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629화
안대를 하고 있는 상황이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느껴지는 것이라고는 서로를 붙잡고 있는 우리 멤버들의 손뿐이다.
“리혁아.”
“왜, 왜요?”
“그동안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이 기회를 빌려서 한마디 해도 될까?”
“무슨… 말인데요?”
안대를 하고 있으니 마치 인질이 된 상태로 끌려가는 듯한 느낌.
그래서 평소에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말을 하고 싶었다. 겸사겸사 방송 분량도 건지고.
“리혁아.”
“네.”
“너 손이…….”
꿀꺽, 하고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너무 차.”
“…….”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손이 너무 차단 말이지.”
동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운전석과 조수석에서 피디님이 컹- 하는 웃음소리를 내는 게 들렸다.
내 손을 탁 쳐 내는 감촉이 느껴졌다.
“수족냉증이에요. 이 인간아. 내가 원해서 그런 게 아니라 긴장하거나 그러면 자동으로 손이 차가워진다고요.”
“그럼 장갑 끼면 되잖아요?”
막내의 말에 리혁이가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른다는 어조로 말했다.
“수족냉증인 사람이 장갑이나 양말을 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따뜻해지겠져.”
“그냥 그 상태로 땀이 맺히는 거야. 차가운 상태로 땀이 성글성글…….”
“되게 리혁이 형 같은 증상이네요. 잘해 줘도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는 듯한…….”
“아아아악!”
비주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리혁아! 지호가 아니고 나야!”
“아! 미, 미안해요!”
안대로 눈을 가리고 있으니 코앞에서 일어나는 상황조차 알기 힘들었다.
번잡스러운 대화 소리와 동생들이 투닥대는 소리 정도.
한편으로는 시각이 차단되어서 그런지 평소에 둔감하던 다른 감각들이 예리해지는 게 느껴졌다.
“……차가 도로에서 벗어났네요.”
중현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를 가고 있던 차량이 울퉁불퉁한 길로 접어드는 게 느껴졌다.
“음.”
중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머릿속으로 목적지를 그려 봤거든요. 집결지였던 공원에서 지금 동북쪽으로 한 5km쯤 온 것 같아요. 느낌상으로는 도로에서 벗어나 공사장 같은 곳에 접어든 것 같아요. 기름 냄새가 좀 나고… 페인트 냄새를 맡아보니까 페인트칠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아요.”
“대박이다.”
“진짜 납치돼도 이 형만 있으면 무사히 풀려날 것 같아요.”
벌써부터 우리 인간 탐지기가 단서를 찾아내면서 제작진이 다급하게 차창을 올렸다.
하지만 어느 정도 단서는 주어진 상태였다.
이 근방에서 공사를 크게 하고 있는 곳이면 하나 떠오르는 게 있었다.
-세계 최대의 놀이동산이 한국에도 지점을 냅니다!
춘천에 건설한다는 블록 회사의 놀이동산과 더불어 화성시에서 거대한 규모로 짓고 있는 놀이동산이 하나 떠올랐다.
18년인가 19년쯤 열린다는 곳.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를 테마로 한 로케이션이 가득한 놀이동산. 우리도 저번에 LA에서 가 본 적이 있었다.
“……왠지 어딘지 알 것 같은데.”
“저두요.”
그렇다면 놀이공원 컨셉인가?
이런저런 상상을 하고 있는 동안 중현이에게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중현아. 그런데 동쪽으로 가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김비주가 서쪽이래요.”
“아.”
“그것도 있고, 안대 안쪽으로 햇살이 새어 들어오는데, 이 시간대에 해가 떠 있는 방향이란 게 있잖아요.”
우리가 박수를 치며 감탄했다.
“와. 이게 바로 야생의 감인가 봐요.”
“강하다. 농촌 소년.”
“도시 사람들이랑은 차원이 다르구만.”
중현이가 으쓱으쓱 팔을 물결처럼 흔들면서, 손을 잡고 있던 우리의 몸이 같이 출렁였다.
수영장에서 가짜 파도에 휩쓸린 그런 느낌이다.
“그래.”
내가 동생들의 손을 꼬옥 잡고 말했다.
“우리가 함께라면 못 이겨 낼 게 없어.”
“맞아요.”
비주가 영원히, 라는 문구를 되새기는 동안 막내가 말했다.
“진짜 우리는 최강의 팀이에요. 생각은 우주 형이 하고 계산이나 백과사전 검색은 리혁이 형이 하고. 비주 형은 잘못된 길이 어디인지 잘 알고, 중현이 형은 힘이 세잖아요?”
“그치. 그런데 너는?”
“저는 귀여움 담당.”
“…….”
“…….”
“…….”
“아. 진짜 이 형들 너무한다. 사람 무안하게.”
키득거리면서 토라진 막내를 우쭈쭈 해 주는 동안 마침내 차량이 멈췄다.
위치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거대한 부지의 정가운데 위치한 느낌의 공간이었다.
무언가 거대한 게 있는지 그늘이 진 곳.
“자. 이제 내리겠습니다. 다들 놀라지 말고 천천히 내려 주세요.”
“네!”
곧이어 머리를 부딪치지 않게 몸을 구부정하게 숙이면서 차에서 내렸다.
“리혁이 형은 안 숙여도 될 텐데. 악!”
“비주 형, 이번엔 안 맞았죠?”
“응응.”
곧이어 손을 놓으라는 지시에 우리가 손을 놓고 기다렸다.
“얘들아! 우리가 함께라면 뭐든지 해낼 수 있어.”
“네. 그러면 지금부터 각자 다른 곳으로 흩어지시겠습니다!”
“예?”
“자! 이동해 주세요!”
내 팔을 붙잡는 누군가의 감촉이 느껴졌다. 동생들도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시작부터 따로 흩어져야 돼?
아무리 쓸데없는 동생들이라지만 있고 없고의 차이가 컸다. 어린아이의 손에서 곰 인형을 빼앗는 느낌.
“안 돼!”
“우주 형!”
“얘들아!”
“형! 저는 형이 없으면 안 돼요…!”
애절하게 서로를 불렀지만 목소리들이 금세 멀어졌다.
불안하다.
내 손을 붙잡은 스탭 분이 ‘이쪽으로’ 하면서 나를 붙잡고 데려갔다.
“……어?”
서늘한 실내 공기.
또옥.
또오옥.
어디선가 물방울이 떨어지는 듯한 지하의 소리가 들려오면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두운 박쥐들이 가득한 동굴이 떠오른다.
“저, 선생님?”
“네.”
“지금 제가 어디로 가는 건가요?”
“그건 말씀드릴 수 없어요. 우주 씨.”
“저희 구독자신가요?”
“……네.”
수줍은 목소리에 내가 말했다.
“리혁이의 숨겨진 비밀 1개 알려 드릴게요.”
“어림도 없어요. 우주 씨.”
“…….”
“리혁 씨 허락이 없다면 비밀 안 알려 주실 거잖아요.”
“역시 저희 구독자가 맞으시군요. 이런 거짓말에도 속지 않으시는 걸 보니…….”
“진짜 팬이에요.”
“감사합니다. 나중에 끝나고 사진 찍어요. 우리.”
긴장해서 그런지 아무 말이 막 나온다.
스탭 분이 웃는 동안 나는 길고 긴 계단을 내려가 마침내 어떤 곳에 이르렀다.
퀴퀴한 지하실 냄새가 나는 곳.
짚단 냄새도 나고, 왠지 모르게 어디선가 횃불이 타오르는 소리도 들려오는 느낌이다.
끼이이이익-
그리고 이건 쇠창살이 삐걱대며 열리는…….
음?
쇠창살?
“선생님?”
“들어가세요. 우주 씨.”
톡.
내 등을 미는 손짓에 나도 모르게 엉거주춤한 자세로 쇠창살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앞이 안 보이지만 들어온 것 같다.
왜냐하면 바로 등 뒤에서 열쇠로 철컥! 잠그는 소리가 났으니까.
“선생님?”
“머릿속으로 30초 세신 다음에 안대를 풀어 주시면 돼요.”
“선생님!”
곧이어 스탭 분이 빠른 발걸음으로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꿀꺽.
침을 삼키면서 안대 바깥 상황을 짐작하기 위해 애썼다.
“일단 지하인 것 같은데…….”
왠지 모르게 나 혼자만 있는 게 아닌 상황 같다.
근처에서 ‘우우우우’ 하거나 ‘으으으으’ 하는 이상한 신음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으니까.
10초. 9초. 8초…….
정확하게 딱 30초를 세고는 안대에 손을 올렸다.
“갑자기 놀래키고 그러면 저도 모르게 반응할 수 있어요. 진심이에요. 그러니까…….”
안대를 딱 풀었다.
빛이 새어 들어오면서 눈앞이 살짝 하얘졌지만, 그리 환한 편이 아니었기에 금세 눈이 적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어?”
감옥이었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그런 중세 감옥.
벽에 횃불이 걸려 있고, 의자에 앉아 있는 간수가 코를 골고 있는 광경.
그리고 쇠창살로 트여 있는 옆방에 왜소한 노인 하나가 드러누워서 몸을 비비적거리고 있었다.
다른 방들에도 죄수들이 갇혀 있고.
그런데…….
“외국 사람들……?”
전부 다 외국인이었다.
내가 놀란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쾅!
“허어어억!”
맞은편 방에서 쇠창살에 몸을 부딪힌 중년 백인 남자가 씩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인물이 영어로 말했다.
「켈켈켈켈! 이거 봐! 아주 파릇파릇한 신참이 들어왔군!」
그와 함께 울려 퍼지는 죄수들의 웃음소리.
멍하니 바라보면서 눈을 깜빡였다.
이게 대체… 지금 무슨 상황인 거지?
* * *
서리혁은 환한 빛에 눈을 깜빡거렸다.
그가 있는 곳은 성 안에 있는 널찍한 내원이었다. 잔디밭이 펼쳐져 있고 사방이 성벽으로 둘러싸인 곳.
‘음?’
서리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고딕 양식인가? 아냐. 르네상스도 혼재되어 있는 것 같은데…….’
성벽이나 주변 첨탑을 보면서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던 서리혁은 얼마 안 가 당황하고 말았다.
「이봐!」
덩치가 큰 사내가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키가 2미터는 될 법한 사내가 기사 갑옷을 입고 있었다.
누구라도 움츠러들 상황이었지만 왠지 무섭지가 않다.
‘플레이트 메일이랑 저 투구가 역사적 시기가 서로 다른데. 영국군이랑 프랑스군을 섞어 놨어.’
마치 처녀귀신이 ‘난 총각이다아아!’ 하며 뛰어오는 느낌.
당신의 고증은 틀렸습니다,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이어지는 말에 리혁은 정신을 퍼뜩 차렸다.
「이런 얼빠진 녀석을 보았나! 그래서 이 드래곤 캐슬을 지킬 수 있겠나?」
「네?」
「기사 생도로서 복장부터 제대로 갖춰 입도록 해라! 플레구스! 이 녀석에게 옷을 챙겨 줘라!」
「네! 단장님!」
갑자기 모르는 외국인들이 영어로 말을 걸더니 그에게 가죽 옷을 던져 주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얼굴로 당황해하던 리혁이 근처 카메라의 사각지대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어안이 벙벙하다.
카메라가 설치된 것과 어딘가 모르게 유원지 느낌이 나는 이 성을 보자면 촬영이 확실한데…….
배우들이 연기를 심하게 잘한다.
‘뭐지?’
단서라고 할 만한 것은 아직 눈에 띄지 않았다.
그저 검은 흑룡이 불길을 뿜고 있는 깃발과 이곳을 ‘드래곤 캐슬’이라고 부르는 기사들의 말 정도.
‘일단 장단을 맞춰 줘야지.’
선우주라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맏형이지만, 이런 위기 상황에서는 누구보다 롤모델이 될 만한 사람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옷을 입고 뛰어간 리혁이 누군가와 비슷한 미소를 따라 하며 물었다.
「그래서 뭘 하면 되나요?」
「수련이다!」
「수련…….」
「자네의 재능이 제법 뛰어나다고 해서 기대가 크다. 미스터 김중현.」
「예?」
되묻는 그에게 기사단장이 물었다.
「자네 이름이잖나. 김중현.」
「…….」
네가 김중현이 아니면 누구냐는 물음에 리혁은 섣불리 뭐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제작진의 실수인지 일부러 그런 건지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분위기상 내가 중현이 아니라고 절대 말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이럴 때 그 아저씨라면…….’
잠시 고민하던 리혁이 결단을 내렸다.
어색하게나마 푸근한 미소를 따라 하며.
「맞습니다. 제가 중현이에요.」
* * *
현장 상황실.
카메라가 설치된 곳에서 패널들이 손뼉을 치며 웃고 있었다.
“흐하하하하!”
어딘가 근엄한 누군가를 따라 하며 ‘제가 중현입니다’ 라고 말하는 서리혁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예능인 유창현이 말했다.
“와. 근데 외국 분들 연기 대박이다. 이분들은 다 어디서 온 거래요? 연기 좀 하다가 오신 것 같은데?”
제작진이 뭐라고 말을 해 주진 않았지만, 전문적인 트레이닝을 받은 연기자들인 것 같았다.
“대박이다. 왕겜 한 편 보는 것 같아요.”
그런 리액션을 하면서 히히 웃던 하은성이 눈을 가늘게 떴다.
‘한국인으로는 힘들었나 보네.’
나름대로 제작진이 생각해 둔 한 수인 듯했다.
빠른 시간 내에 게스트들을 이 상황에 긴장하고 몰입하도록 해야 하는데, 뉴블랙은 그런 상황에 밀어 넣기가 어려운 상대니까.
그래서 각자 따로 떨어뜨려 놓고, 뉴블랙을 알지 못하는 외국인 연기자들로 채운 듯했다.
멤버 전원이 영어로 의사소통이 자유로우니까.
그 때문에 지금도 한쪽 인이어에서는 동시통역사가 통역을 하는 중이었다.
‘으음, 역시 제작진 의도가… 에이. 생각하기 귀찮아.’
깊게 파고들던 하은성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러곤 머리를 비웠다.
‘대가리 클린!’
머릿속을 멀끔하게 비우고 히히 웃는 하은성이었다.
“근데 외국 분들이어서 다행이다. 한국인이었으면 뉴블랙 앞에 두고 표정 관리 안 되지.”
“그죠.”
“그냥 보고만 있어도 웃기잖아.”
안 그래도 서리혁이 가벼운 막대기를 붕붕 휘두르는 모습에 미국 연기자들이 웃음을 꾹 참는 모습이 보였다.
-다시! 드래곤 검술 1식!
부웅-
막대기로 괴상한 각도를 그리던 리혁이 눈치를 슬금 살피는 장면에 패널들이 빵 터졌다.
그런 식으로 저마다 다른 상황에 처한 뉴블랙 멤버들의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중현 씨는 빨래방에 끌려간 건가? 그런 것 같은데.”
“지호 씨는 주방에 갔네.”
저마다 성의 지하 감옥, 기사단, 빨래터, 주방으로 흩어진 멤버들의 모습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상황실에 있는 패널들이 콩닥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얼른 힌트 주고 싶다.’
아직 무전기를 찾지 못해서 멤버들과 소통을 할 수는 없지만 얼른 이야기를 할 순간이 기다려졌다.
여자 패널이 말했다.
“그런데 이거 메인은 비주 씨 아니에요?”
“비주 씨가 메인이지.”
“언제 나오지. 비주 씨도 반응하는 거 보고 싶은데…….”
그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현장에 있는 이들이 예능 드립을 주고받고 있을 때였다.
또 다른 화면에 불이 들어오면서 패널들의 안색이 환해졌다.
“오!”
그들이 기다리고 있던 비주의 장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 *
“누우시면 돼요.”
“네?”
“누우시면 돼요.”
안대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김비주가 고개를 갸웃했다.
“진짜 누워요?”
“네.”
지시사항이 이상하다.
아늑한 공기가 느껴지는 곳에 도착하더니 대뜸 침대에 누우란다.
“어떤 식으로 누워야 할까요?”
“그건 마음대로…….”
어색하게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대박!’
감촉 너무 좋아.
촬영 끝나면 어느 이불집에서 한 것인지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동안, 스탭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가 벗은 신발을 집어서 가져가는 것 같다.
“어어어어!”
“네?”
“그거 우주 형이 선물로 준 거라서… 소중하게 다뤄야 돼요.”
“네! 조심할게요.”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한 비주가 다시금 누웠다.
호텔방과 비슷한 느낌을 풍기는 이곳이 어디일지 기대가 되면서 동시에 호기심도 들었다.
‘무슨 상황일까?’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커튼이 쳐져 있는 어두컴컴한 방인 듯했다.
“20초 뒤에 안대 벗어 주세요.”
“네에~”
유순하게 대답한 비주가 미소를 지으며 20초를 셌다.
그리고 1초 더 센 다음에 안대를 벗었다.
“음?”
어두워서 그런지 눈앞의 사물이 잘 분별이 안 간다는 생각이 들 때였다.
끼이이이익.
문이 음산한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서너 명이 종종걸음으로 방 안에 빠르게 들어왔다.
“허어어어……!”
입을 틀어막으며 김비주가 이불을 끌어올렸다.
매니저 예능을 찍으며 잠에서 깨울 때 왜 스트릿 보이즈가 그토록 경기를 일으켰는지 알 것 같다.
어둠 속에서 막 사람들이 슥슥슥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김비주가 침을 꿀꺽 삼킬 때였다.
촤아아아악-
커튼이 젖혀지면서 맑은 햇살이 들어왔다.
‘어라?’
그러면서 드러나는 고풍스러운 침실.
침대에 누워 있는 김비주의 눈앞에서 하녀들이 종종걸음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와. 진짜 책에 나오는 하녀 같다.’
감탄을 하면서 바라보고 있을 때.
하녀들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일어나셨나요. 아가씨?」
「네?」
「이런 잠꾸러기 같으니. 공작님과 만찬을 함께 하실 시간인데, 아무리 낮잠이라고 해도 이렇게 늦게까지 주무시면 곤란해요.」
「네?」
비주가 웃는 얼굴 그대로 굳어져서 물었다.
「아가씨요?」
「네. 아가씨!」
그거 여자 호칭 아닌가…?
비주의 동공이 흔들리고 있는 동안 하녀들이 부산스럽게 옷과 화장할 준비를 하며 말했다.
「얼른 일어나세요! 아가씨!」
「어머, 이 탐스러운 분홍색 머리카락을 봐.」
「정말 고우세요!」
김비주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우주 형.’
저 왠지 시작부터 망한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죠…?
* * *
「HBS 예능 <지금부터 우리는> - 뉴블랙 편」
핑크 머리 미소년이 하녀들의 손에 이끌려 어어어어 하는 장면이 스쳐 간 후.
인터뷰 컷이 흘러나온다.
비주 : 이거 장르가 그거였더라고요. 리혁이가 예전에 OST 불렀던 <시댁을 터뜨렸습니다>라는 소설 같은 거요. 뭐라고 하더라.
리혁 : 로맨스 판타지요.
비주 : 아. 맞아. 로맨스 판타지. 하….
다시 생각해도 수치스럽다는 듯 비주가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그동안 화면이 다시 바뀌면서 ‘영애님은 드레스가 싫어’라는 부제가 달린 장면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