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509화
내가 웃으며 물었다.
「많이 놀랐죠?」
「조, 조금…….」
에디 그린이 살짝 질렸다는 얼굴로 가슴에 손을 올렸다.
프로듀싱팀 PD들이 말했다.
“저 기분 이해하지.”
“나 저번에 간식 먹으려고 서랍 뒤적이다가 경보음 울려서 깜짝 놀랐잖아.”
“난 덫에 걸렸잖아. 어휴, 하여간 우리 애들…….”
수군수군하는 프로듀싱팀 사람들에게 시선을 스윽 돌리자 그들이 가사지에 집중하며 내 시선을 피했다.
녹음 부스 안에서 헤드폰을 끼고 있는 헤일리가 말했다.
-그게 너희 보안 장치야?
「네.」
-내 스튜디오에도 하나 설치하고 싶네. 너희가 가진 섬광탄도 터뜨리고.
「우리는 이걸 응원봉이라고 불러요. 헤일리.」
1미터짜리 왕봉이를 들어 보이는 중현이를 바라보던 헤일리가 픽 웃었다.
-내 눈에는 정의의 철퇴처럼 보이는데. 너희 팬들이랑은 싸울 일이 없길 바라야겠군.
내가 웃으며 물었다.
「잠시 소란스러웠는데, 이제 다시 녹음 이어 갈까요?」
-좋아.
서랍은 물론이고 주변의 물건들을 경계하며 어깨를 움츠린 에디 그린을 바라보다가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곤 토크백 버튼을 다시 눌렀다.
「갈게요.」
곧바로 반주에 맞춰 헤일리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들어 왔다.
정말이지 감미롭다.
파란 머리카락과 파란 눈을 지닌, 이 물의 요정처럼 생긴 가수는 정말이지 맑은 목소리의 소유자다.
신화 속에 나오는 부정한 것을 씻겨내는 샘물, 잡티 하나 없이 하늘을 담고 있는 맑은 호수처럼 온통 푸르른 것들이 내 귓가를 맴돌고 스쳐 가는 느낌이다.
‘좋아요.’
잘하고 있다는 의미로 헤일리에게 리듬에 맞춰 손을 저어 주었다.
조금 천천히.
그런 의미를 담아 손짓하니 곧바로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가 적절하게 보폭을 맞췄다.
Blue Moon은 과거에 관한 노래다.
과거. 돌아갈 수 없는 시간. 그중에서도 추억.
레퍼런스로 삼은 80년대 미국의 명곡과 비슷한 사운드와 함께 곧바로 가사가 흘러나왔다.
Under the blue moon
I pray
I wish
속삭이는 듯한 헤일리의 목소리가 노래의 저변에 깔린 사운드와 얽혀들었다.
지금은 돌아갈 수 없는 추억에 대한 이야기.
그러하기에 과거에 대한 미련이 조금 남은 분위기를 풍겨야 한다.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는 추억처럼.
메아리가 울리도록 잔향이 남아야 하고, 또한 목소리는 과거의 추억을 다정하게 노래해야 한다.
「헤일리.」
-Yeap.
「방금 좋았는데 다시 한번 갈게요. wish 부분에 목소리를 조금 중첩시켜서 쌓아 볼 거예요.」
-알았어.
비록 언어가 다르긴 하지만, 가수들 사이에서는 통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특별하게 어떤 의도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전에 어떤 식으로 해 줬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면.
-이렇게 할까?
「훌륭해요.」
바로 내가 한 말의 이면에 담긴 의미까지 캐치해서 불러 주는 노련한 가수였다.
정말 좋은 파트너였다.
‘이 노래의 가사는 내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야.’
아까 뮤직 비디오에 대해 설명하면서 헤일리가 설명한 이미지는 다음과 같았다.
롤러코스터, 색색의 풍선이 가득한 놀이동산.
그곳에 외롭게 들어선 아이가 귀신의 집에 들어서자, 그 안에 있던 기기묘묘한 괴물들이 되살아나 소녀를 맞이한다.
푸른 달 아래서 할로윈의 괴물들과 함께 하늘을 날아다니는 소녀.
밤이 끝나고 다시 현실로 돌아온 소녀는 그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다. 그저 확실한 것은 그녀가 가족을 절실하게 원했다는 것뿐.
푸른 달의 마법은 거기서 끝난다.
「좋았어요.」
-이번엔 네가 들어올 차례야. 써니.
고개를 끄덕이며 녹음 부스 안으로 들어섰다.
이번에 헤일리와 함께 작곡한 Blue Moon에서 뉴블랙이 부르는 파트 중에선 내 파트가 제일 많았다.
곡의 정서를 가장 잘 살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헤일리가 9살 때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었다고 했던가. 가족을 원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잘해여~!’
‘못하면 두고두고 놀릴 줄 알아요.’
입모양으로 응원해 주는 동생들에게 씩 웃고는 헤드폰을 끼고 마이크 앞에 섰다.
비녀를 지휘봉처럼 들고 허공에 톡, 톡, 느낌 있게 강세를 주던 헤일리가 내 노래를 듣고 웃었다.
-이건 존나게 끝내주는 곡이 될 거야.
「동감이에요.」
다시 한번 이어진 shibal great에 우리 프로듀서들이 웃음을 터뜨리며 뒤집어졌다.
뒤이어 동생들도 하나씩 들어와 자기 파트를 불렀다.
이미 연습이 다 끝난 곡이어서 녹음 작업은 수월했다.
특히 리혁이가 노래를 부를 때, 헤일리와 프로듀서 에디 그린이 크으 하며 엄지를 치켜들었다.
「저 유리 같은 몸에서 이런 코끼리 보이스가 나오다니. 닥터 피쉬는 최고의 가수야.」
「진짜 잘 부르네…….」
-내 이름은 리혁이라고요. 날 닥터 피쉬라고 부르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 줄 거예요.
부들부들하는 가수를 멀뚱멀뚱 바라보던 우리가 손을 내밀며 몸을 부풀렸다.
“닥터~~~”
“피쉬~~”
-아 진짜……!
화음을 쌓으며 놀리자 리혁이의 얼굴에 붉은 눈금이 쭉쭉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녹음은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끝났다.
엔지니어들이 맡을 세부 작업들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녹음본 자체로도 훌륭한 퀄리티였다.
에디 그린이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내가 준 명함, 꼭 가지고 있어요.」
「그럴게요.」
알아서 우리 품으로 굴러 들어오겠다는 아메리칸 도비의 모습에 따스한 미소를 보내 주었다.
「그걸로는 어림도 없을 텐데.」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헤일리가 뮤지컬 ‘노스탤지어’의 넘버 작업과 관련한 이야기를 말해 주었다.
이윽고 에디 그린의 눈이 번쩍 뜨였다.
「……프랭크 차우랑 곡 작업을 같이 했다고요?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브로드웨이의 그 프랭크 차우요?」
「네.」
「…….」
「헤일리가 포장을 해 줘서 그런 거지, 그 정도로 거창한 건 아니고요. 그때 녹음만 잠깐 함께 했어요.」
내가 민망해서 손사래를 칠 때, 헤일리에게 한마디를 들은 에디 그린이 고개를 획 돌렸다.
「작년에 Thousand Dreams?」
「네. 맞아요.」
「…….」
에디 그린이 명함을 두 장 더 꺼냈다.
그러곤 진지하게 말했다.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내가 웃자 졸개들도 꺄르륵 웃으며 의기양양하게 턱끝을 세웠다. 그러곤 자기들도 손을 내밀었다.
「우린 패키지예요.」
「우리가 가면 이 사람도 가요.」
상대가 반색하며 명함을 네 장 더 꺼냈다.
그렇게 녹음 작업이 마무리되는 동안, 뻐근하다는 듯 기지개를 쭉쭉 키는 헤일리와 소파에 늘어져서 대화를 나눴다.
「드럽게 피곤하네.」
「좋은 말 써야 돼요. 헤일리.」
비주의 다정한 말에 헤일리가 말했다.
「B, 너를 볼 때마다 떠오르는 사람이 있어.」
「누구요?」
「우리 할머니. 뜨개질도 잘하고, 요리도 잘하고, 내가 좋아하는데, 잔소리가 너무 많아.」
「……미워요, 헤일리.」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지호가 물었다.
「그럼 이제 뭐 할 거예요?」
「대충 한국에서 시간 좀 때우다 가려고. 저번에 리혁이 준 한국 방문 리스트를 다 못 채우기도 했고… 아!」
「……?」
「그걸 잊고 있었네.」
헤일리가 핸드폰을 톡톡톡 두드리더니 SNS 화면을 보여 주었다.
「한국 팬들이 올린 멘션이야.」
‘루블리’ 같은 닉네임을 지닌 아이디들이 보인다.
-언니. 뉴블랙과 만나면 ‘뉴-불백’이라는 음식을 달라고 해요.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싼 음식이에요!
-사람들이 이걸 먹으려고 모여서 고속도로가 지옥(hell)이 됐대요!
-톱스타들이 출연료로 받아갔어요.
틀린 말은 아니긴 했는데, 원문의 농담 같은 느낌이 번역기로 옮기니 뭔가 무시무시한 음식이 되어 버렸다.
우리가 감탄했다.
“같은 무게의 금보다도 비싸고, 고속도로를 지옥으로 만드는 음식.”
“멋있다…….”
“이렇게 들으니까 멋있는데여…?”
한국말에 고개를 갸우뚱하던 헤일리에게 말했다.
「뉴불백 좀 드릴까요. 근데 이거 좀 매울 수 있는데.」
「얼마나?」
「음…… 단계로 비유하자면~」
비주가 양손가락들을 마주대고 요롤롤로 하면서 계산을 하다가 우리 넷을 가리켰다.
「리혁, 지호, 우주, 중현에서 지호와 우주 사이에요.」
「흐음, 나름 견딜 만한 수준이네. 그럼 먹을 수 있지.」
헤일리가 납득하는 동안 리혁이가 반발했다.
늘 반발하는 우리 넷째이기에 무시하면서 뉴불백을 찾으려고 작업실 냉장고를 열었지만 없었다.
“아, 아까 나상윤 피디님 줬지.”
숙소에 잔뜩 쟁여 두고 있기는 한데.
“근데 그거 줘도 되나?”
“어차피 오늘 스케줄 안 맞아서 못 줄 거예요.”
원래 주기로 한 사람이 있었던 뉴불백이었다.
비주가 말했다.
“새로 만들어서 주면 돼요.”
“그럼 되겠지?”
고개를 끄덕이면서 헤일리에게 뉴불백이 우리 숙소에 있다고 말하니 매니저를 통해 받아가겠다고 답했다.
그러고는 우리에게 물었다.
「원래 받기로 한 사람이 누군데?」
「아, 그게 누구냐면요.」
우리가 대답하면서 그쪽이 팬이라고 해 주자, 상대가 알아들었다는 듯 눈을 찡긋했다.
「그 친구들에겐 안부 남기도록 할게.」
* * *
레몬 엔터테인먼트 앞.
“나, 나온다!”
“나온다!”
연예부 기자들이 다다다 달렸다.
회사 입구에서 검은 한복 저고리에 비녀를 꽂은 파란 머리카락, 그리고 선글라스를 낀 가수가 걸어 나왔다.
“헤일리!”
여기저기서 이름을 부르며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눈망울이 순수한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나온 팝스타가 우아하게 걷다가 선글라스를 슥 내렸다.
「질문 있는 사람?」
“…….”
연예부 기자들은 질문하지 않았다.
‘이상한 질문하던 욕하던데.’
‘이거 비싼 카메라다.’
‘기자를 물었다던데.’
질문을 해 보라는 듯 바라보았지만 정적이 흐를 뿐.
「난 간다. 한국의 파파라치들아.」
그 모습에 어깨를 으쓱인 헤일리 블루가 다시금 옷자락을 흩날렸다.
자신의 팬들로 보이는 이들에게 가서 사인을 슥슥 해 주는 그녀에게 팬들이 물었다.
「뉴블랙이랑 이번에 진짜 노래 나와요?」
「응.」
그녀가 상냥하게 말했다.
「끝내주는 노래가 나올 거야.」
「허어……!」
「그러니까 음원이 나오면 존나게 다운로드하도록 해. 내게 돈을 쓰란 말이야.」
「네! 그럴게요! 그리고 사진 찍어도 돼요?」
「별로 안 찍고 싶은데.」
팬과 어깨동무를 한 헤일리 블루가 셔터에 맞춰 순간적으로 세상 선량한 사람의 표정이 됐다.
‘어떻게 한 거지?’
다시금 뚱한 표정이 된 팝스타가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그리고.
그녀가 차를 타고 떠나자, 팬과 가수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연예부 기자들이 기사를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헤일리 블루&뉴블랙, 콜라보레이션 내달 말 발표
유명 팝스타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의 후기와 기사들이 우후죽순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대체로 온라인의 반응은 비슷했다.
‘진짜로 하는 거였어……?’
헤일리 블루가 뉴블랙과 콜라보를 하기로 했다는 소식은 한 차례 접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냥 ‘오’ 하고 넘겼는데, 뭔가 일이 진행되는 것을 보아하니 진짜로 하는 모양이었다.
SNS 팔로워만 해도 거의 8,000만 명에 이르는 팝스타와 뉴블랙의 협업.
관계자들이 들썩이는 가운데.
‘……이건 스치기만 해도 죽는다.’
뉴블랙이 컴백하는 10월 중순을 피해 10월 말로 컴백 일정을 잡고 있던 가수들이 달력을 보며 먼 산을 바라보았다.
수플레들을 비롯해 아이돌 팬들이 다시 한번 들썩였다.
-피처링이 아니고 별도 곡인가보네??
-이거 진짜 진행하는 거였구나ㅋㅋㅋㅋㅋ 그냥 추진단계인 줄 알았는데
-허ㄹ
-헐ㄷㄷㄷ
-규호 능력자네; 헤일리 블루를 물어 오네
-뉴블랙이 물어 왔어
-그럼 그렇지
-난 아직도 누가 헤일리 블루 보고 시퍼런 머리카락이니까 시팔언니라고 한 거 기억남
-어케 기다리지ㅠㅠㅠㅠㅠㅠㅠ
-여기 사대주의 개쩌네ㅋ
콜라보로 나온다는 곡이 과연 어떤 느낌일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 수플레들이었다.
작곡 칸에 ‘Haley Blue, 우주’ 라고 적힐 이름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콩닥거린다.
그렇게 팬들이 행복한 덕질 라이프를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을 때.
[닭 한 마리 집에서 헤일리 블루 목격함]
[실시간) 여의도 공원에서 자전거 타는 헤일리 블루]
[이번에도 한국 제대로 즐기러 온 미국 팝스타]
정말이지 곳곳에서 뿅 하고 등장하는 팝스타에 대한 목격담이 여기저기 올라오고 있었다.
-헤일리 블루 뭐임?? 한국 좋아하는 사람이었음?
-ㄴㄴ 그냥 내키는 대로 사는 사람임
-한국에서 질문 잘못했으면 기모노 입고 입국할 사람 ㅇㅇ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개웃겨
-이번에도 뉴블랙이 계획표 준건가? 완전 알뜰하게 즐기는 듯
곳곳에서 올라온 독특한 사진들이 인터넷에 올라오는 가운데.
호텔 스위트룸에서 SNS 라이브 방송을 킨 미국 팝스타의 모습이 화제가 됐다.
-한국 팬들이 이건 꼭 먹어 보라고 해서 뉴블랙한테 받아왔어. New Bull-Back.
그녀가 뉴불백을 보여 주었다.
곧바로 나온 요리에 한 입 맛본 헤일리 블루가 흠 하며 리뷰를 했다.
-이게 한국에서 7만 달러란 드립이 있던데. 그 정도는 아닌 것 같고. 음… 좀 맵지만 맛은 있고.
퉁명스럽게 그냥저냥이라고 하면서도 계속해서 고기를 흡입하는 가수였다.
파란 머리카락 끝에 제육기름이 슥 묻을 만큼 심취한 모습에 웃음이 나올 때.
-아. 참.
헤일리 블루가 검은 봉지 겉에 붙어 있던 포스트잇을 떼며 말했다.
-틴스피릿? 뉴블랙이 원래 그 친구들에게 줄 음식이었다고 하던데.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미안하다. 틴스피릿. 아, 가수야?
이윽고 핸드폰을 검색한 그녀가 틴스피릿의 최신곡을 배경음악으로 틀면서 불백을 집었다.
-이건 너희를 위한 한 젓가락이야. 앗, shibal! 병균 새끼들! 내 불백에 달라붙지 마!
헌정하듯이 젓가락을 들어 보이던 헤일리 블루가 테이블에 떨어뜨린 불백을 다급하게 집으며 미간을 모을 때.
“우와아아아…….”
해당 소식을 뒤늦게 접한 6층의 미소년들이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눈앞에서 shibal 하고 있는 헤일리 블루의 모습은 너무나도 멋지고 당당하고, 근사해 보였다.
그들이 하이파이브를 하며 감격했다.
“이야, 우리 성공했다….”
“계 탔다…!”
“존나 멋있어. 라방에서 욕을 해.”
현란한 욕을 구사하는 타국의 가수를 보며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틴스피릿 멤버들이었다.
* * *
헤일리 블루는 그다음 날까지도 한국을 종횡무진했다.
“스타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네여. 체력이 무슨…….”
“대단하다니까.”
내가 읽고 있던 인터넷 기사를 흘깃 보던 리혁이가 물었다.
“그래서 미국으로 돌아간대요?”
“아니, 피라미드 보러 이집트 간다는데.”
“이, 이집트요?”
대단하지 않냐는 시선을 보내자, 리혁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지, 진짜…….”
“진짜?”
“좋겠다……!”
“…….”
“어느 피라미드 보러 간대요? 쿠푸 왕 피라미드? 스핑크스도 본대요?”
뺨에 홍조가 떠오른 우리 넷째를 보며 언젠가 이집트 쪽에도 한 번 들러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7대 불가사의 투어 이런 거 시켜 주면 아마 좋아서 기절하지 않을까.
곧바로 피라미드를 어떻게 지었는지 아느냐고 설명을 하는 리혁이의 말에 지호가 하품을 하며 벌러덩 드러누웠다.
그러곤 책을 펼쳤다.
“근데 이거 아무리 봐도 제목이 특이한 거 같아여.”
리혁이가 꾸준히 읽고 있던 소설책 ‘시댁을 터뜨렸습니다’의 1권이었다.
활자를 보기만 해도 잠에 빠져드는 우리 막내가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내용을 훑어보고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이 소설이 드라마화되었기 때문이다.
“야, 왕지호, 너 책 구기지 마라.”
막내에게 주의를 주던 리혁이가 연습실에 노트북을 세팅하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근데 이걸 굳이 볼 필요가 있어요?”
“봐야지.”
“난 OST만 불렀다니까요.”
오늘은 리혁이가 OST를 부른 HBS 미니 시리즈 <시댁을 터뜨렸습니다>의 4화가 방영되는 날이었다.
중요한 장면에 리혁이의 OST가 나온다나.
우리 메인 보컬이 말했다.
“내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장면에 OST만 나오는데 뭐 하러 봐요. 그냥 나중에 노래만 들어요.”
“그럴 순 없지.”
우리가 진지하게 말했다.
“뉴블랙은 하나야.”
“그냥 연습하다 지쳐서 쉴 핑계 만드는 거잖아요.”
“에이, 엄청 까탈스러워…….”
다 같이 흥 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니, 리혁이가 헛기침을 하며 우리 곁에 슬쩍 붙었다.
“보면 될 거 아니에요.”
그 말에 내가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어느 장면에 나오는 거야?”
“시댁이 터지는 장면에서요.”
“진짜로 터져?”
“뭐, 아마도 그럴걸요?”
“어떻게 터지는 거야. 폭탄이라도 설치한 건가~?”
내 말에 비주가 으히힛 하며 웃을 때 리혁이가 선선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응?”
나와 비주가 눈을 깜빡였다.
“진짜로?”
“네.”
그런 눈으로 바라보니 상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HBS 채널이 나오고 있는 노트북으로 우리의 시선이 집중됐다.
‘이건 봐야 된다.’
‘시댁이 터진다는데.’
리혁이가 OST를 부르기로 한 소설 원작 드라마 <시댁을 터뜨렸습니다>의 시놉시스는 대강 알고 있었다.
다른 세계의 왕국 공주가 한국 재벌가의 며느리에 빙의하는 스토리.
재벌가에게 배신을 당해 죽을 위기에 처한 며느리의 몸에 두 개의 영혼이 공존하며 복수하는 스토리였다.
“시청률은 무난하게 나오는 거 같아여.”
막내가 인터넷을 검색하며 말했다.
중현이가 느낌이 안 좋다며 택한 각본답게, 엄청 좋은 성적은 아니지만 나름 순항하고 있는 드라마였다.
서서히 상승하고 있다고 해야 되나.
“아, 근데 이걸 꼭 봐야 되겠어요?”
“응.”
“굳이 볼 필요 없는데…….”
자꾸만 꼭 봐야겠냐고 이야기를 하는 리혁이를 우리가 슥 바라보았다.
양반다리를 하고 있지만 달달 떨고 있는 다리.
양손바닥으로 가리고 있지만 모락모락 따스한 기운이 감도는 듯한 귀.
3초에 한 번 꼴로 꿀꺽이는 목젖.
“리혁이 형.”
“어……?”
막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 드라마에 뭐 있져?”
“아, 아닌데?”
오호홋 맞아용! 하듯이 진실의 귀가 긍정했다.
비주가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뭐가 있나 보네.”
“아니라니까요.”
우리가 픽 웃으며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감 넘치는 이견우 씨의 광고가 끝나고 곧바로 15세 연령가 알림과 함께 드라마가 시작됐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분 후.
“오……?”
우리는 왜 리혁이가 그토록 이 드라마를 보지 못하게 하려고 훼방을 놓은 것인지 이해했다.
막내가 벌떡 일어나며 흥분했다.
“리, 리혁이 형이 카메오로 나오고 있어여!”
“어어……?”
TV 속에서 아주 새하얀 얼굴의 누군가가 등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