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260)화 (260/1,031)

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260화

“한국어로 옮기면 ‘기묘한 토크쇼’라는 곳인데, 일본에서 꽤 메이저한 예능이야.”

“얼마나 유명한데?”

찝찝함을 감추지 못하는 석환 형의 모습에 호기심을 느꼈다.

도대체 무슨 프로그램이기에 이 사람이 찜찜함을 감수할 만큼 메리트를 느끼고 있는 걸까.

“작년도 일본 예능 시청률 순위에서도 순위권에 든 프로그램이야. 아마 5위였던가.”

“흐어…….”

우리는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가슴이 벌렁벌렁하다.

그냥 메이저 수준이 아니잖아?

일본 지상파 예능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프로그램이라니. 왜 저 형이 혹했는지 바로 이해했다.

“대박…….”

차량에 탄 스탭들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모두가 비슷한 반응이었다.

그럴 만했다.

지금이야 바람꽃으로 떠서 이곳저곳 나가지만, 전에는 지상파 예능 한 번 출연하려면 석환 형이 지문이 닳도록 손을 싹싹 비비고 다녀야 했으니까.

저 형이 방송국 스탭들에게 쓴 커피 값만 몇 백은 될 걸.

그런데 우리가 유명하지도 않은 외국에서 예능 섭외가 들어왔다니.

그것도 저 정도의 인기 프로그램에서.

믿기 힘들 만큼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고 할까.

“꽤 찜찜한데요.”

리혁이가 내 생각을 대변했다.

“한국이면 그러려니 하는데, 일본 지상파 예능에서 불러준다고요? 우리 팬들 말고는 뉴블랙을 아는 사람도 없을 텐데. 뭔가 꿍꿍이가 있다거나, 아니면 포맷이 이상한 거 아니에요?”

“맞아여. 저 예전에 일본 예능에서 고생하는 선배님들 사진 본 적 있는데.”

2세대 아이돌 선배들이 이상한 예능에서 봉변을 당한 일화들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일본 예능에서 돌고래랑 술래잡기한 선배도 있었지.

매니저가 고개를 저었다.

“포맷도 정상적이야. 예능 중에서도 젠틀한 편에 속해. 우리나라보다는 다소 자극적이지만.”

“그래요?”

“버라이어티랑 토크쇼의 중간이라고 보면 돼. 게스트를 불러놓고 토크나 게임을 하는 프로그램이거든. MC도 유명한 개그맨 트리오야.”

“……괜찮은데?”

메이저한 예능인데 포맷도 정상적이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물었다.

“그럼 남은 건 우리 애들 놔두고, 왜 나 혼자 부르냐는 건데. 결국에는 그게 문제인 거지, 형?”

“맞아. 그거야.”

“나를 섭외하는 이유가 뭐래?”

“너희 아버님과 관련된 일이야.”

“……우리 아빠?”

여기서 아빠 얘기가 나올지는 몰랐는데.

상대가 설명했다.

“아버님이 일본에서 인기가 대단했나 봐. 지금도 사람들이 다 이름을 기억한다고 하더라. 워낙 이런 분야에 관심이 많은 나라기도 하고.”

아빠가 일본에서 인기가 많았구나.

인터넷에 검색을 해도 대부분 미국이나 유럽 쪽 사진만 나와서 잘 모르고 있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90년대의 우리 아빠, 선명주는 일본에서 지금의 한류 열풍과 버금갈 만한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한국에 이어서 일본에서 활동을 하다가 세계로 활동반경을 넓혀간 것이라, 여기서도 은근히 자국 아티스트 비슷한 포지션으로 취급한다나.

일본에서는 소위 ‘아시아가 키워낸 천재 뮤지션’이라고 불린다는 모양이었다.

……묘하게 뉘앙스가 거슬리지만 넘어가야지.

“네가 아이돌로 데뷔했을 때도 여기 언론에서 꽤 관심 있게 다뤘다더라. 물론 아직은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적지만.”

“결국 유명 피아니스트의 아들로 출연해 달라는 거네.”

“뭐, 그렇지.”

대강 출연하는 이유는 납득이 갔다.

굉장한 인기를 끌었던 외국 아티스트의 아들이 아이돌이 되어 일본 활동을 시작하는 스토리.

하지만 이 정도 사유로 석환 형이 찜찜해할 리가 없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객관적으로 나쁘지 않으니까.

내 개인적인 호불호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이건 일본 대중들에게 뉴블랙의 이름을 단번에 알릴 수 있는 기회였다.

그렇다면 문제가 뭘까.

다년간 쌓인 눈칫밥 덕분에 머릿속이 빠르게 굴러갔다.

“게스트가 문제구나.”

“……어떻게 알았어?”

흠칫하는 석환 형과 ‘무슨 소리지’하며 눈을 깜빡이는 동생들이었다.

“상식적으로 그런 예능에 외국인 한 명만 출연할 리가 없잖아. 같이 출연하는 게스트가 있겠지.”

시청률 좋고, 포맷도 건전하고, 섭외 사유도 그럴듯하면 남는 문제는 바로 하나다.

바로 게스트.

멤버들을 빼고 나만 콕 찝어서 불렀다는 건 이유가 있을 터였다.

석환 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게스트가 영 찜찜해서.”

“누군데 그래?”

“하시모토 켄타라고, 일본에서 촉망 받는 신예 피아니스트래.”

“……?”

“그쪽 아버지가 예전에 너희 아버님이랑 일본에서 라이벌 비슷한 관계였다고 하더라고.”

“그래…?”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애기 때 아빠 친구라고 했던 사람들의 라인업을 떠올려 보는데, 그중에 매치되는 이름이 없다.

게다가 이상한 점도 있었다.

“우리 아빠는 라이벌이 없던 사람인데.”

업계에서 압도적인 1인자로 불렸던 사람이 선명주였다.

그 정도로 하니까 그 시절에 미국이랑 유럽 같은 동네에서 박수갈채를 받을 수 있었던 거지.

라이벌이 있었다면 아들인 내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쪽에서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냐?”

“여기서는 유명하대. 라이벌 관계가.”

“……뭐지.”

내 기억이 잘못됐나.

그런 사람이라면 아빠 입에서 한 번쯤이라도 얘기가 나왔을 법한데.

왠지 아빠의 머릿속에서 존재감이 미미하셨던 분 같은데.

“그… 라이벌 분의 아들이랑 같이 출연해 달라는 거야?”

“그래.”

석환 형의 말에 비주가 눈매를 좁혔다.

“저는 좀 수상한 거 같아요. 자기네 피아니스트 띄우려고 우주 형 부르는 거 아니에요?”

“맞아여. 갑자기 피아노 대결시킬 수도 있음.”

“찜찜해요. 이거 영 찜찜해.”

“저도 예감은 나쁘지 않은데, 뭔가 좀…….”

동생들의 무게추가 확 반대쪽으로 기울었다.

그 반응에 석환 형도 조금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내심 별로였던 모양이다.

객관적으로는 인지도를 높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지만 반대로 그만큼 찜찜하기도 했으니까.

그렇다고 아티스트 의사를 묻지 않고 거절하기에는 또 애매하고.

그래도 한 명쯤은 ‘이거 기회니까 나가 보는 거 어때’ 하고 말할 법도 한데.

스탭들까지 가세해서 다들 ‘우주야, 이거 좀 쎄하다’ 하며 이구동성으로 말리는 중이었다.

마침내 내가 입술을 뗐다.

“좋은 기회지만 사양할래.”

인지도를 쌓는 측면에서는 좋을지 몰라도, 지금으로선 그 인지도가 플러스일지 마이너스일지 예측할 수 없었다.

인지도야 생기겠지.

다만 저쪽에서 악의적으로 편집해 버리면 활동 시작 전부터 괜히 비호감으로 낙인찍힐 수 있었다.

게다가 현실적인 문제점도 있었다.

“방송 나가면 저쪽에서 원하는 라이벌 관계에 대한 토크를 해야 하는데. 내가 아는 게 하나도 없거든. 거짓말로 때우는 것도 이상하고.”

“그럼 에이전시 통해서 거절한다고 말할까?”

“응. 부탁할게요.”

혹시나 내가 아쉬움을 느끼기라도 할까봐 신경 쓰였던지, 동생들과 스탭들이 잘 거절했다고 말했다.

“잘했어요. 형.”

중현이가 흐뭇하게 웃었다.

“원래 모르는 사람이 맛있는 거 준다고 해서 따라가면 안 되잖아요.”

“…그, 고맙구나. 중현아.”

“젤리 줄까요?”

착한 어린이, 하면서 칭찬하듯 중현이가 젤리를 손에 올려 주었다.

어딘가 미묘한 기분으로 열심히 받아먹었다.

그 동안 우리가 숙소로 잡은 도쿄의 호텔이 점점 시야에 들어왔다.

*   *   *

“출연할 겁니다.”

일본 NTN 방송국의 회의실. 남자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서로에게 윈윈이니까요. 출연을 안 할 이유가 없습니다.”

“정말 출연을 할 것 같나?”

“100퍼센트입니다.”

피디가 말했다.

“상대는 일본에서 활동을 시작하려는 아이돌입니다. 한국 아이돌이 자리를 잡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요.”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대형 기획사의 인기 아이돌도 인지도를 쌓기 위해 밑바닥부터 몇 년을 투자하는 곳이 일본 시장이다.

하물며 뉴블랙은 막 데뷔한 중소 기획사의 신인.

유명 지상파 예능이 내미는 손을 거절할 만한 급이 아니었다.

“윈윈이죠. 저쪽에서는 인지도를 얻고, 켄타 군은 지금의 천재 피아니스트 이미지를 더 널리 알릴 기회고요.”

“기대되는군.”

맞은편에 앉은 중년 남자, 하시모토 겐지가 흐뭇한 미소를 보였다.

그렇게 웃는 일본의 대표 피아니스트 옆에는 근사한 미모의 청년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하시모토 켄타.

일본 클래식계의 떠오르는 샛별이자, 각종 대회에서 여러 차례 우수한 성적을 거둔 유망주였다.

그가 빙긋 웃으며 물었다.

“방송 내용은 뭘 준비하면 될까요, 피디님?”

“편하게 와. 켄타 군이야 가만히 있기만 해도 그림이 사니까 말야.”

“과찬이세요. 그런 방송 이미지도 피디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하하.”

켄타 군은 언제 봐도 예의 바르단 말이야, 그리 생각하며 껄껄 웃던 피디가 두 남자에게 말했다.

“토크와 함께 게임도 진행할 거예요. 아마 저쪽에서는 통역사를 쓰느라 의사소통에 한계가 있어서, 적당히 분량을 가져갈 겁니다. 포커스는 엄연히 켄타 군이고요.”

“흐음…….”

하시모토 겐지가 턱을 쓰다듬었다.

“게임이라면, 피아노 대결이라든가. 그런 류를 넣어 보는 건 어떤가?”

“과연. 시청자들이 재미있어 할 포인트를 알고 계시는군요, 선생님. 적극 고려해 보겠습니다.”

“고생이 많구먼.”

하시모토 겐지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러면서 한 남자를 떠올렸다.

선명주.

하시모토가 일본에서 자리를 잡아 갈 때, 혜성처럼 등장한 한국의 재즈 피아니스트.

새파랗게 어린 주제에 이미 완숙한 경지에 오른 자신의 라이벌이란 호칭이 붙더니, 얼마 가지 않아 라이벌이란 호칭도 떼어버린 채 세계적인 레벨로 성장했다.

‘……아직도 분하군.’

쓰라린 패배의 기억이 여전히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하시모토의 시선이 막내아들에게로 향했다.

그쪽 자식은 한국 아이돌이라고 했던가.

K팝이니 뭐니 하지만, 그런 저급한 음악을 하는 자와 촉망받는 클래식계의 유망주인 그의 아들은 비교가 불가능했다.

‘세계적으로 알려지는 건 내 아들일 테니까.’

클래식계의 유망주인 아들은 이제 방송을 통해 얼굴을 더 널리 알릴 예정이었다.

이번 토크쇼 출연은 그 계기가 되어 줄 것이다.

과거 라이벌이었던 두 피아니스트의 아들이 만나는 특집.

이것을 발판으로 삼아서 더 높이 올라가는 거다.

물론 이쪽에게만 이득인 일은 아니었다.

그쪽에게도 나쁠 것이 없었으니까. 피디의 말대로 그들에게도 일본에서의 인지도가 필요하다.

“키워드는 어떻게 잡을까요? 왕자님들의 부친은 세기의 라이벌? 아니면 운명의 라이벌?”

“숙명의 라이벌은 어떤가?”

“그도 좋군요.”

피디가 싱글벙글 웃고, 테이블에 둘러앉은 모두가 화기애애하게 차를 마실 때였다.

“피디님!”

회의실의 문이 열리고 제작 스탭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이번에 뉴블랙 우주 군 출연 말입니다.”

“아, 올 것이 왔군.”

미소를 짓던 피디가 기대하는 눈으로 물었다.

“그래. 뭐라고 하나. 출연한다고 하지?”

“안 나온다는데요.”

“……뭐?”

피디가 자세를 고치고 물었다.

“누가 안 나온다고?”

“뉴블랙의 우주 군이요.”

“…….”

잠시 일시정지 상태에 빠졌던 피디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룹 출연 아니면 안 나오는 게 원칙이래요.”

“아하.”

그가 다시 여유로움을 찾을 때, 하시모토 겐지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계획이 틀어지는 건 아닌가?”

“절대 아닙니다.”

피디가 말했다.

“신인 주제에 까다롭게 구는 겁니다. 다 같이 출연하려고 협상을 시도하는가 본데 이럴 땐 강하게 나가면 됩니다. 선생님.”

그가 스탭에게 말했다.

“출연을 원치 않다면 안 해도 된다고 해.”

“네, 피디님.”

“5명은 무리라고 강조해. 단호하게.”

이렇게 말하면 한 명이라도 좋으니 출연하게 해 달라고 굽힐 게 뻔했다.

‘조금 있으면 말이 달라지겠지.’

피디가 흐뭇하게 웃으며 차를 들이킬 때였다.

10분 후.

“안 나온다는데요.”

“…….”

“바로 오케이 하는데,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어요.”

“…….”

피아니스트 부자가 고개를 스윽 돌리자, 피디의 얼굴이 다급해졌다.

*   *   *

K팝 콘서트 행사장으로 이동하는 차량 안.

“이번에는 그룹으로 불렀다고?”

“응.”

“방금 전까지는 됐다고 하지 않았어? 출연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말라고 했다면서.”

“그랬지. 나도 이게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

그룹 아니면 안 나갈 거라고 에둘러서 거절하니, 기다렸다는 듯 출연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알았다고 해서 끝난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그룹 모두 출연하는 걸로 합의 보자는 제안이 돌아왔다.

더 수상하다.

그리고…….

“왜 이렇게 질척거린데? 안 나간다고 전해 줘. 형.”

*   *   *

“안 나온대요.”

“…….”

“중현이란 멤버가 요즘 컨디션이 안 좋아서 어려울 거라고….”

“…….”

피디가 눈을 깜빡였다.

문득 자료 조사를 하다가 발견한 한국 유명 예능의 장면이 떠올랐다.

‘요괴 같은 염소도 때려잡던데…?’

제작 스탭이 말을 이었다.

“피디님, 촬영 준비하려고 구매한 소품은 어떻게 할까요. 환불할까요?”

“…….”

“지금 대본도 새로 써야 되는데….”

“…….”

“피디님?”

“…….”

멍한 표정을 짓는 피디.

찻잔을 들이키던 그의 손이 잠시 달달 떨렸다.

주르륵-

“피디님. 괜찮으세요? 옷에 차가…….”

제작 스탭이 분주하게 티슈를 뽑아 건네주었다.

그 동안 피디의 옷을 적시는 차의 색처럼, 세 남자의 얼굴이 짙은 흙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들이 준비한 계획이 첫 스텝부터 꼬이는 순간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히 계획은 완벽했는데…….’

이런 기회를 누가 마다하겠냐고 생각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분명 뉴블랙의 우주가 TV 예능에 출연하면서 계획이 완성될 예정이었는데.

반드시 그래야했는데…….

뉴블랙이 안 온다.

‘안 오네.’

‘설마 진짜 안 오나?’

분명 그들의 계획은 완벽했다.

단지 뉴블랙이 오지 않을 뿐…….

*   *   *

사나이가 간다 PD님만큼 끈질긴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일본 방문 이후로 랭킹 1위가 바뀌었다.

기묘한 토크쇼의 제작진으로.

중현이의 컨디션이 별로라는 핑계를 댔더니 그럼 언제쯤 괜찮아질 거 같냐고 물었다.

촬영 스케줄은 얼마든지 조정할 수 있다고.

마치 ‘토요일에 절 가요’, ‘일요일에 교회 가요’하고 거절하는데, 1년 내내 빈 스케줄이 없냐고 묻는 사람 같다고 할까.

“인터뷰?”

“하시모토 측에서 인터뷰를 합동으로 해 보면 어떠냐고 제안을 했다고 하더라.”

“……진짜 끈질기네.”

“과거의 인연도 있는데, 이번 기회로 친분을 다지고 싶대.”

식사도 호화롭게 제공해 준다고 하더라, 라는 말을 듣는데 웃음만 나왔다.

처음에는 의도를 짐작하기가 어려웠는데, 이쯤 되니 뭘 하고 싶어 하는지 의도가 너무나 투명했다.

누가 이런 거에 넘어가냐고 하겠지만, 이것저것 제시하는 게 혹할 만한 것들 투성이었다.

우리가 만약 위태위태한 상황이었다면 바로 유혹당했을 만한 제안이라고 해야 하나.

다만 우리가 급하지 않았을 뿐이다.

일본 시장이 해외 K팝 시장 중에서도 중요한 곳이긴 하지만, 저런 지푸라기까지 잡아야 할 만큼 위태로운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일단 한국에서도 잘나가고 있고, 무엇보다 일본에서도 조짐이 좋았다.

“꺄아아아악……!”

컨벤션 센터에 따로 마련된 행사장.

이곳에 마련된 팬 부스에 선 우리는 K팝 콘서트의 전날 행사를 소화하는 중이었다.

수플레들 진짜 많네.

우리가 손을 흔들 때마다 비명이 튀어나오고, 카메라 셔터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중간중간 한국 팬들의 얼굴도 보였다.

「진짜 귀여워. 진짜 귀여워.」

「우주 군!」

「젠민아아아-」

뭐야. 마지막 누구야.

젠민 소리에 깔깔 웃는 동생들에게 눈을 흘겼다.

막 웃던 비주가 ‘제임스!’ 하고 들린 소리에 웃음을 멈추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번엔 내가 박수를 치며 웃었다.

비주의 눈이 가늘어지자, 우리 막내가 열심히 손뼉을 치며 응원했다.

“싸워라. 싸워라. 둘이 사이 나빠져라.”

“넌 또 왜 그러냐.”

“그야 당연히….”

“당연히?”

“둘이 싸우면 서로 저한테 잘 보이려고 할 거 아니에여.”

“이야. 우리 막내는 생각하는 게 참 어메이징하시다.”

박수를 치며 감탄하던 내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닐걸. 너 나랑 비주랑 싸우면 말 셔틀 행이야. 지호야, 비주한테 화 풀라고 전해. 이런 식으로.”

비주도 웃으며 끼어들었다.

“그래. 지호야. 우주 형한테 밥 먹으라고 전해 줄래?”

“지호야. 비주한테 알았다고 해줘.”

“지호야. 지호야.”

“지호야~ 지호야~”

“……그냥 둘 다 싸우지 말고 행복하게 오래 살아여. 제발.”

귀를 막는 막내의 모습에 우리가 키득거렸다.

즐거운 분위기였다.

떠들썩한 부스에서 팬들과 대화를 할 때마다 기분이 업 된다고 할까.

외국에 있지만 세상살이는 어디든 비슷한 것 같다.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이용해 보려고 드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우리를 애정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팬들도 있고.

대만, 상하이, 싱가포르, 일본…….

어디를 가든 수플레의 표정은 그린 것처럼 똑같다.

눈동자들이 반짝반짝해서 투명한 냇물에 비치는 조약돌 같다고 할까. 예쁜 돌을 손에 쥐듯 지금의 눈들을 기억에 차곡차곡 담았다.

「내일 콘서트도 오시는 거죠?」

「네!」

리혁이가 일본어로 소통을 하고 우리가 물개박수를 치는 동안 회사 직원들이 완판된 굿즈를 보며 흐뭇해했다.

반대로 일본 팬들의 눈빛은 서글펐지만.

표정을 보니 조만간 일본 팬들도 대표님의 이름을 알게 되지 않을까 싶다. 아마 ‘규호 쟝…’ 이러지 않을까.

「저 여러분 만나서 너무 좋아요!」

그리고, 오늘 가장 들뜬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리혁이었다.

함박웃음을 짓는데, 얘가 이렇게 웃는 건 로봇 청소기 상자를 개봉한 이후로 처음 본다.

행사가 끝난 후에도 리혁이의 얼굴에는 홍조가 가득했다.

“배운 걸 써먹을 수 있다는 게 참 좋지 않아요? 내가 진짜 일본어 원 없이 쓰고 갈 거예요.”

그러면서 ‘기다려라, 스페인…! 남미…!’ 이러면서 예고까지 하는 모습에 웃었다.

“참, 맞다. 그런데 왜 다들 일본어 안 써요? 기초 회화 말고도 어느 정도 문장 구사할 줄 알잖아요.”

우리가 슬그머니 웃자, 녀석이 눈치를 챘다.

“설마 나 배려하겠다고 다들 자제한 거예요? 그럴 필요 전혀 없는데.”

“왜?”

“아니, 어차피 배려 안 해도 내가 제일 잘하잖아요. 다른 사람이 일본어 쓴다고 해서 내가 위기감 느끼고 그럴 일은 없어요. 절대.”

녀석이 ‘절대’를 강조했다.

자기만큼 열심히 공부한 사람은 없을 거라며 자신만만하게 웃는 모습에 우리가 알았다고 답했다.

내가 슬그머니 웃을 때였다.

“얘들아, 다음 행사 가자!”

“네!”

오늘의 마지막 행사는 팬들 앞에서 간단한 토크와 게임을 하는 토크 콘서트였다.

*   *   *

행사장 중앙에 마련된 토크 콘서트 장소.

연단 위로 올라오는 다섯 미남에 수플레들이 기쁨 가득한 비명을 질렀다.

‘뉴블랙이다!’

MC와 반갑게 인사를 나눈 다섯 멤버가 자리에 앉았다.

학처럼 길쭉하게 뻗은 다리. 저마다 핏 좋게 어울리는 하늘하늘한 남방에 눈길이 갔다.

「그럼 자기 소개 부탁드릴게요.」

MC의 멘트를 통역사가 옮기자, 막내부터 자기 소개를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지호입니다…! 이건 반가움의 하트!」

양손으로 큰 하트를 그리는 모습에 팬들이 환호한 후.

이번에는 에헴, 에헴하는 새하얀 얼굴이 마이크를 잡았다.

「안녕하세요. 뉴블랙에서 메인 보컬을 맡고 있는 서리혁입니다. 팬분들을 만나서 정말 기뻐요. 오늘 우리 재미있게 놀아 봐요.」

유창한 일본어에 팬들이 비명을 질렀다.

스스로도 자신의 일본어 실력에 뿌듯해하는 하찮은 모습.

‘귀여워…….’

‘완전 좋아한다.’

‘일본어 엄청 잘하네. 공부 많이 했구나.’

이어서 뉴블랙의 래퍼, 메인댄서까지 소개를 이어 나갔다.

「랩랩, 중현입니다. 사랑해요.」

「안녕하세요. 비, 비주입니다…! 뉴블랙에서 춤을 맡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리더가 마이크를 잡고, 꽃 같은 미소를 흘렸다.

「안녕하세요. 우주입니다. 오늘 와 줘서 고마워요, 수플레.」

일순간 일본 수플레들 사이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뭐야.’

‘일본인인 줄…….’

리혁이 현지인처럼 고급스러운 어휘를 구사한다면, 이쪽은 기초적인 어휘에도 불구하고 발음이 엄청 좋았다.

어디 나카무라 상이라고 해도 될 만큼 자연스러운 발음에 팬들이 신기하단 표정을 지을 때.

“……!”

근처에 앉아 있던 리혁의 얼굴이 위기감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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