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283화
직원들이 뉴블랙과 대화를 이어 나가는 동안 회의실에 또 다른 사람들이 들어왔다.
바로 4집 앨범에 참여한 작곡가들이었다.
예명으로 ‘솔트맨’을 쓰고 있는 유창석이 소금기 가득한 얼굴을 문지르며 자리에 앉았다.
“소식 듣고 올라왔는데, 타이틀곡이 완성되었다고요?”
“완성까지는 아니고요.”
우주가 웃으며 설명했다.
“저희 컨셉이 흥 폭발이잖아요. 대략 어떤 느낌으로 가야 할지 감을 잡아서 곡을 썼어요.”
“벌써?”
“네. 어쩌다 녹음까지 하게 됐는데 퀄이 생각보다 너무 잘 뽑혔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분들 의견을 묻고 싶었어요.”
“아…….”
우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여전히 의문이 맴돌았다.
‘벌써 만들었다고……?’
각자 타이틀곡을 준비해 오자고 말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벌써 완성해 버렸다니.
하지만 미심쩍은 것보다는 호기심이 더 컸다.
상대의 음악적 기준이 얼마나 높은지 알기 때문이었다.
-우주 씨, 이 정도면 충분한 거 같은데. 수록곡들까지 이 정도 퀄리티인 앨범들은 대형 기획사에서도 몇 없어. 진짜 웰메이드야.
-그래요? 여기 사운드가 좀 비어 있는 느낌이 나는데.
-그, 그만해도 될 것 같…….
-안 되겠어요. 이건 고쳐야 돼요.
어지간한 수준으로는 만족을 못하는 우주였다.
평소 때는 넉살 좋게 하하 웃는데 음악만 관련되면 사람이 아예 180도로 바뀌었다.
노래에 미친 사람처럼 보인다고 해야 하나.
곡 전체의 흐름을 보면서도 디테일을 현미경 수준으로 신경 쓸 정도였다.
건물을 만들 때 엘리베이터 버튼 모양까지 고려하는 수준이라고 할까.
뉴블랙의 성공 비결이 궁금해서 프로젝트에 지원한 작곡가들은 이내 그 비결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바로 근성이었다.
-퇴근 안 해요? 지금 새벽 1시인데.
-조금만 더 하고 들어갈게요. 먼저 들어가세요.
그렇게 다음 날 출근하면 어제와 똑같은 자세 그대로 모니터를 노려보며 중얼거리는 누군가가 보이곤 했다.
솔직히 무서웠다.
동시에 ‘아, 저 정도까지 하는데 성공해야지’ 하며 저도 모르게 납득하게 된다고 할까.
그런 까닭에 잘 뽑혔다는 우주의 말을 들은 작곡가들의 귀가 쫑긋거렸다.
‘얼마나 잘 뽑혔길래 그러지?’
작곡가 유창석이 우주 뒤에서 의기양양해 하는 졸개들을 바라보는 동안 나상윤이 말했다.
“한 번 들어 볼 수 있을까요.”
“네. 잠시만요.”
우주가 회의실 스피커에 노트북을 연결했다.
그 동안 성큼성큼 걸어가 벽에 귀를 가져다 댄 중현이 진지한 얼굴로 OK 사인을 그렸다.
보안이 완벽하다는 사인에 멤버들이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목은 숫자 9를 의미하는 나인이에요.”
우주가 작곡가들에게도 곡에 대한 의미를 다시 한번 설명했다.
“오…….”
“의미가 좋은데. 흥 폭발하는 컨셉에도 어울리고.”
“장르는요?”
마우스를 딸깍거리던 우주가 답했다.
“트랩 쪽으로 잡았어요.”
“아. 트랩.”
아직 한국에서는 크게 유행을 타지는 않은 장르지만, 해외에서 덥스텝의 자리를 대신해서 인기를 얻어 가고 있는 장르였다.
작곡가들이 눈빛을 교환했다.
‘애매한데…….’
트랩은 아직 국내 아이돌 음악에선 메이저한 장르는 아니었다.
헌데 뉴블랙이 현재 음원 시장에서 포지셔닝된 위치는 ‘3세대에서 유일하게 대중성 좋은 보이 그룹.’
지금까지 나온 타이틀곡 대부분이 대중에게 선택을 받은 만큼 네 번째 앨범에서도 그 기조를 이어 가려고 하고 있었다.
문제는 대중들은 낯선 장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데.
“들으시면 이게 장르가 딱 뭐다, 하고 정의하시기 어려울 거예요. 미래 지향적인 사운드도 넣어서.”
“…….”
“백그라운드에서 부우웅 부웅 하는 느낌 있잖아요.”
설명이 이어질수록 뭔가 온갖 것을 버무린 듯한 느낌이라 작곡가들은 미심쩍은 기분을 숨길 수 없었다.
“그럼 ‘나인’의 첫 번째 버전, 가겠습니다.”
마침내 노래가 재생됐다.
“……오.”
부웅 하는 느낌의 사운드가 뒷배경을 채워 주는 가운데 처음부터 임팩트 있는 전주가 이어졌다.
이내 본 가사가 흘러나왔다.
고기 고기 고기
고기 이젠 못 먹어
다이어트야 (so sad)
지호가 한껏 저음으로 목소리를 깔고 부르는 첫 소절이었다.
목소리 톤은 멋있었다.
‘헌데 가사의 상태가……?’
흠칫한 작곡가들과 A&R팀에게 막내가 해맑게 ‘대충 가사 붙였어여’ 하고 입모양으로 말했다.
모두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호에 이어서 리혁이 파트를 받았다.
고기 못 잃어 나
너 고기 있냐 난 여기 있다
나는 꿈 꿔 (고기?)
We meat again (고기!)
맞은편에서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귀에서 불꽃을 뿜어내는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다른 멤버들이 ‘이번엔 저희가 가사를 썼어요’ 하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A&R팀 직원들이 훈훈하게 웃었다.
‘절대 작사하지 마라. 너희.’
‘작사 한 번 더 하면 우리가 작살나겠네.’
‘가이드라 다행이야…….’
이어서 우주의 파트가 흘러나왔다.
소위 말하는 간지 나는 춤이 들어갈 만한 댄스 느낌의 파트였다.
듣다 보면 센터에서 멤버들의 백업을 받으며 몸을 신나게 꺾을 우주의 모습이 그려진다고 할까.
지금 시각 9AM
모닝 삼겹살이야
나 혼자 5인분
다른 손님들 시선 따윈
신경 쓰지 마 (쓰지 마)
사장님이 행복하잖아
이어서 비주의 파트가 흘러나왔다.
부드럽게 부르다가 살짝 긁는 듯한 목소리로 후렴구 직전의 분위기를 강하게 돋웠다.
중요한 건 고기니까
You must remember
고기
That’s all we’ve got
노래가 흘러나오는 동안 맞은편에 앉은 비주가 노래에 맞춰 즉흥 안무로 상체를 흔들었다.
쓸데없이 고퀄리티였다.
이어서 후렴구의 빵 터지는 파트에서는 중현의 목소리가 후렴구를 묵직하게 잡아 주었다.
‘트랩은 톤이 생명인데, 잘 살렸네.’
첫 번째 버전인데도 멤버별 목소리 특색이라든가, 퍼포먼스 특징에 맞춘 파트 분배가 완벽했다.
그들이 수록곡 작업을 하면서 매번 ‘이 파트 누가 해야 되지?’ 했던 고민에 대한 모범 답안을 보는 듯한 느낌.
리스너로서 가볍게 듣기 시작한 1절이 끝난 후 A&R팀과 작곡가들의 눈빛이 깊어졌다.
일단 한 가지는 확실했다.
‘잘 만들었다.’
그에 대해선 이견이 없었다.
곡에 있어선 누구보다 완벽주의인 우주가 선뜻 들어 보라고 할 만큼 테스트 버전인데도 퀄이 좋았다.
가사만 고친다면 당장 발매해도 무난할 정도.
초안인 만큼 고칠 부분이 계속해서 귀에 들어오긴 했지만 그건 천천히 고민해도 될 문제였다.
“와…….”
한편 그들이 감탄한 것은 바로 노래의 포인트였다.
강약을 절묘하게 조절하면서 후렴구로 빵 터뜨리는 형식이었는데 절로 흥이 난다.
말 그대로 흥 폭발.
듣다 보면 내적 댄스 감각이 움찔움찔한다고 할까.
또한 지금까지 뉴블랙이 만들어 온 음악적 특징에도 잘 부합했다.
잔잔한 것을 좋아하는 취향이라면 몰라도, 일반 대중들의 취향에도 딱 부합할 듯했다.
“고기, 고기…….”
어느샌가 고기를 흥얼거리며 턱을 까딱까딱하던 작곡가들과 A&R팀 직원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대박이다.’
‘대박이네…!’
낯선 노래를 듣자마자 흥얼거리게 된다는 것 자체가 대박의 징조였다.
A&R팀 직원들이 누가 이 노래를 채 가기라도 할까 봐 걱정되는지 회의실 바깥을 흘깃거리고.
작곡가들이 ‘뉴블랙 앨범에 참여하길 잘했다’ 하며 스스로의 선택을 칭찬하고 있을 때.
“오……!”
“댄브 파트네. 댄브.”
모든 걸 터뜨리는 3절.
1절과 2절에서부터 단계적으로 고조된 분위기가 폭발했다.
댄스 브레이크 부분.
노래만 듣는데도 무대에서 폭죽이 터지고 뉴블랙 멤버들이 미친 듯이 몸을 움직이는 모습이 상상됐다.
진지한 얼굴로 듣던 작곡가들까지 ‘아아’ 하며 고개를 들자 뉴블랙이 환하게 웃었다.
격한 춤을 추게 될 미래를 생각하면서 구슬피 웃는 누군가를 제외하면.
그렇게 노래가 끝나고 난 후.
“…….”
작곡가들과 A&R팀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너도?’ ‘ㅇㅇ’ 하는 느낌의 머쓱한 미소를 주고받던 그들이 작게 손뼉을 맞부딪혔다.
우주가 물었다.
“어떠세요?”
“그.”
“그…?”
“앞으로 리혁이 빼고 작사는 하지 말자. 얘들아.”
A&R팀장의 말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한결 편해진 분위기 속에서 팀장이 잇몸까지 드러내며 웃었다.
“진짜로 좋은데? 야, 너 어디서 또 이런 걸 가져온 거야?”
“어린 친구들의 도움이 있었어요.”
“하긴, 지호가 약간 신세대라서 그런 감성이 있지.”
“하하하…….”
부끄러운지 민망하게 웃는 우주와 시선을 피하는 멤버들이었다.
“아무튼 타이틀 곡 걱정은 덜었는데? 이대로 바로 진행시키자.”
“정말요?”
“작곡가 분들 의견도 들어 봐야겠지만, 우리는 뭐…….”
서필근 대리를 비롯한 다른 직원들이 말할 필요도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거 아니면 다른 타이틀이 상상이 안 가. 이제.”
“그러니까요. 고기. 고기. 고기.”
“작곡가분들은 어떠세요?”
작곡가들도 입을 모아 대답했다.
“저희도 마음에 드는데요.”
“처음에 설명만 들었을 때는 온갖 장르가 뒤섞인 느낌이었는데, 듣고 나니까 진짜 잘 뽑힌 거 같습니다.”
“제목이 뭐였죠? 너무 신나서 까먹어 버렸어요. 아… 나인.”
그때 나상윤 작곡가가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중간에 꼭 초등학생들이 좋아할 만한 EDM 같은 느낌이 나서 신경 쓰이긴 하는데…….”
뉴블랙 멤버들이 움찔할 때, 그가 웃으며 말했다.
“톤이야 다 조정할 테니까 상관없지 싶네요. 진짜 마음에 들어요. 솔직히 뭐든 좋으니 한 발 걸치고 싶은 곡이에요.”
자리에 있는 작곡가들 모두가 공감하듯 웃었다.
곡에 대한 흥분 때문인지 회의 분위기는 한껏 업되어 있었다.
A&R팀은 그들대로 앨범 제작이나 컨셉에 대한 아이디어가 폭발해서 다들 회의실에 짐을 푸는 중이었고.
작곡가들은 그들대로 신이 나서 곡에 대한 보완점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껏 달아올랐던 회의 분위기가 차츰 차분하게 변할 때쯤, 우주가 물었다.
“참. 그러고 보니 다른 분들도 곡을 알아보신다고 했잖아요.”
“그랬지. 그런데 우주 네가 곡을 너무 빨리 만들어 와서 다른 곡들을 살펴볼 시간이 없었어.”
“아…….”
“타이틀도 잘 뽑힌 마당에 이제 뭐 굳이 들여다 볼 필요가 있을까 싶고.”
A&R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우주가 작곡가들에게 ‘여러분은요?’ 하듯 시선을 보냈다.
그들도 고개를 저었다.
“저희도 뭐 제대로 하지도 못했어요.”
“이 속도에 이 퀄리티면 조 이사님 정도는 되야…….”
“어차피 뭘 해도 이건 못 이길걸요. 하하.”
그 말에 우주가 겸연쩍은 듯 웃었다. 그러곤 멤버들과 함께 회의실을 떠날 채비를 마쳤다.
“그럼 내일 또 뵐게요. 저희는 내려가서 지금 말씀해 주신 부분들을 손보려고요.”
“그래. 들어가.”
“고생하셨습니다.”
점잖게 웃으며 꾸벅하던 멤버들에게 그들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조신한 발걸음으로 나간 것도 잠시.
-꺄르르륵!
-중현이 형. 왕봉이. 왕봉이를 가져와여. 이건 축하해야겠어여. 어서 반딧불이 춤을…….
-나는 개똥벌레~ 작곡을 잘해~
밖에서 들려오는 온갖 주접에 그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직원 중 하나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쟤네는 왜 우리 앞에서 이미지 관리를 할까요? 3초를 못 가는데.”
“그러니까 말야.”
안팎으로 웃음소리가 서서히 잦아들 때, A&R팀과 작곡가들이 노트북을 켜면서 쓴웃음을 머금었다.
“사실 곡을 알아보긴 했는데…….”
“저희가 곡을 만들긴 했는데…….”
동시에 말이 겹치면서 두 집단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내 무슨 상황인지 깨달은 그들이 동병상련의 미소를 지었다.
“저희는 짠! 해 주려고 준비하고 있었거든요. 좋은 곡을 알아봐 둔 게 있어서…….”
“저희도 잠깐 꿈을 꿨어요.”
“무슨 꿈이요?”
“뉴블랙 앨범 타이틀곡이 되는 꿈이요.”
“아…….”
A&R팀 직원들이 말했다.
“데뷔 앨범 때도 이랬어요. 준비 다 해 놨는데 우주가 등장하더니…….”
“그래요?”
“열심히 과자 파티 차려 놨더니 우주가 호텔 출장 뷔페 같은 곡을 들고 찾아왔거든요.”
겪어 보진 못했지만 알 것 같았다.
뭔가 같은 편인데도 내가 패배한 듯한 느낌.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기도 했다. 신대륙으로 가는 배에 올라탄 기분이라고 할까.
여기서 잘해 내면 커리어에 족적을 남길 수 있다는 생각에 작곡가들의 눈에 생기가 감돌았다.
‘잘해 봐야지.’
그리고 그들이 희망에 젖어 있는 동안.
호시탐탐 타이밍을 노리던 A&R팀이 아이스크림 토핑처럼 일거리를 잽싸게 뿌려 주었다.
* * *
“자, 하나둘! 하나둘!”
“오케이! 어우. 너무 멋지다! 옳지!”
강남구의 한 스튜디오.
흥분한 포토그래퍼가 우리를 찍고 있었다.
“조금 더 우아하게!”
차량 보닛 위에 앉은 비주가 입가에 손을 올리고는 다리를 슥 꼬았다. 그러곤 카메라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비주야, 너 지금 그거 같아.”
“네?”
“사극에 나오는 대왕대비마마 같은 느낌.”
“어엇…….”
지호가 덧붙였다.
“뭔가 업신여기는 듯한 느낌이에여. 조금 더 입꼬리에 힘을 풀고 눈을… 오, 네 그렇게.”
우리의 피드백에 표정을 바꾼 비주가 촬영을 했다.
오늘 촬영 목표는 콘서트 포스터와 이벤트에 쓰일 컨셉 포토였다.
스튜디오에는 빨간색 스포츠카라든가, 노란색이나 파란색이 들어간 원색 계열의 소품이 가득했다.
하이틴 영화에 나오는 10대처럼 차려입은 우리가 포즈를 취했다.
여기서 합성이라든가, 여러 효과가 들어간다고 하던데.
아마 완성되고 나면 레트로한 느낌의 영화 포스터처럼 된다고 들었다.
우리 첫 콘서트 포스터의 주제는 놀이공원이었다.
“세트 볼 때마다 놀러 가고 싶네요.”
중현이의 말에 공감했다.
미국 영화에 나올 법한 느낌의 놀이공원 세트였다.
야간 개장한 것처럼 어두운 곳에서 조명이 반짝이는.
VCR을 찍을 때도 초록색 팝콘 기계 차 앞에서 팝콘을 들고 활짝 웃는 중현이라든가.
딸기 셰이크를 들고 걷는 지호라든가. 낯설면서도 알록달록 색감이 예쁜 배경이었다.
없던 추억도 생겨나는 느낌이라고 할까.
“이게 진짜 놀이공원이면 좋을 텐데. 그져?”
“그러게. 다 같이 노는 거였으면 좋았을 텐데…….”
비주가 아쉬움을 가득 머금은 얼굴로 말했다.
“우리 나중에 놀이공원 꼭 가요. 형.”
“음? 형. 고소 공포증 있잖아요.”
리혁이의 물음에 비주가 미소를 지었다.
“거울의 집 그런데 가면 돼.”
“……길은 찾을 수 있고요?”
“엇. 그러네.”
초등학교 소풍 때도 매번 선생님 손 잡고 놀았다는 둘째의 얘기에 웃었다.
리혁이가 주변 세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말했다.
“뭐, 그래도 나중에 다 같이 가는 것도 나쁘진 않겠네요.”
“그러게. 시간 나면 가자.”
우리가 훈훈하게 웃으며 머릿속으로 우리끼리 놀이공원을 가는 미래를 그릴 때였다.
-우와아아아!
-야! 야! 뉴블랙 왔나 봐! 뉴블랙!
-대박! 사진 찍었어? 찍자!
우리의 아름다운 미래가 머릿속에서 와장창 부서졌다.
회전목마 한 번 타고 내려왔더니 구름 떼 같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광경이라고 할까.
“……너, 너무 성공해 버렸다.”
“그걸 깜빡했네여. 넘 성공해서 망이야…….”
“외국 있잖아요. 외국 놀이공원 가면 되지 않을까요?”
설마 그때 돼서 외국 수플레들이 ‘뉴블랙! 포토! 포토!’ 이러진 않겠지.
일단은 놀이공원이고 뭐고 놀 시간이 없어서 그저 희미한 꿈처럼 느껴질 뿐이지만.
리혁이가 뭔가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데뷔 뮤비 찍을 때 기억나요? 그때 을왕리에서 여행 가자고 했었는데.”
“우리가 그랬어여?”
“야, 왕지호. 네가 그때 제일 신났거든.”
“저는 원래 기분 좋으면 아무 말 잘해서여. 아마 형들이 그렇게 들었으면 맞을 거예여.”
“그때 했던 말 기억 안 나?”
“넹.”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고는 곧바로 지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호야. 형한테 준다고 한 10억 어디 갔니?”
“나한테는 금괴 준다고.”
“으음~ 내 차 키가 어디 있지~?”
“아, 진짜! 제가 언… 아니, 그랬어여. 정말로?”
스스로도 기억이 잘 안 나서 미심쩍어하는 막내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이내 우리가 놀렸다는 걸 깨달은 녀석이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웃으며 동생들에게 팔을 둘렀다.
“이번 앨범 활동하고 나면 시간 될 때 우리끼리 한 번 놀러 가고 그래 보자.”
“그래여. 조개도 구워 먹구.”
“다 같이 갯벌 체험해도 돼요. 형?”
“하고 싶은 거 다 하자. 다.”
“시간이 되려나?”
“야. 놀 시간이 설마 없겠냐.”
쉬는 시간 동안 동생들과 여행 등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아직 계획을 잡은 것도 아니지만 벌써부터 설레서 방방 뛰는 녀석들이었다.
지호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우리 며칠 갈까여. 4박 5일?”
“음, 4박 5일 다녀오면 연습에 대한 감을 까먹지 않을까? 난 연습 쉴 때마다 죄책감이 좀 생겨서…….”
“그럼 비주 형 의견을 반영해서 3박 4일~?”
막내의 말에 리혁이가 스케줄표를 확인하고는 말했다.
“올해 연말까지 3박 4일 연속으로 빈 칸이 없는데.”
“그럼 2박 3일!”
“오, 적당하다. 2박 3일.”
우리끼리 화기애애하고 웃는 동안 스케줄표를 확인하던 리혁이가 마른침을 삼켰다.
“없어?”
“…….”
상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없어요. 연속으로 비어 있는 세 칸이.”
“…….”
“잠시만요. 1박 2일도 찾아볼게요.”
하지만 손가락을 쭉쭉 넘길 때마다 리혁이의 표정이 서서히 공허해지기 시작했다.
“……그것도 없어?”
“아뇨. 있긴 한데. 그런 날들 앞뒤가 꽤 중요한 스케줄이에요.”
우리 모두 스케줄표를 확인했다.
하루씩 비어 있는 날들은 굉장히 많은데 두 칸 이상으로 비어 있는 날이 없었다.
자잘한 스케줄이 꼭 하나씩 있거나 아니면 저 때쯤 돼서 꼭 새로운 스케줄이 들어올 듯한 느낌.
콘서트에 이어서 아시아 투어 일정까지 고려하면 사실상 올해 연말까지 일정이 다 정해져 있었다.
거기다 정체를 모르는 자잘한 스케줄까지.
“아니, 이거 행사 심사 위원은 누가 하자고 한 거야?”
“나예요.”
“이 게임 행사는?”
“저예여…….”
“고구마 먹기 대회 패널? 중현아.”
“고구마잖아요. 형.”
“이거 해외 작곡가들이랑 미팅은…… 나구나. 나네.”
석환 형이 ‘너희 괜찮니? 진짜 이거 잡아?’ 라고 할 때마다 호언장담했던 기억이 스쳐갔다.
“…….”
“…….”
다들 실시간으로 망했다는 걸 깨닫는 동안 비주가 물었다.
“형. 우리 놀 수는 있을까요?”
“아니.”
“안 돼요?”
“응. 안 돼…….”
우리끼리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았다.
누가 하라고 떠민 것도 아니고 우리가 꺄르륵 웃으며 밀어 넣은 스케줄들이었다.
“역시 우리는 일할 팔자인가 봐.”
“일하는 게 남는 거죠.”
“맞아요. 우리가 아직 놀러 갈 때에요?”
형들이 열심히 저 포도는 신포도를 하고 있는 동안, 우리 막내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남들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던데, 우리는 자기 도끼로 발등을 열심히 찍었네여.”
참으로 적절한 속담 인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