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780화
67장. Question
몇 주 만에 돌아온 뉴욕은 완전히 크리스마스 분위기였다.
“여러분! 이거 보세요!”
셀프캠으로 뉴욕시의 연말 풍경을 비췄다.
“We wish you a Merry Christmas~ We wish you a Merry Christmas~”
캐럴을 신나게 부르다가 왠지 모르게 허전해서 관뒀다.
보통 이쯤이면 화음을 같이 맞춰 줄 졸개들이 나오는데 오늘은 나 혼자였기 때문이다.
뭐. 지나가는 뉴요커들이 나를 바라보며 이상한 표정을 짓기도 했고.
“동생들이 없어서 엄청 허전하네요. 아. 동생들 없이 외롭게 브이로그를 찍는 저의 마음…….”
“너무 행복해 보이시는데요. 우주 씨.”
민기 형의 말에 어허! 하며 말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동생들이 없어서 너무너무 불행한 것이에요. 저의 하루는 너무나 불행하고… 음? 근데 이건 무슨 냄새예요? 피자 냄새 같은데?”
“피자 맞는데.”
“우리 피자 먹을까요?”
매니저들과 피자 가게에 들러서 간단하게 요기를 했다.
“너무 행복해 보인다. 우주야.”
“가끔은 이렇게 서로 떨어져 지내는 시간도 좋은 거 같아요. 그래야 서로의 소중함을 깨닫지 않을까.”
“그래서 지금 깨닫고 있니?”
“아뇨. 아직.”
다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잠깐 육아에서 해방된 심정이에요.”
길치라서 어디로 사라질지 모르는 아이.
비둘기 보면 쫓아가는 아이.
뉴욕의 비위생적인 시설을 볼 때마다 헛구역질을 하는 아이.
“지호는?”
“지호는… 지호잖아요.”
“아. 뭔지 알 것 같아.”
“제가 그 기운을 감당 못해요. 에너지가 너무너무 넘쳐서.”
방전된 체력도 30분만 자면 충전되는 리트리버처럼 무한 체력을 가진 우리 막내까지.
주의 깊게 살펴야 할 동생들이 없으니 맏형의 어깨는 가벼울 따름이다.
“네. 뉴블랙 TV 구독자 여러분, 오늘 저는 온전히 저만의 하루를 즐겨 보려고 합니다. 오직 저만 생각할 거예요.”
녹음 스튜디오로 향하기 전까지 온전히 나만의 자유를 즐기기로 결정했다.
일단은 이 피자부터!
토마토소스와 치즈가 근사하게 어우러진 피자를 한 입 베어 먹고는 매니저들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거 포장은 안 되겠죠?”
“왜, 녹음하시는 분들 가져다 드리게?”
“아뇨. 너무 맛있어서요. 애들 사다 주면 좋아할 것 같은데, 서울까지 가져가는 건 좀 무리수겠죠?”
다들 나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 * *
『 우주의 뉴욕 방문기 Ep.1 』
피자 가게에서 나온 우주.
르블랑의 꽃무늬 마스크를 착용하고 걸어가자 뉴요커들이 흠칫하고 돌아보는 장면들이 나온다.
중간에 ‘I know you’ 하면서 쿨하게 인사하는 사람들도 나오고.
우주 : 그럼 저의 하루를 즐겨 보겠습니다!
곧바로 깔리는 인간극장 내레이션.
[오늘 하루는 자신만을 위해 살겠다고 선언한 K장남.]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그마한 서점에 들른 우주가 무언가를 바라보는 장면에 매니저가 웃음을 참고 묻는다.
매니저 : 지금 뭐 하고 계신 건가요?
우주 : 아. 이거 리혁이가 좋아할 것 같아서요. 뉴욕시 역사가 담긴 팝업북인데 전에 프랑스에서 사 준 팝업북이랑 같은 출판사네요.
매니저 : 13세 이하 어린이 추천이라고 되어 있는데요?
우주 : 딱 리혁이 취향이죠.
서점에 들려 리혁이 좋아할 만한 책들을 집고.
슈퍼마켓에서 중현이 좋아할 만한 미국의 간식거리들을 집고, 비주에게 줄 크리스마스 스웨터를 산다.
우주 : 장난감 가게다!
매니저 : 야야. 쟤 뛰어 간다! 우주야, 같이 가야지!
우주 : 지호가 사고 싶다고 한 피규어가 저기 있어요! 저거 한정판이라고 했는데…!
매니저들 : (웃음)
장난감 가게까지 들러서 양손에 봉투를 주렁주렁 들고 있는 우주가 어기적어기적 걷는 모습에 다들 웃는다.
그 위로 방금 전 ‘나만을 위해 살겠다’ 하는 장면이 흐릿하게 겹쳐 나왔다.
[정은 주지 않을 것이다 by 선우주]
봉투를 든 우주에게 매니저가 묻는다.
매니저 : 그런데 나머지 하나는 뭐야? 네 거 샀어?
우주 : 아. 장난감 가게에서 산 건데요. 친구 줄 거예요.
매니저 : 친구?
우주 : 현조요. 걔가 요술봉 좋아하거든요. 이거 누르면 불도 들어와요.
큰 웃음을 터뜨리는 매니저들.
아이돌 팬들 사이에서 [요술봉 좋아하는 이현조(25세)] 라는 짤을 퍼지게 만든 선우주의 브이로그였다.
* * *
오늘 하루, 나만을 위한 시간을 보낸 후.
뉴욕 시 브로드웨이에 있는 녹음 스튜디오를 찾았다.
「안녕하세요!」
오케스트라가 녹화해도 될 만큼 어마어마한 크기의 스튜디오에서 악기를 조율 중인 연주자들.
「선의 아들이 왔군!」
‘Son of Sun’하며 언어유희를 하는 이들에게 웃으며 봉투를 들어 보였다.
「간식거리 사 왔는데 드실 분?」
「나요! 나!」
흥겹게 간식 봉투들을 받아드는 연주자들.
레인보우 베이글, 케이크 등을 꺼내드는 이들을 바라보고는 다시 한번 인사를 나눴다.
「다시 한번 뵙게 됐네요. 로스 선생님.」
「윈스턴이라고 부르게.」
오늘 앨범의 전체적인 자문을 맡아준 전설적인 색소폰 연주자이자 재즈계의 거장 윈스턴 로스.
그를 시작으로 오늘 녹음에 참여할 아티스트들과 악수를 나눴다.
머리를 풍성하게 늘어뜨린 흑인 여성이 그윽한 미소를 띠며 손을 내밀었다.
「카밀라 베이커. 내 동생 어슬러가 당신 아버지와 같이 투어를 다녔죠. 만나서 반가워요.」
「참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빠와 함께 마지막까지 공연을 다녔던 연주자의 가족이었다.
재즈 색소폰 연주자 중에서 최고로 꼽히며 이 자리에서 윈스턴 로스 선생님 다음으로 짬이 있는 분이다.
「채드 오웰입니다. 비브라폰을 담당하고 있죠.」
「레이먼드 어윈. 드럼입니다.」
「이 간식 진짜 끝내주네요. 7번가에서 사 온 건가요? 아, 트롬본을 맡고 있는 CJ입니다.」
아무래도 재즈라는 음악 특성 때문인지 보통 미국 거리에서 보는 인종 구성과는 달랐다.
백인들이 더 많은 거리와 다르게 과반수가 흑인인 스튜디오.
노래하듯이 말을 하는 이들과 웃으며 간식거리를 즐기는데, 가슴속으론 심장이 콩닥콩닥하다.
석환 형에게 속삭였다.
“저분 그래미 어워즈 수상자야.”
“그래?”
“응, 음악 잡지랑 교과서에서 최신 트렌드로 보던 분들이 다 여기에…….”
아마 브이로그에 자막을 깐다면 그 밑에 이런 타이틀들이 깔리지 않을까.
[그래미 수상자]
[명예의 전당 헌액자]
[재즈 어워즈 공로상]
어지간한 재즈 연주자는 여기에서 한가롭게 음료를 들이켜는 이들 앞에 바짝 굳어 있을 만한 라인업이었다.
그래도 대화는 어렵지 않았다.
우리 아빠라는 공통 주제가 있었으니까.
「그래서.」
‘So’ 하며 윈스턴 로스가 내게 고개를 기울였다.
「폴이 말하기를, 자네가 이번에 올림픽에서 명주의 곡을 연주한다면서?」
「네.」
올림픽이란 말에 연주자들이 축하 인사를 건넸다.
「무슨 곡을 연주하나?」
「고민 중이에요. 워낙에 좋은 곡이 많아서 딱… 적절한 곡이 있으면 좋을 거 같은데…….」
누군가 끼어들었다.
「선명주 선생님이 명곡이 진짜 많긴 하죠!」
곧바로 왁자지껄해지는 사람들.
「맞지.」
「나는 개인적으로 이번에 공개된 It’s Swing Time이 마음에 들던데. 올림픽에서 공연하기엔 좀 그런가?」
「올림픽이잖아. 진중한 맛이 있어야지.」
저마다 이 곡이 좋다, 저 곡이 좋다 하면서 토론이 오갔다.
피아노 앞에 앉아서 ‘이 곡이 좋지!’ 하거나 혹은 색소폰을 불면서 ‘이거지’ 하면서 연주들이 이어진다.
자기 일처럼 고민해 주는 사람들과 함께 나도 같이 고민에 잠길 때.
‘내 이야기 좀 들어 봐’ 하듯이 색소폰 연주가 흘러나오면서 모두의 시선이 옮겨 갔다.
「다들 성격도 급하긴.」
색소폰 리드에서 입술을 뗀 카밀라 베이커가 수다를 떠는 아저씨들을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일단 녹음부터 끝내고 생각하자고. 아직 미공개 곡도 남아 있잖아. 미공개 녹음을 완성한 다음에 결정하자고.」
「그렇지.」
사람들이 수긍을 하면서 곧바로 녹음 준비에 들어갔다.
각 악기 연주자들이 저마다 자리로 돌아간 후 나는 윈스턴 로스와 함께 컨트롤 룸으로 이동했다.
유리 너머로 헤드폰을 낀 연주자들이 즉흥연주로 흥을 돋우고 있다.
“이건 무슨 곡이야?”
감탄한 얼굴로 묻는 석환 형에게 답했다.
“따로 없어. 그냥 즉흥 연주야.”
“이게…?”
“진짜 대단하지 않아? 숨 쉬는 것처럼 이런 연주가 나온다는 게.”
“대단하다. 난 이미 있는 곡인 줄 알았어.”
연주자들의 손가락이 춤을 출 때마다 음표가 허공에 아름답게 떠돌아다니는 기분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연주자들이 만드는 화음은 그 정도였다.
「그럼 시작할까요?」
엔지니어의 말에 연주자들이 연주를 뚝 멈춘다.
윈스턴 로스가 ‘OK’ 하면서 지팡이를 짚고는 내게 시선을 돌렸다.
「자네가 등장할 타이밍이네, 선의 아들.」
「네.」
콘솔 위의 토크백 버튼을 눌렀다.
그러고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악보를 바라보았다.
「첫 번째 곡입니다. Tik Tok. 시계가 째깍째깍 할 때 나오는 그런 소리를 형상화한 곡인데요. 남녀 간의 연애 관계에 대해 쓴 곡입니다. 사랑을 고백할 때의…….」
오늘 내가 하는 역할은 곡들에 대해 코멘트를 하는 것이다.
연주나 기술적인 부분은 나보다 여기 있는 연주자들과 엔지니어들이 더 전문가일 것이고.
원래 나는 솔직히 할 일이 별로 없다.
그래서 진행 상황이 어찌 되는지 참관만 하고 갈 예정이었는데, 여기 있는 연주자들이 부탁을 하면서 사정이 바뀌었다.
-당신이 우리에게 직접 코멘트를 해 줘요. 아버지의 음악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당신이니까.
그래서 녹음 전에 연주자들이 감정이나 분위기, 느낌을 잘 살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게다가 미공개 곡 악보에 한글 코멘트가 워낙 많기도 했다.
영어로 번역하기 힘든 뉘앙스의 단어들도 있고.
석환 형이 내게 말했다.
“네 코멘트가 도움이 되나 봐. 다들 눈을 감고 집중하고 있네.”
“워낙 잘하시는 분들이니까.”
곧이어 근사한 연주가 시작되면서 내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머릿속으로 요런 느낌이지 않을까 하고 상상하며 재생했던 곡이 고스란히 현실로 흘러나온다.
아름다운 색채.
절묘한 리듬감.
「좋군. 다음 곡으로 넘어가지.」
지팡이를 양손으로 짚고 앉은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곡이 끝난 다음에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면 그 녹음은 끝났다는 뜻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곡에 OK를 하는 건 아니었다.
「레이먼드. 3번째에 들어가는 박자가 틀렸잖나.」
-죄송합니다. 선생님.
「틋, 틋, 틋이 아니고 틋틋, 틋이어야지. 자네가 방금 친 부분은 재즈가 아니야.」
조금이라도 엇나가거나 미묘한 부분이 나올 때마다 눈을 스르르 뜨는데 정말 귀신같은 감각이었다.
내가 듣고 긴가민가하는 부분에 대해 명확하게 진단을 내린다고 해야 하나.
난다 긴다 하는 연주자들을 지휘자처럼 쥐락펴락하는 거장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다음 곡, 설명해 주게.」
「네.」
그 속에서 나도 제 역할을 이어 갔다.
곡에 대해 설명을 하고 그 곡을 듣고.
어찌나 화성이 아름다운지 음악적으로 좋은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눈을 초롱초롱 뜨고 바라보는 내 모습에 재즈 연주자들이 흥을 높이며 녹음을 이어 갈 때.
「이제 마지막 곡이군.」
「마지막이네요.」
이제 마지막이자 가장 중요한 곡을 녹음할 시간이 됐다.
아빠의 공연에서 피날레를 장식할 곡.
20년 후의 사람들에게 보내는 질문을 주제로 쓴 곡이었다.
「이 곡에 대해서는 딱히 코멘트하기는 어렵네요. 개인 경험이 중요한 곡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재즈 연주자들과 눈을 마주치고 말했다.
「저마다 각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질문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음악의 의미는?’ 혹은 ‘내일 저녁엔 뭘 먹을까’ 하는 고민도 있을 수 있겠죠.」
사람들이 웃는다.
「Question은 그런 곡이라고 생각해요.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질문에 대한 곡이요.」
말주변이 부족해서 설명에 난항을 겪었지만 연주자들은 용케 알아들은 기색이다.
곧이어 시작되는 연주.
피아니스트의 솔로로 시작되는 곡이 차분한 멜로디를 그린다. 가볍게 계단을 오르듯이.
하나둘 악기들이 끼어들고.
경쾌하면서도 중요한 메시지를 던지는 곡이 이어지는 동안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노래를 감상했다.
-잘 지내니. 아들?
물론 실제로 이 곡이 던지는 메시지는 그와 조금 다른 느낌이긴 했지만 내게는 그렇게 들려온다.
밥은 먹었니.
오늘 하루는 별일 없었니.
친구들이랑 잘 지냈니.
경쾌한 피아노 반주가 아빠의 목소리처럼 들리고, 현악기의 부드러운 진동이 엄마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composed by 명주, 명은
악보에 적힌 글귀처럼 부모님이 함께 작곡한 곡.
어딘가 자꾸만 자상하게 목소리를 던지는 듯한 곡이 이어지면서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마음속에서 무언가 욕구가 치솟았다.
질문을 들었을 때 대답을 하고 싶은 것처럼.
“…….”
마음속에서 일어난 간질거림이 서서히 사방으로 퍼져 나가면서 손가락이 꿈틀꿈틀한다.
눈을 감은 내 앞으로 아름다운 색채들이 스쳐 가는 느낌.
밤하늘의 옥상에서 수십여 개의 별똥별이 내 위에 포물선을 그리며 지나가는 듯한 감각이었다.
손가락으로 무릎 쪽을 툭툭 두드리면서 Question에 대응하는 멜로디를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한참 동안 그러고 있는데 어딘가 시선이 느껴진다.
“음?”
눈을 뜨자 나를 바라보는 윈스턴 로스의 시선이 느껴졌다.
어딘가 익숙한 광경을 바라보는 것처럼 심술궂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는 노인이 날 불렀다.
「뭔가 떠올랐나?」
「네?」
「자네 손가락 말이야. 연주를 듣는 동안 계속 움직이던데.」
「아…….」
어느새 연주자들도 녹음이 끝났는지 날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영문인지 궁금해하는 이들에게 내가 설명을 했다.
「그러니까…….」
방금 떠오른 곡에 대해서.
* * *
“그러니까…….”
윈스턴 로스와 연주자들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정말 닮았군.’
혼자서 무엇인가에 골똘히 생각에 잠기면서 무아지경에 빠지는 모습은 그들 모두에게 익숙했다.
다 같이 즐겁게 수다를 떨다가도 혼자 뭔가 떠오르면 구석에 가서 종이를 끼적끼적하던 모습.
그러다가 피아노 연주를 하면서 꾸벅꾸벅 조는 모습.
20년 전에 보았던 누군가와 판박이처럼 닮은 이들을 보며 그들이 쿡쿡 웃었다.
“그러니 요약을 하자면.”
윈스턴 로스가 물었다.
“Question에 대한 답가가 떠올랐다는 거군?”
“네, 그거예요.”
미남이 머쓱한 얼굴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런데 이 녹음과는 전혀 별개로 떠올린 것이기 때문에… 지금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예요.”
“지금 명주의 곡을 듣고 떠올렸다고 하지 않았나?”
“네.”
“그럼 이 또한 오늘 녹음의 일부로 여겨도 되겠지.”
다소 논리의 비약이긴 했지만 다른 뮤지션들도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무슨 곡일지는 모르겠지만 재미있어 보인다.’
이미 녹음은 끝났다.
하지만 재미있어 보이는 떡밥이 등장하면서 즉흥 연주의 대가들이 어깨를 들썩였다.
‘뭐,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사람들은 선명주를 천재로 알고 있지만 실상은 그와는 조금 다르다.
재능을 지닌 것도 사실이지만 그런 재능을 뛰어넘는 노력파.
곡 하나를 만들기 위해 10시간 동안 내내 멜로디 하나를 만지작거리는 것도 본 터였다.
‘선우주.’
그들은 눈앞에 있는 선명주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은 것일까.
대중음악 쪽이라서 사실 그의 음악이 어떤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팝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 아마 아버지와 비슷한 재능을 보유한 케이스 아닐까?
“그럼 잘됐군.”
윈스턴 로스가 가리켰다.
“한 번 머릿속으로 생각한 것을 연주해 보게.”
“아, 네!”
“저걸로 연주해 봐.”
“……저걸로요?”
“그래.”
음악 생각을 하는지 멍 때리고 있던 청년이 윈스턴 로스가 가리킨 방향으로 향했다.
하지만 피아노로 향하는 대신.
아까 사람들이 주스를 마시고 남긴 유리컵에 멈춰 서는 팝스타였다.
“……?”
그러더니 유리컵에 손가락을 올린다.
톡.
톡.
저마다 음료 양이 다른 유리컵.
그 때문에 두드릴 때마다 소리가 다르다.
리듬감 있게 유리컵을 손가락으로 두드려 보던 이가 곧이어 음계를 확인하더니 손가락을 움직인다.
‘뭘 하는…….’
그 순간 손가락이 유리잔들을 톡톡 건드리면서 투명한 공명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귓가에 들어오는 간단한 멜로디.
무엇인가 채우거나 뺄 필요 없이 그야말로 완성된 음이었다.
“…….”
자리에 있는 이들이 멍한 얼굴로 우주를 바라보았다.
‘뭐야.’
그들이 예상한 것을 뛰어넘는 재능이었다.
메인 멜로디에 그치지 않고 곧이어 거의 완성된 것 같은 곡을 내보내는데 그야말로 완벽했다.
자신들의 전문 분야가 아닌 대중음악 쪽에서 활약하는 인물이라 살짝 가벼이 여기는 것도 있었는데…….
‘아버지보다 더하잖아?’
지금 보니 오히려 대중음악이라고 저평가가 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대중음악이 아닌 다른 음악 계통에서 저런 재능이 있었다면 곧바로 이 시대의 천재로 칭송 받았을 텐데.
멍한 얼굴로 바라보는 그들에게 누군가 말했다.
“헤라클레스 설화 알아?”
“알지.”
“지금 딱 그거 보는 느낌이야.”
그리스 신화의 주신이 자신들의 적을 상대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여 탄생시킨 아들.
태어났을 때부터 헤라가 보낸 뱀을 물리친 영웅처럼 그야말로 아버지보다 더한 재능을 보여주는 아들이었다.
꼭 선명주가 그들의 곁에 서서 ‘내 아들 장난 아니지?’ 하고 속삭이는 듯했다.
뮤지션들이 멍한 기분을 느낄 때.
“음.”
고개를 든 우주가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어떠신가요? 아무래도 많이 미흡하죠?”
“…….”
“왜 그러세요?”
윈스턴 로스가 입을 열었다.
“그.”
처음에 갈라진 목소리가 나오면서 그가 헛기침을 하고 다시 물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네.”
“네, 윈스턴.”
“왜 피아노에 가서 연주하지 않고 유리컵으로 연주한 건가?”
“네?”
오히려 어리둥절한 얼굴.
선우주가 손가락으로 유리컵을 가리켰다.
“선생님이 이걸로 연주해 보라고 하셨잖아요.”
“내가 언제?”
노인이 어처구니없는 기분을 느꼈다.
“난 저 너머에 있는 피아노를 가리킨 거였네.”
“아…….”
“…….”
“…….”
‘아…!’ 하면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표정의 선우주와 멍하니 바라보는 재즈 음악인들.
그들의 머릿속에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이것은 천재인가 바보인가.’
정말이지 알 수 없는 난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