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246)화 (246/1,031)

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246화

내 목소리에 반응이 돌아왔다.

-어. 이거 누구지~?

-단장님이다, 우리 단장님! 보고 싶어요!

음성변조된 목소리들이 꺅꺅거리는 통에 현장에서 웃음이 흘렀다.

‘단장님’이라는 호칭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들에게 한조가 간략하게 ‘민초단’의 연혁을 설명해 주었다.

듣고 있던 스트릿 보이즈 멤버들이 아우성을 쳤다.

-아. 근데 이젠 단장님 아니지!

-맞아!

-단장님인 줄 알았는데, 저희를 내팽개치고 도망갔어요~!

-맞아! 그거 너어무~ 서운했는데!

-아이돌 운동회에서 막 금메달 여러 개 따더니 저희를 버렸어요! 행복은 성적순은 아닌데!

8명이나 되는 대인원이 난리법석을 떠는 통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MC들이 겨우 진정을 시킬 때, 내가 차분하게 말했다.

“차례대로 유건, 기원, 렉스, LB 씨네요.”

곧바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옴마?

음성변조된 LB의 감탄사에 다 같이 웃음이 터져버렸다.

-이게 뭐시여?

-이거 뭐야. 필터 안 되고 있어요? 그런 거예요? 지금까지 실명 인증 방송이었어?

-어떡해. 어떡해. 우리 사기 당했나 봐!

MC인 유창현이 상황을 설명했다.

“지금 스트릿 보이즈 분들 필터가 적용이 안 된 게 아니고요. 우주 씨가 목소리를 듣고 맞힌 거예요.”

-우와!

-역시 우리 단장님이시다.

-한조 형도 가끔 우리 헷갈리는데, 역시 단장님은 달라!

한조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언제 너희를 헷갈렸다고…….”

-저거 봐. 입만 열면 거짓말이야!

-지난번에 나무 휴게소에 버리고 간 거 기억 안 나? 인원수 잘못 체크했잖아!

그간의 잘못이 폭로되는 가운데, 누군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우주 씨는 어떻게 알았어?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이렇게 딱 맞힐 만큼 자주 만난 건 아닐 텐데.”

“맞아요.”

한조도 수긍한 얼굴로 말했다.

“저도 매일 같이 보는데도 잘 모르겠거든요.”

“아, 그게요.”

내가 설명했다.

“저희가 TBC 연말가요제에서 합동 무대를 한 적이 있었는데.”

“네. …근데 왜 말을 멈춰요?”

“자료 화면 나갈 타이밍 같아서요.”

MC들이 막 웃더니, 알아서 편집해 줄 테니까 그냥 말하라고 했다.

“트렌드 선배님의 노래를 편곡해야 됐는데, 그러려면 스트릿 보이즈의 보이스 컬러를 파악해 둬야 했거든요. 당시 작업을 열심히 했던 게 기억에 남았나 봐요.”

“오, 신기하네. 기억력이 좋구나.”

“그것도 있고, 다들 개성 있고 좋은 목소리여서요.”

스트릿 보이즈가 ‘끼요옷!’ 하는 소리를 냈다.

-우리가 개성 있대!

-나무는 가만히 있어.

웃음을 삼키며 멤버별로 보이스 컬러가 어떤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기원 씨는 되게 노래하듯이 흐르는 목소리예요. 말할 때도 ‘ㄹ’이 되게 부드럽게 흘러가거든요. 반면에 LB 씨는 랩을 하듯이 톡톡 두드리는 목소리고요.”

“오오.”

누군가 감탄사를 흘렸다.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흥미진진하네.”

“난 이렇게 맞히는 게 더 신기한데? 정말 이런 걸 분석해서 아는 거예요?”

졸지에 추리 시간으로 변했다.

스트릿 보이즈 멤버들에게 다시 한번 말해 보라고 시키고, 내 설명을 기억한 사람들이 맞히려고 해 보고.

“하나도 못 맞혔는데. 전혀 모르겠어.”

“이거 방송 나가면 스트릿 보이즈 팬들이 놀라겠네.”

“우리 콘크리트, 오해하지 마세요. 제가 못 맞히는 게 아니고 우주 씨가 진짜 특이한 거예요.”

다들 미스터리한 얼굴로 ‘……?’ 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파티코 때 나와 같이 녹화했던 유창현만 왠지 모르게 흐뭇하게 웃고 있을 뿐.

한편 다들 맞히기 어려운 건 당연했다.

분석도 분석이지만, 사실 그냥 듣고 아는 거였으니까.

음에도 색이 있듯이 사람마다 목소리에도 특유의 색깔과 이미지가 있다.

예컨대 한조의 목소리를 들으면 부드러운 파스텔 톤의 녹색에 흔들리는 수풀이 그려진다거나.

…인데 이걸 말하면 진짜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 거 같아서 속으로만 생각했다.

스트릿 보이즈 멤버들도 신나서 반응했다.

-신기해야 하는데 뭔가 신기하진 않다.

-그러게, 그러게.

-저분이 진짜 특이한 능력이 많거든요! 괜히 저희가 단장님으로 추대한 게 아니에요!

-잠깐만, 잠깐만. 이런 얘기 하니까 갑자기 떠오르는 게 많은데, 뭐 하나 여쭤 봐도 돼요?

MC들이 말해보라고 하자 멤버들이 물었다.

-한조 형 디스하고 난 다음에, 저분 얘기도 해도 돼요?

내 얼굴이 다급해지는 가운데 한조가 좋아 죽는 미소를 지었다.

MC들도 흐뭇하게 웃었다.

“아유, 그럼요.”

“그런 건 언제든지 웰컴이죠.”

……망할.

*   *   *

‘선배님, 신토끼는 어때요?’

섭외가 되고 나서 장소원 선배에게 톡으로 물어본 적이 있었다.

우리가 썸씽으로 활동할 때, 이 사람도 신토끼에 출연했으니까.

분위기 어떠냐는 물음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보통 출연자가 재미있게 녹화하는 방송이 드문데, 이건 은근히 재미있더라.’

궁금하긴 했다.

주세한도 방송으로 보면 재미있지만, 막상 찍을 때는 엄청 재미있지는 않아서.

그런데 이건 진짜 재미가 있었다.

-중2병이 너무 심해요!

실시간으로 부들부들하는 휘연의 모습에 다 같이 깔깔거렸다.

틴스피릿 멤버들이 물 만난 물고기처럼 폭로를 이어 갔다.

-삼겹살 먹을 때 이마에 기름 튀었거든요. 부처님 점 있는 자리에. 근데 거기다 존… 조그만 밴드 하나 붙이면 되는데, 대형 밴드를 사서 이마에 일자로 짝 붙이는 거예요.

-팬분들이 ‘어머! 휘연이 이마 다쳤나봐ㅠㅠ’ 이러는 댓글 보면서 맨날 좋아해요!

-지난번에 눈병 나서 안대 썼을 때도, 의사 쌤이 다 났다고 했는데 한동안 쓰고 다녔어요.

상처 받은 병약 미소년 컨셉에 심취한 휘연의 실체가 밝혀지면서 촬영장이 한 차례 뒤집혔다.

속으로는 ‘이 새끼들…’ 하고 있을 법한 얼굴로 휘연이 내게 물었다.

“그거 가능해요. 목소리 분석?”

“힘들 거 같아요. 잘 모르겠어서…….”

“왜요? 왜 내 건 안 돼?”

내 옷깃을 붙잡고 상대가 절규하자, 옆에 있던 구선웅이 박수를 치며 고소한 표정을 지었다.

스트릿 보이즈 멤버들에게 폭로당한 나와 한조를 시작으로 다른 게스트들도 차례대로 무너졌다.

처음에는 대체로 멤버들이 등장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제3자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서울에서 근무하고 있는 30대 직장인입니다. 와일드 우산 씨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지인이 아닌 일반인들의 경우 그냥 신원을 밝혔다.

우산의 얼굴이 초조해졌다.

멤버들이야 어떤 이야기를 할지 예상이라도 가능한데 일반인들은 정말 예측 불가능이었으니까.

와일드의 우산이 물었다.

“저를 어디서 보셨다고요?”

-목욕탕이요. 목욕탕.

“목욕탕이요?”

-제가 그때 새벽에 탕에 들어가 있었는데,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으어어 하고 있었거든요. 근데 갑자기 앞에서 부글부글 하더니 사람 머리가 푸화학 솟아오르는 거예요!

다들 뒤집어지며 웃었다.

-제가 놀라서 숨넘어가듯 ‘허어!’ 하는데, 그걸 오해하셨나 봐요. 약간 머쓱한 얼굴로 ‘네. 와일드의 우산입니다.’ 하시더라구요. 그때부터 와일드란 팀명이 잊혀지지 않았어요.

“전 그런 기억이 없…….”

-그날 기념으로 인증샷도 찍었어요.

곧바로 제작진이 스크린에 띄운 인증샷에 모두 웃을 수밖에 없었다.

목욕탕 카운터 앞에서 아이돌과 직장인이 같이 브이를 하는 사진이었다.

아. 웃겨.

우리 수플레들이 내가 부끄러울 때마다 끼효홋 하면서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이거였구나.

남 일이라고 생각하니 너무 즐겁다.

이윽고 동갑내기 절친인 배우에 의해 ‘고양이 흑역사’를 폭로 당한 구선웅을 끝으로 한 바퀴가 끝났다.

MC들이 막 웃었다.

“오늘 물 좋네. 마음에 들어.”

“이 분위기로 계속 이어 가면 2부까지 노려도 되겠는데?”

“오, 2부 편성 가나? 우리 한번 가 봐? 김 피디?”

분량을 어느 정도 뽑았다고 생각했는지 다들 신이 난 얼굴이었다. 그러더니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근데 우주 씨만 좀 약한데.”

“그러니까요. 유망주였는데 이게 뭐야. 아까 멤버들도 전화하다가 뚝 끊어지고.”

내가 미소를 지었다.

“사실 제가 별로 나올 게 없어서 그런 거 아닐까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전원이 ‘에헤이’ 하며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는 반응을 보였다.

특히 파티코를 함께 녹화했던 유창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메인 MC가 말했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지금 제작진이 말하길 우주 씨에 관해 전화 연결이 됐다고 그러네요.”

“아까 멤버들 끊긴 거 그거인가?”

그런 이야기가 오갈 때였다.

-안녕하세요~

낯선 목소리.

곰곰이 누구 목소리인지 기억을 떠올려 봤지만, 누군지 모르겠다.

“네, 자기 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선우주 군과 함께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을 함께 한 사람입니다.

“허어…!”

내가 벌떡 일어나 엑스 자를 그렸다.

“이거 안 돼요. 이거 끊어 주세요!”

*   *   *

현장에 모인 사람들은 흥미진진한 기분을 느꼈다.

초등학교 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리도 과민 반응을 하는 걸까.

선우주가 흥분해서 ‘안 돼!’ 하는 가운데, 음성변조된 목소리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방송 예고에 뉴블랙 우주라고 떠 있어서 너무 좋았어요. 제가 이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선우주가! 신토끼에! 언제! 나오느냐! 아 너무 좋다아!

“저기 일단 진정하시고요.”

-아, 네. 잠시 신이 나서…….

MC가 우주에게 고개를 돌렸다.

“누군지 알 것 같아요?”

“초등학생 때 친구라서… 지금 목소리로는 전혀 모르겠어요. 어떡하지.”

우주가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을 카메라가 클로즈업으로 담았다.

“아니, 대체 초등학생 때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래요?”

“그게…….”

그가 난처한 표정을 짓자, 음성변조된 목소리가 웃었다.

-제가 말씀 드릴게요. 우주, 저 친구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외모 부심이 정말 장난 아니었거든요.

“그 정도까지는 아니…….”

-인정하는 부분이죠?

“네…….”

선우주가 한숨을 푹푹 쉴 때, 호기심에 눈을 빛내는 사람들에게 동창생의 증언이 이어졌다.

-우주가 애기 때도 엄청 잘생겼었어요. 여자애들보다 더 예뻤어요. 등교할 때마다 주변 중고교 누나들이 마주치면 ‘우주야! 우주야!’ 하면서 너무 예뻐하고.

현장에 모인 이들이 말없이 공감했다.

눈앞에 앉아 있는 인물을 보면 그런 말이 나올 만했다.

길에서 마주치면 저도 모르게 멍하게 쳐다볼 법한 얼굴이라고 할까.

이마에서부터 코와 턱으로 이어지는 곡선을 보다 보면 와, 저런 선이 있구나 하며 감탄이 나올 정도.

부끄럽다는 듯 인상을 살짝 찡그리는데, 속눈썹이 흔들릴 때마다 구경하는 작가들의 코가 벌렁거렸다.

저기서 15년 정도의 시간을 거꾸로 돌린다면…….

초등학교 때 우주 옆에만 붙어 있으면 모르는 누나들이 사 주는 떡볶이랑 과자를 얻어먹을 수 있었다는 증언이 절로 납득이 갔다.

이런저런 일화가 이어진 후, 동창생이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잠시 이 아이가 이상해진 거 같아요.

“푸하하!”

갑자기 훅 들어오는 디스에 게스트들과 MC들이 웃었다. 우주가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전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제가 뭐 그리 이상했던가요?”

-글쎄요. 학급문집에 ‘난 너무 예뻐’ 하는 시 쓴 사람이 누구더라~

“…….”

얇게 변조된 목소리가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이 친구 얼굴 부심이 장난 아니었어요. 초등학교 때도 ‘왜 사람들은 내 내면을 바라봐주지 않는 걸까~?’ 이런 얘기 하고 다니고. 자기 얼굴에 자기가 막 심취해서!

“저기요.”

-한 번은요. 방학 때 엄청 다이어트하고 돌아온 친구 하나가 있었는데. 잘생겨져서 인기가 많아졌거든요. 그때부터 경계하더라구요. 기념일에 초콜릿 주고받을 때도, 걔가 자기랑 비슷하게 받으니까 다가가서는…….

“…….”

-‘오늘부터 우리 경쟁자네?’ 이러는 거예요! 꺄꺅꺄! 대박이었어요. 진짜!

모두가 테이블에 엎어지면서 자지러졌다. 구선웅은 웃다가 의자가 뒤로 넘어갈 뻔했다.

사무적인 얼굴로 지켜보던 스탭들도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우주가 해명하듯 말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잖아요. 그 나이라면 그럴 수 있어요.”

-아니에요.

동창생이 곧바로 반박했다.

-우주는 정말 그 정도가! 장난이! 아니었어요!

“너무 재밌다.”

“더 말해 봐요! 더!”

MC들이 부추기자, 증언이 이어졌다.

-마니또 할 때도 보면 자기가 누군지 모르게 해야 되잖아요? 근데 우주가 하면 애들이 다 알았어요. 끝에서 ‘제일 잘생긴 누구가~’ 이러고 하는데 누가 모르겠어요.

“푸하하!”

-근데 인기가 너무 많아서, 막 저런 오글거리는 걸 해도 애들이 다 좋아해줬어요! 진짜 이해 안 됐는데!

뭘 해도 인기가 하도 좋아서 납득이 안 갔다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학교가 끝나면 다들 우주한테 가서 같이 놀자고 했다고.

-인기가 얼마나 좋았냐면 학급 바자회 할 때도요. 보통 자기 집에 있는 물건 가져와서 교환하잖아요?

“그렇죠.”

-근데 얘는 종이를 가져온 거예요. 궁금해서 보니까 자기 사인이래요. 테이블에 앉아서 사인을 버전별로 촤라락 펼쳐 두는데.

꼬꼬마 남자아이가 자기 사인을 펼쳐두고 있는 귀여운 광경이 그려질 때였다.

-거기 앉아서 타이타닉 OST를 리코더로 불더라고요. 사인 고르는 동안 매장 음악처럼.

와장창.

머릿속에 그렸던 풍경이 깨지면서 다들 흐느끼듯이 웃었다.

당사자는 될 대로 되라 하는 얼굴로 해탈한 웃음을 흘렸다. 얘기를 하는 본인도 웃긴지 피식거리는 소리가 연신 들렸다.

-웃긴 건 애들이 또 그걸 샀어요. 저도 왜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집에 한 장 있어요. 태극기 에디션인데.

곧이어 자료 화면으로 큼지막한 스케치북에 굴림체로 크게 ‘선우주’라고 적힌 사인이 등장했다.

‘ㅇ’은 태극 마크로 되어 있었다.

현장에서 ‘ㅇ’은 저마다 다르게 커스텀으로 해 줬다는 이야기에 한참 동안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이야기가 다 끝나고 MC가 물었다.

“자기 소개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저는 평범한 대학 생활을 보내고 있는 23세 남자, 이정훈입니다.

“아, 너!”

선우주가 눈을 휘둥그레 뜰 때, 변조가 풀린 목소리가 웃었다.

-아까 살 빠져서 인기 많아진 친구가 저예요.

“아아.”

다들 신기한 표정을 짓는 동안 상대의 말이 이어졌다.

-사실 우주와는 그 전부터 친하긴 했어요. 매일 우주네 할머님 가게에 가서 밥도 먹구. 제가 저 친구 옆에서 떡볶이 얻어먹다가 살이 찐 거라니까요.

“아니, 자꾸 오해할 말을 하는데, 저 친구가 제 것까지 먹어 버려서 제가 먹을 게 없었어요.”

-많이 먹으라면서!

“아니. 말이 그런 거지, 정말이겠냐고.”

잠시 초딩처럼 투닥거린 대화가 흐른 후, 상대가 말했다.

-그래도 좋은 친구예요.

“갑자기요?”

-네. 말이 이런 거지. 정말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거든요. 제가 저학년 때 따돌림? 비슷한 걸 당할 때도 우주 혼자 다가왔어요. 아까 그 마니또도 아무도 안 해 주려는 걸 이 친구가 편지를 써 준 거고요.

훈훈한 일화가 이어졌다.

-제가 살 빼고 인기가 많아졌을 때도 얘가 제일 기뻐했어요. 음…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 이 친구가 없었다면 그 시기가 정말 힘들지 않았을까.

“저기, 정훈아.”

-응?

“고맙긴 한데, 실컷 욕하고 나서 이런 훈훈한 일화는 내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아.”

-우주 일화 더 궁금하신 분?

모두가 손을 들면서 잠시 초등학교 동창 간에 옥신각신이 이어졌다.

그래도 훈훈한 분위기였다.

10년 만에 닿은 연락이라 조만간 밥 한 끼 먹자는 류의 이야기와 함께 대화가 막을 내렸다.

-마음 같아서는 얘기하고 싶은 게 엄청 많은데,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상대가 마무리 멘트를 남겼다.

-5학년 막 올라갈 때였나. 자긴 아이돌이 꿈이라고 밝혔는데 지금 이렇게 잘 된 모습을 봐서 너무 기뻐요. 뉴블랙 잘 됐으면 좋겠고, 앞으로도 많이 사랑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야. 무슨 꽃이냐.

“바람꽃.”

-바람꽃! 사랑해 주세요!

게스트들의 박수와 함께 통화가 끝났다. 따스한 분위기에 웃던 MC들이 몸을 움츠렸다.

“어우, 훈훈하긴 한데 적응 안 되네.”

“갑자기 분위기가 TV는 사랑을 타고처럼 됐어.”

“우리는 막장 방송이 적성인가 봐. 우주 씨, 이리 와 봐. 우리 초등학교 시절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자.”

모두가 ‘나아아’ 하며 괴로워하는 우주를 신명나게 놀려대는 동안, 카메라 뒤에선 제작진이 흡족하게 웃었다.

‘분량 꽤 뽑았네.’

피디가 잇몸이 만개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건 분량을 많이 뽑아서기도 했지만, 앞으로 기다리고 있는 리스트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뽑아낼 게 엄청 쏠쏠한데.’

TNT 멤버들의 전화도 기다리고 있고.

통화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선우주였다.

이대로라면 오랜만에 2부를 노려도 되겠다 싶을 정도였다.

아이돌 특집이라고 우려했던 게 무색할 만큼, 게스트 모두가 전반적으로 이야깃거리가 넘쳤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음?”

촬영장 구석에서 낯익은 얼굴이 눈에 띄었다.

팔짱을 끼고서 선우주를 지그시 쳐다보는 남자. PD가 조연출을 불렀다.

“저 사람은 여기서 뭐하고 있대?”

“조금 이따가 쉬는 시간 기다리고 있다는데요.”

“왜? ……아.”

무슨 용건인지 알 것 같아서 그저 웃음만 나왔다. PD가 조연출에게 지시를 내렸다.

“쉬는 시간에도 카메라 놀리지 말고. 한 두어 대 정도 돌리고 있어 봐.”

그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재미있는 장면이 하나 나올 거 같으니까.”

*   *   *

“잠시 쉬었다 가겠습니다!”

녹화의 전반부가 끝났다. 겨우 절반 끝났는데, 왜 이렇게 삭신이 쑤시는지 모르겠다.

“어우…….”

쭉쭉 기지개를 켜면서 찌뿌둥한 몸을 풀어 주었다. 한조가 내게 말했다.

“어우, 이거 은근 힘드네요.”

“그러니까요. 앉아 있기만 했는데도 뻐근하네.”

담뱃갑을 챙겨 들고 떠나던 MC 하나가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야, 너 아까 잘하더라.”

“감사합니다!”

“이따가도 이만큼만 해 줘.”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꾸벅 숙일 때였다.

“음?”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촬영장 구석에 서 있는 한 남자.

처음에는 매니저인가 싶었는데 목에 사원증을 걸고 있는 방송국 직원이었다.

“……?”

눈이 마주치자 상대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한조가 물었다.

“아는 사람이에요? PD님 같은데.”

“아뇨. 처음 보는 분이에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구석진 곳에 서 있던 상대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내 근처에서 핸드폰을 보던 구선웅이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화장실로 떠났다.

이윽고 다가온 남자가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우주 씨.”

“네. 안녕하세요.”

“지나가다가 들렀는데 방송 너무 잘하더라!”

보기만 해도 마음에 든다는 듯 상대가 나를 칭찬했다.

“말주변도 좋고. 마스크도 호감 가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시청자들이 좋아할 거 같아.”

“감사합니다.”

빈말이라도 감사하다고 생각하는데, 상대가 손사래를 치더니 나를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우리 프로에도 부르고 싶더라고.”

“감사합니다. 불러주시면 저야 너무 감사하죠.”

“안녕하십니까. 피디님.”

옆에 있던 한조가 고개를 꾸벅 하면서 인사하자, 상대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도 인재가 하나 있었네.”

“헛, 감사합니다.”

한조가 ‘피디님이 날 마음에…!’ 하면서 좋아했다. 그 동안 근처에 있던 두 아이돌 선배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 반응이 뭔가 미묘해서 촉이 마구 오기 시작했다.

“…….”

설마 아니겠지.

내가 침을 꿀꺽 삼키며 상대의 정체를 물어보려고 할 때였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아직 자기 소개를 안 했네. 나 여기 예능국 피디에요.”

“저, 피디님.”

“네?”

“혹시 지금 맡고 계시는 프로그램이…….”

“아. 우리 프로.”

그때까지만 해도 활짝 웃고 있던 한조와 내 얼굴이, 이어지는 말에 충격과 공포로 물들었다.

“‘사나이가 간다’라고, 주말에 하는 거 있어요.”

“…….”

“둘 다 괜찮아요? 갑자기 안색이 창백한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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