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753화
“헤헤…….”
바보처럼 웃는 누군가가 포크를 꼭 찍었다.
떡볶이를 입에 쏙 넣고 우물우물하는데 입가 위로 순도 100퍼센트의 행복한 미소가 떠오른다.
“헤헤헤…….”
훌쩍.
코가 벌게진 막내가 언제 울었냐는 듯 씩씩하게 떡볶이를 먹고 있다.
“맛있어?”
“네. 진짜 존맛탱.”
“너 주려고 일부러 여기까지 가지고 온 거야.”
“고마워여….”
막내가 씩씩하게 떡볶이를 먹고 있는 동안 주변 여기저기서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인다.
“뉴블랙 님들, 저희 잘 먹을게요!”
“잘 먹겠습니다!”
감사 인사를 하는 스탭들에게 고개를 꾸벅 하며 웃어 보였다.
멀찍이 푸드트럭이 세 대 서 있었다.
강원도의 바람에 펄럭펄럭이는 현수막.
[기분이 저기압일 땐 고기 앞으로 가자!]
메인 메뉴인 스테이크 도시락.
[탄수화물: 단백질만 먹고 갈꾸야?]
디저트인 매운 떡볶이.
[지호를 위한 커피차가 왔지호~]
마지막으로 입가심을 위한 커피까지.
완벽한 삼위일체의 서포트였다.
드라마 촬영장을 전문으로 한다는 업체들답게 도시락과 떡볶이 등의 퀄리티도 굉장히 뛰어난 편이었다.
호로로로록.
“아, 맛있다…….”
호로로록.
방금 전까지 울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활짝 웃는 막내를 바라보며 조용히 웃었다.
지나가던 스탭들이 놀렸다.
“왕지호 울었대요~”
“저 안 울었어요!”
“지호 씨, 울다가 웃으면 어디에 털이 나는 줄 아나? 핫핫핫!”
“감독님. 저 떡볶이 먹고 있는데….”
젊은 스탭들부터 나이 든 중년 스탭들까지.
드라마 현장에서 부담감을 느끼는 지호와 다르게 스탭들이 굉장히 지호를 귀여워한다는 게 느껴졌다.
하기사 우리 애가 철이 없고 못나서 그렇지, 어디 가서 예쁨 받을 얼굴 아니던가.
“촬영장 분위기 좋네.”
“나쁘지 않네요.”
동생들과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애한테 못되게 굴면 어떡하나 싶어서 걱정하던 차였다.
뭐, 촬영장에서 어떤 사람이 주연 배우에게 못되게 굴겠냐마는…….
TNT에서 지금은 연기자로 활동 중인 지훈이로부터 아이돌 출신이 겪는 스토리를 여럿 들은 터였다.
-조명 감독이 대놓고 꼽 주더라. 다른 촬영장은 아이돌 팬들이 커피차 보내 주고 그러는데 지훈 씨는 뭐 없냐고.
그런 이야기 때문에 촬영장에 오진 못해도 커피차를 자주 보내 주고 그랬는데.
걱정이 기우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평소대로 돌아온 막내에게 비주가 말을 꺼냈다.
“지호야. 아까는 왜 울었어?”
“제가요? 전 운 기억이 없는데.”
눈을 가늘게 뜨는 형들에게 막내가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반창고가 붙은 손가락.
“손가락이 찔려서 눈물이 찔끔 나온 거예요.”
“고작 그걸로…?”
“고작이라니요. 열 손가락이 뱀한테 물리면 다 아픈 법이에요.”
“뱀한테 물리면 그냥 아프지.”
내 말에 중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어렸을 때 살모사한테 물려 본 적 있는데, 물리면 못에 찔린 것처럼 독니 자국이 생겨요.”
“…….”
“형은 시골에서 놀다 물려 본 적 없어요?”
“중현아. 제발 보편적인 감성을 가지도록 하자.”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우리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잠시만요.”
리혁이가 머릿속 속기록을 정리하고 말했다.
“얘가 손가락 아파서 울었다는 거짓말을 쳤을 때까지요.”
“뻥 아닌데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픈 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모습에 우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계속 놀려 대서 그런 걸까.
떡볶이를 우물거리던 막내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아, 그래요. 울었어요.”
이번에는 놀리지 않고 따스하게 물었다.
“왜 울었는데?”
“저도 그거까진 잘 모르겠는데… 막 그런 날 있잖아요. 그냥 가만히 있어도 서럽고 외롭고…….”
“있지.”
그런 날 있지. 엄청 많지.
지호가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오늘따라 머리도 아프고 몸도 무겁고… 그냥 새벽부터 차 타는데 눈물 찔끔 나더라고요. 그런데 촬영장에서 엎어지고, 갑자기 형들이 딱 보이니까…….”
“아아.”
“어떤 건지 알 거 아니에요. 형들도.”
“응.”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동생들과 눈빛을 교환했다.
“지호야.”
“넹?”
그러곤 다 같이 깔깔 웃었다.
“그래도 우린 넘어져도 안 우는데~!”
“으하하하하!”
“울었대요~! 완전 어린이다, 어린이!”
세상 싫은 표정으로 한숨을 쉬는 막내의 곁에 촐싹 달라붙어서 단체로 조잘거렸다.
“우리 막내 외로웠쪄요?”
“서러웠쪄?”
“야, 너 우리 없으면 큰일이다. 진짜.”
지호를 둘러싸고 에베벱 얼굴로 원을 그리는 모습에 지나가던 조연출이 커피를 뿜었다.
우리가 웃으며 인사했다.
“막내를 위한 우쭈쭈 관람열차예요.”
“왜 관람열차인 줄 아시나요? 바로 이렇기 때문이죠.”
네 명이서 얼굴로 빙글빙글 돌리며 웃자 조연출 분이 꺽꺽거리다 웃었다.
지호가 이마에 손을 올렸다.
“형들 집에 언제 가요?”
“안 갈 건데. 너 구경하고 갈 거야.”
“아니, 제가 진짜…….”
지호가 하- 숨소리를 내뿜었다.
“제가 여기 스탭 분들한테 형들 자랑을 얼마나 했는데… 형들 되게 빙구처럼 보여도 실제로 보면 대박이라고.”
“어차피 다들 안 믿었을 거잖아.”
“네, 그렇긴 한데… 아무튼! 좀 왔으면 멋지게 톱스타 흉내도 좀 팍팍 내 주고!”
이렇게 철딱서니 없는 형들의 모습을 기대한 게 아니라며 불평하는 지호.
떡볶이를 다 먹었는지 그릇의 국물까지 호로록 마시는데 마치 소주를 들이켜는 것 같다.
“에이! 진짜.”
그래도 기분은 좋아 보인다.
아까 전에 보았던 영혼 없는 동태눈과 달리 지금은 바다를 누비는 명태처럼 눈이 초롱초롱하니까.
“이제야 좀 살아 있는 사람 같네.”
“저 어디 안 좋아 보였어요?”
“너무 피곤해 보이더라.”
“형이 할 소리는 아닌 거 같은데, 형 작업실에서 일하는 거 보면 저보다 오천 배는 더 심해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려는데 졸개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정말 그런가?
핸드폰을 거울 삼아 바라봤지만 딱히 큰 차이는 모르겠다.
뭐. 막내 말마따나 점점 잠시 쉬어야 할 때가 다가오는 거 같긴 한데… 아직은 그런 때가 아니다.
“아무튼.”
지호에게 웃으며 말했다.
“힘든 거 있으면 평소에도 말하고 다녀. 촬영장에서 이만큼 힘들게 일하는 줄은 몰랐단 말이야.”
“근데 형들도 힘든 거 티 안 내는데, 제가 티 내는 건 좀 그렇잖아요.”
우리가 고개를 저었다.
“막내는 내도 된다.”
“그게 막내의 특권.”
지호가 맑게 웃었다.
“고마워요.”
“그래.”
“사실 이게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잖아요. 본업도 아닌데… 개인 활동으로 지장 줄까 봐 걱정 될 때가 많아서.”
그러더니 불현듯 자기 때문에 지장 있었던 적은 없냐며 묻는 말에 전혀 아니라고 답했다.
정말 아니었다.
“연기한다고 머리 염색하는 거랑 헤어스타일도 못 바꾸고. 그때마다 형들한테 너무 미안해서 고개 못 들겠고.”
“왜 미안해, 그게.”
“그래서 티를 못 냈어요. 낼 엄두가 안 나서.”
차분하게 말을 하는 지호가 오늘따라 어른스럽게 보인다.
그리고 보통 이럴 때면…….
“그런데….”
우수에 찬 눈동자로 허공을 바라보던 지호가 어딘가 짓궂은 눈으로 우릴 바라보았다.
“형들이 징징대도 괜찮다고 하니까 뭐 어떡하겠어요. 징징대야지.”
“…….”
“흐하핫! 저 그럼 이제부터 힘든 거 바로바로 말해도 돼요? 와, 진짜 갑갑하고 답답했는데…!”
“…….”
꺄르륵 웃어 대는 막내의 모습에 동생들과 함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언제 철 들어. 이놈의 거.’
‘전혀 성장하지 않았어….’
그래도 밝게 웃으며 방정을 떨어 대는 막내의 모습이 기껍긴 했다.
나도 정확히 이유는 말하기 힘들지만….
우리 막내는 평생 우리 막내였으면 좋겠다.
그냥 그렇다.
“자.”
촉촉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우리에게 지호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밥도 다 먹었으니까 제가 촬영장 구경시켜 줄게요!”
* * *
점심 식사 시간이 끝난 후.
배를 풍족하게 채운 <신이>의 스탭들과 인사를 나눴다.
“안녕하세요!”
“우와아아아-!”
함박웃음을 지으며 반기는 감독님들과 악수도 나누고.
스탭들, 보조 출연자들과도 함께 단체 사진을 촬영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어… 안녕하세요…….”
피골이 상접한 30대 작가가 우리에게 손을 흔들며 반겼다.
“자, 작가님?”
“안녕하세요….”
살짝 쉰 목소리.
<슬립>의 작가이자 이번 <신이>의 메인 작가인 배예진 작가님이었다. 우리 회사 산하 스튜디오인 LM과 전속 계약을 맺은 드라마 작가.
인사를 마치고 본인의 트레일러로 돌아가는 작가님의 모습에 내가 지호에게 물었다.
“지호야. 작가님의 상태가…?”
“아, 현장에서 머무르면서 대본 쓰세요. 아마 저보다 압박감이 한 10배쯤 될 거라서.”
“왜 작업실이 아니고 현장에서?”
“현장에서 직접 눈으로 봐야 안심이 되신대요. 이게 100억이 넘는 프로젝트잖아요.”
“아아…….”
우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넷플러스에서 통 크게 투자를 해서 회당 10억이 넘는 제작비가 들어가는 드라마였다.
국내 드라마는 ‘작가 놀음’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작가의 영향력이 크다.
드라마가 잘 되면 작가가 대본을 잘 쓴 덕이요, 망하면 작가가 대본을 이상하게 쓴 탓이요 하는 상황.
나 같아도 100억을 주고 ‘대본 써 보세요! 오호홋!’ 하면 잠이 안 오고 밥도 안 넘어갈 거 같다.
“이번이 우리 스튜디오 LM에서 하는 가장 큰 드라마거든요.”
지호가 설명했다.
“다들 진짜 혼을 갈아서 하고 있어요. 돈 들인 만큼 반드시 성과를 내야 하는 거니까.”
그래서 그런지 우리를 반기는 사람들이 많다.
“희한하게 뉴블랙이 촬영장에 찾아오고 나면 대박이 난다던데!”
“우리 모두 뉴블랙만 믿고 있어요. 뉴블랙이 고르는 대본이면 다 잘 된다면서요.”
“중현 씨, 마법의 책 없어요? 마법의 책?”
극도의 긴장 때문인지 ‘미신! 미신 믿을 거야!’ 하는 사람들이 중현이와 우리에게 몰려들었다.
불상처럼 인자하게 웃던 중현이가 젤리 성경을 펼쳤다.
“젤리젤리?”
“마법 젤리!”
다 큰 어른들이 마법 젤리 같은 요상한 단어를 외치는 진귀한 광경. 돈 주고도 못 볼… 아니 돈 줘도 안 볼래.
중현이가 책을 촤르륵 펼치며 손을 딱 짚었다.
[하늘의 별 따기]
“아아아아!”
“별 따기면 불가능하다는 거 아니야?”
그때 누군가 외쳤다.
“아니야! 저거 타로 점처럼 역방향을 보는 거랬어!”
“역방향…!”
이게 이렇게까지 진지해야 할 일일까 싶다가도… 내 어깨에 당장 100억이 얹어져 있으면 나도 저럴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의 재촉에 중현이가 역방향으로 책을 보여 줬다.
‘하늘의 별 따기’ 그 아래 적힌.
[짜잔. 그런데 별을 따 버렸습니다]
“으아아아아아!”
“된다!”
“될 거라고!”
갑자기 우릴 둘러싸고 ‘야야! 야야야야-!’ 하며 강강술래를 추는 이들과 섞여 같이 춤을 추었다.
그 뒤에서 조용히 웃는 감독님을 보아하니 일부러 이런 분위기를 조성한 거 같다.
“자자!”
분위기를 지켜보던 감독님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럼 우리 행운 요정들께서 주신 대박 메시지에 힘을 얻어서! 오늘 화이팅 가득한 기운으로 일해 봅시다!”
“아자! 아자! 화이팅!”
“신이! 대박 난다!”
슥 옆을 돌아보니 메이킹 영상을 찍는 제작사 측 직원들의 입가에 웃음이 걸려 있었다.
분량을 제대로 뽑은 듯했다.
스탭들의 기운을 북돋아준 감독님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오신 김에 슬레이트도 한 번 쳐 볼래요?”
“슬레이트요?”
“네, 대기하시는 동안 심심하실 텐데. 겸사겸사 비하인드에 쓸 만한 그림도 좀 만들고.”
“저희는 좋죠!”
다 같이 카메라 앞에 서서 슬레이트를 탁 치고 잽싸게 빠졌다.
다시금 시작되는 촬영.
자작나무 숲에서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으아악!”
“악!”
누런 일본군 군복을 입은 군인들과 게릴라처럼 차려입은 독립군이 서로에게 볼트액션 소총을 겨눈다.
아무 배경음이나 CG가 없어서 그럴까.
일견 굉장히 엉성해 보이지만 저런 장면이 나중에 어떻게 변하는지 시트콤 촬영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형들! 그럼 저도 찍고 올게요!”
“다녀와!”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던 막내가 촬영장으로 들어섰다.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는 스탭들.
지호 씨 오늘 따라 기분이 좋아 보인다는 누군가의 말이 귓가에 들려온다.
“저 여기 있어요!”
“알아!”
연신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드는 것도 잠시, 촬영이 시작되면서 표정부터가 싹 변했다.
전장에서 수십 년은 구른 베테랑처럼 누비는 지호.
“와…….”
거기에 부담스럽기 그지없는 카메라 클로즈업씬까지 잘 소화한다.
코앞에 카메라가 붙어 있어서 대사 치기 부담스러운데, 마치 앞에 누군가 있는 것처럼 대사를 치고.
“쟤는 진짜 저거 어떻게 할까요?”
칭찬에 박한 리혁이마저 혀를 내두를 만큼 대단했다.
“……어지간한 상상력으로는 안 될 거 같은데.”
“배우들이 다 돈을 많이 받는 이유가 있어.”
그중에서 우리가 가장 감탄한 장면은 바로 정체불명의 괴물과 싸우는 장면이었다.
나중에 CG를 입히려는 것인지 특수 수트를 입은 스탭의 머리에 장대가 달려 있다.
거기서 1미터쯤 위에 보이는 요상한 괴물 머리.
-저기 왜 괴물 머리가 효수되어 있는 건가요?
-효수가 아니고 괴물 CG 입히려고 만든 거예요. 저기가 괴물 머리인 거죠.
그러니까 머리에 막대기를 꽂은 상대 배우의 꼭대기를 바라보며 감정을 잡아야 하는 건데.
나 같으면 상대역이 ‘캬악!’ 하며 울음소리를 낼 때마다 웃음을 못 참을 거 같다.
그런데 우리 막내는 정말 눈앞에 괴물을 앞둔 것처럼 요리조리 피하며 눈빛에 한 점 흐트러짐이 없다.
“잘한다. 잘해.”
‘컷!’ 소리가 나자마자 쪼르르 달려온 막내에게 잘했다고 칭찬해 줬다.
“힘들진 않고?”
“하나도 안 힘들어요. 진짜 너무 재미있어요.”
그래 보인다.
연기가 엄청 재미있는지 행복하게 웃는 막둥이.
곧바로 또 다음 장면을 찍기 위해 총총 뛰어가는 모습이 귀여웠다.
“저기.”
조연출 분이 다가왔다.
“어떻게 의자라도 마련해 드릴까요? 계속 서 계시면 힘들 거 같은데.”
“괜찮아요.”
“오늘 촬영 끝날 때까지 계신다고 들어서.”
“중간에 아무데나 앉으면 되니까요.”
손님으로 와서 진 치고 있는 것도 좀 그렇지 않은가.
그냥 조용히 방해되지 않는 자리에서 구경했다.
-컷! 방금 표정 너무 좋았습니다. 다음 씬으로 넘어가기 전에 촬영장 정리 한 번 할게요.
치열하게 일하는 스탭들.
몇 번이고 구르고 또 구르는 출연자들.
땀을 훔치며 심호흡을 하는 막내.
숨 가쁘게 움직이는 현장에서 가만히 서 있으니 그런 생각이 든다.
“……뭐 도와줄 만한 건 없으려나.”
밥차와 커피차를 보내 주긴 했지만 그래도 뭔가 한 손 보태주고 싶다.
혼자 머리를 굴리며 ‘응원해 주기’, ‘저녁 사주기’ 등등을 생각하다가 불현듯 뭔가 떠오른다.
땀을 말리며 다가오는 지호에게 말했다.
“나중에 뭐 홍보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뉴블랙 TV에서 홍보를 한다든가, 아니면 뭐 카메오로 잠깐 나온다든가.”
분명히 가볍게 말한 것인데.
막내의 눈빛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형, 카메오요?”
“응?”
“카메오라고 한 거예요. 방금?”
“어… 응. 그런데?”
나중에 필요하면 한 번 부르라는 뜻에서 이야기를 한 것인데.
대화가 채 끝나기도 전에 지호가 감독님을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귓속에다 대고 뭐라고 속삭이자 감독님이 벌떡 일어났다.
“우주 씨?”
“네?”
“카메오로 나오고 싶다고요.”
“아, 네. 도움이 되고 싶어서 한 말이었거든요. 나중에 시간 괜찮을 때… 혹시 필요하시면…….”
“오늘 당장 찍읍시다.”
감독님이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네?”
어딘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분위기에 동생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날 바라보며 비웃을 뿐이었다.
“아니, 감독님. 오늘은 제가 준비가…….”
“준비는 우리가 합니다!”
“그…….”
“우주 씨가 괜찮다면 오늘 당장 해야죠! 시간이 언제 날 줄 알고!”
그 옆에서 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제안에 내가 답했다.
“매니저 형이랑 이야기도 하고.”
“그럼 이야기 하고 오시죠!”
원석이 형을 통해 의견 교환을 거치고 출연이 성사됐다.
이렇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진행되는 게 맞나 싶은데, 뭐 카메오 출연이니 큰 상관은 없겠지.
치열한 전투를 목격하는 나무꾼 1 정도라든가.
…라고 생각할 때였다.
“예?”
피곤한 얼굴로 트레일러에서 나온 배예진 작가님이 즉흥 카메오가 성사되었다는 말에 고개를 획 돌렸다.
감독님에게 확인하듯이.
“우주 씨를?”
“네.”
“우리 드라마에 카메오로?”
“네!”
“…….”
배예진 작가님의 구부정한 허리가 스스슷 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흐리멍텅한 눈에 들어오는 총기.
손목에서 머리끈을 빼낸 작가님이 떡진 머리를 가볍게 둘러 묶고는 우리에게 소리쳤다.
“딱 30분만 기다려요! 대본에 새로운 내용 추가하게! 그리고 지호 씨랑 감독님!”
“네!”
“의논하게 안으로 들어오세요!”
“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얼굴들.
“……?”
우당탕탕 트레일러로 들어가는 삼인조를 멍하니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하자, 주변에서 졸개들의 웃음이 날아들었다.
뭐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 * *
정확히 30분 후.
작가님이 갓 만들어 낸 따끈따끈한 대본을 가지고 온 막내가 말했다.
“형을 위한 배역이 탄생했어요.”
“그, 그렇구나.”
“근데 배역 자체가 엄청 대단히 중요한 배역이 아니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요. 진짜 부담 하나도 없이 하면 되는 카메오!”
지호가 말했다.
“제가 작가님한테 말씀을 드렸거든요. 갑자기 카메오라고 해도 분량이 많거나 그러면 저 형이 부담스러워한다. 시청자들도 저 얼굴을 보고 부담스러워한다. 주연 배우인 제 미모를 해치니 오래 나오면 안 된다.”
“오오오!”
“그래서 정말 굵고 짧게 치고 가는 카메오 배역을 만들었습니다. 부담 하나도 가질 필요 없어요. 정말.”
그런데….
대체 무슨 배역이기에 이렇게 앞에 말이 긴가 싶다.
“그래서 무슨 배역인데…?”
“짜잔.”
막내가 대본을 눈앞에 착 내밀었다.
“대사가 있는 독립군 배역이에요!”
“에라이!”
독립 열사라니.
연기 못하면 두고두고 욕을 먹는 배역이 아닌가.
그게 뭐가 쉽냐고 눈으로 욕을 하는 나에게 막내가 화사하게 웃으며 물었다.
“형.”
“응?”
“그럼 일본군 할 거예요?”
“……도, 독립군 할래.”
그리하여 나의 즉흥 카메오 배역이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