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807화
가끔 웹서핑을 할 때면 흥미롭게 보는 게시글들이 있다.
[이 영화에 대한 비하인드 17가지]
해당 영화의 제작 과정이나 촬영장에서 있었던 흥미로운 썰들을 담은 글들.
지금 내가 들은 이야기는 그런 흥미로운 비하인드에 실릴 법한 이야기였다.
1. 영화가 제작되기 전. 선우주는 다른 영화사와의 미팅 자리에서 ‘아버지의 캐릭터를 흑인 배우로 바꾸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왜 보면 있잖아.
정말 말도 안 되고 얼토당토 없어서 ‘설마 그랬을까?’ 싶은 병맛 비하인드가…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실례합니다만.」
‘I’m sorry’라는 말이 먼저 내 입에서 나왔다.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요? 지금…?」
「네.」
영화사의 판권 담당, 크리스 핀이 재차 말했다.
「선명주 님의 일대기에서 모티프를 따 와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배우가 주연을 맡는 겁니다.」
「…….」
「물론 조금 당혹스러우실 수도 있습니다.」
조금이 아니고 많이 당혹스러운데.
「특히나 한국처럼 인종 구분에 보수적인 접근을 취하고 있는 아시아 미디어들의 관점에서는 충격적인 이야기일 수가 있죠. 그러나 최근의 할리우드는 다릅니다.」
「구체적으로…?」
「인종 간의 장벽을 허물고 있는 시기거든요. 히어로 영화에서도 백인 히어로가 흑인 배우로 캐스팅되기도 하고요. 원작에서는 흑인이었던 캐릭터가 히스패닉 인물로 바뀔 때도 있습니다.」
근데 그건 이거랑 다르지 않나.
내 의문을 대신해서 석환 형이 물었다.
「하지만 저희와는 경우가 다를 텐데요. 저희는 실존 인물입니다.」
「그래서 영국 사극을 예시로 들어드렸죠. 실존하는 귀족의 인종을 바꾸지 않았습니까?」
분위기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순간 내가 이상한 사람인가 헷갈리긴 한다.
아니.
생각해 보면 얼마나 이상해.
우리나라 사람들이 선명주 영화 개봉했다고 해서 극장으로 갔는데 타이틀이 끝나고 갑자기 흑인이나 백인 배우가 나오는 거다.
그 아래 사극처럼 깔리는 자막.
[선명주]
한국인. 한국이 낳은 불세출의 스타.
이게 뭐시여… 하는 표정으로 바라볼 한국인들의 표정이 선하다.
굳이 멀리 볼 필요도 없었다. 당장 내 옆에 있는 석환 형과 다른 한국인들의 표정이 그랬으니까.
내가 웃으며 물었다.
「그렇게 구분을 허물 거라면 다른 백인이나 흑인 뮤지션의 인종 구성도 바꿔 보는 건 어떤가요?」
「그건 조금…….」
「곤란한가요?」
「제 선에서 결정할 수 없는 문제 같군요.」
「그럼 제 아버지의 캐릭터는 크리스 핀 씨의 선에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고요?」
「……조금 분위기가 날카로워진 것 같군요.」
상대가 그림 같은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제가 기분을 나쁘게 만들었다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가 말을 이었다.
「현실적인 부분들도 고려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현실이요?」
「네, 저희 쪽도 다 선우주 씨와 선명주 씨를 위해 최상의 호의를 베풀어 드리려는 마음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호의가 두 번이었다가는 백인 사무라이 선명주가 로보트를 타고 킹콩을 무찌르는 영화가 나올 것 같은데.
은발의 미국인이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희는 선명주 님의 영화를 굉장히 큰 규모로 제작하고 싶습니다. 빵빵한 자본과 멋들어진 그래픽!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을 뮤지컬 상업 영화를 만드는 거죠.」
가만히 듣고 있는 우리에게 그가 설명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관객 수입이 나올 때 가능한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오프 더 레코드로 말하자면… 잠시 녹음을 중단하죠. 아시아계 배우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에 대한 수요가 굉장히 미미하거든요. 제 생각이 아니라 산업 현실이 그렇습니다.」
옆에 있던 금발의 직원이 노트북을 돌려 수치를 보여 주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흑인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보다 수요가 낮습니다. 그래서… 윗선에서도 수익성을 의심하고 있는 상황이고요. 과연 이 영화가 돈이 될 것인가.」
그제야 모든 흐름이 하나로 연결된다.
결국 돈이었다.
더 열린 마음으로 인종 구성을 바꾸니 뭐니 했던 것도 돈이 더 되는 쪽으로 가자는 거고.
크리스 핀이 깍지를 끼고 내게 진지하게 물었다.
「아버님의 영화가 상업적으로 성공한 영화가 되길 원하십니까? 아니면 저 구석에 있을 예술 영화나 독립 영화가 되길 원하십니까?」
「솔직히 말씀드릴까요?」
「네.」
「저는 제대로 잘 만든 영화를 원해요.」
상대가 이해가 안 간다는 미소를 지었다.
「기왕이면 어마어마하게 성공한 영화가 좋지 않겠습니까? 이 영화의 OST를 비롯해 우주 씨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뉴블랙도 지금 미국에서 신인 아티스트인 상황 아닙니까?」
「저희 신인 맞죠.」
신인 취급이긴 한데, 한국에서 활동이 많았으니 신인상 후보에는 안 끼워 주는 그런 포지션이다.
상대가 설득하듯 말했다.
「로버트 맥기니스 감독 아십니까?」
「영화계의 거장이시죠.」
이름만 들으면 다 아는 영화들을 제작한 할리우드의 전설적인 제작자다.
「우주 씨만 OK 하면 그분이 제작자로 나서실 겁니다. 저희끼리 호의적인 의사소통이 오가고 있죠.」
석환 형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나는 내 좌측에 앉은 통역사에게 자문을 구했다.
“방금 제작자라고 하신 거죠? 디렉팅이 아니고.”
“네. 제작자라고 하셨어요.”
우리가 고용하는 통역사 분들은 대체로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다.
왜냐하면 전문 용어들이 난무하니까.
여기 있는 김희성 통역사님도 한국과 할리우드 간의 소통이 있을 때 자주 등판하시는 분이었다.
그가 귀띔을 해 주었다.
“할리우드에서는 한국과 달리 프로듀서 놀음이라고 해도 될 만큼 제작의 파워가 강력하긴 합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맥기니스 감독 같은 경우는 1년에 제작으로 이름 올리는 영화만 10편가량은 될걸요. 그중에 꽤 많은 수는 이름만 빌려 주는 모양새라고 할까요. 대체로 감독들의 자유를 존중하는 편이라 간섭도 크지 않은 편으로 알고 있습니다.”
‘누구누구 유명감독 제작!’이라고 영화 포스터에 걸려서 흥미로워 했는데, 정작 퀄리티가 그저 그랬던 영화들이 떠오른다.
그때, 석환 형과 이야기에 난항을 겪던 크리스 핀의 눈동자가 내게로 향했다.
우리 에이전트까지 포함해서 대리인들이 만만치 않으니 만만한 어린애를 노리겠다는 전략인 듯했다.
「저희는 우주 씨에게도 혜택을 드리고 싶습니다. 작곡에 관심이 많다고 들었는데… 영화 음악 작업에 뛰어드는 건 어떠신가요?」
「글쎄요. 제가 일을 해야 되는 건데 왜 저에게 혜택인 건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이 사람이 모르는 게 하나 더 있다.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미 뮤지컬 영화 <노스탤지어>의 OST 때문에 존 에드워즈 감독님, 그리고 프랭크 차우 작곡가님과 작업한 적이 있어요. 뮤지컬 제작자인 프랭크 차우 씨로부터 영화 음악에 대한 제안들도 종종 받고 있고요.」
「…….」
「제가 아직 이쪽에서 입지를 다지지 못한 건 알지만, 왜 그게 저에게 혜택이라는 건지 모르겠네요.」
우리 미국 에이전트가 잘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아까부터 상대와 말할 때마다 테이블 아래로 뻐큐를 날리고 있던 분이었다.
「그렇군요. 일리 있는 말씀이십니다.」
거기까지 자료조사를 한 것은 아닌지 크리스 핀의 시선이 옆에 있는 영화사 직원들에게 돌아갔다.
직원들이 침을 꼴깍 삼키는 것을 보아하니 몰랐던 모양이다.
처음부터 조건을 후려치던 것도 그렇고.
상대가 우리를 굉장히 쉬운 먹잇감으로 여기고 나온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세계 몇 대 영화사라는 곳에서 황금빛 미래를 약속하면서 ‘잘해 줄게~’ 하면 무조건 넘어올 거라 생각한 걸까.
「서로 간에 이견이 조금 있군요. 하하.」
크리스 핀이 웃으며 말을 골랐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내 예감 같기는 하지만, 지금부터 꺼내려는 말이 본론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면 이견을 봉합하는 쪽으로 가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저희도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거든요.」
「좋죠.」
「우선 아까의 말에 대해선 사과의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직 한국 분들에겐 조금 이른 이야기를 한 것 같군요.」
말투는 정중하지만 ‘옛다 사과나 받아라’ 같은 느낌이었다.
어쨌거나 상호 간에 건설적인 이야기를 하자는 동의를 한 후.
「배우들에 대해서 조정을 해 보죠.」
「네.」
하지만 몇 가지 부분에 대해선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한국어를 쓰는 한국 장면.
그러니 한국말을 잘하는 한국계 미국인 정도는 되어야 우리가 납득할 수 있었다.
「우선 저희가 제시하는 조건을 들어 보시죠. 저희는 아시아 배우들을 기용하고 싶습니다.」
「잠시만요.」
뉘앙스 차이를 파악한 우리 미국 에이전트가 입을 열었다.
여전히 테이블 아래로 상대를 향해 뻐큐를 하고 있었다.
「아까와는 말이 조금 달라진 것 같군요. ‘아시아계 미국인’ 배우가 아니라 ‘아시아’ 배우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이 부분은 아직 검토 중인 사안이긴 합니다만… 중국 배우를 기용하는 것은 어떨까 생각 중입니다.」
살짝 던지듯이 간을 보던 흑인 배우 건과 다르다.
이쪽이 더 그들이 하고 싶어 했던 것에 가까웠다.
아무래도 ‘흑인 배우는 우리가 양보할게. 대신 중국 배우 OK인 거지?’로 퉁치려던 전략 같았다.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석환 형이 아연한 기색으로 물었다.
「주인공이 한국인인데 중국 배우를 쓰겠다고요?」
「여러모로 윈윈 전략이 될 겁니다.」
크리스 핀이 진지하게 말했다.
「넷플러스 때문에 최근 할리우드 영화의 수익 구조가 흔들리고 있거든요. 히어로 영화가 아닌 영화들의 극장 수입이 떨어지는 상황이라 전 세계 박스 오피스도 신경을 써야 합니다.」
미국 외에서도 돈이 나와야 한다는 말이었다.
「중국의 배우를 기용한다면 중국에서도 좋은 성적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견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농담인가 싶었는데 눈빛을 보니 진짜였다.
정말….
직접 접하니 더더욱 레전드였다. 할리우드 사람들.
아시아의 돈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관심이 많은데, 정작 아시아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모른다고 할까.
아니.
중국인들이 한국인 영화에 중국인 배우가 나온다고 ‘와! 그거참 멋지다!’ 하면서 보겠냐고.
「…….」
석환 형과 내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상대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중국 배우를 기용할 경우에 여러 장점도 있습니다. 일단 박스 오피스 성적이 보장된다는 것과 함께… 중국 미디어 기업들의 투자 제안들이 줄을 잇고 있거든요.」
「투자 제안이요?」
「네. 대부분 굉장히 관대한 제안입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거의 공짜에 가까운 무상 돈 지원! 같은 느낌이었다.
「혹시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투자 제안을 미끼로 영화 내용에 간섭하겠다는 제안들은 아닙니다. 계약서에도 영화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겠다는 조항을 넣을 생각이거든요.」
「…….」
하지만 나는 떨떠름할 뿐이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나.
게다가 이상하다.
중국 기업들이 나라의 허락 없이 마음대로 한국 관련 컨텐츠에 투자가 가능한가…?
그게 가능하다는 것은 나라의 허락을 받았다는 뜻일 텐데.
국가 차원에서 끼어든다는 것에 뭔가 찜찜함이 느껴진다.
정확히 의도는 모르겠지만… 가끔 이렇게 쎄한 감각이 느껴질 때가 있었다.
석환 형에게 속삭였다.
“이상한데. 형.”
“이상하다. 진짜 이상해.”
해외 나갔을 때 몇 번 겪은 일이었다.
어디선가 요상하고 야릇한 자본이 끼어든다 싶으면 중국이나 일본이고, 말도 안 되는 루머가 터졌다 싶으면 대만이고.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크리스 핀이 물었다.
「그래서 저희의 제안은 대충 이렇습니다만 어떠십니까?」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데요.」
비즈니스를 하면서 느낀 것은 거절도 잘해야 한다는 거다.
서로 간에 앙금이 안 남게.
어떤 식으로 거절할지 회의를 하려고 준비하는 동안, 나는 세계 최고의 영화사에 대한 미련을 떨치기 위해 질문을 꺼냈다.
「그 전에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네. 무엇이든 여쭤 보시죠.」
얼마 전에 아빠의 공연 영상을 보고 왔다고 했나.
「이번에 공개된 신곡들 중에서요. 1부에 나왔던 저희 아버지의 곡 중에서 어떤 곡을 제일 좋아하시나요?」
「음…….」
상대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는 Answer가 제일 좋더군요.」
「그렇군요.」
공연이 끝나고 공개된 Answer를 1부 곡으로 언급하는 모습에 내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월드 아트 스튜디오의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한 후.
다음 날.
나는 상쾌한 기분으로 나머지 3곳과의 미팅도 끝마쳤다.
“후아.”
호텔 방에서 넥타이를 풀어헤친 TF팀 직원들과 우리가 탄산수를 들이켜며 멍하니 있었다.
소파에 앉은 고양이처럼 다들 흐물흐물한 자세였다.
석환 형이 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다시 보니 선녀였다는 말이 있잖아. 우주야.”
“응.”
“그게 진짜이긴 한 모양이다.”
“그러게.”
첫날 월드 아트 스튜디오와의 제안을 들을 때만 해도 그랬다.
이건 최악의 제안이다.
하지만 다른 세 곳과 미팅을 하고 나니 뭔가가 떠오른다.
수능 근현대사 배울 때 사진 자료로 나오는 ‘구관이 명관이다!’ 하는 대통령 선거 포스터.
-저희는 열린 마음으로 기다리겠습니다.
월드 아트 스튜디오의 판권 담당, 크리스 핀이 어제 우리에게 웃으며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친절한 미소인데 가끔 미국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깔보는 듯한 느낌의 미소.
-다른 영화사와의 미팅을 하시면 느끼실 겁니다. 저희가 업계 최고라는 것을.
그뿐만 아니라 다른 직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너희는 결국 우리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다는 듯 자신하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쪽 방향으론 쳐다도 안 보겠다는 마음으로 나섰지만, 다음 날 우리는 할리우드의 실태를 깨달았다.
-뮤지컬 영화로 제작해 보는 건 어떨까요? 물론 제작비는 충분하지 않습니다만… 열정이 중요한 거 아닐까요? 예? 수익 분배 말씀이십니까?
꺄르륵거리며 열정이 중요하다고 말하다가 수익 분배 이야기가 나오니까 표정이 싹 돌변하는 제작사 1.
-솔직히 언제 제작된다고 답변은 드릴 수 없죠. 내부적으로 크게 확정된 것은 없습니다. 아. 그리고 판권을 저희가 다른 제작사에 양도할 수 있다는 조항에 대해서 말입니다.
판권 사서 플미 붙여 팔겠다는 대형 제작사 2.
-백인들이 억압적으로 만들어 낸 시스템 하에서 그걸 뚫고 성공하신 분이죠. 선명주 님을 존경합니다. 영화에 부르주아에 저항하는 프롤레타리아적 감성을 담아….
딱히 음악에는 관심 없고 시스템에 대한 저항정신을 담겠다고 폭주하던 제작사 3.
그냥 멍하다.
“할리우드 놈들 대단하다. 정말.”
TF팀 직원이 말했다.
“눈 뜨고 코 베어 가려고 하네요. 분명히 한국에서 볼 때만 해도 서류들이 완벽했는데…….”
“그래서 직접 만나야 하는 거야.”
석환 형이 답했다.
“서류랑 현실은 다르니까.”
“이 정도로 다를 줄은 몰랐죠. 기획안 볼 때만 해도 저희 다 같이 희희낙락 웃었잖아요.”
정말 좋은 제안서들이 가득해서 ‘만나볼까?’ 해서 만났더니 갑자기 말이 달라진다.
아파서 의사를 만나러 갔더니 수의사가 ‘석환 씨는 중성화했나요?’ 하는 말을 들은 것처럼 황당하다.
“비유가 이상하잖아. 선우주.”
“머리가 아파서 그런가 봐.”
골이 지끈지끈하다.
TF팀 직원 중 하나가 물었다.
“그래서… 월드 아트 스튜디오와 다시 연락해서 재협상 들어갈까요? 거기가 조건이 제일 좋기도 했고.”
내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반대예요.”
“왜?”
“굳이 양보할 생각 없거든요.”
아빠에 대한 전기 영화.
있으면 좋다.
하지만 저렇게 사정하거나 양보하면서까지 제작해야 할 영화는 아니었다.
차라리 국내 영화로 만드는 게 낫지.
석환 형이 탄산수를 홀짝이며 말했다.
“안 그래도 국내 영화감독 중 하나가 제안하기도 했는데. 김계원 감독 알아?”
“누구야?”
“국뽕 영화 전문이거든.”
누군가 설명해 줬다.
최근에 해외로 파병 나간 한국 군인들에 대한 영화를 만들었다나.
한국군에게 감화된 외국 민병대가 태극기에 경례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는 말에 말없이 웃었다.
“…….”
머릿속에 장면이 떠오른다.
모스크바에서 공연하는 아빠가 ‘꼬레아!’ 하면서 태극기를 흔들고 백만의 러시아인들이 와아아 하는 영화 장면.
갑자기 눈앞에 월드 아트 스튜디오의 직원들이 반짝반짝거린다.
-구관이 명관이다!
-거봐. 우리가 제일 낫지?
아니야.
너희도 아니야.
“뭐. 그리 서둘러야 하는 프로젝트도 아니잖아요. 저희 앨범과 관련된 것도 아니기도 하고.”
“그건 그렇지.”
“어차피 저쪽에서 제시한 조건들도 받아들이기 힘들어요.”
다른 직원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새로운 제안이 또 들어온다면 모를까. 지금 상황에서는 차라리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나았다.
아니면 내가 감독을 찾아볼까.
그런 우스갯소리에 가까운 생각을 하면서 웃을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녀브제영. 선우주 씨 계신가영.
싱글벙글한 막내의 목소리에 직원들과 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문을 열자 방금까지 입김을 내뿜은 듯, 뽀얀 얼굴에 홍조가 떠오른 졸개들이 들어왔다.
나홀로 집에의 주인공이 떠오르는 빵 모자에 패딩 패션.
밖에서 눈싸움을 하고 돌아온 모양이다.
“호텔에 숙박 중인 애기들이랑 눈싸움 했어요.”
“오.”
내가 가장 중요한 것을 물었다.
“그래서 이겼어?”
“졌어여…….”
막내가 시선을 돌리며 먼 곳을 바라보는 모습에 내가 다른 동생들에게 물었다.
“애기들한테 졌다고?”
중현이가 슬픈 얼굴로 말했다.
“초등학생들이었거든요….”
“아아.”
“분한 건 진심으로 했는데 졌어요. 전략에서 밀려서…….”
리혁이의 말에 다들 웃음을 터뜨릴 때.
시큰거리는 벌건 코를 문지르던 비주가 날 바라보며 물었다.
“형은 준비하고 있는 중이었어요?”
“응?”
“우리 이제 슬슬 준비해야 되잖아요.”
“아아. 맞다.”
그러고 보니 이제 슬슬 메이크업을 비롯해 꾸밀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이따 밤 9시에 있는 시사회 스케줄.
오늘은 선댄스 영화제 개막을 장식할 우리의 다큐 영화를 보러가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