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382화
우리가 웅성거리는 가운데 리혁이가 양손을 들었다.
“자자! 일단 진정하고.”
“네가 제일 흥분한 거 같은데.”
“…아, 아니거든요? 제주도 날씨가 더워서 그런 거예요.”
머리를 슥슥 털어 벌게진 귀를 감춘 녀석이 말을 이었다.
“일단 상황부터 정리해 보자고요. 지금 그러니까 운전을 하고 싶다는 거잖아요. 중현이 형이.”
“그렇지.”
“절대 안 돼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된다는 듯 단호한 말투.
급격히 시무룩해지는 중현이가 안타까웠지만 우리도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다.
리혁이가 말했다.
“중현이 형, 제주도에서 교통사고 나는 이유 중 하나가 뭔지 알아요?”
“뭔데…?”
“초보 운전자들이 운전 좀 해 보고 싶다고 렌터카 빌려서 운전하다가 사고를 내는 거예요.”
“나 초보 아냐.”
우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니야?”
“네.”
중현이가 구레나룻을 긁적이더니 차량 천장을 바라보았다.
“굳이 따지면 견습생 정도?”
“에라이.”
나도 모르게 나온 말투에 동생들이 손뼉을 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촬영 중이던 제작진도 자기들끼리 키득거리다가 우리에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중현이가 운전을 하는 게 그렇게 불안해?”
“네.”
우리가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저희가 괜히 이러는 게 아니에여. 정말. 저희 형이 전적이 화려한 형이거든여.”
“우리 중현이가 이것저것 골고루 잘 부수거든요.”
“진짜.”
내 말에 리혁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자료화면 있으면 자막이랑 같이 띄워 주세요. ‘뉴블랙 멤버들이 중현의 소원에 기겁하는 이유는?’ 해서.”
“맞아. 시청자들한테도 보여 줘야 돼.”
* * *
K-net 방영 예정, 「뉴블랙의 여행일기 시즌1」 중 1화 편집본.
# 차량 안 (D)
중현이 운전하고 싶다는 소원을 밝히자마자 차량 안에 아우성이 가득하다.
주사 맞으러 가는 유치원생처럼 통곡하는 뉴블랙.
머쓱하게 앉아 있는 중현의 얼굴 밑으로 납량특집 자막이 떠오른다.
[멤버들이 중현의 운전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곧이어 나오는 자료화면.
밑에 ‘자료제공 : MeTube 뉴블랙TV’와 함께 평상시 중현의 모습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잔잔한 클래식 BGM과 함께.
화분에 물을 주며 콧노래를 부르는 중현.
조그마한 숙소에서 볶음 요리를 하기 위해 가스레인지 위에서 후라이팬을 이리저리 흔드는 중현.
음료 자판기에 동전을 넣는 중현의 모습.
-#@^#^!
테이프가 엉키는 듯한 효과음과 함께 클래식 BGM이 와장창 깨진다.
음산한 BGM.
중현이 물을 주던 화분이 물의 힘에 밀려 탁자 끝으로 밀려나더니 거실에 엎어진다.
폭발하는 흙과 막 집에 들어와 흙빛이 된 멤버들의 얼굴.
-아으이! 내 소련 공산당 역사! 이거 절판돼서 대학원생 분들도 잘 못 구하는 건데!
-아이고. 동무, 리혁 동무. 정신 차리시라요.
책을 붙잡고 통곡하는 리혁과 지호의 개드립으로 끝나는 장면.
그리고, 부엌에서 요리를 하던 중현의 장면에서 갑자기 프라이팬 손잡이가 뚝! 하고 분리된다.
비산하는 밥과 함께 하늘에서 내리는 밥알의 향연.
-얼마 전에 본 영화가 떠오르네여.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
모닝커피에 들어간 밥알을 건지며 담담하게 반응하는 지호와 우주의 대화가 흘러나오고.
마지막으로 중현이 동전을 넣은 자판기.
아무 반응이 없자 중현이 자판기에 노크를 하고 귀를 기울인다. 그러고도 반응이 없자 음료 버튼을 꾸욱꾸욱 누른다.
꾸우욱.
강한 힘에 반응했는지 자판기의 모든 버튼에 ‘X’자 불이 들어오고 중현이 당황해한다.
-기, 김비주야. 어디 있니.
이윽고 도도도 달려와 상황을 파악하더니 지갑부터 꺼내드는 비주까지.
자막이 떠올랐다.
[저희도 이 정도인 줄은 몰랐습니다. — 제작진 일동]
보고 있는 시청자들마저도 ‘어이쿠’ 하는 반응이 나올 만큼, 그야말로 파괴신이 강림한 듯한 영상이었다.
* * *
우리가 절대 안 된다며 차량 안에서 버티고 있을 때.
K넷 제작진이 노트북을 내밀었다.
“안 그래도 중현 씨가 이 정도 반발이 있을 거라고 미리 말을 했거든요.”
“반발을 예상하고도 강행하다니. 그럼 더 나쁜 거네여.”
“……일단 멤버 분들 모두 이 영상을 봐 주세요.”
노트북에 영상 하나가 떠올랐다.
사전 미팅에서 개인별 인터뷰를 할 때, 중현이가 K넷 회의실에서 소나무 음료를 홀짝이는 장면이었다.
지호가 중얼거렸다.
“음료부터 몰입이 깨지네여.”
“하여간 맛알못이야. 김중현.”
신조어 드립을 치고는 눈치를 살피는 비주에게 잘했다며 하이파이브를 해 줬다.
그 동안 인터뷰에 잔잔한 BGM이 깔렸다.
노트북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라 제작진이 핸드폰으로 트는 감동 영화 OST였다.
-중현아. 여행에서 꼭 하고 싶은 소원으로 왜 운전을 적은 거야?
-어렸을 때부터 경운기 타는 집안 어른들이 정말 부러웠어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농사일 도우면서 온갖 걸 다 해봤거든요. 모내기도 같이 하고.
중현이가 말했다.
-가끔 삼촌이 몰래 막걸리도 한 모금 주시고, 거의 집안 어른들이랑 똑같이 살았거든요. 근데….
-근데?
-다른 건 몰라도 운전은 절대 안 된다고 하셨어요. 그건 어른들이 하는 일이라고.
우리가 황당해했다.
“잠깐만, 저때가 몇 살인데?”
“초등학생 때였나.”
“야! 그러면 당연히 안 되는 거잖아! 뭔 초등학생이 운전을 하려고 들어?”
“허헛.”
머쓱하게 웃으며 뒷덜미를 긁적이는 중현이었다.
그러는 동안 화면 속 중현이가 큼지막한 손을 꼼지락거렸다.
-조금 바보 같게 들릴 수는 있지만, 저한테 운전은 그런 의미였어요. 어른이 됐다는 상징?
-무슨 뜻인지 알겠다.
-그래서 19살 생일 지나자마자 바로 운전면허를 땄는데 막상 쓸 기회가 없더라고요.
중현이가 제작진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까 이번 여행의 테마가 뭐였으면 좋겠냐고 물으셨잖아요. 저는 ‘도전’이었으면 좋겠어요.
-도전?
-네. 지금까지 해 보지 않았던 그런 걸 해 보고 싶어요. 새로운 도전을.
그와 함께 영상이 끊겼다.
제작진과 중현이가 ‘이쯤 하면 감동적이지 않았나?’ 하며 우리를 바라보았지만 모두 뚱한 표정이었다.
“중현아.”
“네. 형.”
“아니…….”
내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말했다.
“왜 너의 성장 서사에 우리를 끌어들이는 거니. 성장이나 도전은 혼자 하란 말이야.”
“맞아여. 우린 그냥 멀리서 응원하고 싶단 말이에여.”
“운전해도 돼요. 형. 근데 혼자 해요. 혼자.”
“너 핸들 안 뽑을 자신 있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우리 말을 경청하고 있던 중현이가 ‘아!’ 하며 손뼉을 쳤다.
“혹시 내가 운전하는 게 불안한 거야? 못할까 봐?”
“아니! 그걸 이제야 이해하는 거냐고!”
우리가 입에서 불꽃을 뿜을 기세로 열변을 토하고 있을 때, 중현이가 제작진에게 눈짓했다.
노트북이 꾸멀꾸멀 다가왔다.
피디님이 말했다.
“안 그래도 안전에 대한 우려가 있어서 미리 철저하게 연습을 했어.”
“연습이요?”
“원석 매니저님이 중현이 운전연수하면서 같이 찍은 영상이 있거든. 잠시만.”
노트북에 두 번째 영상이 재생됐다.
차량에 카메라가 설치된 가운데 잔뜩 긴장해 있는 원석이 형이 조수석에 타고.
중현이가 운전석에 타며 여유롭게 벨트를 매는 장면이었다.
“잘 봐요. 다들.”
중현이가 말했다.
“나 운전 엄청 잘하니까.”
“…….”
“진짠데. 나 거짓말 안 하는데…….”
그 동안 중현이가 등받이와 헤드레스트를 조정하고는 백미러를 흘깃 보며 말했다.
-형.
-응.
-이거 시동은 어떻게 걸어요? 키가 없는데?
-버튼 누르면 돼.
화면 속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뚱땅뚱땅하는 깜빡이 소리에 중현이 하하하 웃었고, 원석이 형의 눈이 촉촉해졌다.
-……아으으. 엄마.
190센티가 넘는 거구가 양손에 얼굴을 묻으며 움츠러드는 광경은 오랜만이었다.
박수를 치며 웃던 우리가 급격하게 정색했다.
남 일이라 웃었는데 생각해 보니 우리 얘기였다.
그러는 동안 시동을 건 중현이가 드디어 차량을 출발시키고 주차장을 무사히 나섰다.
-중현아. 여기 교차로에서는 일단!
끼익!
-으악!
하면서 원석이 형이 화들짝 놀라고, 중현이가 흐뭇하게 웃으며 운전대를 잡는 장면이 나올 때.
둔! 하며 윈도우 특유의 알림음이 흘러나왔다.
[전원이 부족해서 컴퓨터를 종료합니다.]
제작진이 당황하며 노트북 전원 버튼을 눌렀지만 방전이 되어 버린 컴퓨터는 반응이 없었다.
피디님이 ‘어어…’ 하며 당황했다.
“아닌데. 이게 아닌데.”
“어… 그, 뒷부분에는 제가 잘해서 원석이 형이 놀라워하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그 말에 원석이 형을 찾았지만 지금 매니저 형들은 리얼리티 차량과 별도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불신의 눈초리에 중현이가 얼른 원석이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중현아.
“원석이 형. 지금 멤버들이 다 저의 운전을 불신하고 있는데…….”
-잠시만. 내가 이동 중이어서, 뭐라고?
“멤버들이 저의 운전 실력에 대해 불신하는데 뭐라고 한 마디 좀 해 주세요. 형.”
-너의 운전?
무의식적인 바람 소리가 새어나왔다.
-ㅎ….
“네?”
-잠시만, 여기 너무 시끄럽다. 조금 이따가 걸게.
띠록, 하며 끊긴 전화 소리에 중현이가 우리에게 물었다.
“어때요? 좀 불식? 됐어요?”
“…….”
전혀 불식되지 않았다.
장장 30분간의 설득에 결국 우리는 중현이가 운전하는 차에 타기로 했다.
계속해서 미적대다가는 방송 스케줄도 빠듯해질 테고. 뭐 설마 죽겠나 싶었다.
그랬기에 딱 한 가지 조건을 걸고 동의했다.
“중현이가 운전하는 차에 타기 전에, 저희가 가족들한테 통화할 시간을 좀 주세요.”
제작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 * *
막간을 이용해 가족들에게 잘 도착했다고 안부 전화를 한 후.
다 같이 렌터카 앞에 섰다.
6mm 카메라를 든 제작진이 처량한 표정을 짓는 우리 모습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리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피디님은 함께 안 타시나요?”
“응. 나는 촬영을 조율해야 돼서.”
“작가님들은요?”
“뉴블랙의 힐링 여행 리얼리티잖아. 차량에 카메라 설치해 뒀는데 거기에 우리가 나오면 안 되지.”
이번엔 카메라 감독님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감독님.”
1번 카메라가 양옆으로 까딱 흔들리며 거절 의사를 전했다.
2번 카메라 감독님이 한 손가락으로 X자를 그렸다.
“아아…….”
썬팅된 창문과 손잡이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는 동안 차키를 받아온 중현이가 우리에게 열심히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이제 타요!”
“…….”
도무지 용기가 나지 않아 동생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
“여기 있어요.”
나와 비주를 시작으로 리혁이와 지호까지 다 같이 한 손을 잡은 후, 막내부터 차량에 올라탔다.
가위바위보에 진 비주가 조수석에 올라타고.
우리 모두 오들오들 떨고 있을 때.
부릉-
차량이 달달 떨렸다.
“흐아악!”
“그냥 시동 걸은 건데. 머쓱하네요.”
“저희 살려 주세여!”
차창을 내린 막내가 하소연하자, 차량 주변을 둘러싼 제작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중현이가 자동버튼으로 차창을 올리자, 지호가 울상을 지었다.
“엄마…. 누나아…….”
“지호야. 아버님도 불러드려. 맨날 서운해하시잖아.”
“아빠…….”
“옳지.”
이윽고 중현이가 차량에 놓인 블루투스 마이크를 들었다.
-아아. 승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 김중현이 운전하는 행복 렌터카에 타신 걸 환영합니다.
“예에…….”
-안전벨트는 매셨나요?
“가능하기만 하면 두 겹으로 매고 싶어요. 정말.”
-모두 행복하신가요!
대뜸 행복하냐는 물음에 ‘아뇨오!’ 하고 대답했다.
‘좋습니다’ 하며 관광버스 아저씨처럼 웃던 중현이가 머리에 쓴 스냅백으로 손을 올렸다.
그러곤 뒷부분이 이마로 오도록 돌려썼다.
“라이더 모드 온.”
“드라이버요. 형.”
“드라이버 모드 온.”
중현이가 액셀에 발을 올리면서 모두 눈을 질끈 감았다.
처음부터 끼이이익! 하는 소리가 나올 게 분명했다.
눈을 감은 채 동생들의 손을 붙잡을 때.
부우웅-
“어……?”
출발을 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흔들림이 없었다.
손을 잡고 있던 나와 리혁이가 눈이 마주쳤다.
“어?”
“어?”
서로에게 학을 떼며 손을 떨쳐 버린 후.
모두 휘둥그레진 눈으로 주변 풍경을 바라보았다.
바깥이 움직이고 있다.
손에 난 식은땀을 닦으며 앞을 바라보니, 리얼리티 차량을 따라 렌터카가 움직이고 있었다.
백미러를 통해 싱긋 휘어진 두 눈이 보였다.
“어어……?!”
내가 입을 떡하니 벌리며 외쳤다.
“야! 너 왜 잘해?!”
“아니. 형. 왜 잘하냐니요…….”
중현이가 짐짓 서운하다는 투로 답했다.
손뼉을 치며 깔깔대던 동생들도 이내 긴장이 탁 풀렸다는 듯 안도했다.
“대박이다. 중현이 형 운전 잘하네여?”
“응. 잘해.”
중현이가 뿌듯하게 웃으며 운전대를 잡았다.
“내가 몸으로 배우는 건 절대 안 까먹거든. 우주 형이 기억 잘 하듯이.”
“역시, 내 예상대로였네요. 봐요. 이렇게 사람은 다양한 면이 존재하는 거예요.”
호들갑을 떨 때는 언제고 갑자기 그럴 줄 알았다며 태세를 전환하는 리혁이었다.
그러는 동안 차량이 제주공항의 서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열린 차창을 통해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고, 탁 트인 하늘 아래 푸른 바다가 우릴 반겼다.
“와아아아!”
10년차 드라이버처럼 부드럽게 운전을 하던 중현이가 백미러로 우릴 보며 웃고.
우리도 웃고 있을 때.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비주가 입을 열었다.
“중현아.”
“나 운전 잘하지?”
“응. 그건 그건데… 너 몸으로 배우는 건 절대 안 까먹는다고 그랬잖아.”
“맞아. 몸으로 하는 건 뭐든지.”
“그러면.”
비주가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저번에 안무 까먹었다고 한 건 어떻게 된 거야?”
“…….”
중현이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는데도 중현이의 콧잔등에 식은땀이 맺히는 광경에 웃음을 터뜨렸다.
비주가 ‘으이구’ 하며 키득거리는 가운데, 지호가 말했다.
“형들! 형들! 우리 드라이브 하면서 노래 들어여!”
“그럴까?”
여행 분위기를 물씬 내기 위해 드라이브 송을 물색했다.
* * *
K-net 방영 예정, 「뉴블랙의 여행일기 시즌1」 중 1화 편집본.
# 중현이 운전하는 차량 안 (D)
흥겹게 ‘푸른 언덕에~’ 하고 노래를 부르며 좌좌좌좡 기타 치는 시늉을 하는 멤버들.
비주가 핸드폰으로 트는 노래들이다.
첫 곡을 신나게 끝냈을 때.
차창에 코를 박을 기세로 파란 하늘을 감상하던 멤버들이 눈을 깜빡였다.
1월에 발매한 뉴블랙의 스페셜 앨범 수록곡 ‘Winter Trip’이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듣기만 해도 여행의 설렘이 느껴지는 노래였지만, 멤버들의 안색은 어두워졌다.
-좋긴 하네여. 우리 노래.
-우리 여행까지 왔는데, 일 이야기는 하지 말자.
우주의 말에 멤버들이 웃을 때, 귀여운 자막이 흘러나왔다.
[보충설명 : 뉴블랙은 직접 곡 작업을 하기에 평균적으로 한 곡당 최소 수백 번씩 듣는다]
[노래가 좋다 = 일 이야기]
리혁이 조수석의 비주에게 묻는다.
-이거 뭐예요. 형?
-망고에 ‘여행지에서 드라이브하며 들어야 할 노래’라는 제목의 믹스야.
-일단 다음 곡으로 넘겨요.
바로 다음 곡으로 스페셜 앨범의 ‘승강장’, ‘동행’이 흘러나왔다.
겨울 여행에 딱 맞는 안성맞춤 노래.
점점 괴로워하는 멤버들의 모습에 비주가 다급하게 다른 믹스를 찾는다.
-찾았어요! 봄철에 들으면 설레는 노래 믹스.
-아니야. 그것도 아냐.
-아니에요? 왜……. 아.
첫 곡부터 작년도 연간 1위인 ‘바람꽃’이 흘러나왔다.
-썸씽도 있지?
-네.
이내 훈훈한 미소를 띠며 바람꽃의 가사를 흥얼대며 즐기는 뉴블랙 멤버들이었다.
-예이이이~
-요오오~ 바람꼬옻~
촉촉한 눈으로 자기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 밑으로 궁서체 자막이 떠올랐다.
[명곡 부자의 슬픔.avi]
스트리밍 추천을 눌러놓든, 어느 믹스를 누르든 자기 노래를 피할 수 없는 아이돌이었다.
* * *
첫날 오전은 간단한 드라이브로 마무리 한 후.
3박 4일의 일정 중에서 첫날 일정을 소화했다.
“둘 셋!”
“펜안 하우꽈? 뉴블랙입니다!”
“스페셜 앨범 팬사인회에 혼저 옵서예. 제주도에 오니 촘말로 좋수다. 공기도 맑고!”
열심히 연습한 제주도 사투리를 쓰며 팬들에게 인사하니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방금 한 말들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무신 거옌 고람 신디 몰르쿠게? (뭐라고 말하는지 모르겠지요?)”
“네?!”
팬들로부터 요즘은 어르신들도 사투리를 잘 안 쓴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어쨌거나 저번 1월에 못했던 팬사인회도 하고, 저녁에는 공연장을 하나 대관해 소극장 투어를 완벽하게 마무리지었다.
관객 중에는 우리가 특별하게 초청한 손님도 있었는데, 바로 명곡단으로 인연을 맺은 원로가수 노재현 선생님이었다.
“선생님, 엄청 건강해지셨어요!”
“건강해 보이나? 아핫핫!”
이제는 걸음걸이도 엄청 편해 보이고, 지팡이 정도만 가볍게 짚고 다니는 선생님이었다.
혈색도 좋아지셨는데, 보호자인 아주머니가 실제로도 엄청 좋아지셨다고 알려 주셨다.
공연이 끝나고 함께 한 식사 자리에서 노재현 선생님이 말했다.
“상교한테 들었는데. 일본 가수 하나 낚았담서.”
“낚았다니요. 선생님.”
“아이고. 어쩌자고 다들 그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건지 참…….”
말씀이 너무하다고 우리가 아우성 쳤지만 고개를 젓는 선생님이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숙소 입주까지 마무리했다.
대기업이 사내 연수를 할 때 쓰는 숙소라는데, 시설과 보안이 굉장히 좋은 곳이었다.
피디님으로부터 원래 빌리기 힘든 곳인데 우리 인지도가 엄청 높고, 이미지가 좋아서 가능했다는 후문을 들었다.
첫날 일정을 모두 마무리한 후.
마침내 둘째 날,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하기 위해 도착한 해수욕장에서 피디님이 말했다.
“여러분.”
“네!”
“이번 ‘뉴블랙의 여행일기’는 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말 그대로 여행 자체를 즐기는 힐링 컨셉입니다.”
피디님이 웃으며 말했다.
“열심히 달린 여러분에게 주어진 휴식 시간이니, 모쪼록 편하게 방송에 임해 주세요.”
일부러 웃기려고 할 필요 없이, 그저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 달라는 뜻이었다.
그 말에 우리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능처럼 웃겨야 한다는 압박이 없는 자유로운 분위기라니, 우리에게 최상의 휴식 시간이었다.
* * *
6mm 카메라를 든 제작진이 뉴블랙을 따라붙었다.
파도가 물러날 때마다 다 같이 어깨동무를 하고 뛰어가고는 다시 밀려오는 파도에 도망치는 멤버들.
“흐하핫!”
바닥에 떨어진 조개껍데기를 줍기도 하고.
모래 바닥에 ‘수플레, 뉴블랙이 한락산만큼 소랑햄쪄’ 라고 쓰며 우정사진을 찍기도 하고.
피디와 작가들이 감탄했다.
“얘넨 뭘 해도 그림이 산다. 살아.”
“진짜요.”
가만히 있어도 사색에 잠긴 듯한 외모 덕분인지, 강풍에 흩날리는 머리를 매만지는 모습도 감탄스럽다.
해변에 발자국을 꼭꼭 남기며 걷는 멤버들.
저기에 입힐 팝송이나 힐링 노래들이 절로 머릿속에 하나둘 떠오를 때.
“꺄하하핫!”
걷다가 바닥에 엎어진 막내를 보며 깔깔대는 뉴블랙이었다.
피디가 입맛을 다셨다.
‘좋은 그림이 10초를 못 가긴 하지만…….’
잡아주는 손 없이 홀로 일어난 막내가 입을 비죽이며 형들을 따라잡았다.
해수욕장의 평온한 분위기 속에서 녹화가 진행될 때, 막내가 간식거리를 옴뇸뇸 먹을 때.
갑자기 나타난 갈매기가 간식을 홱 채 가면서, 막내가 손을 움켜쥐었다.
“아앗!”
막내가 ‘악!’ 소리를 내자, 나머지 넷이 손가락에 난 피를 보고 눈이 홱 돌았다.
화가 난 코흘리개 무리 같은 분위기.
“뭐야? 누가 지나가다 쳤어?”
“지호야. 왜 그래?”
“누구야. 어떤 사람이야?”
누가 우리 막내 건드렸어, 하며 뿔이 난 모습에 제작진들이 웃고 지호가 갈매기를 가리켰다.
“……쟤요! 저 갈매기!”
“중현아. 얼른 확인해라. 어떤 새놈이야?”
“가슴에 검은 줄무늬 있는 애 같은데요.”
갈매기를 향해 ‘야! 네가 우리 동생 건드렸냐!’ 하며 분노하는 장면을 찍으려고 할 때.
“잠깐만.”
멤버들이 막내의 손을 봐주는 가운데, 리더가 바닥에 떨어진 간식 부스러기를 들었다.
낚시 떡밥이 움직이듯 갈매기들을 유혹하는 모습.
다른 갈매기들이 다가올 때마다 스윽 자연스럽게 회피하는 우주였다.
그렇게 집요하게 노리기를 1분.
‘설마…….’
제작진들이 바라보고 있을 때, 간식을 채 가려던 야생의 갈매기가.
퍼드득!
……우주의 손에 붙잡혔다.
카메라 감독과 주변 관광객들이 얼이 빠진 표정을 짓는 가운데, 뉴블랙 멤버들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당황한 갈매기가 날개 퍼덕거림도 멈추고 눈을 땡글땡글 뜬다.
“너냐. 우리 막내 손에 피 나게 한 게?”
“처신 잘해. 갈매기.”
구경꾼들이 웃음을 터뜨리는 가운데, 피디와 작가들이 눈을 깜빡이며 입을 벌렸다.
‘아니, 누가 아이돌 리얼리티에서 갈매기를 잡냐고…….’
본래 취지인 힐링 예능.
애초부터 무리였나 하는 의문이 드는 제작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