣기가 힘드네요. 다 비슷비슷하게 들려서.”
그 말에 건너편에서 음성변조된 목소리들이 ‘거봐. 꺄꺄꺄’ 웃을 때, MC들과 게스트들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MC 중 하나가 기대감 어린 시선으로 물었다.
“아까 스트릿 보이즈랑 뉴블랙이 친하다고 했는데. 혹시 지금 이 목소리들도 감별할 수 있어요?”
“으음…….”
잠시 고민을 하다가 대답했다.
“어려울 거 같긴 한데, 한번 도전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