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675화
“응?”
조규환 이사님과 한창 즐겁게 스칼렛의 곡을 만지고 있을 때였다.
뒤통수가 간질간질해서 고개를 돌려보니, 유리창 너머로 낯선 얼굴들이 모여 있었다.
“어!”
막내가 외쳤다.
“유웅 작곡가님이에요! 저기 샌드걸 작곡가님도 계시고!”
“왜 오셨지?”
송 캠프에서 함께 했던 외부 작곡가들의 등장에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
리혁이가 말했다.
“이번에 들어오신다고 했잖아요.”
“아!”
파릇파릇한 뉴비가 프로듀싱 팀에 배송되었다는 소식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와 함께 멋진 작곡 세상을 열어 갈 동지가 도착했다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왜 숨으시는 거지?”
“그러게요.”
나와 눈이 딱 마주친 순간 화들짝 놀라서 숨는 모습에 의아함을 느꼈다.
중현이가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열자, 문 뒤에 숨어 있었던 무수한 사람들이 나타났다.
쭈그리고 앉아 있던 프로듀싱 팀과 신규 작곡가들이 우리와 눈이 마주쳤다.
“…….”
엉거주춤하게 앉아 있던 나상윤 팀장님이 하하 웃었다.
“이번에 새로 오신 분들한테 회사 소개시켜 주고 있었어. 특히나 2층은 우리 작업 활동하는 주 무대니까.”
“그런데 왜 쪼그려 앉아 계시는…?”
“아이고. 갑자기 다리가 아파서…….”
와하하하 웃는 아저씨들의 모습에 눈을 가늘게 떴다.
보나마나 작곡 요괴다! 하면서 자기들끼리 공습경보 울리고, 도망치고 그러려고 난리 났던 것 같다.
내가 웃으며 말했다.
“신규 작곡가 분들 오해하시겠어요. 누가 보면 제가 망태할아버지처럼 잡아가기라도 하는 줄.”
신규 작곡가들이 그 말에 하하하! 웃는 동안 우리 회사 프로듀서들은 웃지 않았다.
신입들이 어색하게 ‘이게 아닌가?’ 하며 돌아보는 모습에 작곡가들이 말했다.
“농담이 아니거든요.”
“지금 조 이사님이 계셔서 그렇지, 아무도 없었으면 바로 잡혀갔을 거예요.”
안쪽에 앉아 있던 조 이사님이 힘없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마치 드래곤에게 붙잡힌 왕자님처럼 계시는 이사님에게 나오시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다.
“반갑습니다. 레몬 엔터의 제작이사 조규환이라고 합니다.”
“예, 안녕하세요.”
역시 작곡계에서 이름 높은 우리 이사님이 등장하면서 작곡가들이 꾸벅 인사하며 악수를 했다.
업계 레전드를 바라보는 초롱초롱한 눈빛.
현재는 스칼렛의 전담 프로듀서 겸 레몬 엔터의 경영으로 바쁘지만, 한창 작곡할 때는 가요 시상식에서 작곡가 상을 휩쓸고 다니던 우리 이사님이었다.
그러니 은퇴한 축구 전설을 바라보는 듯한 저분들의 시선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안녕하십니까! 우주 씨!”
왜 나한테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꾸벅 인사하시는 걸까.
조 이사님을 볼 때와는 확연히 다른 표정이었다.
파르르 떨릴 정도로 올라간 입꼬리. 살짝 치켜뜬 눈. 필사적으로 어필하듯이 반짝이는 눈.
‘이거 어디서 많이 봤는데 뭐더라.’
‘형.’
내 눈빛에 중현이가 고개를 기울여 속삭였다.
“사극에서 본 표정이에요.”
“아.”
어디서 봤나 했더니 지금 작곡가들의 표정에서 보이는 것은 바로…….
‘야. 이건 간신배들 표정이잖아.’
‘끄덕끄덕.’
손바닥만 비비고 있지 않을 뿐. 폭군에게 아첨하는 간신배들과 같은 표정이었다.
신입 작곡가들이 입을 열었다.
“헤헤, 오늘도 잘생기셨습니다. 우주 씨. 아주 용안… 아니, 아주 얼굴에서 빛이 나네요.”
“우주 씨와 함께 백 년을 나아가는 훌륭한 작곡가가 되겠습니다.”
“이야! 우주 씨까지 이 작업실 하나에 K팝의 레전드 두 분이 함께 계신 거네요.”
사탕 발린 아첨.
사회생활 만렙을 자랑하는 신규 작곡가들의 모습에 나는 표정을 굳혔다.
무릇 간신배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충신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이 좋은 리더의 본분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웃음을 꾹 참고.
“으… 으헤헷…….”
“저거 봐. 진짜 저렇게 웃을 때 보면 짱구 같지 않아요?”
중현이에게 눈짓하자 ‘느아악!’ 하면서 바른말 좋아하는 충신이 끌려갔다.
옛날부터 왜 왕들이 간신배를 좋아하나 했는데 이젠 알겠다.
리혁이 같은 사람들이 상소문 올리면서 ‘님 도르신? 도르신?’ 하면 누구라도 의금부 도사를 호출하고 싶지 않겠는가.
“아이고.”
흐뭇하게 웃으면서 신규 작곡가들을 환영했다.
“이렇게 훌륭한 작곡가 분들과 함께 작업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네요. 하하하!”
“천군만마! 정말 말처럼 일하겠습니다. 하하하!”
“으헤헤헤헤!”
“헤헤헤!”
그리고 중간에 같이 껴서 간신배처럼 웃어 대는 우리 프로듀싱팀 작곡가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조규환 이사님이 해탈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뉴블랙 엔터로 이름을 바꿔야 하나…….”
* * *
이사님과의 협동으로 스칼렛 신곡 작업은 빠르게 진행됐다.
컨셉이나 곡 분위기에 맞춰 수정하는 작업은 어렵지 않았지만, 파트 분배에 애를 먹고 있던 터였다.
우리 곡이야 ‘이 파트는 리혁이가 가져가야지’ 하고 분배하면 되는데.
스칼렛 곡은 내가 잘 모르니까.
“이 파트에서는 봄 누나가 부르고, 아라 누나가 여기서 은은하게 더블링 좀 쳐주는 식이면 어떨까 해요?”
“괜찮은걸. 감이 좋구나.”
“사실 감이라기보다는 예전에 본 게 기억나서요. ‘Bad Girl’에서 둘이 같이 부르는데 그 부분이 되게 좋더라고요.”
“아.”
파트 분배에 대해 감을 잡을 수 없어서, 그냥 스칼렛의 모든 무대를 미튜브에서 수십 번 반복해서 봤다.
이전에는 노래들만 다 알고 있었는데.
무대들을 많이 봐서 그런지 어느 정도 이해도가 좀 생긴 듯하다고 할까.
“음.”
내가 나눈 파트를 보던 이사님이 미소를 지었다.
“내가 없었어도 될 뻔했는데. 내가 너였어도 이렇게 파트 분배를 했을 것 같다.”
“정말요?”
“그럼.”
퇴근해도 되냐고 묻는 이사님에게 안 된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리하여 고길동과 둘리의 합동 작업은 순탄하게 막을 내렸다. 새벽에 잠이 드신 이사님에게 담요도 다섯 겹 덮어 드리고.
“흐히히히. 이사님 좋은 꿈 꾸시겠죠?”
“그럴 거야.”
다음 날, 악몽을 꾸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다섯 명한테 짓눌리는 꿈을 꾸셨다고 그러는데, 아마 스칼렛의 신곡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 아니었을까.
“절대 우리 때문일 리가 없지.”
“맞아요. 우리가 얼마나 귀여운데…!”
스칼렛과의 곡 작업을 마친 후에는 바로 METRO 녹음에 들어갔다.
메인 보컬의 철저하고 열 받게 하는 디렉팅 아래 거의 녹음에만 20시간이 소요됐다.
평소보다 2배 정도 긴 시간이었다.
“이게 영어로 부르니까 진짜 어렵네요.”
막내가 목을 매만지며 말했다.
“난이도가 한 세 배는 올라가는 거 같아요. R이랑 L 구분하는 거랑 F랑 P 구분하는 게 진짜…….”
“단어 자체의 음률도 조금 다른 것 같아요.”
“한국어로 부르면 진짜 쉽게 부를 거 같은데…….”
확실히 언어가 바뀌니 노래를 부르는 방식도 조금씩 바뀐다.
그래서 처음에는 좀 애를 먹었는데, 우리 메인 보컬의 정확한 코칭 덕분에 나름대로 편히 소화할 수 있었다.
녹음 부스 안에 서서 한참 고민할 때마다 리혁이의 목소리가 헤드폰으로 날아들었다.
-혀를 조금 안으로 밀어 넣는다는 느낌을 줘 봐요. 이게 우리가 평소 발음이 좋은 편이라 더 어려운 거예요.
“발음?”
-한국어 발음이요. 발음이 정확할수록 반대로 소리가 날카로워져서 영어랑 잘 안 어울릴 수도 있거든요. 조금 부드럽게 울리듯이, 공간적인 느낌을 준다고 생각하고 불러봐요.
“네. 알겠습니다.”
그래도 단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희한하게 한국어로 노래를 부를 때마다 고음이 더 잘 올라가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건 나름대로 좋았다.
“이야…….”
그리고 우리 메인 보컬은 철저한 분석과 연습을 통해 아예 노래를 자기 걸로 만들고 있었다.
K팝이 추구하는 맑은 목소리의 극치가 귓가를 간질인다.
리혁이 노래를 들을 때면 잔잔하면서도 맑은 호수가 떠오른다.
맑고 상쾌하면서,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함, 그리고 저 안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깊이가 느껴진다.
비주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진짜 리혁이는 뭐든지 다 자기 장르로 바꿔 버리는 거 같아요.”
“성격이 안 좋아서 그렇지. 애가 스펙트럼이 진짜 넓어.”
막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처음에 레몬 들어왔을 때, 리혁이 형 노래 부르는 거 멀찍이서 보고 되게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날카롭게 생긴 형이 막 노래 부르는데 되게 잘생겨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친해졌구나.”
“하루 만에 후회했지만요…….”
몇 년 동안 후회 중이라는 막내의 말에 우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녹음 부스 안에서 자기 욕을 한 것을 알았는지 리혁이가 도끼눈을 떴다.
-내 욕 했죠?
“어.”
훈훈하게 웃으며 서로에게 눈으로 욕을 했다.
그렇게 리혁이의 보컬 코칭에 힘입어 곡을 무사히 녹음한 후에는 이제 비주의 영역이었다.
“형, 이거 봐요.”
“응?”
“안무 시안 들어온 것들 분석하는 중인데 우리 같이 살펴 봐요~”
국내 안무가들에게 의뢰한 안무 시안 비디오를 하나씩 보여 주며 행복해하는 우리 메인 댄서였다.
“어떤 게 마음에 들어요, 시안 3개 중에서?”
“난 3번.”
“3번은 너무 쉬워서 좀 그렇지 않을까요? 수플레들에게 뭔가 강력한 한 방을 보여 줘야 하지 않을까요…?”
“1번?”
“음… 1번도 쪼오오금…….”
“저희는 괜찮으니 영애님이 하시고 싶은 걸로 하시죠.”
집사 모드로 영애님의 선택을 응원하기로 했다.
무도회에 나갈 드레스를 고르듯이 안무 시안을 보면서 직접 췄다가 앉아서 분석하기를 반복하던 비주가 안무를 골랐다.
무엇을 골라야 사교계, 아니 연예계에 큰 화제가 될지 고민하던 우리 둘째가 가장 어려운 안무를 골랐다.
“이거예요.”
“…….”
PT 체조 8번 온몸 비틀기 같은 걸 골랐다.
안무를 보는 순간 ‘와, 저것 참 평소에 안 쓰던 근육 다 쓰겠구나~’ 하는 감탄이 나오는 안무였다.
동시에 왜 골랐는지 알 것 같은 안무기도 했다.
구성력이 뛰어난 안무라서 잘못하면 밑천이 들통 나기 쉬운 안무지만, 깔끔하면서도 연결성이 뛰어나다.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리혁이가 동의했다.
“……난이도와 별개로 곡이랑 어울릴 것 같긴 해요. 영어 곡 가사 특성을 고려하면요.”
은유적이나 시적으로 흘러가는 국내 가사와 다르게 팝 가사는 스토리가 있는 편이다.
어젯밤 파티에서 널 만났는데 넌 다른 여자랑 있었고, 그러니 난 너에게 수류탄을 던질 거고. 뭐 이런 식으로.
그런 측면을 고려했을 때 좋은 안무였다.
“연습하려니까 다들 행복하죠?”
“녜…….”
“다 같이 박수 치면서 환호해 볼게요.”
“와아아아아…….”
나날이 올라가는 안무 난이도에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곡만 만들 때가 제일 행복했다.
* * *
퓨처 베이스의 영어 타이틀 METRO의 녹음을 마친 후.
안무 연습과 함께 우리는 바쁜 스케줄을 소화했다.
우선, 8월에 있을 VMA 무대에 있어서는 해외 유명 안무가 하나를 초빙해서 무대를 꾸미는 데 도움을 받기로 했다.
-좋은 친구라고 너희를 소개했어.
헤일리의 소개 덕분이었다.
-살살 굴리라고. 너희가 고용한 다음에 나도 고용해야 하니까 내 몫까지는 남겨 둬.
「그런 말 하면 우리가 악당 같잖아요. 헤일리.」
-음? 아니었어?
……훈훈한 덕담을 나누며 감사인사를 전했다.
어쨌든 VMA 무대를 꾸미기 위해 TF팀과 머리를 맞대고 온갖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미국 4대 가요 시상식의 첫 단독 무대다 보니 현 시점에서 METRO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였다.
바로 그 아래 순위로는 무대 없이 참석만 하는 미국 틴 초이스 어워드가 있고. 9월 말에 열리는 패션 위크 정도.
-이번 패션 위크에서 여러분의 곡을 써 보고 싶군요.
르블랑의 수석 디자이너 지미 로빈스가 패션쇼 전체 BGM으로 우리 노래들을 쓰고 싶다는 말을 전해 왔다.
거기에 사용할 노래를 편곡하는 것도 추가로 해야 할 일이었다.
“우주 씨! 저희한테 맡겨 주세요! 백골이 될 때까지 일하겠습니다…!”
“훌륭합니다. 우리 신입 작곡가 분들.”
열정이 넘치는 신입 작곡가들에게 일감을 넘겨주고는 주어진 일정에 집중했다.
VMA라는 예기치 못한 변수 때문에 연습 일정이 빡빡해지긴 했지만, 개인 일정은 그대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가장 바쁜 리혁이는 이번 3분기와 4분기에 나올 드라마의 OST를 맡기로 했는데, 연이어 방영하는 드라마 시기들을 고려하면 거의 올해 남은 기간 동안 매주 리혁이의 OST가 TV에서 울려 퍼질 예정이었다.
“저는 교양 프로그램 나가 보려고요.”
“탁월한 선택이야.”
비주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교양 프로그램에 패널로 나가기로 했다. OST 쪽은 구미가 안 당긴다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으으으음.”
“중현아. 형이 도와줄까?”
“으으으음!”
“싫다고 그냥 말을 해…….”
우리 감자 군은 본인 믹스테이프를 작업하는 데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일부 래퍼들이 요청했다는 피처링은 무산됐다.
비싸게 군다고 힙합 가수들이 뒤에서 욕한다던데 딱히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그리고 우리 중에서 가장 바쁜 사람은…….
“흐어어엉!”
“지호야. 이제 스무 살이잖니. 이제 어른스럽게 울어야지.”
“아이고오, 꺽꺽!”
드라마 촬영 스케줄이 이런 거였냐며 매일 밤마다 통곡하는 우리 막내였다.
미팅 자리 등에서는 어른스럽게 굴다가 집에만 오면 ‘나 힘들었쪄!’ 하는 모습에 웃음만 나왔다.
내년에 넷플러스에 런칭하기로 하면서 예산도 늘어나고, 분량도 늘어나서 체력적으로 고생이 심한 모양이다.
“영어 속담 중에 너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너를 강하게 만든다는 말이 있어. 지호야.”
“고마워요. 형. 저도 이 경험을 밑거름으로….”
“하지만 때로는 그냥 죽을 때도 있지.”
“…….”
“저 말이 명언이 된 이유는 바로 죽은 사람들은 말이 없기 때문이거든. 우후후후후.”
울면서 방으로 뛰어가는 막내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냥 형들이라는 비빌 언덕이 보이니까 ‘으잉!’ 하고 뒹굴뒹굴하는 거지, 촬영장에서 프로답게 잘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탈출 예능에서도 혼자 남으니까 잘했듯이.
촬영장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취합하고 있는데 특별하게 걱정할 부분은 없어 보였다.
“자. 그럼 나도 일을 해 볼까.”
동생들이 개인 스케줄을 소화하는 동안, 나는 스칼렛의 프로젝트에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그리하여 매일 스칼렛 TF팀과 함께 회의를 했다.
다만.
“저 의상에 대해 의견이 있습니다.”
“기각합니다.”
“너무하네요. 제가 프로듀서 아닌가요? 패션에 대해서 한마디 정도는 할 수 있잖아요.”
“가슴에 손을 얹어 주세요. 우주 씨.”
안타깝게도 패션에 대해서는 일체의 의견을 제시할 수 없었다.
주로 패션이 아닌 다른 부분에서 내 의견을 내고 직원들과 조율하는 식이었다.
“안무가도 섭외를 하면 좋겠는데요. 아직 국내에는 낯선 장르 특성상 해외 댄서 분을 고용하는 게 어떨까 싶어요.”
내 주장에 TF팀 직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는 의견인 것 같아요. 우리 프로듀서님이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나요?”
“네.”
스칼렛의 기본 컨셉은 고급스러움과 우아함.
이번 곡은 신나게 춤을 추는 곡이지만, 그렇다 해도 기본 컨셉은 놓치지 않고 잡아야 한다.
그리고 나는 고급스러운 안무를 만드는 데 능한 인물을 알고 있었다. 우아한 안무를 추구했던 14년도의 Masquerade를 성공적으로 만들어 낸 세계적인 안무가.
“제가 생각한 분이 하나 있어요.”
예명을 우주선이 아니라 김덕춘으로 바꾸어서 참 다행이었다.
* * *
얼마 후 인천공항.
입국장에서 캐리어를 들고 들어온 한 남자가 딸과 함께 상쾌한 공기를 머금으며 미소를 지었다.
‘다시 한국이군.’
세계적인 안무가 클레이 타일러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재킷에 꽂았다.
얼마 전에 들어온 의뢰.
-클레이 타일러 님을 저희 스칼렛의 신곡 안무가로 초빙하고 싶습니다.
레몬 엔터에서 들어온 아주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보수도 짭짤하고.
스칼렛이라면 평소에 눈여겨보고 있던 걸그룹이기도 했다. 춤 잘 추기로 유명한 K팝 그룹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곳이 바로 뉴블랙의 소속사라는 것.
혹시나 그 회사에서 춤 요괴나 작곡 요괴와 마주치는 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이번에는 괜찮겠지. 아빠?”
딸 조이 타일러의 물음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이번에는 뉴블랙과 얽힐 일이 없어. 계약도 안 했는걸.”
“후우…….”
“그리고 내가 알아보니 말이야.”
멀찍이 ‘Clay Tyler’라는 팻말을 든 스칼렛의 매니저를 바라보던 클레이가 딸에게 속삭였다.
“뉴블랙은 이번에 따로 안무가를 구했대.”
“그래?”
“응. 시몬스 알지?”
“시몬스 아저씨?”
“그 바보 같은 녀석이 헤일리 블루 소개 받고 계약을 덜컥 해 버렸다고 그러더라고.”
“어머!”
이미 뉴블랙이 점찍은 댄서가 따로 있다는 말에 타일러 가의 부녀가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예감이 좋아.’
클레이 타일러 부녀가 레몬 엔터에서 준비한 차량에 탑승했다.
쾌청한 하늘 아래 인천공항.
멀어지는 공항을 보던 부녀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하하하!”
“아하하하하!”
그런 이들에게 직원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국은 오랜만이시죠?”
“그렇죠.”
“바로 회사로 모셔 드리겠습니다. 저희 프로듀서님이 클레이 타일러 씨와의 만남을 고대하고 있거든요.”
“아, 미스터 킴덕춘…….”
어떤 인물일지는 모르겠지만, 끝내주는 곡을 만들어 낸 작곡가에 대한 관심이 무럭무럭 솟는다.
바로 그때.
철컥-!
차량이 속도를 높이면서 자동으로 문이 잠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신경을 거스르는 묘하고 쎄한 느낌.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클레이가 미소를 지었다.
‘아니겠지.’
인천공항을 벗어나는 차량 위로 흘러가는 구름.
하지만 그중에 우주선을 닮은 구름이 클레이에게 ‘그거 나야…’ 하듯이 몽실몽실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