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444화
프로듀싱 팀 직원들이 눈을 깜빡거렸다.
‘이걸 우리가 하라고?’
문득 인터넷에서 본 피라미드 유머가 떠올랐다.
지금으로부터 1천 년 전, 2천 년 전의 사람들이 ‘우와, 피라미드 대박. 이거 어떻게 만들었지!’ 하고 감탄하고 있을 때.
4천 년 전, 고대 이집트인 건축가가 당황하고 있는 짤이었다.
-제가 이걸 지으라고요…?
그들 역시 그와 같은 표정이었다.
방금 전에 선우주가 편곡했다는 ‘불꽃놀이’의 인트로를 들으며 그들 모두 감탄했다.
전문 작곡가인 그들이 보기에도 까다로워 보이는 섬세한 터치.
안 그래도 레몬 엔터에서 ‘어려워서 절대 쓸 수 없다’는 괴담처럼 돌았던 소스를 개량한 곡이 바로 불꽃놀이었다.
그런 곡의 까다로운 편곡이라니.
“혹시 문제가 있나요…?”
“……으음.”
“방금 전까지 다들 이해했다고…….”
그들이 뭐라고 하기 전에 눈치 빠른 뉴블랙의 리더가 웃었다.
“자세하게 설명해 드릴까요?”
“응.”
직원들이 녹음 어플을 켠 가운데 우주가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편곡 의도에 대해서 먼저 설명을 드릴게요.”
“응.”
“이번에 다시 무대를 하게 되면, 불꽃놀이를 2년 만에 다시 팬분들에게 보여 드리는 거잖아요.”
“그렇지.”
우주가 멋쩍게 웃었다.
“그런데 저희 실력이 그때보다 더 나아졌고요.”
“매번 달라지긴 하지.”
프로듀싱 팀 직원들이 공감했다.
새로운 앨범 작업을 하려고 할 때마다 그들이 가장 먼저 파악하는 것이 멤버들의 보컬 실력이었다.
‘리혁이 음역대 좀 제발 그만 넓어지게 해 주세요….’
‘노래가 무슨 계단식으로 늘어나냐고.’
대충 저번 앨범을 기준으로 맞춤형 옷처럼 만들면 바로 사이즈가 안 맞는 식이었다.
특히나 노래에서는 메인보컬과 눈앞에 있는 리드보컬의 발전이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비결이 뭔지 아세요?
리혁이 비밀을 알려 주었다.
-미친 사람이 쫓아오면 누구든지 하게 되어 있어요. 잠깐 쉬고 왔더니 내 자리에 누가 앉아 있는 이 느낌…! 느아아아! 이 아저씨 때문에 내 속이 터지고!
왜 회상만 했는데도 고막이 저릿저릿할까.
어쨌거나 ‘이끈다’는 뜻의 ‘리더(leader)’란 말답게, 리더가 졸개들을 이끌어 내는 방식으로 매번 실력이 상승하는 뉴블랙이었다.
우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서 이번 불꽃놀이는 기존과는 다른 곡이어야 해요. 지금의 저희 실력에 더 잘 맞는 불꽃놀이 2.0으로. 그때보다 무대 노하우도 많이 생겼고, 실력도 더 늘었잖아요.”
결국에는 더 좋은 무대를 보여 주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설명을 듣고 나니 인트로에서 보여 주었던 미묘한 음의 변화가 이해가 됐다.
“후렴구에서 조금 더 고음으로 가길 원하는구나.”
“네.”
“안무가 조금 더 강하게 들어가도록 베이스를 약간 강화하고.”
“네, 그거예요.”
그러곤 한 가지를 덧붙였다.
“계절감도 살리려고 해요. 저희가 데뷔했을 때는 6월 중순이었거든요.”
“아. 그럼 이번에는 7월 중순은 되어야 무대를 하는 거니까. 조금 더 한여름의 느낌이 나게?”
“맞아요.”
요약하자면 그거였다.
후렴구 고음 올리고, 안무가 더 들어가도록 해 주고, 계절감이 살게 더욱 청량하게.
프로듀싱 팀의 직원들이 눈을 깜빡거렸다.
‘……얘는 우리가 이걸 인트로만 듣고 알 거라고 생각한 건가?’
그들을 고평가 해 주는 마음씨에 감사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서글퍼지는 프로듀싱팀 직원들이었다.
팀장인 나상윤 PD가 대표로 말했다.
“어떤 식으로 만져 달라는 건지 알아들었어. 근데 이게 말이야. 불꽃놀이의 원 소스부터가 그렇잖아. 음을 하나 올리면 다른 음이 이상하고.”
“맞아요. 저도 그래서 엄청 애먹었잖아요.”
나상윤 PD가 턱을 긁적였다.
“지금 2주 남짓 남았는데, 그 안에 다 하기가 힘들 수도 있거든.”
프로듀싱팀의 가장 중요한 손님은 뉴블랙이지만, 레몬 엔터에는 다른 가수도 있었다.
발라드 가수이자 OST 강자로 유명한 윤찬혁, 그리고 현재 잘나가는 걸그룹인 스칼렛.
불꽃놀이의 음원을 준비하려면 인력이 조금 부족하다는 그런 말이었다.
“그러면…….”
우주가 곰곰이 생각하고는 그들에게 물었다.
“인력을 더 충원하면 될까요?”
“그렇지.”
그리고 프로듀싱팀이 에둘러 말하는 인력은 바로 옆 사무실을 쓰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프로듀싱팀이 신설된 이후로 도비 문서에서 이름이 파인 해방 도비들.
이내 그들이 기다리고 있던 말이 돌아왔다.
“그러면 A&R팀 작곡가 분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건 어떨까요?”
“그래! 바로 그거… 흠흠. 그래야겠네.”
흥분해서 박수를 치려던 나상윤 PD가 자리에 앉으며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우리가 최대한 빠르게 음원을 준비해 볼게.”
“부탁드릴게요.”
저 가요~ 하는 가수에게 직원들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형섭아, 나 간다~’ 하며 웃는 선우주에게 김형섭이 잘못 걸린 마니또를 대하듯 손을 흔든 후.
달칵.
우주가 문을 닫고 나간 사무실에 서 있던 프로듀싱팀 직원들의 눈빛이 타올랐다.
‘절대 혼자는 안 죽는다.’
레몬 엔터에서 뉴블랙과 스칼렛을 보며 배운 제1교훈이었다.
살 것 같으면 나부터 살고, 죽으려면 반드시 같이 죽을 것.
고된 업무량에 지쳐 있던 프로듀싱팀 직원들은 이내 젖과 꿀이 흐르는 A&R 랜드로 넘어갔다.
달칵!
“안녕하십니까.”
“어이구~ 우리 프로듀싱 분들~ 무슨 일이세요?”
A&R팀의 작곡가들이 여유롭게 커피 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 이들을 보며 프로듀싱팀 직원들이 웃었다.
“우주 불꽃놀이를 새로운 버전으로 작업해야 돼서 말이죠.”
“네, 그런데요?”
“우리 프로듀서님으로부터 허락을 받았습니다. 필요한 인원을 마음대로 징발하라고.”
“푸웁!”
“콜록, 콜록!”
A&R팀 직원들이 단체로 사레가 들렸다.
노동력 징발을 나온 탐관오리들에게 저항하듯 그들이 현실을 외면했다.
“안 돼…!”
“안 돼요. 저 진짜 거기서 겨우 해방됐단 말이에요….”
“저희 제발 쉬고 싶어요.”
살이 잔뜩 오른 A&R팀의 작곡가들이 버둥거리는 가운데, 피골이 상접한 얼굴로 그들을 하나둘 끌고 가는 프로듀싱 팀이었다.
복도에 켈켈켈 하는 웃음소리와 아우성이 울려 퍼질 때.
“……음?”
우아하게 계단을 내려오던 총괄 프로듀서, 조규환 이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지?’
의미를 알아들을 수 없는 아우성 속에서 ‘뉴블랙’, ‘우주’, ‘제발’, ‘망할’ 같은 키워드가 들려왔다.
‘우주와 관련된 일이구나.’
담담하게 웃던 조 이사가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빠르게 되돌아갔다.
* * *
프로듀싱 팀에게 불꽃놀이 편곡을 의뢰한 후.
우리는 바쁘게 스케줄을 소화했다.
불꽃놀이의 역주행을 대비하기 위한 연습도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해외 투어 연습이었다.
“리혁이 형, 싱가포르어로 안녕~ 수플레가 뭐였져?”
“Hello, Souffle.”
“아, 맞다!”
당장 이번 주의 싱가포르, 인도네시아를 시작으로 우리가 방문하는 나라의 수플레들에게 해 주면 좋은 멘트를 틈틈이 연습했다.
당연히 무대 연습도 잊지 않았고.
이번 달 말까지 싱가포르, 자카르타, 방콕, 시드니, LA 등의 공연이 남아 있었다. 일본 쪽은 스케줄상 이미 2월에 다녀왔기에 올 겨울로 일정이 넘어갔고.
그리고 이런 해외 투어 중간에도 국내 스케줄이 있었다.
“뉴블랙 월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못 나갑니다~”
「와우! 무슨 뜻인지 이해는 못하겠지만 음악이 너무 좋네요!」
바로 국내에 내한한 유명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뉴블랙 World 인터뷰였다.
마에다 신 선생님의 인터뷰를 시작으로 저번에 폴 로랑이 출연하면서 생긴 변화였다.
국내에 개봉하는 할리우드 영화의 출연진이 내한하면서 우리의 컨텐츠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첫 타석은 인종차별의 은유를 담아 미국에서 화제작으로 꼽힌다는 공포 영화 ‘Claire’의 출연진이었다.
「‘못 나갑니다’ 이건 무슨 뜻인가요?」
「그건 말이죠! 여러분들이 저희의 매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거라는 뜻이에요!」
「그건 한 번 두고 봐야겠군요~」
능글맞게 웃는 할리우드 배우들과 영화에 대한 질문을 주고받으며 영화를 홍보해 주고.
우리는 조회수를 챙기는 윈윈이었다.
“대애애박!”
그리고 우리 막내는 덕심도 챙기고.
“나나나나! 나! 나! 나 당신의 세상 최고 팬이에여! …를 영어로 해 주세여! 리혁이 형! 저 지금 당황해서 말도 하나도 안 나오고, 막 영어 못 알아먹었겠어요!”
「당신을 보는 순간, 나는 놀라서 할 말을 잊어 먹었어요.」
「어머.」
아카데미 주연상 후보에 들 만큼 출중한 연기력의 배우, 새라 휘태커를 앞에 두고 횡설수설하는 지호였다.
“필모그래피에 있는 영화도 제가 다 봤구여. 그, 그, 엄마 찾으러 가다가 아빠 찾는 영화도 넘 좋았어여! 거기서 진짜 눈빛 연기하시는 거 보고 눈물 주룩주룩 흘렸어여! 저도 배우거든요.”
「나는 아주 미미한 배우 지망생이지만, 연기를 보는 눈이 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연기는 정말 아름다움의 극치였어요. 호수 같은 눈동자를 보는 그 순간, 내 마음에 파문이 일더군요.」
「어머머. 얼른 이리로 와요…!」
“리, 리혁이 형! 갑자기 이분이 왜 저를 포옹해 주시는 거예여?!”
“내가 통역을 잘해서.”
“뭔진 모르지만 잘했어여! 저 누나들한테 평생 자랑할 거예여!”
연기 지망생인 막내는 할리우드 배우들과 인터뷰를 할 때마다 흥분의 도가니였다.
그럴 만도 한 게 다 어디서 본 사람들이었다.
군대에서 은성이랑 같이 보다가 식겁해서 꺼버린 공포 영화의 주인공도 있고. 영화 채널 슥슥 돌리다 보면 나오는 단골처럼 등장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만큼 여러모로 비범했다.
「비행은 어땠나요?」
「좋았죠. 이번에 새로 고용한 기장이 정말 뛰어난 파일럿이거든요.」
「아…….」
어쨌거나 그런 인지도에 처음에는 긴장했는데, 대개 5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면 긴장이 풀리곤 했다.
워낙 인터뷰어의 긴장을 풀어 주는 데 도가 튼 스타들이기도 하고.
우리도 한 5분 정도 보고 나면 금세 적응하곤 했다.
오히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내한한 외국 연예인들이 식겁하곤 했다.
「그게 된다고요?」
「네!」
쪼그려 앉아 목을 기괴하게 꺾은 비주가 웃으며 물었다.
「이게 안 되시나요?」
「흐아아악!」
목을 꺾은 채 헤헷 하며 추격하자, 공포 영화를 홍보하기 위해 내한한 배우들이 혼비백산해서 도망쳤다.
뭐.
그런 식으로… 여러모로 한국에 대해 좋은 인상을 심어 준 것 같다.
「저와 옥타브 대결에서 승리해야 과자를 먹을 수 있습니다. 자, 첫 음 드릴게요. 아↗」
「……아니 이걸 어떻게 이기라고.」
「우리한테 과자를 먹일 생각이 없나 본데.」
「잠깐 기다려 봐요. 캘리포니아 앞바다에서 나 대신 불러 줄 돌고래를 섭외해 올 테니까.」
「나 같으면 돌고래로 공격하겠어.」
어쩌면 좋은 인상이 아닐 수도 있고.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당사자들이 홍보 효과를 노리는 것 이상으로 조회수가 나온다는 점이었다.
인터뷰가 끝나고 셀카를 찍는 자리에서 한 배우가 뉴블랙TV에 접속하고는 식겁했다.
「세상에, 한국에서 너희 미튜브를 얼마나 많이 보는 거야?」
「음…….」
우리가 웃으며 답했다.
「거의 전국민?」
「그래서 내 매니저가 너희를 national hero라고 소개한 거였구나!」
「……이야기가 좀 깁니다. 그건.」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가는 배우들에게 ‘Kukmin Idol’에 대해 설명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다큐멘터리 제작진이 쏘아 올린 작은 공이 불러온 후폭풍이었다.
* * *
그렇게 해외 유명인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터뷰도 진행하는 한편.
스케줄이 끝나고 불꽃놀이의 연습을 하기 위해 회사 연습실로 돌아왔다.
“음?”
“왜 그래. 중현아?”
“2층에서 뭐 맛난 거라도 먹나 봐요. 되게 흥분한 목소리가 들리는데요. 축제인가.”
리혁이가 고개를 저었다.
“A&R팀이 갈리는 소리에요.”
“아하.”
다 같이 흐뭇하게 웃으며 연습실로 향했다.
“자.”
연습실에 모인 동생들을 둘러보며 손뼉을 쳤다.
“내 개인 스케줄에 관련해서 할 말이 있어.”
“마음 정했어요, 형?”
“응. 나 뭐 할 거…….”
“잠깐만여! 잠깐!”
“…….”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해여.”
각자 후하후하 하면서 가슴에 손을 올리고 ‘제발 난 걸리지 말아라’ 하면서 소원을 비는 녀석들이었다.
마음의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 준 후.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
“나 이번에 연기해 보려고.”
곧바로 희비가 교차했다.
“아아아아! 안 돼애애애!”
막내가 그 상태로 바닥에 쓰러진 가운데, 동생들이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이스!”
“살았다! 살았어!”
“춤추지 마여! 열 받으니까!”
“얘들아. 우리 지호 앞에서 추자.”
“와아아아~”
비주를 중심으로 우리가 군무를 펼쳤다.
지호야 지호야
형이 연기 좀 할게
“하지 말라구여!”
당첨된 막내를 보며 다른 녀석들이 깔깔 웃는 동안, 지호가 입을 비죽이며 일어났다.
“근데 왠지 그럴 거 같긴 했어여. 예전부터 형 연기 해보고 싶어 했잖아여.”
“그랬나?”
“저 대본 볼 때마다 스윽 다가와서 만지작거리고. 대사 중얼중얼해 보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맞는 말이었다.
마법학교 CF를 찍을 때도 그랬고. 지호가 슬립의 카메오 촬영하는 걸 지켜보면서 은근히 들었던 생각 중 하나였으니까.
한 번 해 보고 싶다.
이번에는 평소에 늘 하던 작곡, 예능에서 벗어나 새로운 영역에 도전해 보고 싶었다.
“너희 생각은 어때?”
동생들이 냉큼 손을 들었다.
“찬성이에요. 저 형 연기하는 거 보고 싶어요.”
“찬성.”
“찬성.”
“아아아아아!”
3대 1로 인용되었다.
자축의 의미로 손뼉을 친 후, 내가 가방에서 주섬주섬 대본 뭉치들을 꺼내 보여 주었다.
“이게 나한테 제안이 들어온 대본들이거든.”
“엄청 많네요.”
“응, 일단 추리지 않고 받은 대로 다 가져왔어.”
작곡이나 예능 쪽에 관한 제안을 빼고도 연기에 대한 제안이 엄청 많이 들어와 있었다.
거의 다 드라마였는데, 지호에 비하면 절반이지만 그래도 많은 수였다.
예능 같은 다른 분야와 다른 점이라면 이쪽은 내가 오디션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었다. ‘이 배역에 네 얼굴이 어울릴 것 같은데, 오디션 볼래?’ 하는 느낌으로.
동생들이 촤라락 대본을 훑었다.
바닥에서 버둥거리던 막내도 진지한 눈빛으로 대본을 몇 장 넘기기 시작했다.
“어디로 오디션을 보러 가야 될지 결정을 안 했는데, 너희랑 의논해 보고 정하려고.”
개인 활동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뉴블랙 우주라는 이름을 걸고 활동하는 거니까.
“내 의견만큼 너희 의견도 중요하니까. 가감 없이 얘기해 줬으면 좋겠어.”
동생들이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묘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지호가 대본 몇 장을 골라내어 뺐다.
“일단 우주 형의 지금 실력으로 어림도 없는 대본들은 뺐어여~”
“그, 그렇게 가감 없이는 말고.”
감동적인 분위기가 바로 파괴됐다.
다 같이 웃음을 터뜨리고는 이내 대본을 하나씩 살피기 시작했다.
“자자! 역할 분담할게여~”
“……이거 나만 이상해요? 아무리 봐도 이거 개인 활동이 아닌 것 같은데.”
“리혁아. 우리 갈매기 잡으면서 결의했잖아. 뉴블랙은 하나야.”
“아니, 이게 개인 활동이 아닌…….”
“형, 우린 공산주의예여!”
아니야. 그거 아니야.
실시간으로 국번 없이 111을 불러내는 막내를 막아 세웠다.
잠시 소란이 정리된 후에 다시 지호가 말했다.
“자, 그럼 역할 분담할게여. 일단 드라마라는 건 정말 변수가 많잖아여. 작가, 감독, 배우 셋 다 완벽해도 막 외부에서 문제가 터질 수도 있고. 그 안에서 뭔가 펑! 하고 터질 수도 있고.”
“그렇지.”
“그런 의미에서 운이 없을 만한 것들을 중현이 형이 걸러낼 거예여.”
“오키. 골라낼게.”
중현이가 대본 위에 손을 슥슥 올리고는 하나씩 뺐다.
누가 보면 이런 걸로 액막이가 되겠냐고 비웃을 것 같은데, 그건 중현이를 겪어 보지 않아서 그런 거다.
“휴, 다 골랐어요. 지금 여기 있는 것들이 느낌이 안 좋아요.”
“잘했다. 리혁아~ 거기 남은 것들 치우자.”
느낌이 좋다는 것을 치우고는 불길한 것들을 모았다.
대본들에게서 행운의 향기가 느껴지는 듯한 기분.
그 다음은 리혁이의 차례였다.
“리혁이 형은 진짜 까다롭잖아여. 뭐든지 반박하려고 태어난 사람이니까.”
“뭔 소리야. 네 말은 틀렸어.”
“봤져?”
“……!”
바로 증명됐다.
우리가 웃음을 터뜨리고 리혁이가 얼굴을 붉히는 동안, 막내가 해맑게 웃었다.
“그런 논리력이 우리를 구원해 줄 거예여!”
흥 하며 콧바람을 뿜던 리혁이가 대본을 슥슥 훑었다.
“너무 스테레오 타입이고. 차별적인 것도 많고. 이건 심지어 고증도 틀렸네. 이 시대에 이게…….”
하나씩 걸러졌다.
마치 거름막에 통과한 것처럼 대본 층이 얇아졌다.
“이제 리혁이 형의 논란 필터를 통과했으면 비주 형 차례예여. 드라마가 잘 되려면 일반 대중이 재미있어야 하잖아여. 이럴 때는 머글의 눈을 이용해야 돼여.”
지호가 하는 말 치곤 일리가 있었다.
비주가 대본을 슥슥 넘기고는 ‘음?’ 하며 갸웃하는 것들은 바로 사이드로 빠졌다.
그렇게 비주의 과정까지 두어 시간이 지났을 때.
“이제 제가 확인을 해 볼게여.”
대본은 총 3개가 남아 있었는데, 앞서 걸러진 다른 대본들과 다르게 찬조 출연 정도 비중이었다.
‘우리 드라마에 뉴블랙 우주가 카메오로 나온다고요!’ 하며 언플을 할 정도인데.
아무것도 검증 안 된 내 연기력을 고려하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런 게 더 나은 거예여. 형이 유명하긴 해도 인성 나쁜 우주선 그런 걸로 유명한 거잖아여.”
“그렇지.”
“형을 갑자기 주연이나 조연으로 쓰겠다! 이러면 그건 높은 확률로 조금….”
“이상하지.”
상태가 영 좋지 못한 곳일 가능성이 컸다.
‘네가 뭔데 그런 데 들어가느냐’ 부터 시작해서 달릴 악플들이 상상이 갔다.
으으, 하며 몸서리를 치면서 대본을 훑어보았다.
“하나는 사극이네여. 흐음.”
“사극이 아니고 판타지.”
“……판타지 사극이네여. 흐음.”
트렌디한 사극에서 약방의 감초 같은 역할이었다.
정보를 유통하는 비밀 조직을 이끄는 수장인데, 바지 사장을 세워두고 뒤에서 조종하는 뭐 그런 역할.
대충 눈에 부리부리한 화장하고 귀걸이 다는 그런 역할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코믹한 장르물인데….”
밤마다 악당들을 때려 부수며 정의구현하는 주인공이 위장용으로 카페를 운영하는데.
거기서 사장 대신 카페를 경영하는 알바생 배역이었다. 잘생긴 외모와 유능한 능력으로 장사가 지나치게 잘 되게 만드는 역할.
우리가 하나씩 보면서 흐음 하고 있을 때.
대본을 둘러보던 막내가 세 번째 대본을 집었다.
“근데 제가 봤을 때, 형은 이걸 해야 돼여…!”
아기 사자를 들어 올린 원숭이처럼 대본을 양손으로 번쩍 드는 막내였다.
어딘가 성스러운 후광이, 아니 거울에 비친 조명이 그 뒤에서 빛났다.
“오오오…!”
우리가 감탄하고 있을 때, 침을 꿀꺽 삼키는 나에게 막내가 대본을 하사해 주었다.
“이건…….”
장르는 시트콤.
그 밑에 적혀 있는 제목을 본 순간, 나의 두 눈동자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니, 이건…….”
“재미있을 거 같지 않아여?”
“…….”
내가 눈을 깜빡이는 동안, 동생들도 같이 눈을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진짜로…?”
“진짜……?”
지호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우리가 눈을 깜빡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앞서 두 대본을 버리고 막내가 건져 올린 대본은 바로.
“<우리 가족은 외계인>…?”
굉장히 특이한 제목의 주말 시트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