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738화
“이상하네. 올 때가 됐는데…….”
한조가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왜 안 오지?’
약속한 시간이 됐는데도 뉴블랙 멤버들이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정말이지 이상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뉴블랙에는 약속 시간에 1분만 늦어도 닦달하는 광인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사람과 사람 간의 기본적인 시간 약속은 지켜야죠. 우리가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해도 서로 지킬 건 지키고…….
고작 5분 늦었다고 10분 동안 잔소리를 퍼붓는 뉴블랙의 메인 보컬.
그 때문에 뉴블랙이랑 무언가 일을 할 때마다 시간 약속에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하게 된 스트릿 보이즈였다.
물론 ‘약속 시간을 잘 지켜야지!’ 하는 긍정적인 쪽의 변화는 아니었다.
“오호라.”
LB가 턱을 쓰다듬으며 눈을 빛냈다.
“이렇게 늦는다 이거지? 서리혁이 늦는다?”
“이야, 이거 못 쓰겠네.”
“자기들은 늦어도 되고 우린 안 된다?”
간만에 약점을 잡았다고 히죽히죽 웃는 못난 모습들.
LB가 이를 갈았다.
“안 되겠어. 우리도 이번에 잔소리 한 10분 해 주자.”
“간만에 훌륭한 계획이다. 감나무.”
“진짜 똑같이 되갚아 줘야 돼. 사람과 사람 간의 약속은 기본적인 시간이… 그 뭐였더라.”
가물가물한 기억을 되짚는 가운데 누군가 물었다.
“그런데 우리 중에 10분 동안 잔소리할 수 있는 사람? 난 말빨 후달려서 자신 없는데.”
“어…….”
“으음…….”
스트릿 보이즈 멤버들이 추욱 늘어졌다.
그들에게 10분 동안 잔소리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잔소리를 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귀찮은 일이 아니던가.
귀찮은 일이라면 질색인 스보 멤버들이 인심 썼다는 미소를 지었다.
“우리가 한 번 봐줬다.”
“진짜 마음 같아서는 잔소리를 퍼붓고 싶은데, 우린 뉴블랙이랑 다르게 대인배니까.”
“대인배는 잔소리 같은 거 안 하지~”
합리화를 하는 멤버들의 모습에 한조가 미소를 지었다.
‘못난 놈들.’
그러고는 다시금 시계를 바라볼 때였다.
창문을 바라보고 있던 렉스가 눈매를 좁히더니 뭉툭한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켰다.
“밖에 뉴블랙 차 보이는데?”
“그래?”
“게다가 저어기, 사생들 진 치고 있는데 우리나 라로즈 쪽은 아니야. 딱 봐도 뉴블랙 사생들이네.”
“……이상하네.”
그럼 회사 안에 들어와 있다는 건데, 대체 어디로 새어 버린 걸까.
그런 의문을 품을 때였다.
한조의 핸드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대표님 [현조야대표실로잠시올라오거라]
대표님 [기원이도데리고오고]
대표님 [나무는절대안돼]
탁자 아래에서 핸드폰 자판을 톡톡 치기라도 한 것인지 띄어쓰기 하나 없는 문자였다.
한조가 멤버들에게 말했다.
“대표님이 잠깐 올라오라고 하시네.”
“왜?”
“나도 모르겠네. 일단 올라갔다 올게.”
어깨를 으쓱인 한조가 막내이자 메인 보컬인 기원을 데리고 대표실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에 탄 기원이 그에게 물었다.
“대표님이 우린 왜 부르실까?”
“글쎄…….”
“형이랑 나랑만 부르는 거면…….”
그들이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얼굴을 바라보았다.
스트릿 보이즈의 맏이와 막내의 조합.
학생회장처럼 반듯하게 생긴 얼굴과 곱상하면서도 수려한 느낌을 주는 얼굴이 비쳤다.
팬들 사이에서 비주얼 조합으로 불리고, 그들끼리는 ‘정상인즈’라고 부르는 조합.
대체로 외부 손님들이 왔을 때 보여 주기에 제일 그럴싸한 조합이기도 했다.
“……손님?”
“아!”
곧바로 깨달음을 얻었다.
‘뉴블랙이 대표실에 있구나.’
절친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한조의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성큼성큼 달려간 한조가 대표실 문을 차분하게 노크했다.
곧이어 돌아오는 임현식 대표의 따스한 목소리.
-들어오렴~~
“음?”
둘이 고개를 갸웃했다.
‘대표님 목소리 톤이 평소랑 다른데.’
데뷔 초창기와 다르게 스트릿 보이즈가 큰 성공을 거두면서 자상하게 변한 임현식 대표긴 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어 본 건 처음이다.
“뭐지.”
“일단 들어가자. 형.”
대표실로 들어가자마자 둘은 크게 미소를 지었다.
‘선우주다!’
‘리혁이 형이다!’
각자 절친, 과거 연습생 시절에 은혜를 입은 사람을 발견하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불독을 닮은 중년인, 임현식 대표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음? 한조랑 기원이가 왔구나.”
“아. 네, 대표님이…….”
“하하하! 내가 보고 싶어서 왔구나!”
예?
뭔 개소리…….
순간 표정 관리에 실패할 뻔했던 둘이 눈을 끔뻑이자, 임현식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다가왔다.
“아이고. 너희가 또 대표님 보고 싶다고 여기 올라왔구나.”
“…….”
그들을 바라보며 애처롭게 윙크를 날리는 모습에 한조와 기원이 어색하게 대답했다.
“예, 뭐 일상이죠.”
“대표님 보고 싶어서 왔어요.”
“하하하.”
두 멤버가 ‘왜 저래?’ 하며 시선을 교환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왜 대표님이 이상 행동을 보이는지를 깨달았다.
‘어, 저분은…….’
주지스님처럼 온화하게 차를 홀짝이던 박규호 대표와 그들의 눈이 마주쳤다.
“어?”
“허허.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대표님!”
밝은 얼굴로 인사하는 스트릿 보이즈의 모습에 임현식 대표가 입을 불퉁하게 내밀었다.
‘왜 남의 집 대표한테…….’
그와 상관없이 둘의 표정은 밝았다.
‘박규호 대표님이다.’
‘연예인이다.’
뉴블랙 TV를 통해 종종 접하는 탓에 준-연예인처럼 느껴지는 레몬 엔터의 박규호 대표였다.
게다가 뉴블랙 멤버들로부터 들은 온갖 일화들 때문인지 친근하게 느껴졌다.
-우리 대표님이 절에 가서 스님이랑 찍은 뒷모습 투샷인데, 어느 쪽이 스님이게?
-대표님이 이번에 집에서 쫓겨나셔서 회사에서 숙박을…….
-대표님께서 새로운 작곡 장비를 사 주셨는데, 이게 미국에서만 팔고 있던 거를…….
앨범 만들 때마다 돈을 펑펑 쓰고, 소속 연예인에게 아낌없이 따스한 조언을 해 주는 이미지.
박규호 대표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연말평가 때 잠시 얼굴을 봤던 것 같은데 현조 군이랑 기원 군이었지요? 원래도 훤했는데 인물이 더 피었네요. 하하.”
“감사합니다.”
“우리 임 대표가 감당하기에는 참 버거운 인재들이네요. 허허허!”
스보의 맏형과 막내가 눈을 깜빡였다.
‘방금 말에 굉장히 뼈가 있었던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임현식 대표의 불독 같은 얼굴에 험상궂은 표정이 떠올랐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임 대표가 박규호 대표를 향해 팔짱을 꼈다.
“본인 걱정부터 하시지? 박 대표도 솔직히 뉴블랙을 감당할 그릇은 아니지 않나?”
“어허. 이 사람이 과민 반응을 하네. 내가 언제 뭐라고 했나.”
귀를 후비적하며 모른 척하는 박규호 대표를 뚫어져라 노려보는 임현식 대표였다.
두 중년인이 치열한 눈싸움을 벌이고 있는 동안 상황을 정리하듯이 선우주가 입을 열었다.
“일단 두 사람 앉을 자리부터…….”
“아.”
임 대표가 자신의 옆 소파를 퉁퉁 두드렸다.
“여기 와서 앉거라.”
“네.”
소파에 앉은 스보의 두 멤버가 맞은편에서 두 손을 모은 채 앉아 있는 뉴블랙에게 눈빛을 보냈다.
‘이게 뭐야?’
‘대표님들 자존심 배틀.’
‘아.’
그제야 왜 자신들이 소환된 것인지 깨달은 두 멤버였다.
대표님 딴에 ‘뉴블랙한테 비주얼도 안 밀리고, 헛소리 하면서 속 박박 긁는 감나무 등등과는 다른 녀석들’을 찾은 듯했다.
“허허.”
박규호 대표가 그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인물이 훤하네. 정말 훤해.”
“하하.”
“근검절약하기로 유명한 우리 임 대표 밑에서 어쩌다 이런 훌륭한 사람들이 나왔는지…….”
해석: 짠돌이 같은 놈 밑에서 용케 잘 컸구나!
임현식 대표가 입을 파르르 떨었다.
“……박 대표.”
“왜 그러시나. 임 대표?”
“…….”
“…….”
스님과 불독 사이에서 치열한 전기 스파크가 튀는 듯한 느낌에 청년들이 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냥 주먹질을 해서 싸우든지 해야지.
다 큰 어른들이 눈싸움을 하며 누가 먼저 눈을 깜박이나 하고 있었다.
“참.”
박규호 대표가 미소를 지었다.
“요즘 차트 봤나? 이번에 우리 리혁이가 부른 OST가 망고 차트에 1위로 들어갔는데, 허허허.”
“…….”
“메트로가 빌보드 1위한 지 얼마 안 돼서 또 이런 소식이…….”
오사카 돔 공연을 시작으로 최근의 게임 광고 때문에 에어소프트가 상한가를 쳤다는 소식까지.
그걸 가만 두고 볼 임현식 대표가 아니었다.
“저번에 우리 현조가 찍었던 단막극이 어찌나 반응이 좋던지, 감독님들 사이에서 기대되는 신인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다니까.”
“흠. 그러고 보니 우리 지호도 이번에 단막극을 찍으려고 했는데, 시간이 안 나서 미루고 있었거든. 내년에 넷플러스 드라마 주연으로 들어가서…….”
“기원이가 OST를 부른 웹 드라마가 10대들 사이에서…….”
그야말로 유치함의 끝이었다.
중간부터는 서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듯한 느낌.
“우리 애는 포브스 선정 아이돌 춤꾼 1위라고!”
“그런 거면 우리 애는 타임지가 선정한 최고의 메인 보컬이다!”
“우리 애는 공중제비를 3바퀴나 돈다고!”
“……현조야! 너도 오늘부터 연습하거라!”
허억, 허억 하며 숨을 고르는 두 중년인.
어린이들을 중재하듯이 우주가 미소를 지으며 끼어들었다.
“그래도 대표님들 덕분에 저희가 정말 잘 활동하고 있는 거니까요.”
두 남자가 고개를 끄덕일 때.
리혁이 은근슬쩍 말을 얹었다.
“정말 대표님 덕분에 저희가 잘 활동하고 있죠. 저번에 제 개인 연습실도 마련해 주시고…….”
“그랬지. 허허.”
이번에는 막내가 쏘옥 끼어들었다.
“드라마 예산도 투자해 주시고…….”
그런 식으로 뉴블랙 멤버들이 ‘대표님이 이거 해 주셨잖아요’ 하면서 박규호 대표의 입가가 헤벌쭉 올라갔다.
반면에 임현식 대표는 입을 꿍얼거릴 뿐이었다.
“나도……!”
하지만 스트릿 보이즈 멤버들과 눈이 마주친 임현식 대표는 뭐라고 말하기가 애매했다.
‘돈 드는 건 다 안 된다고 했는데.’
하지만 이 자리에서 저 대머리한테 질 수는 없지.
그가 에라 모르겠다 하는 마음으로 질렀다.
“나도 이번에 현조가 찍고 싶다는 드라마 한 번 캐스팅 시켜 보려고, 백방으로 돌아다니고 있지.”
“대표님!”
한조가 짐짓 감격한 표정으로 두 손을 맞잡았다.
기세가 오른 임현식 대표가 그동안 미뤄 두고 있던 프로젝트에 예산 승인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 앨범에 뭐냐. 뮤직비디오도 찍고 싶다는 거 다 로케이션 돌려서 찍어 보고! 또 그 뭐냐!”
기원이 쏙 끼어들었다.
“의상이요.”
“그래! 의상도 이번에 새로 좀 해 보자고.”
그런 식으로 줄줄이 프로젝트를 승인하는 모습에 한조와 기원이 기분 좋게 웃으며 감사의 눈빛을 보냈다.
맞은편에서 우주와 졸개들이 윙크를 했다.
그런 식으로 임현식 대표가 ‘다 질러! 질러 버려!’ 하고 있을 때.
“음?”
우주가 꽃무늬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벌써 시간이 30분이나 지났네. 어쩌죠, 대표님. 저희 이제 가서 녹음을 해 봐야 할 거 같은데.”
“아이고. 시간이 그렇게 됐니?”
박규호 대표가 차를 홀짝이며 말했다.
“차나 한 잔 하려고 했는데 얘기가 길어졌네. 가 보렴. 녹음 잘하고.”
“네, 대표님.”
한조도 고개를 돌려 임 대표에게 미소를 지었다.
“저희도 가 보겠습니다.”
“어어, 그래.”
“그리고 감사합니다. 대표님.”
“응?”
“앨범 예산이요.”
임현식 대표가 눈을 끔뻑거렸다.
“……아아. 그랬지. 하하.”
한조가 그림 같은 미소를 지으며 꾸벅 숙이고는 우주와 어깨동무를 하며 대표실을 나섰다.
그러는 동안.
“……?”
임현식 대표가 잠시 멈칫했다.
‘뭐지. 뭔가 당한 것 같은데.’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은 한참 지나서였다.
핸드폰으로 계산기를 두드려 보던 임 대표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아무리 봐도 무리한 액수인데.’
하지만 다들 보는 앞에서 약속을 한 마당에 ‘돈 많이 들어서 안 돼’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후우.”
막연하게 한숨만 쉬는 그의 맞은편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왜. 뭐.”
“아니야. 아무것도.”
슬쩍 웃으며 시선을 돌리는 박규호 대표.
‘저놈 때문에 내가 또…….’
맞은편에서 연신 차를 홀짝이는 대머리를 얄밉게 바라보던 임 대표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뭐야.”
“음?”
“네놈이랑 나랑 한가하게 차나 마시고 있을 사이도 아니고. 뭔가 용건이 있어서 왔을 거 아니야?”
“으음…….”
남들에게는 인상이 좋고 허허실실한 대표로 알려져 있지만 임현식 대표는 상대를 잘 알고 있었다.
문어처럼 느물거리며 뒤꽁무니로 먹물 같은 속셈을 뿜어내는 인간.
약간의 사심이 들어간 평가긴 했지만, 그만큼 그가 경계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이고, 향이 좋네.”
박규호 대표가 허허 웃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임 대표.”
“뭐.”
“나한테 회사 넘겨볼 생각 없어?”
“……푸흡!”
임현식 대표가 차를 뿜었다.
* * *
박규호 대표가 떠난 후.
다 식어 버린 찻잔을 바라보며 임현식 대표는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임 대표. 나한테 회사 넘겨볼 생각 없어?
앙숙이 던지고 간 제안이 머릿속에 맴돈다.
처음에는 그게 무슨 헛소리냐며 그럴 거면 나가라며 욕을 퍼부었지만, 상대는 허허 웃을 뿐이었다.
-요즘 들어 회사 재정 상황이 그리 좋지 못하다고 그러던데… 들리는 풍문으로는 말이야.
어디서 정보가 샌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회사 사정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는 라이벌이었다.
물론 상대가 한 말은 사실이었다.
“…….”
임현식 대표가 보고 있는 서류에는 회사 재정 상황이 적혀 있었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평가해도 좋다고 말하기는 애매했다.
1군 아이돌인 스트릿 보이즈로 쓸어 담은 돈이 다 어디로 갔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성과와 지금의 재정 상황은 별개였다.
‘상황이 참 뭐 같군.’
대중들의 인식과 다르게 연예 기획사는 이익률이 굉장히 낮은 편이다.
사람으로 하는 장사이기 때문이다.
스타로 인해 이익을 창출하는 것이기에 그만큼 스타에게 떼어 줘야 계약을 유지할 수 있는 게 기획사다.
옛날 얘기긴 하지만 심한 경우에는 톱스타를 영입하기 위해 0대 12라는 기기묘묘한 계약까지 맺을 정도.
“으음…….”
DNS 미디어도 마찬가지였다.
스트릿 보이즈가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정산 떼고, 앨범 투자비용 떼고 다 떼면 정말 남는 게 별로 없다.
‘저놈이랑 저놈네 애들이 이상한 거라고.’
인터넷에서 자신을 욕하는 글을 볼 때마다 괜스레 억울한 임현식 대표였다.
하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했다.
-투자금이 필요할 텐데.
당장 회사에 돈이 필요했다.
새롭게 시작한 사업들에서 아직 자금을 다 회수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회사를 넘기라는 말은 농담이고. 하하. 조금 무리한 말로 표현하긴 했지만 지분을 대가로 투자 유치하려는 건 사실 아닌가?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지분을 주고 외부 투자를 유치하려는 게 계획이었으니까.
만약에 그런 제안을 한 사람이 박규호 대표만 아니었다면 그도 흔쾌히 승낙을 했을지도 모른다.
‘길게 보면 내 회사까지 먹으려는 속셈인데.’
레몬 엔터가 DNS 미디어의 주주가 되겠다는 상대의 이야기에 심란한 표정을 짓는 임현식 대표였다.
물론 지금 지분을 넘긴다고 해서 당장 자회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투자회사나 관계회사가 된다 정도.
하지만 박규호 대표가 처음에 한 말이 그의 속내를 내비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회사를 넘길 생각이 없냐니.’
최근에는 NBS라는 방송 사업까지 시작하더니, 이제는 다른 기획사들까지 인수 의사를 보이고 있다.
여우같은 조규환과 함께 대머리가 무언가 큰 그림을 그리는 게 분명한데 그에게는 그 청사진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저 머리를 긁적이며 고민에 잠길 뿐.
‘미치겠군.’
분명히 제안만 보면 더 좋은 곳들이 많긴 하다.
하지만 거액을 주겠다는 중국이나 일본계 자본, 혹은 사모펀드들을 볼 때마다 뭔가 찝찝한 마음이 든다.
정확히 말로 표현하기는 힘든데 뭔가 가슴이 싸한 느낌.
-기왕이면 이웃끼리 잘 지내는 편이 좋지.
그 말을 남기며 사라진 오랜 앙숙을 떠올리며 임현식 대표가 고민에 잠겼다.
‘나쁜 제안은 아니야. 협력 관계가 되면 레몬 엔터의 프로듀싱 팀과 같이 일을 할 수도 있고…….’
어쩌면 지금처럼 우주선에게 곡을 받는 것도 더 쉬워질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가능성을 머릿속에 떠올리던 임현식 대표가 한숨을 쉬었다.
‘복잡하네.’
그리고 중얼거렸다.
“일단은 나만 알고 있어야겠어.”
* * *
“오?”
중현이가 귀를 쫑긋거리며 눈을 깜빡거렸다.
“왜 그래?”
“뭔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아요.”
“……그래?”
우리 회사에는 그런 말이 있다.
낮말은 중현이가 듣고, 밤말도 중현이가 듣는다.
그리고 까먹는다.
나중에 얘기해 달라고 하고 있을 때, 한조가 내게 다가와 어깨동무를 하며 말했다.
“덕분에 대표님한테 예산 지원 잘 받았다.”
“그래. 내 덕순이지?”
“응?”
“아. 덕순이래. 덕분.”
나도 모르게 최애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헛기침을 하고는 부드럽게 웃었다.
“뭐, 친구끼리 돕고 돕는 건 당연한 거지. 안 그래? 친구니까.”
“그렇지.”
“그래서 떠오른 건데 말이야.”
눈을 가늘게 뜨며 웃어 보였다.
“우리 이현조 씨는 왜 그러셨을까?”
“……응?”
내가 손가락을 튕기자 스스슷- 나타난 비주가 핸드폰 영상을 대령했다.
TBC 돌림픽 로고.
그 아래로 한조가 미소를 지으며 게임 1등 기념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친구야. 나는 본선 간다.]
[너는 오지 못하는 곳이지.]
손가락을 다시 튕기자 비주가 다시 재생하기를 눌렀다.
스스로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조가 침을 꿀꺽 삼켰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날 바라본다.
“설마 옹졸하게…….”
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녹음 한 번 잘 해 보자. 친구야.”
“…….”
“내가 오늘만을 기다렸어. 정말.”
안색이 핼쑥해진 친구를 바라보며 눈을 이글이글 불태웠다.
마침내 복수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