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480화
백스테이지.
무대 스크린에 연습 영상과 인터뷰가 흘러나오는 동안 사과팀은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꿀꺽.
생수로 목을 축인 란이 크게 숨을 내쉬자 비주가 웃었다.
“선배님도 떨리세요?”
“응.”
그녀가 씩 웃었다.
“오랜만에 무대 서서 그런지 떨리네. 적당히 긴장도 되고. 너는?”
“저도요.”
“이리 와. 셋이 같이 붙어 있자.”
“네.”
비주와 란, 하루가 어깨를 맞대고 으으으으 하며 오들오들 떨었다.
화면에 비주가 등장했는지 요란한 환호가 들린다.
멀찍이 VCR에서 흘러나오는 란과 자신의 비명을 들으며 하루가 어색하게 웃었다.
“근데… VCR이 엄청 기네요.”
“한 15분 걸릴 거야.”
“……15분이나요?”
그 말에 하루가 몸을 살짝 떨었다.
이렇게 심장 떨리는 상태로 15분을 기다려야 한다니.
‘……토할 거 같아.’
아주 중요한 무대를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사방의 공기가 그를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비주가 그를 불렀다.
“하루야.”
“네?”
“괜찮아? 너 엄청 긴장한 것 같은데.”
“아…….”
하루가 담담하게 답했다.
“조금 긴장한 거예요, 선배님. 신경 안 쓰셔도 괜찮아요.”
“진짜 괜찮아?”
짙은 밤색 눈동자가 정말? 하듯이 묻고 있다.
잠시 머뭇거리던 하루가 한숨을 쉬었다.
“…실은 엄청 떨려요.”
“그럴 줄 알았어.”
비주가 공감한다는 듯 웃었다.
“우리도 명곡단 첫 경연 들어갈 때 엄청 긴장했거든. 백스테이지에서 생수만 1리터 마시고 그랬어.”
히힛 웃는 비주에게 하루가 말했다.
“아, 맞다. 선배님은 명곡단…….”
비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진짜 떨렸어. 우주 형도, 나도, 다른 애들도 다 긴장해서 허둥지둥하고 그랬거든.”
“그때 1위 하시지 않았나요?”
“응. 근데 사실 기억이 하나도 안 나. 무대에서 어떻게 했는지, 그냥 몸이 자동으로 움직인 거 같아.”
어떤 느낌인지 공감이 갔다.
그가 데뷔 무대에 올랐을 때 정말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2년 전 일을 떠올리며 웃는 비주의 모습에 하루는 감탄했다.
‘나랑 경험의 질이 다르구나.’
데뷔 해부터 신인상을 다 쓸어 모으고 지금은 체조경기장까지 석권한 뉴블랙이었다.
거기에 크고 작은 해외 공연들까지.
밟고 올라가 있는 경험의 높이가 다르니 보이는 시야도 다른 듯했다.
“선배님은 확실히 덜 떨리시겠네요.”
“아니.”
비주가 하핫 웃었다.
“나도 엄청 떨려.”
“…….”
“옛날에는 콘서트도 해 보고 그러면 덜 떨리겠지, 했는데 공연 앞두고 떨리는 건 여전하더라.”
기지개를 쭉쭉 켜던 비주가 화제를 돌렸다.
“혹시 괜찮다면, 좋은 방법 하나 알려 줄까?”
“좋은 방법이요?”
“조금 덜 긴장되는 법!”
“네…! 네!”
비주가 근처의 시계를 보며 물었다.
“평소 이 시간에 뭐 해?”
“주말에는 숙소에 있고… 주중에는 회사에서 멤버들이랑 연습하고 있을 시간이에요.”
“보컬? 댄스?”
“댄스요.”
“잘됐다.”
비주가 웃으며 말했다.
“잠시 눈 좀 감아볼래?”
“네.”
“평소에 연습은 어디서 하는 거야? 저번에 란 선배님이랑 내가 방문했던 숨 엔터 연습실?”
“네, 거기요.”
“그러면, 지금부터 머릿속에 연습실을 그려 보는 거야. 연습실에 막 들어서기 전에 문 앞에서부터.”
눈을 감은 하루가 상상 속에서 연습실을 떠올렸다.
-우리 24시간이 왔구나!
-에이, 연습실에서 떡볶이 좀 먹을 수도 있지. 휴게실 멀… 네, 죄송합니다. 네.
꿈틀꿈틀하는 그의 표정에 비주가 아차 하며 말했다.
“참고로 다른 사람들은 지워도 돼.”
“아, 네.”
“내 경우에는 김중현이 맨날 공중부양 하는 거 그려져서 집중이 안 됐어.”
그 말에 따라 미친 형들을 지운 에이플비의 막내가 눈을 감고 연습실 풍경을 하나하나 그려 나갔다.
케빈 놈이 한쪽 귀퉁이를 부숴 먹은 앰프.
다른 형이 깨 먹은 유리.
연습실 라커에 묻은 떡볶이 자국들.
숨 엔터의 연습실을 하나하나 상세하게 그려 나간 하루에게 비주가 말했다.
“그 연습실에서 오늘 무대를 하는 상상을 해 봐.”
“네.”
“그리고 이제… 눈을 떠 볼래?”
평소처럼 연습실에서 차분하게 안무 연습을 하는 광경을 그리던 하루가 눈을 떴다.
비주가 백스테이지에서 무대로 가는 통로를 가리켰다.
“나머지는 쉬울 거야. 저 통로의 끝에 올라가고 나면 네가 머릿속으로 그린 연습실이 나온다고 생각하는 거지.”
“아…….”
“몇 번 하다 보면 적응이 될 거야.”
그러곤 부드럽게 웃었다.
“실전이 아니라 연습이라고 생각해 봐. 무대가 아니라 마지막으로 하는 연습.”
“네, 이해했어요.”
“어때? 조금은 편해진 거 같아?”
하루가 고개를 끄덕이자 비주가 웃으며 말했다.
“다행이다.”
상대가 파이팅~ 하며 내민 손뼉과 손을 마주대며 하루가 감사의 의미를 담아 꾸벅했다.
슥 웃던 비주가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동안 하루는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 비주가 알려 준 방법을 써먹자 잘게 떨려 나왔던 숨이 고르게 변했다.
-하루야…? 벌써 힘들어?
-흐악!
자꾸 튀어나오려는 비주가 변수긴 했지만,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었던 안면 근육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그러는 한편.
‘하루도 긴장을 푼 것 같고.’
다른 팀원들의 안색을 확인한 비주는 이내 마음을 놓았다.
왠지 모르게 초췌해진 안색들을 제외하면 팀원들의 상태는 몹시 좋아 보였다.
그랬기에 시선을 거두고 눈을 감았다.
“후우…….”
이제 자신의 상태를 확인할 차례였다.
‘으음, 조금 쑤시긴 한데…….’
무릎과 허리를 제외하면 정상이다. 이 정도는 점프의 강도만 조절하면 해결이다.
들숨과 날숨의 리듬도 규칙적이고.
긴장되긴 하지만 딱히 마음의 동요는 없었다.
‘연습이야. 마지막으로 하는 연습.’
하루에게 말했던 것처럼 눈을 감고는 무대 위로 올라가는 통로를 차분하게 올라가는 상상을 했다.
그러면서 마음속의 생각들을 하나씩 지워나갈 때.
란이 그를 불렀다.
“비주야.”
“네!”
“이제 준비 들어가야겠다. 3분 남았어.”
눈을 뜨자 휙 몰아치는 현실감각과 함께 상기된 얼굴의 댄서들이 보였다.
“자자! 모입시다!”
란의 호출에 비주와 하루가 모이고, 이번 무대를 위해 그들과 합을 맞췄던 댄스 크루도 모였다.
란이 웃으며 말했다.
“무대 올라가기 전이에요. 아쉬운 점도 많고, 힘들었던 점도 많겠지만 그런 건 다 아래에다 두고 올라갑시다!”
“네!”
“자, 둘셋 하면 파이팅할게요. 둘셋!”
“파이팅!”
긴말은 필요 없었다.
다 같이 파이팅을 외치고는 제자리에서 깡총깡총 뛰며 몸을 풀고 있을 때.
“사과팀, 스탠바이 해 주세요!”
인터컴을 낀 스탭의 말에 주변 댄서들과 미소를 주고받던 비주가 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있는 그의 연습실이 그려진다.
하루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가 상상하는 연습실에는 언제나 네 사람이 함께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빛나는 사람들.
깊숙한 수렁에 빠져 있던 그에게 손을 뻗어 준 형과 연습생 시절을 지탱해 준 친구와 동생들.
자신의 사람들을 떠올리며 웃었다.
‘잘하자.’
분주하게 움직이는 주변의 흐름에 눈을 떴다.
“사과팀! 무대 올라가겠습니다!”
“네!”
환한 미소와 함께 비주는 무대 위로 발걸음을 옮겼다.
캄캄한 무대.
댄서들의 실루엣이 드러나면서 환호가 들려왔다. 어디선가 우주빛깔 김비주 하는 이상한 응원이 섞인 가운데.
뒤편에서 <에라트리아>의 장면 소개 영상이 나오는 동안 비주는 고개를 숙여 바닥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걱정, 불안, 초조, 설렘 등으로 복잡한 머릿속의 생각을 하나하나 지워 나갔다.
‘생각을 비워야 편해.’
생각이 많은 건 싫다.
그것이 바로 그가 남들이 싫어하는 집안일과 요리를 좋아하는 이유였다.
바쁘게 몸을 움직이다 보면 생각이 사라지니까.
오히려 쉬는 시간이 주어질 때가 불안했다. 헤엄을 멈춘 물고기가 가라앉듯이 복잡한 생각에 괴로웠기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하루하루가 사과 같은 기분이었지만 한때 매일 상한 사과를 먹는 것 같을 때가 있었다.
막막했던 집안 분위기.
가족들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는 책임감과 안개 낀 것처럼 뿌옇게 보였던 데뷔 후의 미래.
그랬기에 춤이 좋았다.
춤을 추다 보면 잡다한 생각이 사라진다. 복잡하게 계산할 필요도 없다. 그저 음악에 몸을 맡기면 된다.
“후우…….”
차분하게 심호흡을 한 비주가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물결 하나 없는 고요한 호수처럼 맑은 빛이 그의 눈동자에 자리했다.
음악의 리듬에 맞춰 들숨과 날숨이 박자를 맞춰 가면서 그의 손이 허공을 향해 뻗어졌다.
다시 한번.
자유로워질 시간이었다.
* * *
무대 위로 댄서들이 우르르 올라왔다.
수플레들의 함성이 쏟아지는 가운데 우리가 목청을 돋우며 환호했다.
“우아아아아아!”
“우주빛깔 김비주! 사랑해요 김비주!”
“저기에 저희 형이 있어여…!”
스트릿 보이즈 멤버들까지 섞여서 예쁘다 김비주! 하는 동안.
무대 위에서 서 있는 댄서들을 빠르게 훑었다.
‘누가 비주지?’
‘안 보이는데여.’
조명이 안 들어온 상태기도 하고, 비슷비슷한 복장의 댄서들 속에 섞여 있는 터라 잘 안 보인다.
파앗!
대신에 무대 뒤편의 스크린에 불이 들어왔다.
[Chapter IV]
왕의 탄신일.
CG로 구현한 스테인드글라스 같은 그림들이 움직인다.
왕을 암살하기로 결정한 왕자와 공주는 각기 다른 길을 걷기로 결정한다.
공주는 어렸을 때 거두어졌던 극단에서 배운 춤이라는 특기를 활용해 궁중 무희의 자리에 들어간다.
-나는 무희가 되겠어. 당신은?
-나는 근위대가 될 거야.
대장간 주인에게 거두어졌던 왕자는 검이 퍽 익숙했다.
그래서 그는 왕을 가까이서 지키는 근위대에 일자리를 구하고, 국왕의 호위 기사로 발탁되는 데 성공한다.
공동의 목표를 향해 달려간 남녀는 그들을 지원해 주는 비밀결사와 결행일을 지정한다.
-왕을 죽이려면 이날뿐이야.
그것은 바로 국왕의 탄신연.
잔치가 벌어져서 경계가 느슨해진 상황 속에서 국왕을 암살하겠다는 것이 그들의 아이디어였다.
무희들의 축하 공연이 벌어지고 있을 때, 공주가 비수를 던져 왕을 암살하고.
만약 실패하면 호위 기사인 왕자가 임무를 마무리하고, 성공할 경우에는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틈타 함께 도망치기로 약조한다.
하지만….
-이게 정말 옳은 일일까?
공주가 무희가 되어 암살 준비를 하는 동안 왕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던 왕자는 회의를 느낀다.
그가 지켜본 왕의 죄는 방관자라는 것이었다.
실질적인 악행을 저지르는 재상과 무력한 왕을 보며 고민을 거듭하는 장면이 나온 후.
파앗-!
암전된 스크린과 함께 무대 조명이 밝아 올랐다.
“와아아아아아아!”
객석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환호와 무대의 음악이 섞이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과연 어떤 무대가 나올까.
이 장면에서 비주는 어떤 배역을 맡았을까?
마치 연극의 막이 오르듯이 서서히 밝아지는 조명 아래로 댄서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좌우 양쪽으로 나뉜 구도에서 먼저 왼편의 조명이 환해진다.
“오오오오…….”
따로 마련된 옥좌에 앉아 턱을 괴고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란이 있었다.
권태롭고 무감정한 몸짓.
곁에는 호위 기사로 위장한 왕자 배역을 맡은 댄서가 있었다.
‘저분 되게 유명하신 분이라고 했져?’
‘응.’
란 선배가 섭외한 유명 댄스 크루의 단장이었다.
비주가 정말 춤을 잘 추는 분이라서 좋아했던 분인데, 업계에서 굉장히 실력 좋기로 유명한 댄서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교활한 재상 역할을 맡은 하루가 있었는데 은성이가 흥분해서 방방 뛰는 게 느껴졌다.
‘거 앞좌석은 발로 차지 맙시다.’
‘미안합니다~’
그렇게 소개가 끝나고 왼편에서 무대가 시작됐다.
국왕과 기사, 재상이 한데 어우러져 한 편의 춤을 선보였다.
탄신일 축하 파티 장면을 보여 주듯이 흥겨운 분위기가 이어진 후.
이번엔 오른편 조명이 밝아 올랐다.
“와아아아아아아-!”
비단옷을 입은 무용수들이 붉고 투명한 천을 두르고 있었다.
무대 위의 바람에 무희들의 복장에 달린 붉은 끝이나 장식들이 부드럽게 흔들린다.
그 중앙에 비주가 있었다.
다른 무희들처럼 입가에 붉은 천을 두르고 있어 눈만 드러났지만 누가 봐도 비주였다.
눈 끝에 꼬리처럼 그려진 붉은 화장에 객석의 수플레들이 흥분해서 방방 뛰기 시작했다.
현장에선 함성이 흘러나오는 한편.
국왕의 탄신일에 어울리는 듯한 흥겨운 음악이 점차 잦아들었다.
“우와아아아아…?”
왠지 조용히 해야 될 것 같은 느낌이라 다들 목소리를 낮췄다.
소리가 하나둘 사라지고 무대 오른편에 서 있는 무희들에게 시선이 모일 때였다.
바로 그 순간.
비주를 둥글게 둘러싸고 있던 붉은 옷을 입은 무희들이 동시에 몸을 숙이며 자리에 앉았다.
붉은 원 한가운데 찍힌 점처럼 서 있던 비주에게 시선이 모였다.
“……!”
우리 주변에서 누가 헛 하고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가 다시금 고요해졌다.
천여 명의 시선을 홀로 받고 있던 비주가 턱 끝을 고고하게 들었다.
몸에 두른 붉은 천도 살랑거리고 팔다리의 새하얀 피부가 조명 아래 빛을 발했다.
모두가 숨 쉬는 것도 멈추고 바라볼 때.
비주가 허공을 향해 손을 나긋하게 뻗으면서 음악이 옅게 깔리고.
뒤이어 손을 다시 회수하면서 본격적인 궁중 연회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그와 함께 <에라트리아>의 클라이맥스, 무희들의 춤이 시작됐다.
* * *
무대에서 날뛰는 메인 댄서를 보며 뉴블랙의 어깨가 백두산과 한라산처럼 쑥쑥 올라갈 때.
일반 방청객들은 넋을 잃고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박이다…….’
쉴 새 없이 모양이 바뀐다.
한 점이 되었다가 십자 모양의 바람개비처럼 빙글 돌았다가, 마치 꽃봉오리가 열리듯 펼쳐지다가.
이런 공연이 눈앞에 있으면 정말 누가 암살당해도 모를 것 같다.
그리고.
‘우와아아….’
비주의 춤이 이랬구나 싶다.
아이돌 팬들 사이에서야 춤선 top 아이돌을 꼽을 때 거론되는 멤버지만, 일반인들에게는 그리 유명한 편은 아니었다.
그런 것을 한풀이라도 하듯이 뉴블랙의 메인 댄서가 옷자락 끝을 휘날리며 날고 있었다.
‘미쳤다. 진짜.’
수플레들도 흥분의 도가니였다.
‘내가 이걸 보려고 태어났구나!’
‘발카로 잡으면 가만 안 둬, 방송국 놈들.’
‘이제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어. 집으로…….’
만약에 그들의 감정과 생각이 와이파이로 연결된다면 서버가 다운될 만큼 트래픽이 폭주했을 것이다.
‘비주야!’
우아하게 몸을 날리면서 객석을 향해 고고하면서도 당당한 눈빛을 보이고.
붉은 천의 움직임을 이용해 일부러 눈앞을 지나가도록 만들면서, 그 뒤에서 야릇하게 웃기도 하고.
다른 무희들을 이끌듯이 붉은 선이 비주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
주변을 바라보니 객석에 앉은 다른 아이돌 팬들도 입을 떡하니 벌리고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이지 그럴 만한 무대였다.
아마 이 자리에 있는 관객 중 반수가 넘는 사람들은 집에 가서 미튜브에 비주를 검색할 분위기였다.
그러고 있을 때.
촤악-
후반부에 접어든 무희들의 춤에서 비주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을 멀리 날렸다.
붉은 천이 허공에서 느릿하게 낙하하는 동안 땀에 젖어 탄력 있게 빛나는 얼굴이 드러났다.
“……!”
객석 곳곳에서 헛 하며 비명이 나오려다가 말 때.
긴박하게 변하는 음악과 함께 무대의 좌측에서 조명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포커스가 이동했다.
공주가 왕을 암살하기 위해 비수를 준비하고 있을 때.
왕 측에서 일어난 변화였다.
대사는 없었지만 마치 눈앞에 대사가 보이는 듯한 몸놀림.
[저 아이는…….]
무희의 얼굴이 드러나면서 국왕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진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왕비와 닮은 외모.
어딘가 모르게 묘한 이끌림을 느끼던 왕이 몸을 곧추세우고 있을 때.
[……?]
호위 기사로 위장한 왕자는 국왕의 목에 있는 반점을 발견한다.
자신의 것과 같은 독특한 모양.
그 순간, 왕자 역시 본능적인 깨달음을 얻는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황.
오른편에서 춤을 추던 무희들이 점차 왼쪽을 향해 다가가고, 공주는 비수를 움켜쥔다.
[안 돼!]
그리고 그 순간.
비주의 손이 촤악 뻗으면서 그 안에 있던 붉고 기다란 천이 마치 화살처럼 뻗어 나갔다.
눈앞에서 비수의 궤적이 보이는 느낌.
그리고 그 비수의 끝이 닿은 곳은…….
[…….]
국왕의 앞을 막아선 호위 기사의 가슴팍이었다.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어, 뭐야…? 하고 바라볼 때.
그 순간.
무대가 계속되어야 할 그 순간에 조명이 일시에 어두워졌다.
‘뭐야?’
이대로 끝나는 건가 하는 생각에 다급하게 욕을 준비할 때.
파앗!
어두워졌던 조명이 밝아 올랐다.
“……어?”
무대 위를 바라보던 관객들은 의아한 기분을 느꼈다.
왜냐하면 무대 위에 서 있던 댄서들이 움직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마치 3D로 된 그림 같았다.
궁궐을 배경으로 놀란 표정의 귀족들이 입을 막고 있고, 호위 기사는 쓰러져 있고, 무희들은 당황하고 있다.
마치 누군가 찍은 사진 한 장처럼.
‘어? 또……?’
그러더니 또 한 번 조명이 암전됐다가 켜졌다.
무대 위의 장면이 바뀌었다.
놀란 왕이 몸을 굽혀서 호위 기사의 몸을 붙잡고, 무희들 속에서 공주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다.
‘스냅사진 같은 거구나!’
호위 기사가 비수에 맞고 난 직후 벌어지는 일들을 마치 여러 편의 그림처럼 보여 주는 듯했다.
[누구냐…!]
눈앞에서 호위 기사가 사망하는 상황에 왕은 노호성을 터뜨리는 듯했다.
정확히 어디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무희들 속에서 나온 비수 한 자루가 호위 기사를 암살한 것으로 보였다.
공주가 나서려고 할 때 왕자가 손을 뻗었다.
[저…….]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바로 재상.
유언을 대신하여 재상을 가리킨 왕자가 죽음을 맞이하고, 장면이 후반부로 넘어갔다.
후반부는 왕을 제거하려는 재상이 이끄는 무리와 왕이 결투를 벌이는 장면이었다.
무희들이 있던 곳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재상과 왕이 빙글 돌면서 그런 결투를 선보이고.
마침내 승리를 거둔 왕이 무희로 위장한 공주와 대면하는 장면으로 4장이 끝났다.
에라트리아의 미래가 어찌 될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가운데.
길고 느릿한 음악이 마침내 멈췄다.
“와아아아아아아!”
조명 아래 엔딩 포즈를 취하고 있는 댄서들에게 환호가 날아들었다.
비 오듯이 땀을 흘리며 숨을 몰아쉬는 세 댄서의 얼굴이 한 차례씩 클로즈업되는 한편.
공연용 조명이 꺼지고 무대가 환하게 밝아 오르면서 환히 웃는 비주의 얼굴이 드러났다.
-감사합니다!
박수를 치는 관객들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환히 웃는 그 표정은 왠지 모르게 시원하면서도 후련해 보였다.
‘비주야!’
수플레들이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그들이 좋아하는 가수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어떤 식으로 주접을 떨어야 할지 머릿속으로 씽크빅을 할 때.
카메라가 움직이면서 객석과 패널석을 훑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플레들은 자신들의 모자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패널석에서 기립박수를 하는 뉴블랙의 손에 핸드폰이 반짝거렸다.
[비주야? 어디서 풀 냄새 안나니? 원더풀.. 뷰티풀..]
[네..? 저 왕지호가 세계 최고의 댄서 김비주의 동생으로 보인다고요?]
[한 편의 꽃등심 같은 무대였다.]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비주 형 좋아요.]
당사자가 민망해서 시선을 피하는 주접들.
전광판 앱을 든 채 행복하게 웃는 4블랙의 모습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