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810화
솔트레이크시티의 호텔 방.
“형, 저 다 씻었어요. 이제 들어가서 씻어요.”
“나 조금 이따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북슬북슬 말리던 막내가 잠옷차림으로 다가왔다.
테이블에 앉아서 노트북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내 모습에 상대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 보고 있어요?”
“아까 유건 감독님이 소개해 주신 분 프로필.”
“아.”
캔 맥주를 깐 막내가 호로롭 하며 물었다.
“아버님 영화 관련이요?”
“응.”
“그분 성함이 뭐래요? 제가 아는 분일 수도 있는데.”
“데보라 킴.”
한국계 미국인으로 이런 독립 영화 쪽에서 인지도가 상당한 분이라고 했다.
아까 시사회를 마친 자리에서 유건 감독님이 했던 말들이 떠오른다.
-음악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서 꽤 일가견이 있는 친구거든. 내 지인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재능이 있어.
한 번 만나볼 생각이 없냐는 이야기에 일단 승낙을 하긴 했다.
뭐. 어떻게 확정된 건 아니었다.
아직 제작을 어떤 식으로 할지 방식을 결정한 것도 아니고, 그냥 좋은 감독 후보군을 접한다는 생각으로 만나기로 했다.
“음.”
막내가 눈을 말똥말똥 뜨며 말했다.
“어디서 들어 본 것 같기도 한데. 영화를 보면 알 것 같기도 하고.”
“그래?”
지호에게 노트북 화면을 돌려서 보여 주었다.
내가 음악에 대해 관심이 많고 아는 게 많듯이, 영화나 드라마 쪽에 대해서는 지호가 빠삭하게 꿰고 있었다.
쉬는 날에는 거실에서 하루 종일 영화나 드라마를 정주행하는데, 아침에 보면 밤을 샜는지 초췌한 고양이 같은 얼굴을 하곤 했으니까.
“TF팀에서 찾아서 정리해 준 프로필이거든. 밑에 보면 영화 제목들이 쭉 써 있어. 옆에 한국어판 제목도 있고.”
대략 세 편 정도의 영화가 있다.
지호가 맥주를 홀짝이고는 유심히 바라보았다.
“되게 다작하시는 분은 아니네요. 경력이 꽤 긴 것 같은데.”
지나가듯 하는 말에 내가 물었다.
“혹시 적게 작품 찍으면 안 좋은 거야?”
“아뇨. 꼭 그런 건 아니구. 오히려 이런 분들 중에 진짜 보석 같은 분들이 숨어 있어요.”
“그래?”
“네. 보면 남들 1년에 한 편 찍을 때 3~4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감독님들이 있거든요. 그분들 중에 보면 진짜 영화 매니아들의 가슴을 덕순덕순하게 만들어 주는 분들이 많아요.”
“그만큼 한 편, 한 편에 신경을 기울인다는 거네.”
지호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리스트에 적힌 세 편의 영화를 훑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갸우뚱한다.
“음?”
“왜 아는 거 있어?”
“잠시만요.”
핸드폰으로 검색을 한 번 해 보더니 지호가 ‘오!’ 하면서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저 이거 연습생 때 이태원 가서 본 적 있는 거예요.”
“뭔데?”
“이거요. 이거, 영어로 라고 되어 있는 거요. 이거 진짜 재미있는데!”
흥분해서 침을 튀기는 걸 보니 엄청 재미있는 영화인가 보다.
노트북을 돌려서 바라보니 그 옆에 한국어 제목이 쓰여 있다.
투 맨, 원 컨트리.
한국 배급사가 번역가들을 고용하기 귀찮았던 모양이었다.
“이거 넷플러스에도 있을걸요. 형 이거 안 봤죠?”
“응.”
“이거 진짜 봐야 돼요. 독립영화 중에서 진짜 재미있게 본 거라서… 잠시만요.”
곧바로 호텔방에 있는 TV에 ‘N’이 두둥 뜨더니 지호가 검색창을 딸깍딸깍 켰다.
젊어서 그런지 확실히 검색을 잘해.
지호가 소파 옆을 탁탁 두드리며 말했다.
“얼른 와요. 영화 틀 거니까.”
“잠시만.”
노트북을 정리하고 불을 끄고는 소파에 앉았다.
두 명이서 쓰기에는 좀 큰 TV 같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영화를 보니 은근히 좋다.
캐리어에서 팝콘을 꺼내온 막내에게 유리그릇을 건네주며 물었다.
“그런데 무슨 내용이야?”
“형은 노래 들을 때, 뭔 내용인지 미리 알고 들어요?”
“아니.”
“영화도 그렇게 봐야 재미가 있는 거예요. 아~ 이 영화 볼 줄 모르는 사람~”
“팝콘이나 줘.”
짭조름한 팝콘을 우물거리며 TV를 바라보았다.
선댄스 영화제 수상작이라는 로고가 나온 후에 곧바로 영화가 시작됐다.
쏴아아아아-
잘 익은 벼들이 바람에 살랑인다.
마치 갈대밭처럼.
그곳에서 소를 몰고 있는 까무잡잡한 한국의 아이가 있다.
리혁이가 봤다면 1950년대라고 소개할 법한 배경들 앞에서 소를 붙잡고 다니는 어린아이.
막내가 미장센 미쳤다면서 양 뺨에 손을 올리고 흥분할 때.
[…….]
소년이 눈가에 손을 올리고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뭔가 의미가 담긴 것 같은데 나는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그렇게 태양을 바라보던 소년의 시선을 보여 주듯, 카메라가 하늘에서 아래로 이동한다.
아주 좋아 보이는 양옥집이 보인다.
꼭 마을 지주가 사는 집 같다는 생각을 할 때.
[…….]
그 마당에서 뛰어놀고 있는 부잣집 아이를 보던 소년이 소의 고삐를 손에 쥔 채 빤히 바라볼 때였다.
[괘애애애애앵-]
어디선가 굉음이 들려온다.
푸드덕!
나무 위의 새들이 놀라서 도망치고 소가 우어어 하면서 소리를 낼 때.
소년의 시선이 돌아간 곳에서는 강철로 된 거대한 괴물, 탱크가 포신을 드러내며 마을을 지나가고 있었다.
놀란 소년의 얼굴로 클로즈업되는 화면.
그러더니.
[빠아아아앙-]
자동차가 지나가는 굉음과 함께 눈동자에서 서서히 줌 아웃이 된다.
주름진 노인의 모습.
곧이어 한국계 노인이 지팡이를 짚은 채 뉴욕의 도로를 거니는 장면 아래로 자막들이 깔렸다.
[directed by Deborah Kim]
뉴욕 출신 뮤지션들의 재즈 음악이 배경으로 깔리는 동안 힘겹게 어딘가를 찾아가는 노인이었다.
“음악 되게 잘 사용하시네.”
“그래요?
“응. 영화 장면이랑 잘 어울리게 사용하시는데? 감각이 진짜 좋으시네.”
이런 소규모 영화에 음악감독이 따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센스가 좋다고 생각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화면의 구도나 연출에 집중하는 막내와 달리 나한테는 음악이 제일 먼저 들려왔다.
“음악도 뉴욕 출신 뮤지션들 음악만 썼어. 저번에 만났던 카밀라 베이커 씨 기억하지? 이거 그분 노래다.”
“아, 진짜요?”
“색소폰 소리가 딱 그분이잖아.”
“?”
갸웃갸웃하던 막내가 뭐 그런가 보다 하며 고개를 끄덕하는 동안,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감독이 음악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방식이 마음에 든다.
음향과 음악에 조예가 있는지 노력을 기울인 티가 난다고 해야 되나.
내가 그런 부분을 주목해서 보는 동안 영화의 내용은 빠르게 전개됐다.
[적절한 요양이 필요하겠군요.]
의사로부터 건강검진에서 ‘좀 쉬는 게 좋겠다’는 말이 나오고.
운영하고 있는 세탁소의 매출도 옆에 있는 코인 세탁소에 밀리고.
루이지애나 주의 시골 도시에 살고 있는 친지들이 ‘이쪽으로 와서 쉬는 게 어떠냐’ 하는 말에 노인 ‘정(Jung)’은 이사를 결심한다.
그리하여 시골 마을에 도착한 정은 친지들과 조우하고 노후 생활을 보내려고 한다.
그런 정 노인을 커튼 뒤에서 바라보는 누군가.
[저쪽 사는 사람이랑은 말도 하지 말아요. 할아버지.]
[왜?]
[북한 사람이 있어.]
[북한?]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설정인 듯한데, 배경도 80년대 아니면 90년대인 모양이다.
북한이라는 말에 기함을 하는 정 노인.
눈도 안 마주쳐야겠다며 노인이 결심을 한 후.
[…….]
영화답게 바로 마주쳤다.
시골 도시에서 주최하는 ‘어른들을 위한 음악 교실’이 열리면서 마주한 두 노인.
적대감이 심한 두 남자는 처음부터 서로를 싫어한다.
그런데 하필이면 두 할아버지가 음악 교실의 한 할머니에게 반하면서 문제가 생기는 스토리였다.
두 노인이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서로에게 창의적으로 엿을 먹이는 장면들이 흘러나올 때마다 웃음이 나왔다.
“흐하하하!”
“아, 진짜 재미있긴 하네.”
코미디 영화 같은 장면들이 계속해서 이어지면서 웃음이 나왔다.
마지막 결말의 반전까지 정말 예상치 못한 스토리들이 이어지면서 내내 흥미롭게 본 것 같다.
설마 할머니의 정체가 그럴 줄이야.
마지막에 나오는 타이틀을 바라보면서 막내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물었다.
“어떤 거 같아요? 진짜 재미있죠?”
“재미있네.”
“그죠? 제가 진짜 잘 소개해 줬죠?”
“응, 재밌다.”
50분이라는 짧은 분량 안에 있어야 할 이야기가 전부 다 들어가 있었다.
아무래도 이쪽 영화가 취향이 아니라서 그런지 평소라면 ‘볼 만했다’ 평가를 내렸을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지금은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오늘 영화를 볼 때 내가 집중했던 포인트는 바로 다른 거였으니까.
과연 선명주의 전기 영화를 이 사람이 만들면 어떨까?
보통 이런 음악인들의 전기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음악 장면이었다.
그런 점에 있어서 데보라 킴 감독의 영화는 내게 만족스러운 인상을 주고 있었다.
음악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센스도 센스지만, 영화에서 ‘음악 교실’이라는 소재를 정말이지 잘 녹여냈으니까.
“왜 유 감독님이 추천해 줬는지 알겠어.”
“그죠? 이런 분들은 독립영화 위주로 찍어서 그렇지, 상업영화 찍어도 잘 찍을 분이라니까요.”
“혹시 다른 영화들은 없어?”
“잠시만요. 저도 아직 안 본 것들인데… 어! 있다! 있어요.”
신이 나서 눈을 초롱초롱 뜨는 막내와 눈을 마주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자.”
“볼까요?”
곧바로 데보라 킴 감독의 남은 두 영화까지 달리기로 했다.
* * *
본격적으로 시작한 선댄스 영화제의 첫날.
“영화다! 영화! 하… 제가 이 날만을 위해 영어를 공부했나 봐요. 자막 없이 미국 영화를 볼 수 있다니! 아. 영어 공부하길 잘했어. 마이크 쌤! 보고 계신가요! 제자가 미국 영화를 자막 없이……!”
신이 나서 방방 뛰는 막내를 바라보며 동생들에게 말했다.
“백 년 만에 산책 나온 강아지 같네.”
“지호 엄청 신났나 봐요.”
웃으면서 입가에 손을 올리는 비주에게 내가 말했다.
“오늘 쟤 잘 부탁할게. 필요하다면 손목에 줄이라도 걸어서 끌고 다녀.”
“부탁대로 하긴 할 텐데… 아, 벌써부터 기 빨려.”
“제가 잘 데리고 갈게요.”
리혁이와 중현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막내를 방생했다.
“꺄하하하하하!”
“지호야!”
행복에 겨운 영화광을 우리 멤버들과 경호원들이 에스코트한 후.
나는 자리를 옮겼다.
온통 영화제 때문에 정신이 없는 파크 시티의 가장자리에 있는 어느 식당을 방문하기 위함이었다.
“여기가 아는 사람만 아는 맛집이거든. 영화제에 자주 오는 사람들은 다 여기에 식사하러 와.”
“오.”
“브런치를 주로 하는 곳인데 오믈렛이 정말 명물이야.”
유건 감독님이 소개해 준 곳은 구석진 곳에 있는 식당이었다.
스키장이 바로 보일 만큼 뷰가 좋은 식당에 미국인들이 와글와글 식사를 하고 있다.
「오?」
「어? 저 사람.」
「저기, 저쪽 봐봐. 아니 대놓고 고개 돌리지 말라고, 멍청아.」
나를 바라보고 ‘오?’ 하고 눈썹을 치켜뜨거나 고개를 돌리고 힐끔거리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눈이 마주친 이들에게 ‘Hi’ 하며 웃어 주고는 가장 구석진 테이블에 앉아 있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음?”
상대가 우릴 발견하고는 환히 웃었다.
코트 차림에 비니를 눌러쓴 30대 중반의 한국계 미국인.
길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오?’ 하고 한 번쯤 돌아갈 만큼 아름다운 인상이었다.
블라인드 테스트로 직업을 말하라고 하면 감독보다는 오히려 배우나 모델을 언급할 듯한 느낌.
“안녕하세요. 데보라 킴입니다. 그냥 한국어 이름 김보라를 써 주시면 돼요.”
정확한 한국어 발음에 석환 형이 살짝 놀랐다.
애틀란타에서 태어난 미국인이라고 들었는데 정말 위화감이 없는 한국어 때문이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윤석환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감독님. 선우주라고 해요.”
나와 악수를 하던 감독님이 꺄아 소리를 내며 좋아했다.
“제가 진짜 팬이에요.”
“아. 정말요?”
“수플레까지는 아니고 짭플레 정도. 짭플레 맞나요? 건이가 이런 경우는 짭플레라고 하던데.”
“네. 맞아요.”
뭔가 반갑다.
영어를 써야 하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한국어가 나와서.
유건 감독님과 김보라 감독이 포옹을 한 후, 브런치 메뉴를 주문하고는 가벼운 대화를 나눴다.
“…어제 그래서 저희 멤버랑 같이 감독님 영화를 정주행했거든요.”
“정주행이요? 자동차 운전할 때?”
“그… 처음부터 보는 거예요.”
“아.”
2010년대 한국어 톤과 발음이라서 인지하지 못했는데, 최근 한국에서 쓰이는 단어들에 대해 꽤 낯설어하는 미국 감독님이었다.
상대가 웃으며 물었다.
“그래도 저 한국어 잘하죠?”
“네. 정말 잘하세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그랬거든요. 이 나라에서 살려면 네 뿌리를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고. 그게 어떤 바람이 불어도 널 지켜 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거라고 뭐, 그러셨거든요.”
“정말 좋은 말씀이네요.”
유건 감독님이 옆에서 웃으며 말했다.
“쟤 때문에 진짜 고생했어. 미국 와서 영어 쓰려고 노력하는데 자꾸 와서 한국어로 말하자고 해서.”
“맞아요. 제 최신 한국어의 8할이 건이 덕분이거든요.”
내가 물었다.
“두 분이선 그러니까 같은 영화학교에서 공부를 하신 건가요?”
“네.”
“나랑 같은 남가주 대학교 출신이야.”
지호 말에 따르면 영화계의 명문으로 불리는 학교가 바로 저 서던캘리포니아 대학이었다.
저번에 월드 아트 스튜디오에서 제작자로 언급한 로버트 맥기니스 감독을 비롯해 할리우드의 전설들을 여럿 배출한 학교라나.
브런치로 나온 오믈렛을 쪼개며 석환 형이 물었다.
“오늘 어떤 자리인지는 알고 나오신 거죠?”
“네.”
김보라 감독이 으 하면서 어깨를 움츠렸다.
상상만 해도 두렵다는 듯한 표정.
“선명주 님의 전기 영화에 대한 미팅이라고 들었어요.”
“네. 맞긴 합니다만 너무 깊게 생각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부담 가지실 필요 없는 자리예요.”
내가 덧붙였다.
“아직 확정된 게 아무것도 없거든요.”
“아? 그래요. 그럼 다행이다. 편하게 얘기해도 되겠네요?”
“네.”
사실 석환 형과 나도 딱히 뭔가 방법을 정해 두고 나온 건 아니었다.
-차라리 그냥 우리가 만드는 건 어때?
자체 제작사인 스튜디오 레몬을 통해 제작해 보는 게 어떠냐는 말이 나오긴 했지만….
아직 구체화가 된 단계는 아니었다.
“저희도 이래저래 고민이 많거든요. 규모가 규모라.”
“그죠. 최소 수천만 달러는 들어가야 할 프로젝트니까.”
딱 견적을 내 주는 김보라 감독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천만 달러.
영화를 제대로 만든다고 가정했을 때 드는 액수는 한국 돈으로 최소 400억 정도.
자본 조달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지만… 섣불리 ‘한 번 해 볼까?’ 할 만한 프로젝트는 아니었다.
“일단 저희 제작사가 주축이 되는 것으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석환 형이 말했다.
“아무래도 할리우드 쪽에서 제시하는 조건들은 받아들이기 힘들기도 하고, 차라리 저희 쪽이 주도하는 게 좋을 것 같더라고요.”
“으흠.”
“물론 어찌 될지 확정이 된 건 아니지만요.”
생긋 웃고는 대화를 이어 갔다.
그 뒤로는 쭉 이쪽 영화 업계나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서 말이 이어졌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감독님이 음악을 직접 다 배치하신다고요?”
“네. 원래 영화 쪽으로 오지 않았으면 음악 쪽으로 진로를 정하려고 했거든요. 음악 감독까지 고용할 돈도 없고.”
“엄청 잘 배치하셨던데요. 저 보면서 정말 감탄했거든요.”
“고마워요.”
영화에 대한 재능이나 열정 등, 보면 볼수록 눈앞에 있는 감독님이 적임자라는 생각이 든다.
드라마가 작가 놀음이라면 영화는 감독 놀음 아니겠는가.
어찌 될지는 모르겠지만 감독은 이분이 맡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꾸만 스멀스멀 밀려온다.
‘이 사람 괜찮은 거 같지?’
‘좋은데?’
석환 형과 시선을 교환했다.
처음에는 단계적으로 차근차근 이야기를 할까 고민을 했는데, 최근 여러 프로젝트 제안이 들어와서 곧 결정을 할 거라는 김보라 감독의 말에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어찌 될지 모르지만 미리 찜해 두기로.
“혹시 괜찮으시면… 일단 감독직과 관련해서 제안을 한 번 드리고 싶습니다.”
석환 형의 말에 김보라 감독이 난색을 표했다.
“저를요?”
“네.”
“저 아직 상업영화 한 번도 만들어 본 적 없는데…? 필모 보면 알겠지만 저 독립영화 3개예요.”
“그런데 그 3개가 너무 대단했어요.”
어제 보았던 영화들에서 감명 깊었던 점을 이야기해 줬지만, 상대는 여전히 소극적인 분위기였다.
“이게 다른 상업영화면 저도 한 번 고민을 할 텐데… 이건 저 같은 조무래기가 만들 수 있는 영화가 아니에요.”
“왜요?”
“다른 분도 아니고 선명주 님의 영화잖아요.”
김보라 감독이 진지하게 말했다.
“미국에 살고 있는 모든 한국계 미국인들의 우상이 선명주 님인걸요. 그런 분의 영화를 제가 감히 제작할 수 있는 역량이 되는지 의문이 들기도 하고… 너무 중압감이 심해요.”
그냥 뭐 대충~ 하며 편하게 접근하던 할리우드 사람들과 다른 신중함 가득한 분위기가 몹시 마음이 들었다.
김보라 감독이 눈매를 좁히며 말했다.
“솔직히 선명주 님의 매력을 어떻게 살릴지도 고민이에요. 이번에 공개된 Question 같은 곡은 말할 것도 없고, 기존의 Sunset 같은 곡도 진짜 그 분위기를 어떻게 살리겠어요?”
“저희 아버지의 곡을 잘 알고 계시나요?”
“네. 재즈 팬이니까 당연하죠. 게다가 명반이 얼마나 많은데… 한정된 시간 동안 그걸 선정해서…….”
본인은 분명 거절하는데 내게는 달콤하게 들린다.
내게는 상대가 온몸으로 구애의 춤을 추며 ‘나를 감독으로 데려가 줘’ 하는 것처럼 보였다.
영화에 음악을 잘 녹여내는 재능.
할리우드 영화 산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는 한국계 미국인.
선명주의 음악을 전부 꿰고 있는 재즈 매니아.
내 입가에 미소가 자꾸만 머금어지는 가운데.
김보라 감독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이런 수천만 달러짜리 프로젝트를 저 같은 무명 감독에게 맡기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에요.”
“이 자리에 나오신 건 그래도 생각이 있으셨던 것 아닙니까?”
“네. 욕심은 나죠.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볼수록 오히려 제 자리가 아닌 거 같아요.”
부담감도 심하고 자신은 그 정도 능력이 안 된다고 말하는 이.
석환 형이 ‘으음’ 하면서 어떤 식으로 설득할지 고심하고 있을 때, 내가 석환 형에게 눈짓했다.
‘그거 말할까?’
‘괜찮을 거 같다.’
매니저의 승낙에 나는 비장의 수를 꺼내 들었다.
“근데 감독님에게 제안을 드리는 이유가 있어서요.”
“뭔데요?”
“얼마 전에 월드 아트 스튜디오와 미팅을 했는데요. 거기서 제안을 했던 게…….”
내가 속삭였다.
“아버지 배역을 흑인이나 중국인 배우에게 맡기겠다고 하더라고요.”
“…Sibal.”
“네?”
갑자기 벌어진 일이었다.
지금까지 방긋방긋 웃으면서 거절하던 김보라 감독님이 정색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그쪽에서 뭐라고 했다고요…?”
잠들어 있던 조상님들의 피가 깨어나는 미국인 감독의 모습에 석환 형과 내가 작게 웃었다.
김보라 감독 섭외 완료.
“다시 한번 들려주세요. 거기서 뭐라고 했다고요…?”
어….
아주 확실하게… 섭외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