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752화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평창 G-100 콘서트는 무사히 막을 내렸다.
-감사합니다!
전 출연자가 함께 모여서 부른 희망찬 노래를 마지막으로 다 같이 관객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평창 화이팅!
-돌아갈 때 다치지 않게 질서 유지하면서 이동해 주기! 주변에 떨어진 물건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기.
워낙 인파가 많이 몰린 탓에 콘서트 중계가 끝난 후에도 사람들에게 안내 멘트를 이어갔다.
우리 안전 광인이 마이크를 들었다.
-천천히, 그리고 차분하게 이동할게요. 혹시 아이들이 있으면 꼭 손을 잡고 챙겨 주시고요.
다행스럽게도 사람들이 통제를 잘 따라 주었다.
사실 우리가 굳이 안내해 줄 필요도 없이 사람들이 놀라울 만큼 질서정연하게 퇴장했다.
쓰레기까지 척척 챙겨가는 사람들에게 엄지를 들어 보였다.
-모두들 와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와아아아아-!”
-그럼 저희도 이만 가 보겠습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지금까지 뉴블랙이었습니다!
여전히 남아 있는 대포 카메라나 폰카를 든 사람들에게도 손을 흔들어 주고는 조용해진 무대를 내려갔다.
“장관님 오십니다!”
“여기는 IOC에서 오신…….”
요란하게 등장한 올림픽 관계자들과도 사진 한 장씩 찍고.
동료 가수들과 작별 인사도 하고.
그리고 긴 시간 동안 벼르고 있었던 4인조 걸그룹에게 습격을 받았다.
“캬아아악!”
따뜻하게 무대 하라고 북슬북슬한 퍼 코트 의상을 입어서 그런 걸까.
플라밍고들 같다.
흡혈 괴조처럼 변한 여신들이 괴성을 토해냈다.
“내가 언제 그런 표정을 지었냐, 선우주!”
“아유. 알지. 우리 나윤이 그런 표정 안 짓는 거 알지. 그냥 내가 극적으로 과장을 한 거야.”
“진짜 우리가 언제 그런 식으로 열 받게 노래를…….”
“누나. 과장이에요. 과장.”
콘서트의 뉴칼렛 무대에 잔뜩 열이 올라 있는 이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중현이를 불렀다.
“중현아. 이분들에게 좋은 스트레칭이라도 하나 알려…….”
고개를 돌린 순간.
멀찍이 무대 구조물 뒤편으로 도피를 마친 졸개들이 날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
“…….”
“…….”
눈을 가늘게 뜨고 자상하게 웃어 보였다.
“지금 날 버리고 간 거야?”
막내가 당당하게 말했다.
“그래도 형은 거기서 안 죽을 거 아니에요. 누나들이 곡 제조기는 살려둘 거니까.”
“맞아. 우린 파리 목숨인데.”
비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른 두 녀석도 마찬가지로 끄덕끄덕 동의했다.
형은 앞에서 괴인들을 상대하고 있는데, 자기들은 살겠다고 뒤로 내뺀 모습에 기가 찼다.
혀를 끌끌 차면서 고개를 돌렸다.
“…….”
“…….”
험상궂은 표정으로 나를 둘러싸고 있는 4인조 괴인들.
그들에게 웃으며 제안했다.
“수록곡 하나 계약합시다.”
“……!”
4인조의 눈빛이 변했다.
청부업자처럼 변한 아라가 음험하게 눈을 빛냈다.
“조건은?”
“쟤네 좀 일단 잡아와 주세요.”
“확인.”
스스슷!
4인조가 그림자에 녹아들듯이 움직이면서 곧이어 하찮은 비명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아악!”
“느아악! 저주할 거다. 선우주! 저주…….”
졸개들의 비명을 클래식 음악처럼 감상하고 있을 때, 메인보컬 봄이 따스한 캔 음료를 건넸다.
세상 친절한 자본주의 미소였다.
“드시죠. 작곡가님.”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하.”
“여기 손에 핫팩도.”
“이러실 필요까지 없는데, 아하핫!”
따끈한 초코 음료를 마시고 있는 동안 핸드폰이 반짝반짝인다.
이현조 [진짜 스타일러 필요 없냐]
이현조 [외식하고 나서 옷 넣어두면 고기 냄새 완전 잘빠져]
안마 의자 10개를 기부했다는 틴스피릿의 말이 신경이 쓰였던지 뭔가 사 주겠다고 제안하는 스트릿 보이즈.
가족의 원수처럼 다가오다가 급 친절해진 스칼렛.
그리고 졸개들의 아름다운 비명까지.
“호오…….”
수록곡 장사도 꽤 쏠쏠하다는 생각이 드는 날이었다.
* * *
평창 G-100 콘서트가 끝난 후.
우리는 평소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패션 위크와 일본 투어, 피날레 콘서트 등의 숨 가쁘게 바쁜 스케줄을 지나 마침내 평화로운…….
-11.16 망고 차트 어워드
-11.20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AMA)
-12.01 K넷 뮤직 어워드
스케줄 표를 바라보며 동생들과 훈훈한 미소를 교환했다.
“평화로운 일상 그게 뭐죠. 먹는 건가.”
“연습만 하고 살면 평화로운 일상인 거지, 뭐. 여기에 다른 스케줄 없는 게 어디야.”
“그건 그래요.”
아.
일상으로 돌아왔는데 왜 눈물이 나지.
“이번엔 어워드가 3개…….”
망고와 KMA 준비하는 데만 보통 한 달이 걸리는데, 이번에 AMA라는 신규 어워드까지 뿅 끼워져 있다.
“그나마 AMA에서 메트로 1곡인 게 다행이네요.”
“그렇지.”
엄청 바쁘긴 할 텐데 이 정도는 되어야 할 맛이 나지 않겠는가.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지.
사실 긍정 회로를 돌리지 않았다가는 머리가 과부하로 터질지도 모르겠다.
“일단 하나하나 계획부터 짜자.”
회사로 따지면 전 임직원 앞에서 하는 중요한 PPT가 한 달 내에 3건이나 되는 일이었다.
그러니 연습 계획을 짜는 것부터가 일이었다.
비주와 리혁이가 척척 짜내는 연습 스케줄에 한두 마디씩 보태며 한 달간의 플랜을 만들었다.
“형들.”
막내가 이번 주 토요일을 가리키며 말했다.
“죄송한데 저 이 날은 새벽에 돌아올게요.”
“왜?”
“…….”
막내가 입술을 살짝 모았다.
“저 드라마 촬영이요.”
“아아.”
“촬영 일정 픽스할 때만 해도 AMA까지는 일정에 안 잡혔거든요. 이게 취소가 힘들어서…….”
“그럴 수 있지.”
“그래도 저 날 끝나면 다음 달에 보강 촬영밖에 안 남았으니까요. 걱정 안 해도 돼요~”
정말 미안하다며 다음에는 이런 일 없을 거라고 말하는 막내에게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하루 정도는 괜찮아. 우리가 하루 연습 쉰다고 퇴보할 실력도 아니고.”
“맞아.”
비주도 동의했다.
“콘서트 하면서 6개월 넘게 보냈는데 하루 정도로는 지장 없어.”
“네…….”
그리 말하면서 입술을 살짝 모으던 지호가 이내 활짝 웃으며 말했다.
“형들이 그렇게 말해 주면 전 고맙죠~”
“그래. 그럼 됐고…….”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는 동안 우리 막둥이가 연습실 바닥을 손가락으로 긁으며 고개를 숙였다.
얼굴에 살짝 그늘이 진 듯한 느낌.
무언가가 엄청 서운한지 눈이 살짝 그렁그렁해지려는 조짐이 보이려던 찰나.
“저 잠깐 세수 좀 하고 올게요.”
“응.”
그러고는 막내가 나갈 때까지 동생들과 회의를 이어갔다.
달칵.
문이 닫혔을 때.
“쟤 완전 삐진 거 같죠?”
리혁이가 키득거리며 하는 말에 우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
“지금 거의 수도꼭지 터지기 직전까지 갔어.”
“또 떡볶이 먹으러 가네.”
우리끼리 ‘눈물을 흘린다’의 의미로 쓰는 관용어 ‘떡볶이 먹으러 간다’였다.
내가 말했다.
“쟤도 생긴 건 다 컸는데.”
어화둥둥 우리 막내긴 하지만 이제 ‘애’라고 말하긴 좀 미묘했다.
졸업하면서 완전히 젖살이 쭉 빠졌다 보니 이젠 어디 가도 20대 초반처럼 보인다.
메이크업에 따라 10대 후반부터 20대 후반까지 다양하게 어우를 수 있는 얼굴.
오뚝한 콧대에 누가 봐도 훤칠한 미남 배우 같다는 생각이 드는 미모인데… 여전히 행동은 막내다.
“그래도 서운할 만하긴 하죠.”
“그렇긴 하지.”
촬영장에 한 번 놀러간다, 놀러간다 해 놓고 지금까지 안 놀러간 건 사실이었으니까.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정말 시간이 없어서 못 간 거였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때였으면 ‘아! 언제 올 건데~! 죽고 나서 영혼으로 올 거예여?’ 하던 애도 이해해서 아무 말 안 한 거고.
그나마 한가할 때는 또 얘가 촬영이 없어서 타이밍이 안 맞았다.
“이번에 현장 감독님 얘기 들어보니까 우리 언제 놀러올 거라고 엄청 자랑한 거 같더라.”
“그래요…?”
마음이 아픈지 비주의 눈매가 강아지처럼 축 늘어졌다.
“그럼 진짜 꼭 가야겠네요.”
“가야지.”
안 그래도 이미 현장 촬영 감독님 및 제작사 측과 통화를 한 터였다.
저 날 놀러가도 되냐고.
제작사 측에서도 메이킹 필름에 ‘뉴블랙 방문!’ 하며 쓸 거리가 생겼다고 엄청 좋아하면서 성사가 됐다.
“후후후후.”
그랬기에 지금은 모르는 척 하고 있었다.
눈을 땡글땡글 뜨면서 듣고 싶은 말을 기다리던 방금 전 모습을 생각하면 마음이 쿡쿡거리긴 하지만…….
“그래도 이게 서프라이즈의 맛이지.”
“맞아요.”
리혁이도 고개를 끄덕이며 낄낄거리는 가운데.
달칵.
다시 문이 열리고 눈가에 잔뜩 물을 칠한 막내가 나타났다.
“……흐흡.”
입가에서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헛기침을 했다.
조용히 자리에 앉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눈을 비비는 우리 막내의 모습에 다들 작게 웃을 뿐이었다.
* * *
D-Day 토요일.
지호가 새벽부터 촬영장으로 나간 후, 얼마 안 가 우리도 차량을 타고 강원도로 이동했다.
“왜 강원도래요?”
조수석에 탄 원석이 형이 답했다.
“이번에 찍을 씬에 눈 내린 배경이 필요하다고 하더라고. CG로 안 되는 부분들을 좀 찍으러 간대.”
“아하.”
“자세한 건 나도 모르겠어. 워낙 보안이 철통같아서.”
지호가 찍고 있는 드라마는 과거 웹드라마로도 나온 적이 있는 <신이>.
겉모습은 고등학생이지만 수천 년을 넘게 살아온 존재가 비밀 기관과 함께 기이하고 사악한 악령들을 사냥하는 이야기다.
해외에도 비슷한 소재가 많은 만큼 흔한 포맷이긴 하다.
하지만 여기에 인기 장르물 <슬립>을 쓴 작가님의 실력과 뛰어난 배우들, 스탭들의 열연으로 웹드라마임에도 굉장히 인기를 끌었다.
“근데 시즌 2는 무슨 내용일까요.”
비주의 말에 내가 답했다.
“시간여행일 거야.”
“시간여행이요?”
막내와 대본 리딩을 하면서 대충 상황 파악을 했다.
“무슨 시간 여행 장치를 잘못 건드려서 과거 한국사에 있었던 순간들을 함께 하는 그런 스토리라던데.”
과거 삼국 시대나 조선 시대에 나타난 괴이한 존재들을 사냥한다는 스토리였다.
내가 본 대본만 해도 서양의 유령선이 이양선으로 나타난다든가.
어부가 미역인 줄 알고 잡았는데 머리카락이어서, 물속에 서 있던 귀신이 기괴하게 웃는다거나 하는 것들이 있었다.
“으으으으.”
졸개들이 부르르 떨었다.
“아. 진짜 싫어….”
“그런 건 왜 이야기하는 건데요. 하나도 안 궁금해!”
“나만 당할 수 없으니까.”
흐뭇하게 웃으며 손에 턱을 괴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기나긴 도로를 지나 마침내 우리가 목표로 한 촬영지에 도착했다.
“와아-”
절로 감탄이 나왔다.
자작나무 숲으로 들어서는 주차장에 자리가 하나도 없을 만큼 촬영 관련 차량들이 가득했다.
배우들 차량.
기술 관련 차량.
커다란 트럭 같은 장비 차량.
“……진짜 대규모긴 하다.”
넷플러스에서 한국이랑 동남아 시장 공략한다고 통 크게 질렀다던데.
진짜인 모양이다.
-아, 형들 진짜 놀러와야 돼여. 이게 웹 드라마 시절이랑은 완전 다르다니까요. 진짜 스케일 대박인데~
스탭들 수만 해도 내가 찍었던 <우리 가족은 외계인>보다 최소 두 배는 되는 느낌이다.
“안녕하세요!”
차에서 내리자 조연출이 밝게 웃으며 우리를 맞이했다.
“오는 길은 어떠셨어요? 괜찮으셨어요?”
“네, 안 막히고 왔어요.”
롱 패딩에 모자까지 둘러쓰고 마스크까지 썼다.
서프라이즈를 해야 되는데 보조 출연자나 다른 스탭들이 알아보고 ‘어어어!’ 하면 곤란하니까.
“감독님이랑 작가님 정도만 알고 있는 거죠?”
“네. 최소한으로요.”
진짜 다들 깜짝 놀랄 거라며 좋아하는 조연출의 말에 웃었다.
찬바람에 몸을 웅크리면서 뽀드득 뽀드득 눈을 밟으며 걸었다.
이윽고 자작나무 숲 안쪽으로 들어서자 널찍한 공터에 스탭들이 잔뜩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액션!”
확성기를 든 감독님의 말에 ‘와아아아!’ 하면서 보조 출연자들이 눈 덮인 숲을 데굴데굴 굴렀다.
리혁이가 물었다.
“저건 뭐 하는 건가요?”
“아, 지금 전투씬 촬영 중이거든요. 만주에서 독립군과 일본군이 교전하는 장면이에요.”
리혁이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주에도 자작나무가 있으니 고증에 맞네요.”
“……그, 네. 그렇죠. 아무튼 포성이랑 총성은 나중에 편집하면서 들어갈 거라서요.”
그러곤 자리에 멈춰선 조연출이 한 곳을 가리켰다.
“지호 씨는 저기 있네요.”
“오.”
독립군 복장을 입은 지호가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촬영 모니터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겨드랑이엔 둘둘 만 대본을 끼고 있는데 전문적인 배우 같다.
“바로 인사하실래요?”
“아뇨. 이따가 적절한 타이밍에 끼어들려고요.”
“네, 그럼 필요하시면 부르세요~”
멀찍이서 지호를 잠시 구경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긴장하면서 숨어 있었는데 이내 마음 놓고 구경했다.
“주변을 안 보네.”
“그러게요.”
모니터를 볼 때가 아니면 대본을 보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기를 반복한다.
입을 중얼중얼하는데 아마 대사가 아닐까.
그러다 적당한 타이밍이 됐다 싶으면 주변 배우들이나 감독들에게 가서 애교 한 번 부리며 촬영장 분위기를 밝게 만들어 주는데.
딱히 그렇게 하고 싶다기보다는 의무적으로 하는 것 같다.
“와.”
리혁이가 말했다.
“쟤 저러는 건 처음 보네요.”
“그니까. 원래 저렇게 책임감 있게 행동하는 애가 아닌데.”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아 걱정했는데 막상 현장에서 보니 어른스럽게 잘하고 있다.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떼를 쓰던 애가 걱정돼서 가 보니 다른 애기들이랑 웃고 있는 걸 보는 느낌이다.
“……가서 인사하기가 좀 그렇네.”
거기다 너무 집중하고 있어서 그걸 깨기가 미안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변장하고 다녀올게.”
우두둑! 우득!
실루엣 변신술을 사용하고는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동생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다녀온다~”
“형…. 그걸 지호가 모를까요?”
“확인해 보려고.”
후훗 웃으며 비탈을 내려갔다.
모두가 나를 자연스럽게 스탭으로 생각하는 가운데, 지호 근처에 있던 로드 매니저 지운 씨와 눈이 마주쳤다.
“……!”
내 눈매를 보고 알아챈 모양이다.
아님 미리 이야기를 해 놔서 그런가.
‘쉿.’
‘앗, 네.’
‘비밀이에요.’
그러고는 지운 씨에게 물병을 건네받아 막내에게 내밀었다.
살짝 쉰 목소리로.
“지호 씨, 물 좀 드세요.”
“…….”
“지호 씨.”
“아.”
대본에 코를 박고 있던 지호가 고개를 들었다.
“감사합니다.”
피곤한 목소리.
물병을 받아들고도 한참 동안 대본을 바라보던 지호가 ‘아’ 하고 물병을 들어 목을 축였다.
그러곤 공손하게 물병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
“제가 좀 정신이 없었죠? 제가 연습할 시간이 좀 많이 부족해서…….”
대충 응대해서 미안하다고 말을 한 지호에게 괜찮다고 하자 다시금 대본으로 시선이 돌아간다.
“…….”
짜잔! 하려다가 말없이 동생들에게 돌아갔다.
“못 알아봐요?”
“응. 애가 좀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는데.”
그 외적인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일단…….”
대본을 뒤적거리면서 중얼중얼하는 막내를 바라보며 동생들에게 말했다.
“촬영이 좀 끝나면 아는 척하자.”
* * *
‘아, 머리야.’
왕지호가 피곤한 얼굴로 생수병의 마개를 돌돌 돌렸다.
매니저가 건네주는 타이레놀을 한 알 먹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
머릿속 난쟁이들이 관자놀이 쪽에서 망치질을 해대는 느낌이다.
눈을 찡그리며 통증을 참아내고는 대본을 다시 바라보았다.
활자들을 읽긴 읽는데 눈에 잘 안 들어온다.
‘어제 그냥 잘 걸 그랬나.’
연기를 하고는 있는데 잘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주변 사람들이나 감독님, 작가님이 ‘잘하고 있다’ 면서 말해 주니 그러려니 하는 것일 뿐.
“아.”
왕지호가 고개를 들어 매니저를 바라봤다.
“참, 아까 저한테 물이랑 과자 주고 가신 분이요.”
“아, 네.”
“그분 누구예요?”
“그…….”
알아보겠다는 매니저에게 말했다.
“중요한 건 아닌데, 아까 감사 인사를 했는지 안 했는지가 좀 헷갈려서. 저 이상한 말은 안 했죠?”
“네. 감사 인사도 했어요.”
“그럼 다행이다.”
촬영장에서 모르는 스탭이 보여서 잠시 당혹스러웠다.
‘사람들 얼굴은 다 알고 있는데.’
아이돌 출신에 100억이 넘는 제작비의 드라마 주연을 맡은 까닭에 평판에도 꼼꼼하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촬영장에선 무조건 웃고 있으라는 맏형의 조언도 있었고.
“……치.”
그 얼굴을 생각하니 괜히 얄밉다.
오늘따라 컨디션도 안 좋아서 그런지 유독 서러운 기분.
머릿속에 몽실몽실 떠오르는 형들의 얼굴에 막내가 손을 휘휘 저었다.
‘어떻게 한 번을 안 와주냐.’
괘씸하고 고얀 형들.
이따가 숙소에 돌아가면 형들이 잠들 타이밍에 문을 꽝 닫아야겠다고 결심한 막내였다.
다년간의 막내 체험을 통해 엄마와 누나들이 ‘너 지금 뭐 하자는 태도야?’ 라고 달려오지 않을 정도로 문 닫는 세기를 조절할 수 있는 뉴블랙의 막내였다.
‘흥.’
괜히 입만 삐죽이고 있을 때.
“지호 씨, 스탠바이!”
“네!”
활짝 웃고는 의상팀과 분장팀의 점검을 받고 공터에 들어갔다.
감독이 그를 불렀다.
“대사 없는 씬이니까 평소처럼 하면 돼. 저기서 저기로 뛰어갔다가 이리로 포복하면서 다가오기.”
“네.”
“나머지 어려운 씬은 스턴트가 대신해줄 거니까, 얼굴 나오는 부분들만 촬영하면 돼.”
“알겠습니다!”
주변 엑스트라 배우들에게 박수를 치며 ‘화이팅!’ 하던 지호가 동선 체크를 마쳤다.
‘좋아.’
눈을 지그시 감으며 배경을 상상했다.
눈발이 날리는 만주.
여기저기서 포성과 총성이 울리고.
그 속에서 주인공은 총탄을 피하기 위해 노력한다. 총알을 맞으면 다쳐서가 아니라, 맞아도 안 죽는 모습을 들키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심하면서도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으로 움직인다.
“레디~! 액션!”
주인공 신이한의 모습을 떠올린 왕지호가 곧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쾅! 쾅!”
감독이 직접 입으로 효과음을 넣어 주는 가운데 왕지호가 빠르게 뛰어갔다.
“쾅! 쾅! 포탄이 바로 옆에 착지한다. 쾅!”
환상처럼 흙이 비산한다.
주변에서 같이 구르는 엑스트라들을 가볍게 살펴보며 낮은 언덕을 오를 때.
“억!”
튀어나온 나무뿌리에 발등이 걸려 넘어졌다.
꽈당.
“아야!”
앞으로 넘어진 배우의 모습에 스탭들이 벌떡 일어났다.
“지호 씨! 괜찮아?”
“네! 괜찮아요.”
눈물이 살짝 핑 돌았다.
무릎이랑 허벅지도 조금 얼얼하긴 했지만 쏙쏙거리는 손가락 끝 때문이었다.
“으.”
넘어지면서 긁혔는지 피 한 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닥 아프지도 않았지만 괜스레 오늘따라 모든 게 야속하게 느껴졌다.
하필이면 거기서 넘어질 게 뭐람.
서러움에 살짝 눈물이 맺히려는 걸 참았다.
‘아니야.’
고개를 저으며 일어나려고 하는데…….
우당탕탕!
웬 패딩 입은 사람들이 미친 듯이 비탈을 달려 내려왔다.
“야!”
“괜찮아?!”
“지호야!”
스탭들보다 먼저 달려온 4인조의 모습에 왕지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형들이다.
마스크를 벗으며 자기 얼굴을 보여주더니 괜찮냐고 물어보는데 머릿속이 멍하다.
‘어어?’
형들이 왜 여기 있지?
그의 손가락을 붙잡고 아이고 우리 막내 죽는다! 하며 오버하고 있는 형들을 바라볼 때였다.
“…….”
왕지호의 멍한 얼굴 위로 무언가 차오르면서.
하루 종일 막아두었던 뭔가가 터지듯이 뚝 떨어졌다.
“뭐야. 얘 왜 이래?”
“야.”
“어디 다쳤어? 그 정도로 아파?”
갑자기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펑펑 우는 막내의 모습에 형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