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790)화 (790/1,031)

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790화

김덕순 여사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흑인 뮤지션들이 상상한 이미지는 다음과 같았다.

‘빅 마마.’

유년기에 보았던 주변 할머니들의 모습.

커다란 체구의 할머니가 넉살맞게 웃으며 솥뚜껑 같은 손으로 요리를 접시에 담아준다.

-아이들은 많이 먹어야지!

푸짐한 미소를 지어 주며 아이들의 등짝을 팡팡 칠 때마다 뇌수까지 같이 흔들리던 그 충격.

그들에게 김덕순 여사는 그런 이미지였다.

게다가 요리에 대한 칭찬이 얼마나 자자한지.

-장모님 요리는 정말 최고야. 어릴 적부터 명은이랑 같이 어머님의 요리를 먹으며 커 왔거든.

-아. 엄마가 해 준 순두부 먹고 싶다.

선명주-이명은 부부가 그 마법 같은 맛을 언급할 때면 아이들과 친구들이 침을 꼴딱 삼키곤 했다.

이제 그 맛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엄청 들떴는데.

그들은 지금 의아할 따름이었다.

‘건물의 상태가…?’

분명히 허름한 골목에 있는 가게라고 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저 건물은 무엇이란 말인가?

지붕이 기와로 되어 있어서 그런지 마치 거대한 궁궐을 보는 기분이었다.

“웅장하다.”

“웅장해도 너무 웅장한걸. 한국에선 이런 걸 골목이라 부르나.”

“K푸드의 왕이 사는 궁궐 같아.”

그런 너스레들이 오가는 가운데 그들의 시선이 버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할머니에게 향했다.

직원들을 부하처럼 거느리고 코트자락을 흩날리는 모습.

그들의 상상과는 전혀 달랐다.

‘갱스터 같아.’

바보 같은 아들을 바지사장으로 부리고 본인은 조직을 뒤에서 관리하는 대모 같은 분위기였다.

선글라스를 슥 벗는 동작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손주가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

“뭔가 상상한 거랑 좀 다르죠?”

“…….”

그들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백반집 스케일에 놀랐는지 입을 뻐끔거리는 뮤지션들을 데리고 버스에서 내렸다.

“할머니이이-!”

꺄아 김덕순 하고 뛰어 오는 내 모습에 숙자 이모를 비롯한 백반집 직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할머니 품에 꼬옥 안겨서 잠시 그리운 온기를 즐겼다.

“너무 보고 싶었어, 할머니.”

“오느라고 고생혔다.”

등을 토닥토닥해 주는 할머니에게 우리 졸개들도 달려왔다.

“할머님! 저희도 왔어요!”

“어이구, 우리 비주 오랜만에 본다.”

“저는요~? 저는?”

고개를 쏙쏙 내밀고 귀여움을 어필하는 막내를 비롯해 할머니와 해후를 나누는 동생들이었다.

천천히, 어딘가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다가온 재즈 뮤지션들이 지척에 가까워졌을 때.

내가 그들을 소개했다.

“여기는 아빠 공연을 맡아줄 뮤지션 분들이야.”

“반가워요.”

우아하고 고상한 어투로 인사하는 할머니에게 그들이 한국식 예법으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처음에는 살짝 조심스러운 분위기였는데.

우리 할머니가 인상만 무섭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금세 뮤지션들이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두 분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레이먼드 어윈입니다.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끝내주는 요리를 하신다고 들었죠.」

「건물이 너무 멋있네요. 가게에 써 있는 한글 간판도 너무 멋스러워요.」

악수를 청하는 이들에게 할머니가 손을 붙잡고 인사를 주고받았다.

우아하게 인사하는 폴 로랑을 보며 할머니가 ‘저 사람은 잘생겼다, 야’ 하며 속삭이는 가운데.

홍조를 띤 노인이 나섰다.

“……?”

까무잡잡한 피부 위로 발그레한 홍조가 떠올라 있는 인물은 바로 재즈계의 거장 윈스턴 로스 선생님이었다.

「흠흠.」

헛기침을 하고는 모자를 벗고 우아하게 인사하는 윈스턴 로스 선생님.

할머니의 손끝에 입맞춤을 한 노인이 인사했다.

「윈스턴 로스라고 합니다.」

“예. 반가워요~”

수줍은 소년처럼 우물쭈물 물러난 윈스턴 로스 선생님이 내게 물었다.

「자네.」

「네?」

「혹시 할머님에게 부군이 있는지 여쭤도 되겠나?」

「…….」

노인정만 가면 할아버지들이 끈덕지게 달라붙는 우리 김덕순 여사의 미모.

발그레한 뺨의 노인을 시큰둥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할머니에게 통역을 해 주었다.

“할머니한테 배우자가 있는지 물어봐 달라고 하셨어.”

“남자라면 지긋지긋허다고 전해 줘라. 느이 영감 때문에 내가 얼마나 개고생을 혔는데…….”

“그렇지.”

“이 나이 먹은 할망구들은 말이여. 남편이 없어야 오래 살어.”

“그치. 오래 살아야지.”

기쁜 마음으로 김덕순 여사의 메시지를 전해 줬다.

살짝 시무룩한 얼굴로 변한 윈스턴 로스의 얼굴을 만족스럽게 바라보고는 시선을 돌렸다.

「바람이 차네요. 들어가실까요?」

외투를 여민 뮤지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백반집에 들어서자마자 혼란이 일었다.

“뉴블랙이다!”

“TV에 뭐 나와?”

“아니, 뉴블랙이 저기에 있다니까!”

“어? 어어…?!”

계단으로 올라가는데 각 층 테이블에 앉은 손님들이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들기 시작했다.

뮤지션들을 먼저 올려 보내고는 손님들을 찾았다.

“안녕하세요. 이 집 손자입니다! 식사는 맛있게 하고 계세요?”

“저희는 이 집 손자의 동생들입니다!”

“어머. 어머…!”

박수를 치며 어제 TV에서 우리들을 봤다는 등산복 어머님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대기업 임원이라며 자기 명함을 내미는 아버님과 악수도 하고.

이제 네 살이 되었다는 어린 아이와 같이 브이 하며 사진을 찍는 등 팬 서비스를 했다.

“자, 이제 뭘 해야 할지 아시죠? 인터넷에다가 뉴블랙 실물~?”

“대박이다!”

“인성?”

“최고다!”

내가 박수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오늘 사이다랑 콜라는 제가 쏩니다.”

“와아아아-!”

계 탔다고 좋아하는 손님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뮤지션들이 있는 층으로 빠르게 올라갔다.

아랫층에서 들려오는 환호성들 때문인지 재즈 뮤지션들이 혀를 내둘렀다.

폴 로랑이 웃었다.

「진짜 언제 봐도 인기가 어마어마하다니까요.」

「아버님이랑 똑 닮았다니까. 팬 서비스 하나는 진짜 끝내주게 하네요.」

내가 웃으며 물었다.

「주문은 하셨어요?」

「일단 뉴-불백부터 주문을 했네. 그게 이 가게의 시그니처 메뉴라고 하더군.」

「최고의 선택을 하신 거예요.」

숯불과 불판이 올려진 테이블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반집의 규모가 커진 후에 할머니의 가게는 약간 고깃집과 비슷한 분위기로 바뀌어 있었다.

박규호 대표님이 소개해 준 요식업 전문가의 사업 컨설팅 때문이라나.

「와우…….」

불판 위에 올려진 불백 냄새를 맡은 뮤지션들이 잔뜩 업된 표정으로 재즈 곡을 허밍했다.

뚜비두밥~ 하는 흥얼거림에도 위트와 센스가 묻어 나온다.

당연히 불백의 반응도 엄청 좋았다.

「세상에, 제가 최근에 먹은 음식 중에서 최고예요.」

「오늘부로 한국을 제2의 고향으로 임명합니다.」

「코리아타운에 있는 음식점들도 많이 가 봤는데 이런 맛은 처음이에요. 정말 최고다….」

반찬은 깨작거리던 이들도 고기만은 극찬을 했다.

그리고 깨달은 사실 하나.

“형.”

중현이가 뚝배기에 숟가락을 얹는 외국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저분들 순두부 되게 잘 먹네요.”

“그러게…?”

매워서 못 먹을 거라고 생각한 순두부를 외국 사람들이 진짜 잘 먹는다는 점에 신기함을 느꼈다.

일부러 덜 맵게 해 달라고 했지만 그래도 신기하다.

그런 요리 덕분일까.

우리 김덕순 여사도 평소보다 기분이 더 좋아 보인다.

“형, 할머님 화나셨어여?”

“아니? 기분 엄청 좋은 표정인데 저거.”

“?”

아마도 재즈 뮤지션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식사를 하는 내내 우리 할머니에게 말을 거는 이들.

「명은 씨가 가끔 요리를 해 줄 때마다 당신의 이야기를 하곤 했죠. 자신이 그 요리 실력을 물려받았으면 정말 좋았을 거라고… 그러면서 어찌나 즐겁게 웃던지.」

「따님과 눈이 닮으셨군요.」

「정말이지 멋진 친구였어요. 그녀는.」

딸의 흔적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느낀다는 건 어떤 감정일까.

엄마가 할머니에 대해 말하던 이야기들, 엄마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일화들.

이제는 희미한 기억들뿐이지만 이들이 엄마의 이야기를 말해 줄 때마다 머릿속에 드문드문 기억들이 떠오르는 기분이다.

-잘 자. 우리 아가.

노래하듯이 맑고 부드러운 목소리.

봄바람에 부드럽게 커튼이 나풀거리고 따스한 햇살 아래 엄마의 품에서 잠이 들었던 기억이 생각나는 것 같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실제 있었던 일인지 아닌지도 가물가물하지만….

좋았다.

그러면서 일곱 살 무렵에 엄마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열심히 했다는 사실에 잠시 감사함을 느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 줄 수 있는 것은 축복이다.

“…….”

조용히 사람들이 수다를 떠는 틈을 타 고개를 슥 돌리고 눈가를 훔치는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사랑해. 할머니.’

마주 본 눈동자가 비슷한 말을 전해 온다.

나를 바라보는 할머니의 눈이 왠지 모르게 오늘따라 엄마와 비슷해서 조용히 웃었다.

*   *   *

「그럼 서울에서 봬요.」

「다시 만나지.」

윈스턴 로스 선생님을 비롯해 재즈 뮤지션들을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로 배웅한 후.

우리는 김덕순 하우스로 향했다.

“뭘 그리 주렁주렁 사 왔냐?”

“에이, 할머님 집에 오는데 그래도 빈손으로 올 수 없죠.”

“역시 비주여.”

“…할머님은 맨날 비주 형만 예뻐해여.”

졸개들이 가지고 온 집들이 선물을 바라보며 샐쭉 웃던 할머니가 나를 바라보았다.

“너는? 넌 뭐 없냐?”

“나는 존재 자체가 선물이니깐.”

“옘병하고 있네.”

“…….”

돌이 된 나를 보며 다들 웃는 동안 김덕순 여사가 우리를 바라보며 웃었다.

“뭐. 그래도 밤에 무섭진 않겄다. 다섯이나 있어서.”

“좋지? 엄청 좋지?”

“그려. 좋다.”

어차피 내일 스케줄도 특별한 게 없어서 할머니 집에서 하룻밤 자고 가기로 했다.

“너희는 그냥 서울 돌아가도 된다니까.”

“안 돼요.”

지호가 배낭을 끌어안고 고개를 저었다.

“저번에 리혁이 형이 할머님 집에 다녀온 다음에 엄청 자랑했거든요. 자기가 그만큼 특별 대접을 받았다. 형이 솔로곡을 써 준다면 아마 자기가 처음이 아니겠느냐.”

“뭔 소리야, 왕지호? 내가 언제?”

“아 몰라여. 암튼 형이 그랬으니까. 이번엔 저도 자고 갈 거예요.”

파자마까지 야무지게 챙겨 온 막내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역시 사람은 저런 뻔뻔함이 있어야지.

냐아-

동생들과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있는데, 2층에서 고양이가 토도도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치즈색 고양이를 본 동생들이 기뻐했다.

“나비다!”

“대박. 저 나비 실물 처음 봐요.”

“난 이미 봤어요.”

처음에는 낯선 이들을 바라보며 경계하던 나비가 쫄래쫄래 걸어온다.

기분이 좋은지 내게 몸을 부비며 가르릉거리던 수염을 쫑긋쫑긋하며 처음 보는 셋을 훑었다.

“역시 나한테 제일 먼저 왔어.”

츄르를 든 채 흡족해하는 리혁이를 첫 타자로, 이어 중현이와 비주에게 몸을 슥 비비적거리는 나비.

그리고 막내는 스킵했다.

“……?”

다른 동생들과 내가 손뼉을 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포인트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막내가 영 취향이 아닌 모양이다.

“역시 고양이가 사람을 잘 알아.”

“……!”

막내가 열심히 재롱을 피우며 고양이를 유혹했지만 그때마다 시큰둥한 반응들이 돌아온다.

그저 리혁이의 품으로 쏙 들어가 기지개를 켤 뿐.

그렇게 한바탕 즐겁게 웃음을 터뜨린 것을 시작으로 동생들과 느긋하게 새해 기분을 즐겼다.

설이나 추석 명절 같은 기분을 느끼며 할머니, 동생들과 거실에서 TV를 보면서 수다도 떨고.

손톱 밑이 노래지도록 귤도 까 먹고.

인스타에 들어가 오늘 찍은 사진들을 올리며 사람들의 댓글 반응도 모니터링 하고.

“잘 자요. 형.”

“잘 자.”

같은 방 멤버로 결정한 비주와 함께 침대에 드러누웠다.

불이 꺼진 방.

숨소리가 새근거리는 방에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

“…….”

그래.

나는 오늘 하루를 충분히 알차게 보냈어.

이제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드는 거다.

하나둘… 레드 썬.

Red red sun sun

적색 태양이 날 비춰

레드 썬이라는 키워드에 어울리는 후렴구와 가사가 머릿속에 스르륵 떠오른다.

그와 어울리는 벌스 후보군들이 스르륵 떠오를 때.

“…….”

다시 눈을 뜨고 고개를 저었다.

진짜 오늘만큼은 일 생각 없이…….

-다음 앨범 작업할 송 캠프 장소 말이야. 내가 물색해 본 곳들이…….

석환 형의 목소리와 함께 회의에서 결정할 사안들이 떠오른다.

다음 앨범을 함께 할 디자이너와 프로듀서 라인업이 스르륵 스쳐 지나간다.

아니야.

“…….”

다시 눈을 떴다가 눈을 감았다.

백반집에서 만난 사람들이나 재즈 뮤지션들의 얼굴이 눈앞으로 동동 떠다닌다.

오늘 말실수 한 건 없나?

회상을 하며 혹시 말실수를 할 만한 적은 없었는지 머릿속으로 생각을 하다가 다시 관뒀다.

“…….”

다시금 눈을 뜰 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응?”

“잠 안 오죠?”

“미안.”

비주가 웃으며 말했다.

“저도 잠이 안 와요.”

“너도?”

어둠 속에서 얄쌍한 형체가 일어난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달빛 때문인지 눈이 초롱초롱 반짝이는 존재. 나도 일어나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댔다.

“잠이 왜 이렇게 안 오냐. 진짜.”

“저도 요즘에 그래요. 좀 예민해진 느낌…….”

“피곤한데 잠이 안 와. 너도 알지?”

“알죠. 형.”

어둠 속에서 둘이 조용히 웃었다.

비주가 뒷목을 주무르며 말했다.

“되게 죄책감 느껴지는 기분이에요.”

“오늘 하루 쉬어서?”

“네.”

“가끔 쉬는 날도 있어야지… 라고 말하고 싶긴 한데 나도 비슷한 기분이라서 뭐 할 말이 없네.”

오늘 해야 하는 일의 할당량이 있는데 그걸 못 채우면 잠이 안 온다.

그래서 평소에는 어차피 잠 못 잘 거 일어나서 일이나 하자 해서 새벽을 보내곤 했는데.

장기화 되다 보니 피곤함이 스노우볼처럼 누적되는 기분이다.

“선배들이 왜 잠 자는 약 처방 받고 그러는지 요즘에는 알 것 같더라.”

“그래도 우린 자연적으로 해결해야 돼요. 형. 우리 기사라도 나면 진짜 큰일이니까.”

“당연하지.”

최근에는 안마 의자나 근육을 이완시키는 스트레칭의 도움을 받기는 하는데.

뭔가 근본적으로 마음의 전환이 필요할 것 같다.

한참 동안 기지개를 켜다가 비주에게 고개를 돌렸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앨범 얘기나 할까?”

“좋아요.”

올해 봄에 발매하려고 생각 중인 정규 3집 앨범.

비주에게 노트북을 켜서 보여 줬다.

“곡은 일단 많거든.”

“흐어……. 이게 다 곡이에요?”

“응.”

“형, 저 진심으로 걱정돼서 그런데 형은 좀 자야 할 거 같아요. 곡이 무슨…….”

“많지?”

고개를 끄덕이는 비주에게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형, 이 정도면 정규 10집까지도 충분할 거 같아요.”

“내가 저번에 세 봤는데 40집까지 가능할 거야. 아마.”

“…….”

“수록곡 외주 받으면 80집까지 가능하고.”

틈날 때마다 작곡을 해 놔서 곡은 어마어마하게 많다.

딜레마는 이거다.

“이 중에 뭘 고를지가 고민인 거지.”

외국 진출곡이라 특별하게 송 캠프를 했던 때와 달리 국내 곡들은 이미 충분하다.

아니.

해외에 내보낼 곡도 충분하다.

다만 타이틀곡과 주제를 잡고 거기에 어울리는 곡을 선별하는 작업이 어려울 뿐.

“타이틀이야 새로 만들어야겠지만… 일단 어떤 주제로 곡을 선정할지가 좀 고민이 돼서.”

“음…….”

“뭐 떠오르는 거 없어?”

“모르겠어요. 머리가 좀 멍해서…….”

잠은 안 오는데 졸음이 쏟아진다는 이의 말에 무언가 딱 떠올랐다.

“불면증으로 할까?”

“저는 좋은 것 같아요. 공감을 얻기 쉬운 주제잖아요. 팬분들 중에도 잠 못 자는 분들이 있을 수도 있고.”

“그런 사람들에게 잘 자라?”

“음. 그것도 좋구요. 그런데 메트로 때부터 그렇게 기획을 했잖아요. 우리의 내적인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그랬지.”

“이런 부분도 우리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요. 팬분들에게도 좋은 메시지를 줄 수 있고.”

팬들에게 잘 자라고 하는 메시지가 딱 마음에 꽂힌다.

-잘 자. 우리 아가.

정말 들은 것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엄마의 그런 말이 떠올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비주가 하품을 하며 말했다.

“그런데 일단 애들한테 물어봐야 할 것 같아요.”

“그렇지.”

우리끼리 섣불리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달칵.

스르륵.

문을 슬쩍 열며 고개를 내미는 삼인조와 노트북 불빛을 받아 반짝이는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

중현이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잠이 잘 안 와서요.”

“나도요.”

“저두.”

비주와 눈을 마주치며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동생들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불면증.

자연스럽게 다음 앨범의 주제가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   *   *

뉴블랙의 멤버들이 한 방에 모여 작곡 이야기를 하며 밤을 지새우고 있을 무렵.

같은 시각.

한국과 세계 곳곳에서는 편지들이 날아가고 있었다.

저마다 공연 일시나 장소는 다르지만, 세계 곳곳에 있는 이들의 품으로 똑같은 문구의 초대장이 도착했다.

[His Last Vow]

선명주의 마지막 공연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한국에서는 공연 추첨에 성공한 사람들이.

아직 추첨이 진행 안 된 세계 곳곳에서는 뉴블랙 혹은 선명주와 인연이 있는 이들의 품으로 먼저 특별 초대장이 향하고 있었다.

[당신의 논문에 도움이 되길 기대합니다. 또 다른 Sun으로부터.]

“어라?”

선명주에 대한 논문을 처음부터 다시 써야 한다는 글을 인터넷에 올렸던 소냐 애덤스가 우주의 메시지에 눈을 크게 뜨고.

[아버지의 마지막 공연을 보러 와 주시겠어요?]

“……어어?”

과거 선우주와 잡지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선명주의 팬임을 밝혔던 일본의 잡지 에디터가 입을 틀어막았다.

[여러분은 올해 아버지의 새로운 음악들을 가장 먼저 듣게 되실 겁니다.]

“…….”

“…….”

멍하니 편지만 바라보는 선명주 재즈 팬클럽의 회원들까지.

‘오늘 잠은 다 잤다.’

한국의 첫 공연으로부터 불과 4일 남은 날.

설레는 마음으로 편지를 붙드는 사람들의 모습이 한국과 세계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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