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434화
“흐하하하핫!”
“아, 그만 좀 웃어요. 쪽팔리니까.”
“흐하하하!”
“그만 좀 웃으라고!”
메인보컬의 호통에 우리가 웃음을 뚝 멈췄다.
그러곤 눈을 마주친 후.
“흐하하하!”
서로를 팡팡 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매니저 형들까지 배를 잡고 웃는 광경에 리혁이가 저주를 내뱉었다.
“걷다가 확 넘어져 버려라.”
“이렇게?”
마임으로 넘어지듯이 몸을 기울이면서 묻자, 리혁이가 잔뜩 약이 올라서 이이익 했다.
행인들이 박수를 치며 지나가면서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다시 자세를 바로 하고는 멀찍이 떨어져서 걸으려는 리혁이를 데려왔다.
“리혁아.”
“아, 왜요.”
“너만 민망했겠어? 우리도 얼마나 당황했는데….”
진짜 당황스러웠다.
“흔들흔들 해서 일어났는데 모르는 미국인 아저씨가 있었어여.”
“맞아. 내가 당황해야 되는 상황인데 오히려 아저씨가 더 당황하고 있었어. 유얼 프렌드 런 어웨이 하면서….”
깜빡 졸다가 일어났더니 모르는 미국인 아저씨가 ‘네 친구 도망감!’ 이러고 있었다.
뒤늦게 상황을 듣고 웃음을 터뜨리긴 했지만 순간적으로 진짜 당황했다.
‘이 아이를 보셨나요?’ 하면서 핸드폰과 포상금 10달러를 들고 타임스퀘어를 배회하는 미래가 막 그려지고.
막내가 따스하게 웃었다.
“그래도 어디 멀리 도망갈 체력까지는 안 돼서 참 다행이에여. 단거리 질주하면 바로 퍼지니까.”
“리혁이 특징 : 배터리 방전 잘 됨.”
“…….”
부들부들 하는 리혁이의 모습에 우리가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어쨌거나 극장에서의 일은 잘 마무리가 됐다.
K팝 팬이라고 자기를 소개한 프레드 씨와 셀카도 한 장 찍고, 사인도 한 장씩 건네주었다.
중현이가 길거리를 둘러보며 말했다.
“근데 세상이 좁긴 좁은 것 같아요. 이런 데서 팬을 만날 거라곤 전혀 예상 못했는데.”
“그러게. 우리 행동 좀 조심해야겠다.”
일전에 방문했던 LA야 한국인들이 원체 많이 찾기도 하고, 한인 교포가 많기로 유명한 곳이니 그러려니 했지만.
뉴욕에서 미국 사람이 아는 척을 할 줄은 몰랐다.
우리가 브로드웨이를 진지하게 둘러보았다.
“어쩌면 이 속에서도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여.”
“흐으으음… 굉장히 할 일이 없는 사람이군.”
“그래도 조심하는 게 나쁘진 않겠죠.”
진중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자니 매니저 형들이 비웃었다.
“진짜 안 어울려.”
“왜요. 얼마나 진지한데.”
“유치원생이 학예회 한다고 진지하게 걷는 느낌이야.”
오늘도 원석이 형의 비유에 한 번 더 뼈를 맞았다.
그냥 원래처럼 웃으라는 말에 우리가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꺄하핫!”
그리고는 신나게 뉴욕의 밤거리를 거닐었다.
휘황찬란한 야경이라는 말이 딱 어울릴 만큼 극장들이 밀집한 브로드웨이는 불야성이었다.
모든 게 반짝거린다.
간판들도 반짝거리고, 심지어 스벅 간판까지 반짝반짝하다.
그리고.
“뭔 사람이….”
그야말로 사람에 휩쓸려갈 것 같다.
온갖 사람들이 웃고 떠들면서 바글바글한데, 그 때문인지 활력이 넘쳐흘렀다.
환히 빛나는 뮤지컬 간판들을 보며 잠시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올해 말이나 내년쯤이면 이제 여기에 노스탤지어 간판이 걸리겠지?”
“그러겠네여.”
“느낌 진짜 이상하네…….”
넘버 중에 한 곡으로만 참여하는 터라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있었는데.
이제 여기에 ‘Nostalgia’라는 간판이 걸리고, 사람들이 그걸 보러 온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오묘하다.
리혁이가 헛웃음을 지었다.
“방금 전까지 뮤지컬 보면서 졸았던 사람들이 왜 갑자기 이렇게 감회에 사로잡혔대요?”
“넌 이제부터 바른말 금지령이야. 서리혁.”
“에휴. 저 형 때문에 또 흥 깨졌어여. 흥 깨는 학문이 있으면 거기서 박사 학위 받았을 텐데.”
본전도 못 찾고 찌그러진 리혁이를 비주가 과자를 먹이며 챙기는 동안.
우리는 거리를 걸으며 맨해튼의 밤을 즐겼다.
“음? 땅콩 냄새가 나요.”
수십 미터 거리에서 길거리 땅콩의 냄새를 포착한 중현이의 후각에 감탄하기도 하고.
“오. 노래하고 있어요.”
“춤인데요.”
길거리에서 츄리닝을 입은 채 춤을 추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땅콩을 맛나게 먹었다.
정말로 즐거운 시간이었다.
간만에 잠을 푹 자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우리끼리의 소소한 여행이 마냥 좋다고 할까.
한국이었다면 거의 삼보에 한 번 꼴로 우릴 알아보는 사람을 만나는 터라, 이렇게 완벽하게 군중 속에 숨어 대도시를 즐기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뉴욕이라고 해서 우릴 아는 척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길을 가다 마주친 한국인 중년 부부가 아는 척을 해 왔다.
“뉴블랙이구나. 너희 여기는 어쩐 일이니?”
“저희 이번에 공연하러 왔어요.”
“어이구, 뭣 하러 외국까지 나왔어. 집 나오면 고생인데 그냥 한국에서 편하게 있지.”
뭔가 바라보시는 게 ‘뭣 하러 미국 땅까지 와서…’ 하는 느낌이었다.
한국에서 그만큼 떴는데 굳이 미국까지 와서 뭘 하냐는 듯한 반응이었다.
사실 이번 합동 콘서트가 1만 명이 넘는다고 말씀을 드리려고 할 때.
“자, 이거 받아.”
훈화 말씀을 하시던 아버님이 달러를 건네주셨다.
“이걸로 밥이라도 사 먹어.”
“아유, 괜찮아요. 아버님. 저희 돈 많이 벌어요.”
“넣어 둬. 넣어 둬. 어이구, 이 먼 데서 고생을 하는데 뭐라도 해 줘야지.”
“정말 감사하지만 마음만 받을게요.”
“그려, 여행들 잘하고.”
“뉴블랙 화이팅!”
어머님까지 작게 주먹을 쥐어 보이며 떠나는 모습에 우리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과연 한국인의 정이었다.
그리고 그걸 시작으로 한국 사람들과 마주치기 시작했다.
“어? 여기 왜 있어요?”
“그걸 지금부터 맞추셔야 돼요. 저희가 여기에 왜 있을지 한 번 맞혀 보세요~! 제한 시간은 10초!”
“어, 어…! 잠깐만요. 추격전 컨텐츠? 뉴욕 야시장 특집?”
“땡! 시간 초과.”
처음에는 우리한테 한국인을 끌어 모으는 어그로력이 있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다른 이유였다.
일단 한국인이면 뉴블랙 얼굴 알아본다 하는 느낌이었다.
민기 형이 말했다.
“언론에서 국민 아이돌이라고 하는 거 말로만 들었지, 뉴욕에 와서 느낄 줄은 몰랐네.”
“으아아아!”
“왜 그렇게 오글거려 해?”
“그 단어 들을 때마다 민망하단 말이에요. 형 보고 누가 국민 리사조아라고 해 봐요.”
“매니저라는 좋은 말도 있잖아. 선우주 너 거기 안 서?”
그날, 뉴욕에서의 일정은 어떤 행인의 예측대로 추격전 컨텐츠로 마무리를 지었다.
* * *
자유 여행을 마친 다음 날.
우리는 아침 일찍부터 스튜디오를 방문했다.
「헤이~ 오랜만이구만!」
통통한 아시아계 미국인이 내 손을 힘 있게 흔들었다.
프랭크 차우.
영화 <노스탤지어> 원작 뮤지컬의 제작자이자,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작곡가와는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이었다.
저번에는 어땠더라.
건포도 같은 눈동자가 내 뒤를 유심히 살폈다.
「이번에는 그 사람이 같이 안 왔구만. 하하하!」
조규환 이사님과 Thousand Dreams 계약을 두고 영혼의 싸움을 벌였다가 바로 패배하셨지.
그가 쿨하게 웃었다.
「쓰라린 기억이었지. 세상은 참 넓다는 것도 깨닫고. 그런 마귀가 나 말고 또 있을 줄은….」
「이거 그대로 전달해 드릴 거예요.」
「섭섭하네. 꽤 친해진 줄 알았는데!」
이제 그럼 법정에서 소송으로 만나는 거냐는 그의 농담에 내가 웃었다.
확실히 서로에게 내적 친분이 생기긴 했다.
저번의 만남 이후로 이메일로 계속해서 의견을 주고받아서 그런지, 마치 펜팔 친구를 만난 기분이라고 할까.
「펜팔이라… 비유가 적절하네. 요즘에도 그런 걸 하나?」
「어렸을 때 한 번인가 해 봤어요. 사진 보낸 다음에 연락이 끊기긴 했는데.」
「왜?」
「자기랑 결혼하자고 그러더라고요. 지참금 두둑이 챙겨 놓겠다고 하는데 부담스러워서….」
잘 지내고 있니. 타냐.
아련하게 웃는 내 모습에 프랭크 차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뒤따라오던 동생들이 수군거렸다.
“알고 보면 그 나라 최고 부자 그런 거였으면 좋겠어여.”
“땅에서 석유 나오고.”
“진짜 아까운 기회네요. 십수 년 전에 보내 버릴 수 있었는데….”
눈을 슥 흘기자 바로 조용해졌다.
그러곤 프랭크 차우를 따라 스튜디오 복도를 걸었다.
각종 상패를 비롯해 그가 제작한 브로드웨이의 유명 뮤지컬 포스터들이 벽면에 줄지어 걸려 있다.
뮤지컬에 문외한인 나도 다 아는 것들이다.
연기자 지망생인 막내가 동그란 눈으로 뮤지컬 제작자를 새삼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뭔가 새삼스럽게 감탄하는 눈빛인데…?」
「전혀요.」
들켰네.
그래도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기꺼웠는지 프랭크 차우가 껄껄 웃었다.
「이쪽으로.」
마침내 녹음실이 나타났다.
그리고….
“우와아아아아-!”
녹음실에 도착한 우리 모두 똑같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건 녹음‘실’이 아니었다.
‘녹음의 집’이나 혹은 ‘뉴블랙과 녹음의 방’ 같은 단어 정도는 되야 이 규모를 담을 수 있다고 할까.
“진짜 크다.”
널찍한 전면 유리 너머로 30평은 될 법한 커다란 방에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악보를 보고 있고.
주변에 또 다른 유리 칸막이가 있었다.
‘Vocal 1’, ‘Vocal 2’ 등을 보아하니 배우들이 노래를 부르는 곳이다.
프랭크 차우가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우리 쪽 뮤지컬은 생음악을 중시하거든. 그래서 이렇게 녹음실이 커야 돼.」
미리 자료 조사를 해서 아는 내용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공연을 하는 동안 생음악이 동원되는 것이 영미권 뮤지컬의 특징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캐스트 앨범 녹음을 할 때도 이렇게 대규모로 진행한다고 들었다.
말 그대로 실제 공연과 똑같이.
“와아…….”
영화 OST 메이킹 영상에서 볼 법한 큰 규모에 나와 동생들이 입을 떡하니 벌리고 있을 때.
프랭크 차우가 손짓했다.
「이리 와. 우리 단원들을 소개해 줄 테니. 일단 여기 있는 사람은 나와 이름이 같은 프랭크 윌러, 이번 뮤지컬의 음악감독이지.」
백인 할아버지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어 보였다.
녹음실에 정신이 팔린 우리가 ‘Hello’ 하며 꾸벅 인사하자, 재미있어 하면서 자기도 고개를 끄덕했다.
음악감독을 시작해 작사가, 편곡 담당. 엔지니어 등등.
컨트롤룸에서만 예닐곱 명 되는 스탭들이 있었다.
「저쪽은 우리 오케스트라 단원들.」
프랭크 차우가 토크백 버튼을 누르며, 유리창 너머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불렀다.
「이봐, 친구들! 우리 Thousand Dreams의 원곡자들이 오셨어!」
「반가워요!」
헤드폰을 낀 연주자들과 지휘자가 우리에게 유쾌한 함성과 함께 손을 흔들었다.
연주자들의 함성에서 요란한 행진 퍼레이드에서 볼 법한 색감이 느껴졌다. 같이 있다 보면 기분이 들뜨는 그런 종류였다.
뮤지컬 제작자가 이번에는 유리창 너머 보컬룸의 5인조를 가리키며 붉은색 토크백 버튼을 눌렀다.
「여기는 ‘외국어 책’들을 연기해 줄 배우들이지. 차례대로 홀리, 앨….」
티셔츠 등 편한 차림으로 있는 5인조.
중년 여성부터 어린 아이까지 다양한 연령대로 구성된 배우들이 우리에게 익살맞은 인사를 건넸다.
그중에서 자신을 홀리라고 소개한 중년 흑인 여성이 리혁이를 보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Oh my god…!”
리혁이의 백짓장 같은 얼굴이 긴장해서 더 하얗게 변할 때.
홀리가 입가에 양손을 올린 채 말했다.
「너무 귀여워! 내 아들 어렸을 때랑 머리부터 발끝까지 너무 똑같아…!」
“오……!”
그게 가능한가 현실적인 의문이 들었는데, 말 잘못했다가는 이 나라를 떠나야 할 각이라 조용히 있었다.
리혁이가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감사합니다. 캠벨 씨.」
「캠벨 씨는 무슨! 홀리라고 불러요, 귀요미! 아직 그렇게 불릴 나이는 아니라우.」
자기 아들 이름이 존인데, 리혁이가 그 쪼꼬미 버전 같다며 ‘마이 리틀 존’ 하며 부르는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졸지에 귀요미가 된 리혁이의 얼굴이 벌게졌다.
컨트롤룸 내부의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리는 동안, 프랭크 차우가 손짓을 하며 카메라를 세팅 중인 남녀 3인조를 불렀다.
「그리고 여기는 이번에 촬영을 나온 다큐멘터리 제작진.」
「반가워요! 레이첼 브라운이에요.」
발랄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민 이와 악수를 나눴다.
그녀는 이번에 우리가 촬영하기로 한 음악 다큐멘터리 의 진행자였다.
매 에피소드별로 40분가량 진행되는 다큐.
그중에서 <노스탤지어>의 원작과 영화 속 노래들에 대해 이야기를 다루는 회차가 우리가 출연하게 될 에피소드였다.
「자-!」
작곡가가 웃으며 말했다.
「이제 소개는 다 마친 것 같은데… 연습 몇 번 더 해 보고 진행할까?」
「좋아요.」
그 말과 함께 자리를 안내 받았을 때.
“허어어어어—!”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사람들이 날 쳐다보고 있다는 것도 아랑곳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콘솔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내가 이걸 왜 못 봤지?!
“이, 이건……! 이건!”
“형, 지금 한국말로 하고 있어여.”
「이건…! 이건……!」
과연 세계적인 작곡가의 녹음실 아니라고 할까 봐.
그야말로 최신 장비가 곳곳에 가득했다.
‘마이갓 마이갓’하며 장비를 보며 눈 돌아가는 내 모습에 프랭크 차우가 웃었다.
「신기한가?」
「여기가 제가 누울 곳인가 봐요.」
「응…?」
못 알아듣는 모습에 드립을 바꿨다.
「천국이 있다면 바로 이곳일 거예요.」
「글쎄, 몇 시간 앉아 있다 보면 생각이 바뀔걸.」
「이 귀한 것들을 한 번씩 만져만 봐도 될까요? 조정하는 게 아니고, 그냥 손가락만 올려 볼게요!」
「뭐, 그거야 맘대로….」
콘솔 테이블을 손으로 만지며 몸을 부르르 떠는 모습에 동생들이 수치스러워했다.
「셀카도 한 장만.」
뮤지컬 녹음만 아니었다면 한 시간이고 만지고 속삭이고 그랬을 텐데.
눈앞에 있는 콘솔 테이블과 각종 기기를 볼 때마다 눈이 몽롱해지는 기분이었다.
“아저씨, 정신 차려요. 지금 다큐멘터리 녹화 중이에요.”
“…….”
“급격히 표정 바꾸지도 말고요. 더 이상해 보여.”
서서히 진지하게 표정을 바꾸는 동안 주변에서 웃음이 돌아왔다.
프랭크 차우가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
「자네도 진짜 괴짜군.」
「잠시 작곡가로서 흥분한 것뿐이에요. 누구나 이런 걸 보면 설렐 수밖에 없다고요.」
「아무렴.」
비죽 웃음을 흘린 작곡가가 눈짓을 보냈다.
손님맞이는 끝났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을 해도 되겠느냐는 이야기였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상대도 끄덕였다.
「그럼 시작해 보자고.」
마침내 녹음이 시작됐다.
그러자, 방금까지의 유쾌한 웃음은 장난이었다는 듯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진지하게 연주를 시작했다.
물론 얼굴에 띠고 있는 미소는 그대로였다.
「옳지!」
악보를 쥔 프랭크 차우가 벌떡 일어나 리듬을 타면서 디렉팅을 하는 동안.
엔지니어를 비롯해 다양한 인물들이 각자 자신의 일을 하고.
배우들은 신나게 노래를, 연주자들은 신나는 얼굴로 연주를 시작한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신나는 분위기이기에 동생들과 눈빛을 교환했다.
‘좋다.’
‘좋네요.’
그야말로 최상의 분위기였다.
프로답게 모두가 철저하게 준비해 오고, 녹음할 때는 진짜 뮤지컬 공연을 하듯 유쾌하게.
생음악과 배우들의 목소리가 어우러지는 리허설을 보며 감탄했다.
이래서 여기가 뮤지컬로 세계에서 제일 알아주는 동네인 건가 싶기도 하고.
눈앞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색의 형연을 감상하며 미소를 지었다.
Thousand Dreams의 리허설이 끝나고 나서 프랭크 차우가 열띤 얼굴로 물었다.
「리허설은 어떤가?」
「적응 중이지만, 조금 있으면 감을 잡을 것 같아요.」
「의견이 있으면 가감 없이 말해 줘. 아무리 뛰어난 작곡가도 원곡 작곡가보다는 못한 법이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몇 번 정도 이어진 리허설을 감상하며 감을 잡았다.
동생들도 리듬에 맞춰 고개를 까딱까딱하며 눈을 빛내는 모습을 보니 나와 비슷하게 감을 잡은 것 같다.
최종 리허설을 마친 후.
「어떤가? 녹음 시작 전에 몇 가지 보탤 말이 있나?」
「네.」
생음악 쪽에서는 내가 건드릴 부분이 별로 없었다.
이쪽에서 편곡을 오케스트라 버전으로 다 해 놓기도 했고, 흠 잡을 구석이 거의 없었다.
「드럼 소리를 더 크게 올려 주세요.」
「드럼을?」
「이번에 리부트한 ‘노스탤지어’의 넘버는 ‘해밀턴’처럼 트렌디하고 팝 느낌을 내는 게 목적이잖아요? 그러려면 일렉 기타랑 드럼 소리를 지금보다 한 단계는 더 올려야 돼요.」
프랭크 차우가 엔지니어에게 손짓했다.
「오케이. 그리고?」
「1절에서 2절로 넘어가는 파트에서 실이 끊겨요.」
「실?」
「이 3분 30초를 하나의 실이라고 가정할 때, 부드럽게 물결치다가 끊기는 부분이 있거든요. 정확히 말하자면 1절과 2절에서 현악기 파트가 연결되지 않는 느낌이에요.」
「동감이군. 나도 비슷한 인상을 받았지.」
「이 노래는 1절과 2절이 그런 식으로 끊기면 안 되는 노래예요. 하나의 긴 메시지이기 때문에.」
「원작자의 말은 언제나 옳지. 특히나 이 경우에는.」
곧바로 조치에 들어가는 프랭크 차우를 보는 동안,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컨트롤룸 내부에 있는 뮤지컬 스탭들이었다.
콘솔 테이블을 만지작거리던 엔지니어, 샘이 ‘워우’ 소리를 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방금까지 적응 중이라고 그러지 않았어? 두 번 적응했다간 큰일 나겠네.」
녹음실 내부에 떠들썩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살짝 겸연쩍기는 했지만 다들 나를 굉장히 호의 어린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방금 전에 만났을 때와는 또 다른 류의 시선이었다.
액면가 때문에 반신반의하다가, 지금의 모습을 보고 필드의 플레이어 중 하나로 나름 인정해준 느낌이다.
동생들이 내 곁에서 졸개모드로 으쓱으쓱하고 있을 때.
「자, 준비는 다 됐고.」
프랭크 차우가 유쾌하게 웃으며 내 등을 퉁 쳤다.
「녹음 시작 전에 원작자로서 한 마디 해 주라고.」
* * *
뮤지컬 ‘노스탤지어’의 단원들이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틴에이저처럼 보이는 앳된 얼굴의 미청년이었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미모에 절로 입가가 올라갈 때, 듣기 좋은 목소리가 헤드폰으로 흘러나왔다.
「제 노래가 이렇게 뮤지컬로 나올 거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는데, 이런 마법 같은 일에 참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유쾌한 환호로 답하는 뮤지컬 단원들에게 선우주가 웃으며 말했다.
「원작자로서 딱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게 있다면, 방금 전의 리허설보다는 더 강렬하게 연주를 했으면 좋겠어요. 이 곡은 잔잔해 보여도 에너지가 넘치는 곡이니까요.」
「알겠습니다!」
「대개 피땀을 흘려 무언가를 한다는 표현이 있는데….」
그리고 그 순간.
입가를 꿈틀! 하던 선우주가 입가에 한 줄기 피를 흘렸다.
실수로 혀를 세게 깨문 모양인데, 보는 사람이 윽 하고 몸서리를 칠 만큼 아파 보였다.
그런데….
‘안 아픈가?’
벌떡 일어나 난리법석을 피우는 졸개 4인방에게 두목이 손을 스윽 내저어 보였다.
티벳 승려 같은 평온한 표정에 단원들이 입을 떡하니 벌릴 때.
「…말하다 보니 진짜로 피가 나왔네요.」
티슈로 입가를 스윽 문지른 선우주가 환히 웃었다.
무섭다.
따스한 미소였지만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설화 속 흡혈귀를 보는 듯한 섬뜩함이었다.
농담으로 이것이 K-spirit입니다 하던 우주가 마무리를 지었다.
「여러분의 피땀이 담긴 열정적인 연주 부탁드립니다.」
단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그렇게 안 하면 좋은 꼴을 못 볼 것 같은 느낌이었다.
“…….”
모두의 눈빛이 결연해진 가운데.
이어진 연주는 프랭크 차우조차 경탄의 박수를 칠 만큼 열성적이었다.
* * *
“비흐야(비주야).”
“네?”
방금 전까지 멋있게 훗 웃던 선우주가 아으으 하고 고개를 푹 숙이는 모습에 김비주가 당황했다.
“왜 그래요, 형?”
“아 너흐 아하(나 너무 아파).”
“그럴 것 같았는데. 진즉 말하지 그랬어요.”
“호하혀허 하히힝을 호허허(쪽팔려서 타이밍을 놓쳤어).”
“에고, 얼른 이리 와요. 형.”
“하헤하에에 아 호이에 헤후허히(카메라에는 안 보이게 해 줄 거지)?”
촉촉한 눈으로 꼬꼬마처럼 칭얼대는 큰형의 모습에 둘째는 그만 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