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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806)화 (806/1,031)

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806화

문득 눈 감았다 뜨니 세상이 바뀌었다는 말이 떠오른다.

내 경우에는 눈을 감았다가 뜨니 나라가 바뀐 거긴 했지만.

“정신 차려요.”

“응…?”

“우리 도착했다고요. 정신 차려요.”

리혁이가 내 눈앞에다 대고 손가락을 튕겼다.

그럼에도 한동안 멍했다.

그렇게 한동안 멍하니 리혁이를 바라보다가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그래.

나는 지금 선댄스 영화제 참석을 위해 미국으로 왔지. 아빠 영화와 관련된 미팅도 하러 왔고.

“…어이, 아저씨. 내 말 들려요?”

눈을 크게 뜨고 내게 손을 흔들어 보는 리혁이의 다급한 모습에 잠시 장난기가 동했다.

짐짓 멍한 표정으로….

“당신은 누구시죠?”

“……왜, 왜 이래?”

반쯤 넘어온 모습에 아련한 얼굴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제가 왜 여기에…….”

“나! 나 리혁이에요. 형! 정신 차려 봐요.”

코로 큽 하며 웃음소리가 새어 나올 때, 고개를 갸웃한 리혁이의 뒤에서 지호가 심드렁한 얼굴로 캐리어를 꺼냈다.

“우주 형 연기하는 거예요. 리혁이 형. 척 보면 몰라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윙크했다.

“연기였지롱.”

“죽어! 이 인간아!”

“아아악!”

두툼한 미국 여행 안내서로 맞으면 굉장히 아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씩씩거리는 리혁이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며 웃고는 기지개를 쭉 켰다.

개운하긴 한데 여전히 몽롱하다.

바깥에서 눈발이 약하게 흩날리는 활주로를 바라보고는 물었다.

“여기가 어디야?”

“솔트레이크시티 공항이요.”

“도착했구나.”

그런 말을 하며 벨트를 풀 때였다.

솔트레이크시티 공항이라며 알려 준 비주가 내 앞에서 눈높이를 맞추었다.

생글생글한 미소가 눈에 들어온다.

“형.”

“응?”

“우리 제3차 비주 협약 맺은 거 기억해요?”

“…정해진 시간에 무조건 잠을 자야 하는 불공평한 조약을 말하는 거라면 맞아. 기억하고 있지.”

비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 이번이 두 번째 위반인 건 알죠?”

“응.”

“세 번째로 위반하게 되면…?”

“…….”

세 번째까지 위반하면 적용되는 페널티 조항이 기억난다.

-하루 동안 말 안 걸어줌.

“!”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집단 속에서 큰 의미를 찾는 존재에게 하루 동안 내려지는 금언령.

그 무시무시한 페널티를 기억하니 온몸의 털이 쭈뼛 솟으며, 저절로 정신이 퍼뜩 차려졌다.

“맞아요. 형.”

비주가 스산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진짜 말 안 걸어 줄 거예요.”

“조심할게….”

“농담이 아니라 걱정이 돼서 그래요. 16시간이나 스트레이트로 잘 정도면 얼마나 피곤했던 거예요?”

“나 16시간이나 잤어?”

“네.”

“……진짜 잘 자긴 해야겠네.”

걱정 가득한 눈빛.

미국 사과라도 사서 먹여야 하나 하는 눈빛을 보이는 비주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다음에는 이런 일 없을 거야.”

“정말이죠?”

“이번에 내가 낚시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거든. 낚시에서 인생을 배우고 와서…….”

“잠 다 깬 거죠?”

살짝 놀리는 얼굴로 바라보는 비주에게 눈을 흘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스탭들이 짐을 챙기고는 비행기 사다리 계단을 통해 내려가는 중이었다.

나도 목도리와 마스크까지 착용하고 나서 그 뒤를 따라나섰다.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솔트레이크 공항 부지.

항공기 유도등이 여기저기서 반짝이고, 공항 직원들이 형광조끼를 입은 채 돌아다니고 있었다.

“7시 방향에 파파라치들 있다고 합니다!”

“네.”

“계단 조심히 내려오세요!”

로드 매니저들의 말을 들으며 난간을 붙잡고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고소 공포증이 있는 비주를 중현이가 챙겨 주고, 리혁이가 핸드폰으로 미국의 풍경을 담을 때.

“좋구나.”

상쾌한 기분으로 활짝 미소를 지었다.

16시간이나 잠을 자서 그런 걸까.

처음에는 피곤했는데, 점차 온몸의 세포들이 살아 숨 쉬는 기분이었다. 정말이지 상쾌하다.

그래. 선우주.

“오늘부터 새 나라의 어린이가 되는 거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새 나라의 어린이가 되고자 하는 야심찬 결심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

진작 이렇게 좀 잘 걸.

온몸에 활력이 돌아서 그런 걸까.

오늘 하루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간만에 정말로 상쾌한 기분이었다.

*   *   *

유타 주의 솔트레이크시티.

LA나 뉴욕 위주로 다니던 우리에게 이곳은 처음 와 보는 도시였다.

당연하게도 사전 정보는 별로 없었다.

유타 주라고 하면 떠오르는 몰몬교 정도? 한국에서 영어를 가르쳐 주며 포교한다는 선교사들이 연상되는 정도였다.

그리고 솔트레이크시티는.

“동계 올림픽 맞지?”

“맞아요. 2002년.”

“아직도 기억난다. 희한하게 솔트레이크시티 올림픽은 기억에 남더라고.”

아마 한국인들에게는 미국인 선수가 어맛 하고 할리우드 액션을 하면서 편파판정을 만들어 냈던 올림픽 개최지로 유명할 것이다.

전 국민에게 할리우드 액션이라는 단어가 보급된 사건.

막내가 빨간 코를 훌쩍이며 말했다.

“저는 올림픽은 못 봐서 모르겠는데. 저도 솔트레이크시티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요. 다큐에서 봤거든요.”

“그래?”

“네. 여기서 수영하면 수영 못하는 사람도 둥둥 뜬대요.”

“오.”

내가 감탄하며 말했다.

“혹시 그 다큐에서 수영하는 사람들이 되게 맨몸으로 따뜻한 하늘 아래 수영하지 않았니?”

“넹.”

“그거 사해 같은데?”

“아. 그거인가?”

검색을 하더니 아 하는 지호의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사전 정보 없이 온 곳이었는데 도시 자체는 나쁘지 않은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특이점이라면 눈이 꽤 많이 쌓여 있다는 것 정도.

중현이가 차창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산맥도 보이네요. 저기서 스키 타면 진짜 재미있겠다.”

“실제로 스키랑 스노우보드가 이 지역 명물이래요. 우리가 곧 가게 될 파크 시티도 스키 명소라는데요.”

“괜히 동계 올림픽이 열렸던 데가 아니구나.”

생각해 보니 평창처럼 동계올림픽이 열린 곳이니 눈이 많이 내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시간 나면 스키도 한번 타 보자는 말을 하는 가운데.

꼬르르르륵-

거대한 꼬르륵의 5중주가 우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일단은 밥부터 먹자.”

“좋은 생각이에요.”

우리는 현재 16시간 동안 금식을 한 상태였다.

얼마 전에 어느 다큐멘터리를 보았는데 거기서 추천해 준 방법이었다.

시차 적응에 괴로워하는 자동차 레이싱 선수를 대상으로 한 실험이었는데, 16시간 동안 굶은 다음에 식사를 하게 되면 생체 시계가 자동으로 현지 시간에 맞춰지게 된다나.

시내의 유명 레스토랑에서 점보 스테이크를 시킨 후.

“뉴블랙 TV 여러분!”

브이로그를 찍기 위한 셀프캠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저희가 한 번 시차 적응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정말인지 실험해 보겠습니다!”

“기대해 주세요!”

1시간 후.

드르러렁- 피유

드르렁- 피유

과식으로 인한 식곤증으로 전원 실패.

배에다 손을 올린 채 잠에서 깨어난 동생들과 후기를 공유했다.

“성공 아닐까요.”

“모르겠는데요. 잠이 오는 거 보면 실패한 거 아닐까요……. 저 나무늘보가 되는 꿈 꿨어요.”

“너무… 우우우욱… 많이 먹었어요.”

“우우욱… 리혁이 형, 우우욱 소리 내지 마여….”

그저 미국에서 ‘점보’라는 말이 붙은 메뉴는 함부로 시키는 게 아니라는 교훈을 얻을 뿐이었다.

어쩐지 주변에서 덩치 큰 미국 손님들이 우리 보고 놀라더라.

다 먹고 나니 주방장이 와서 칭찬해 주더니 벽에 걸 사진까지 찍어 줬다.

그렇다.

우린 레스토랑 벽에 있는 명예의 전당에 실린….

“후후후… 우우욱!”

“우우우욱!”

시차 적응은 모르겠는데 음식의 후폭풍이 좀 길었다.

“당분간 기름진 음식은 안 먹어야지.”

“기름 얘기하지도 마요. 참기름이고 들기름이고 뭐고….”

“그럼 중동의 OPEC과 석유 이야기는 어때. 리혁아.”

“우우우욱!”

시차 적응은 나름대로 성공(?)으로 치기로 했다.

다음 날 일어나 봐야 진짜 효과를 알 수 있다던데 그건 지금으로선 알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고.

일단은 기분이 좋았다.

“너무 좋네요. 한국처럼 알아보는 사람도 없고.”

“크으!”

동생들과 행복한 웃음을 터뜨리며 서로 간에 손뼉을 짝짝 마주쳤다.

“꺄하하하하!”

“꺄르륵!”

이곳에도 수플레가 있을 순 있겠지만, 한국처럼 길거리를 돌아다닐 때마다 10초에 한 번 꼴로 안부를 묻는 일은 없으니까. 야채 잘 먹어야 한다는 말을 10연속으로 들을 일도 없고.

그런 생각을 하며 환한 미소를 지을 때였다.

솔트레이크시티 번화가에서 가장 화려한 곳.

그곳 건물의 광고판이 번쩍번쩍하면서 시선을 모으기 시작했다.

[사람을 찾습니다.]

“누구를 찾나 봐.”

“저런 광고도 있구…….”

하지만 화면에 떠오른 5명의 사진은.

“우리인데?”

“어?”

그 아래 광고 문구가 떴다.

[이들의 이름은 뉴블랙!]

[특이사항 : 칭찬해 주면 반응이 귀여움]

횡단보도 맞은편.

코트를 입고 있는 솔트레이크시티의 주민들이 광고판의 현상수배와 우리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

“…….”

이야.

우리 수플레들.

사람들이 우리 못 알아볼까 봐 이렇게 광고도 걸어 주는구나.

아. 너무… 너무 고맙다…….

“…….”

조용히 핸드폰을 드는 시민들에게 우리가 눈물 가득한 얼굴로 포즈를 취해 보였다.

*   *   *

뭐.

말은 그리하긴 했지만, 솔트레이크시티 탐방은 무사히 끝났다.

워낙 땅덩이가 넓은 나라답게 광고판을 보고 우리를 알아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리 막 열광하는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으니까.

‘나 너 알아’ 정도.

그래도 광고판이 꽤 화제가 된 듯하긴 했다.

「호텔에서 묵고 있는데 광고판이 번쩍이더군요. 하하. 팬들이 아주 열성적인가 봐요.」

은발에 매끈한 고급 정장을 걸친 남자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성공가도를 달리는 비즈니스맨 같은 인상을 풍기는 이 남자는 바로 월드 아트 스튜디오의 판권 담당이었다.

「크리스 핀이라고 합니다.」

「선우주입니다. 반갑습니다.」

우리 윤석환 팀장과 통역사, 미국 에이전트와 변호사 등이 배석한 가운데 서로 간에 통성명과 인사가 오갔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동생들이 휴식시간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호텔 라운지에서 영화사와 미팅을 하는 중이었다.

목적은 당연히도 선명주에 관한 전기 영화를 제작하고 싶다는 영화사의 요청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인상 깊은 공연이었습니다.」

「공연을 보셨나요? 아직 미국에는 오픈을 안 했을 텐데.」

「PBS? 한국의 공영 방송 맞나요? 그곳에서 중계를 해 준 미스터 선의 공연 영상을 보았거든요.」

「자막이 없어서 이해하시기 힘들었을 텐데….」

상대가 웃으며 말했다.

「우린 월드 아트 스튜디오입니다. 우주. 세계 최고의 영화사에 자막 담당이 없겠습니까?」

「그건 그러네요.」

「아무튼 정말이지 인상 깊은 공연이었어요. 영혼을 뒤흔드는 무언가가 느껴지더군요.」

어메이징. 판타스틱.

그런 단어들이 들어간 립서비스에 내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간에 화기애애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커피를 홀짝일 때.

「그럼.」

상대가 깍지 낀 손을 테이블 위에 올리며 말했다.

「피차 시간이 부족한 상황이니 본론부터 들어가겠습니다.」

「좋아요.」

「우리 월드 아트 스튜디오는 선명주 씨에 대한 전기 영화를 제작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상대의 표정이 살짝 미묘하다.

그걸 캐치한 나와 윤석환 팀장의 눈매가 가늘어질 때, 크리스 핀이 테이블 위에 놓인 제안서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희가 제시한 조건들은 다 확인하셨습니까?」

「네.」

내가 대답하는 동안 석환 형이 물었다.

「그럼 저희가 제시한 조건들은 다 확인하셨나요?」

「네. 물론입니다.」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부분에 조정이 필요할 것 같더군요. 우선적으로 첫 번째 조항이 저희 입장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배우들의 출신 국적에 대한 문제요?」

「네.」

내가 영화사 측에 제시한 첫 번째 조건은 바로 배우들의 국적 문제였다.

한국인 역할로 나오는 사람들은 한국인으로 기용을 했으면 좋겠다는 게 내 의향이었다.

윤석환 팀장이 물었다.

「어떤 부분이 납득하기 어렵다는 거죠?」

「배우 풀이 굉장히 좁아진다는 문제점 때문이죠. 조금 더 열린 마음을 가져 보면 어떠실까요?」

「네?」

크리스 핀이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어차피 영화의 언어에는 영어가 쓰일 겁니다.」

「네?」

「아시다시피 미국 관객들은 자막을 보는 걸 굉장히 힘들어하거든요. 고작 1인치의 자막을 보는 것도 어마어마하게 힘들어한다고 할까요. 자막은 영화의 몰입을 해칩니다.」

「저는 넷플러스에서 자막이 달린 영화도 잘만 보는걸요.」

내 진지한 말에 상대가 웃음으로 넘겼다.

「하하. 한국 관객들은 뛰어나서 그럴지 모르겠지만 미국 관객들의 특수성도 감안해야죠. 평생 자막 없이 영화를 보아 온 사람들이거든요.」

「그래서 영어를 쓰겠다는 계획인가요?」

「네.」

그가 말했다.

「글래디에이터 아십니까? 고대 로마를 다룬 영화인데 그 영화에서도 로마인들이 영어를 쓴다고 누가 비난하던가요?」

우리 측이 잠시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리혁이가 이 자리에 없어서 다행이다.

내가 말하기 전에 내 대리인이 먼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고대 로마와 현대 대한민국을 비교하는 건 어폐가 있는 것 같은데요. 고대 로마에서 쓰이던 라틴어는 지금 쓰이지 않고 있는데. 그에 반해 한국어는 지금도 5천만 명이 쓰는 언어고요. 아. 북쪽까지 합치면 7천만은 되겠군요.」

냉철한 지적에 상대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살짝 흥분하신 것 같은데. 오해가 있었군요.」

‘쿨한 모습을 보이는 건 어때?’ 하는 듯한 말에 석환 형이 ‘이거 봐라?’ 하며 조용히 웃는 동안.

내가 입을 열었다.

「한국 극장가에 나올 영화 아닌가요? 제가 함부로 단언하긴 어렵겠지만, 저희 아버지에 대한 영화라면 사람들이 꽤 볼 텐데요.」

「네. 물론입니다.」

크리스 핀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한국 관객들은 외화를 잘 보지 않습니까? 아버님의 한국 장면에서 영어가 나온다고 해서 딱히 매출이 떨어지진 않을 겁니다. 볼 사람들은 보겠죠.」

그러니까 어떤 논리인지 이해가 된다.

어차피 한국인들은 ‘와 선명주 영화다!’ 하고 볼 테니 미국 관객들을 공략하겠다는 소리였다.

내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나라 관객들이 안 좋아할 것 같은데요. 관객들이 정말 냉정하거든요.」

아무리 할리우드 스타가 내한해서 최고의 팬 서비스를 펼쳐도 영화가 재미없거나 별로면 안 보는 게 한국 관객들이다.

의리도 재미가 있을 때나 통한다는 말.

상대가 다시 또 말없이 빙그레 웃으며 피하고, 그런 식으로 잠시 서로 간에 침묵의 대치가 이어질 때.

「일단.」

석환 형이 말이나 들어 보자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가정법으로 말을 해 보죠. 선명주 씨에 대한 영화에서 한국 장면에 영어가 나온다고 가정을 해 보았을 때… 그래서 배우를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인 것인지.」

「우선, 할리우드의 영화 시장에 대해 잘 모르는 여러분을 위해 설명해 드리자면… 아시아계 배우들의 풀이 굉장히 좁습니다. 한국계 배우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죠. 그 때문에 조금 더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돌려 말하지 말고 본론을 말하시죠.」

「한국계 배우만을 고집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크리스 핀이 시장 논리를 말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필리핀계 배우, 일본계 배우, 중국계 배우 등등. 출신 때문에 배우 풀을 국한하는 건 고루한 생각이 아닐까요?」

「…….」

「아버님 역할로 중국계 배우를 쓰는 것도 좋은 옵션이죠. 최근 들어서 중국 측에서 아주 관대한 투자 제안들이 들어오거든요. 기분 나쁘게 들으실 말은 아닙니다. 독일계 미국인 역할을 이탈리아계가 맡기도 하거든요.」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말문이 턱 막힌다?

왜 고연봉을 받는지 알 것 같긴 하다.

진짜 반박이 안 나올 만큼 어처구니없는 말들을 정말이지 매끄럽게 내뱉고 있으니까.

「하하. 조금 당혹스러우셨겠군요.」

「많이 당황스러운데요.」

내가 웃으며 말했다.

「제안서와는 내용이 전혀 딴판이라.」

「그때와는 또 상황이 바뀌었거든요.」

「어떤 상황이요?」

「내부 사정입니다.」

더 질문을 하지 못하게 상대가 웃으며 마무리를 지었다.

내부 사정은 무슨.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던 게 눈에 선하다.

「배우들의 문제 때문에 조금 까다로운 것들을 말씀드렸는데… 사실 진짜 문제는 바로 이겁니다.」

「또 뭐가 있나요?」

「음… 아무래도 선명주 씨의 전기 영화를 만들 때 있어서 가장 난감한 부분이 있는데요.」

아시아계 배우들을 가볍게 언급하던 이가 이번에는 최대한 책잡히지 않기 위해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선명주 씨가 미국 진출 초반에 조금… 차별을 당했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아.」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다.

아빠가 미국에서 재즈 분야에 진출했을 때, 당연하게도 외부인을 배척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일부 백인뿐만 아니라 일부 흑인들에게도 인종 차별을 당했던 시절.

흑인 재즈 뮤지션들이 인종 차별을 했던 장면을 영화에 넣기 어렵다는 모양이었다.

「그, 현재 정서상 할리우드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차별적인 언행을 하는 장면은 좀 그렇거든요.」

「그래서요?」

「그런데 안 넣으면 영화 각색이 조금 어렵고.」

크리스 핀이 고심 끝에 말했다.

「그래서 해결책을 저희가 찾았습니다.」

「그래요?」

웃으며 물었다.

이쯤 되니 어디까지 가나 싶어서 흥미진진하다.

「아시아계 배우들의 좁은 배우 풀에 대한 문제도 해결되고, 위에 말씀드린 난처한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아마 선우주 씨는 탐탁지 않아 하실 수도 있는데…….」

「말씀하세요.」

「메리 스튜어트를 주인공으로 하는 사극에서 아시아계 영국인이 실존하는 영국 귀족으로 출연한 바 있다는 사실 아십니까?」

은발의 미국인이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한국의 전설적인 소프라노 성악가도 마술피리에서 밤의 여왕을 맡았죠.」

「그래서요?」

「선명주 씨의 이야기에서 모티프를 따 와서… 조금 더 대중적인 방향으로 가 보는 겁니다.」

그가 물었다.

「선명주 씨의 배역을 아프리카계 미국인 배우가 맡는 건 어떨까요?」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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