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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757)화 (757/1,031)

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757화

이상한 이야기에 눈을 치켜 떴다.

“아빠 이야기라고?”

“응.”

“정확히 어떤 용건인지 말 안 해 줬어?”

“직접 만나야만 말해 줄 수 있다나 봐.”

가만히 테이블만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미국 로펌 쪽에서 연락이 왔는데 그게 아빠와 관련된 이야기라고 한다.

도무지 영문을 알 수가 없다.

아빠가 돌아가신 지 거의 20년이 다 되어 가는 와중에 법적인 문제로 할 이야기가 또 무엇이 있는지.

“아.”

석환 형이 보충 설명을 해 줬다.

“정확히 말하자면 너를 만나고 싶다는 쪽이 로펌은 아니야. 로펌 쪽은 보증인 역할이야. 너를 만나려고 하는 사람들이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자기들이 보증한다고.”

“……그래?”

미국에서 짧게 활동하면서 깨달은 것 중 하나는 바로 저 나라가 신용에 굉장히 예민하다는 점이다.

저기서 말하는 보증이라는 것은 손해가 발생할 시 내가 책임을 지겠다는 말과도 같다.

그러니 신원이 보증된 사람들이긴 할 것이다.

“형은 어떻게 생각해?”

“글쎄. 아마 나라면 만나 보긴 할 거 같은데…….”

사실 처음부터 답은 결정된 문제였다.

“만나볼래.”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신에 약속 장소는 회사로 잡아줘.”

*   *   *

뿌우우우!

“생일 축하해요! 형!”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당신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펑! 펑!

폭죽이 터지면서 색색의 종이들이 뿌려졌다.

“흐하하하!”

화려한 꽃들로 꾸며진 연습실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꽃밭이로구나. 꽃밭이야.”

“마음에 들어요?”

비주가 눈을 반짝였다.

“일부러 형이 좋아하는 꽃들로 골랐거든요.”

“향기가 너무 좋다.”

“가짜 꽃이에요.”

“으음~ 향기가 좋은 가짜 꽃이구나.”

꽃향기를 맡는 척하면서 머쓱한 얼굴을 숨겼다.

지금은 밤 12시 정각.

정확히 내 생일인 11월 9일이 되자마자 졸개들이 준비해 준 생일 파티였다. 사방에 꽃이 가득해서 웨딩홀에 온 듯한 느낌.

“형.”

막내가 자기 머리에 리본을 하고 말했다.

“축하해요. 제가 바로 형의 생일 선물이에요.”

“…….”

“존재만으로도 형의 기쁨이 되어 주는 귀염둥이 막ㄴ….”

“반품.”

옆에서 같이 리본을 하고 있던 리혁이가 리본을 풀고 아닌 척했다.

내가 웃으며 물었다.

“너희 생일 선물 준비 안 했지?”

“안 했을 거 같아요?”

리혁이가 발끈하며 생일 선물들을 한 보따리 내밀었다.

“여기 이렇게 선물을 준비해 놨는데!”

“고마워.”

“엇… 뭐, 그래요.”

편지는 안에 동봉되어 있다는 말에 웃었다.

그걸 시작으로 졸개들이 건네주는 선물들을 하나씩 품에 챙기며 웃었다.

쉴 새 없이 반짝이는 핸드폰.

가까운 곳과 먼 곳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축하 메시지에 소소한 행복을 느꼈다.

“형! 케이크요!”

“자르자.”

리혁이가 과학적으로 계산한 각도로 케이크를 예쁘게 5등분으로 잘랐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한밤의 생일파티가 진행되는 한편.

가만히 케이크를 들여다보며 깨작거리는 날 발견한 리혁이가 물었다.

“왜 그래요?”

“응?”

“보통 생일날이면 되게 어린애처럼 방방 뛰고 그랬잖아요. 오늘따라 좀 조용해 보이는데.”

리혁이의 말에 모두가 케이크를 먹던 포크를 내려놓고 날 바라보았다.

“그게…….”

석환 형이랑 나누었던 대화에 대해 자초지종 설명했다.

아직 할머니한테만 알려 준 것이긴 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도 어차피 해 줘야 할 이야기였다.

“그래서 하루 종일 신경이 쓰이더라고. 중요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어쩌면 정말 별일 아닌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어느 쪽인지 하나도 감이 안 잡히네.”

“음…….”

비주가 웃으며 말했다.

“좋은 소식인지 안 좋은 소식일지 모르겠다는 거죠?”

“네.”

“제 생각에는 좋은 소식일 거 같아요.”

“……?”

고개를 갸웃하는 나에게 비주가 말했다.

“로펌의 보증까지 받을 만큼 신중하게 접근하는 사람들이잖아요. 형 생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고요. 저라면 안 좋은 소식을 전할 때 굳이 누군가의 생일은 피할 거 같아요.”

“아, 일리가 있네.”

그 말을 끝으로 내가 다시 생각에 잠길 때.

중현이가 물었다.

“형.”

“응?”

“내일 혹시 형이 괜찮다면 자리에 같이 있어 줄까요?”

“그럼 좋지.”

같은 편이 있으면 든든하니까.

다른 동생들도 같이 있어 주겠다고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리혁이가 물었다.

“그런데 법률적인 문제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경험이 많은 어른들에게 같이 배석해 달라고 부탁하는 건 어때요?”

“그래.”

외부의 도움을 얻자는 말에 내가 웃으며 말했다.

“도움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   *   *

회사 3층 대회의실.

“…….”

“…….”

우글우글.

바글바글.

“…….”

사람들로 복작거리는 주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삼대장처럼 앉아 있는 조규환 이사님, 박규호 대표님, 그리고 본부장님.

석환 형과 우리 TF팀 직원들.

그리고.

“저 대표님.”

“음?”

내가 소곤거리며 깐깐해 보이는 정장 남자들을 가리켰다.

“저분들은 누구신가요?”

“우리 회사와 계약한 법무법인이야. 회사에 법률적인 문제가 생길 때마다 자문해 주는 사람들.”

“그, 그렇군요…….”

악플러들 고소할 때도 저 법무법인을 통해서 한다나.

뭔가 일의 스케일이 내 생각보다 너무 커져 버려서 당혹스럽다.

내가 리혁이를 쿡 찌르며 속닥거렸다.

“너 대체 몇 명을 부른 거야…?”

“대표님이랑 이사님한테만 말씀을 드린 건데… 이렇게 많이 불러오실 줄은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요?”

“아무리 그래도 이건 조금 과하지 않아?”

“그건 아니죠.”

우리 메인 보컬이 후후 웃었다.

“전쟁의 기본은 머릿수거든요. 물량과 머릿수로 압도하는 게 바로 병법의 기본이에요.”

우리가 언제부터 전쟁을 하고 있는 걸까.

삼엄하게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인의 장막을 바라보며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할지, 부담스럽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니, 고맙긴 한데…….

사람을 너무 과보호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였다.

“1층에서 연락 왔습니다!”

TF팀 직원이 말했다.

“올라오고 있대요.”

“그럼 준비하지.”

대표님을 시작으로 모두가 근엄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오네요.”

중현이가 후우 하며 심호흡을 하고 있을 때.

마침내 달칵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들어왔다.

들어온 사람은 셋이었다.

「음?」

가장 맨 앞에 있는 것은 느긋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노인.

지팡이를 짚고 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인데, 허연 곱슬머리와 허연 수염이 인상적이었다.

「이렇게 환대를 해 줄 줄은 몰랐는데.」

회의실에 바글거리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노인이 껄껄 웃었다.

그 옆에서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자, 그리고 지적인 인상의 여자가 서 있었다.

「여기는 내 비서와 로펌에서 온 변호사입니다.」

각자 앤드루와 클라우디아라고 말한 이들이 소개를 마친 후.

노인이 자기소개를 하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아서 앤더슨이라고 합니다. 우주 씨.」

「반가워요. 앤더슨 씨.」

내가 인사를 마치자 근처에 서 있던 대표님도 자신을 에이전트라고 소개하며 손을 내밀었다.

차례대로 인사가 오간 후.

「이것 참. 손님이 많군요.」

아서 앤더슨이 턱수염을 매만지며 웃었다.

「하기야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이 나라 최고의 가수를 만나자고 했으니 이 정도 인원은 당연할 수밖에…….」

우리 측에서 조규환 이사님이 대표로 말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해하고말고.」

노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내가 상황을 이해하는 것과 선명주 씨의 부탁은 별개이지 않겠습니까? 내가 받은 부탁은 ‘개인적으로’ 전달을 해 달라는 거였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참관하는 현장이 아니라.」

그러고는 차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어도 될까요? 우주 씨?」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이내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   *   *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간 회의실.

문틈을 통해 빼꼼히 보고 있는 동생들에게 괜찮다고 손을 흔들어 주고는 맞은편의 노인을 바라보았다.

「음.」

목을 축인 아더 앤더슨 씨가 말했다.

「우선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내 소개를 하지요.」

「네.」

「나는 아주 특별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입니다. 비유하자면 금고지기 같은 사람이지요.」

앤더슨 씨가 깍지를 꼈다.

「물론 평범한 금고라고는 할 수 없지요. 특별한 손님들을 위한 특별한 금고를 제공해 드리고 있으니까.」

그의 설명은 이러했다.

의뢰인이 물건을 건네주면 무슨 일이 벌어져도 안전하고 무사하게 보관을 해 준다고.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어딘가 모르게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악당처럼 음험해 보이다가도 굉장히 지혜로워 보이기도 하고.

「귀하의 아버님도 우리 고객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인 1997년에 찾아와 물건들을 맡기셨지요.」

「아버지가 무슨 물건을 맡기셨나요?」

「그건 알 수 없습니다.」

앤더슨 씨가 답했다.

「그게 바로 규칙이니까요. 물건이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 그저 계약사항을 준수할 뿐입니다. 예컨대 일주일에 한 번씩은 환기를 시켜 줘야 한다거나, 안전한 상자에 보관해야 하는 것이거나.」

「그렇군요.」

「어찌 보면 당연한 규칙이지요. 무엇인지 몰라야 비밀을 지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넉살맞게 웃던 노신사가 본론으로 돌아왔다.

「귀하의 아버님께서는 물건을 맡기면서 독특한 조건을 걸으셨습니다. 물건을 20년 넘게 찾아가지 않는다면 자신의 신원을 확인하고, 이 물건들을 자신의 직계 가족에게 전달해 달라고.」

「‘신원을 확인한다’고요?」

「예. 계약사항으로 인해 저희도 계약자 분의 신원을 특정하지 못합니다. 선명주 씨의 물건이란 건 우리도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지요.」

굉장히 비밀스러운 회사란 생각만 든다.

평소처럼 일상을 살다가 갑자기 이런 이야기들을 들으니 내가 살던 세상과 조금 다른 곳에 온 듯한 느낌.

「아무래도 조금 당혹스러우신 모양이군요.」

「저 같은 사람한테는 낯선 이야기라서요.」

「그리 난해하게 여길 필요 없습니다. 스위스 은행과 같은 곳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사실 우리가 제공하는 서비스와 그리 큰 차이는 없으니.」

눈을 찡긋한 앤더슨 씨가 내게 물었다.

「그럼 이제 물건을 전달해 드려도 될는지요?」

「네.」

그가 턱짓을 하자 비서가 특수 잠금장치가 된 가방을 열어 내게 상자들을 건네주었다.

박스 두 개 분량의 물건이었다.

내용물을 살펴보려고 하는 나에게 노인이 다급하게 손짓했다.

「개봉은 우리가 나가고 나서 해 주시길.」

「네.」

「그리고 사인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물건을 잘 수령했다는 확인서에 서명을 하자 아서 앤더슨 씨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걸로 용건은 끝이군요. 짧은 만남이지만 즐거웠습니다. 손녀가 뉴블랙의 팬이거든요.」

활동을 응원한다며 웃던 이가 명함을 내밀었다.

「혹시 물건을 맡기시거나 다른 의뢰가 있다면 이곳으로 연락 주시길. 아버님께서 얻은 회원 자격은 아직도 유효하니까요.」

「감사합니다.」

용건은 이게 전부라는 듯 쿨하게 자리를 떠나는 사람들.

회의실 앞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에게 잠시 시간을 달라고 하고는 홀로 회의실에 남았다.

꿀꺽.

“…….”

침을 삼키고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심장이 떨려온다.

콩닥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상자를 개봉했다.

“음?”

두 박스 중 첫 번째 상자에는 직사각형의 물건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2017년에는 보기 힘든 물건.

“비디오테이프?”

상자 하나가 잘 보관된 비디오테이프들로 가득했다. 상자 맨 위부터 아래까지 빼곡히 쌓인 테이프.

그리고.

두 번째 상자에는 내가 예감한 것들이 담겨 있었다.

“세상에…….”

보관이 잘 됐는지 변색이 덜 된 종이들이 가득했다.

휘갈긴 아빠의 손글씨.

음표들.

지금까지 세상에 나온 적 없는 악보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

멍하니 그걸 바라보고 있을 때.

문이 빼꼼 열리더니 석환 형이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

“……형.”

“왜 그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침을 꿀꺽 삼키고는 매니저에게 물었다.

“형, 혹시 비디오테이프 기계를 구할 수 있을까?”

우선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필요가 있었다.

*   *   *

비디오테이프 기계는 다행히도 금방 구할 수 있었다.

철컥.

오래된 비디오테이프 기계에 ‘#1’이라고 적힌 테이프를 넣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잠시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해요. 별일은 아니고 확인을 해야 할 게 있어서.

내 표정이 심각하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다들 별말 없이 물러나 주었다.

내 개인 작업실.

작업실로 굴러들어온 움직이는 TV에 비디오 기계를 연결했다.

급작스럽게 사건들이 몰아닥쳐서 그런 건지, 아직도 현실감이 하나도 없는 기분이었다.

파츠츠츠.

노이즈와 함께 영상이 재생됐다.

[음음.]

카메라를 바라보던 절세의 미남이 헛기침을 하고 있었다.

창가 너머로 동유럽으로 보이는 배경이 눈에 띄는데, 아마 연습실에서 녹화를 한 모양이다.

[어…….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네. 아들. 안녕?]

아빠 안녕.

입술을 오므리며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이 영상을 보고 있다는 건 아마도 내가 서기 2017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겠지?]

한숨을 내쉰 아빠가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기왕이면 우주 네가 이 영상을 볼 일이 없으면 좋겠지만… 사람 일은 정말 모르는 거니까. 세상일이란 게 참…… 하하, 나는 오래 살고 싶은데 말이야.]

심란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던 아빠가 이내 밝게 웃었다.

[아무튼 우리 아들 생일 축하한다! 20년 후에 보게 될 거니 아마 스물다섯이겠네? 지금 다섯 살이니까.]

“…….”

[어때? 여자 친구는 좀 생겼니? 내 아들이 어디 가서 꿀릴 일은 없을 텐데.]

“없어요. 없어.”

[그래도 너무 방탕하게 살지 말고. 아빠처럼 좋은 사람 만나서 빠르게 정착하는 것도 좋아.]

나도 모르게 웃음이 작게 나왔다.

이미 녹화된 것이란 걸 알면서도 대답하게 된다.

[밥은 잘 먹고 다니니?]

“네.”

[야채 좀 많이 먹고. 아빠가 요새 너를 보는데 고기만 먹고 야채를 잘 안 먹더라. 채소를 먹어야 사람이 건강해지는 법이거든. 다섯 살이면 괜찮지만 스물다섯은 그러면 안 돼.]

“알았어요.”

[근데 뭐 나도 안 먹으니까. 하핫! 명은이한테 맨날 혼난다.]

방정맞게 웃던 우리 아빠가 안경을 벗고 카메라 각도를 움직였다.

[잠시만… 됐다.]

뭘 하려는 걸까 궁금해할 때쯤 카메라 시야에 피아노가 들어왔다.

[우리 아들 생일이니 일단 생일 축하곡을 연주해 줘야겠지.]

피아니스트 선명주로 변한 아빠의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 위를 미끄럽게 움직였다.

처음 듣는 음악이었다.

잔잔한 재즈 음악인데 마치 배경 음악처럼 드럼과 첼로, 클라리넷 등의 소리가 환청처럼 어우러지는 듯했다.

난생처음 보는 아름다운 색채가 내 눈앞을 장식했다.

[오케이. 몸 좀 풀렸고.]

리듬을 타며 고개를 까딱이던 아빠가 본격적으로 연주를 시작했다.

부드러운 재즈 특유의 리듬을 타고 피아노 소리가 조용한 작업실에 울려 퍼졌다.

작고 소박한 것들을 시(詩)처럼 노래하는 느낌.

이 세상 작고 소박한 것들이 하늘에서 차분하게 내려오는 인상을 주고 있는 곡이었다.

내게 제목을 지으라고 한다면 아마도.

[Snowy Day.]

“눈이 내리는 날.”

동시에 말이 나왔다.

음악인들끼리 통했을 때 느껴지는 특유의 감각에 미소가 맺혔다.

[어때. 마음에 드니?]

“네.”

[오전 1시 11분. 네가 태어난 날에 눈이 펑펑 내렸거든. 그날 어찌나 세상을 다 얻은 거 같던지……. 그날은 바빠서 아무 생각도 못 했는데, 어느 눈 내리는 날에 그 생각이 딱 들더라.]

일전에 프랑스의 피아니스트 폴 로랑에게 이야기를 들었던 Snowy Day가 바로 이 곡인 거 같다.

피아노의 건반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던 아빠가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실제로는 카메라를 바라보는 것이겠지만.

왠지 모르게 세월을 거슬러 정말 맞은편에 있는 나를 바라보는 것 같다.

[지금 아마 이 영상을 보고 있어서 당황스럽지? 왜 갑자기 이런 영상으로 생일 축하를 하는 건지.]

“……네.”

[음… 아빠는 부모님이 아주 어릴 적에 돌아가셨어. 정말 부지불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작별을 할 시간도 없었고. 그게 평생 마음에 걸리더라. 작별을 미리 해 두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

[물론 아빠랑 엄마는 항상 네 곁에 있겠지만, 정말… 어떤 불가피한 상황이 닥친다면…….]

아빠가 심호흡을 하고는 웃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작별 인사를 준비해 봤어. 미국에서 알게 된 친구가 안전한 금고를 하나 소개해 줬거든. 아마 이걸 보고 있다는 건 그 사람들이 보관을 잘했다는 거겠지.]

“응. 그런 거 같아요.”

[일단 20년이란 기간을 정해 두긴 했다만 혹시 몰라서 찍어 뒀어. 아마 그 전까지 내가 살아 있을 확률이 99퍼센트는 되긴 한데… 만약의 상황이라는 건 정말 모르는 거니까. 내 아들과 성인 대 성인으로 대화를 나눌 기회는 절대 놓칠 수 없지.]

그러곤 무언가 성가시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 도둑놈들이 어찌나 많은지. 악보들도 안전한 곳에 보관을 해야겠더라. 어차피 지금은 써먹지도 못하는 것들이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 90년대 신문을 보면 아빠 집에 그런 귀중품을 노린 강도들이 자주 찾아들고 그랬으니까.

그런 이야기를 차분하게 풀어 놓던 아빠가 조용히 웃었다.

[우주야.]

“응.”

[아빠랑 엄마가 정말 미안해. 같이 있어 주지 못해서.]

그러면 안 되는데 눈물이 터져 나왔다.

한참을 울었다가 다시 영상을 틀었다.

[울지 말고.]

“안 울어.”

[넌 엄청 잘 울더라. 목청이 얼마나 좋은지… 가수 시켜도 되겠어.]

코를 훌쩍이며 TV를 바라보고 있을 때.

[우주야.]

“응.”

[아빠는 사후 세계를 안 믿어. 그래서 지금 살고 있는 삶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

“…….”

[하지만 우주의 섭리는 믿어. 흙에서 나온 영양분이 아주 작디작은 사람의 씨앗에 들어가고, 그 씨앗이 언젠가는 다시 흙으로 돌아가고. 지구가 별에서 온 물질로 만들어졌다는 건 알고 있니? 우리 모두 따지고 보면 우주에서 와서 다시 우주로 돌아가는 거니까.]

장황하게 말하던 아빠가 웃었다.

[어떤 일이 벌어지든 언제나 아빠는 이 행성에서 너와 함께 있는 거야.]

“…….”

[그러니까… 사랑한다. 내 아들.]

카메라를 향해 손을 올리는 아빠에게 다가가 손을 올렸다.

잠시 그 상태로 눈을 감은 후.

“…….”

‘#1’에 이어서 ‘#2’라고 적힌 테이프를 틀었다.

내게 전하는 아빠와 엄마의 메시지로 가득했다.

인생에 대한 조언들.

보증은 서지 말라. 보험은 꼭 들어라. 부모님이 살면서 경험했던 조언들이 담긴 테이프.

그런 식으로 조용히 테이프를 하나하나 감상할 때였다.

‘#7’이라 적힌 테이프에서 아빠가 말했다.

[…그리고 아들. 미안한데 아빠가 부탁이 하나 있어.]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이던 아빠가 내게 말했다.

[혹시 작은 공연을 하나 열어 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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