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811화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있듯이.
보통 한국인이 해외에 거주하면 이런저런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고 들었다. 그 사회의 마이너리티로 살아가야 하니까.
인종 차별.
언어 문제 등등.
물론 출생부터 미국에서 태어난 한국계 미국인의 삶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선명주 님의 인종을 바꾸겠다고요…?”
눈을 이글거리는 김보라 감독님을 보고 있자니 지금까지 마음고생이 만만치 않았던 듯싶었다.
이글거리는 눈동자에 그간 쌓인 게 좀 많아 보인다.
“아니.”
김보라 감독이 헛웃음을 지었다.
“바꿀 게 따로 있지. 실존하는 인물을 바꾸겠다고.”
“그게 트렌드라고 하던데요.”
“성별과 인종의 장벽을 허무는 게 요즘 트렌드인 거? 그건 맞죠. 나도 그 뜻에 어느 정도 공감하고. 그런데, 그쪽에서 제시한 방식의 방향은 잘못된 게 맞아요. 차별적이기도 하고.”
그런 말을 하며 씩씩거리던 김보라 감독이 레모네이드를 쭈와아압 들이켜고는 손부채를 부쳤다.
그러고는 얼마 안 가 씁쓸하게 웃었다.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은 아니네요. 그게 바로 내가 알고 있던 할리우드니까.”
“영화 업계에 있다 보면 익숙한 일이지.”
유건 감독이 레모네이드를 홀짝이며 수긍했다.
“정말 별의별 일이 다 벌어진다니까. 수십 년 동안 감춰졌던 이쪽 업계 추문들도 최근 들어서야 터지는 마당이니.”
미국 영화업계를 잘 모르는 우리는 조용히 경청했다.
열이 확 올랐는지 김보라 감독이 코트를 벗고는 스웨터의 팔을 스윽스윽 걷었다.
“아. 열 받아.”
“음료 한 잔 더 시킬까요?”
“그럼 좋죠.”
이 집 명물이라는 레모네이드를 한 잔 더 시키고는 김보라 감독에게 물었다.
“그간 쌓이신 게 좀 많은가 봐요.”
“쌓인 거? 그냥 많은 정도가 아니고 진짜 폭발할 정도로 많죠.”
그녀가 얼음을 아그작아그작 씹는데, 마치 성난 햄스터가 해바라기씨를 먹는 듯한 풍경이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내가 어렸을 때 꿈이 배우였거든요? 솔직히 내가 좀 예쁘기는 하잖아. 이건 객관적인 사실이에요. 우주 씨도 본인이 잘생겼다는 거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으세요?”
“네. 알죠.”
“그래! 모를 수가 없다니까.”
유건 감독과 석환 형이 뚱한 얼굴로 우리 둘을 바라보았다.
김보라 감독이 새로 나온 레모네이드를 들이켜고 말했다.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오디션 보러 엄청 다녔거든요? 심지어 대학생 되고 나서도 오디션 보러 다녔어. 거의 10년을 할리우드에서 내가 오디션을 보러 다녔는데…….”
그녀가 물었다.
“어떨 것 같아요? 많이 붙었을 거 같아요?”
“네. 제가 감독이라면 뽑을 거 같아요.”
기본적으로 입체적으로 아름다운 이목구비라서 카메라에 살리기 좋은 얼굴이다.
저 감독님이 자기 첫 영화에 주연으로 나와서 알고 있다.
“단 한 번도 안 뽑혔어요.”
“……?”
“이상하죠? 그런데 진짜라니까요. 오디션 가서 아무리 준비를 해도 안 뽑아 주더라고요. 자잘한 소규모 프로젝트에는 선발됐어도, 메이저한 곳에서는 절대 안 뽑아 주더라고.”
그 이유를 궁금해할 때, 상대가 말했다.
“아시아계 치고 너무 서구적으로 생겼대요.”
“…….”
“그쪽에서 원하는 인상이랑 다르대요. 보면 할리우드 사람들이 생각하는 아시아인 얼굴이 딱 있거든.”
그녀가 명언을 남겼다.
“아시아계 배우 중에 잘생기고 예쁜 사람이 없는 게 아니에요. 이 새… 얘네가 자기들이 생각하는 스테레오타입만 내보내서 그런 거지.”
“그렇군요.”
“그러니까 선명주 님이 모두의 우상인 거예요.”
다시 돌고 돌아 우리 아빠로 이야기가 이어졌다.
“영화보다 더 glass ceiling이 강한 게 저 음악이거든요.”
“그런가요?”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아시아계 배우 이름 대라고 하면 댈 수 있죠?”
“네.”
몇 명 정도 알고 있다.
한국계 미국인이 미드나 영화에 출연하면 오오옷! 하면서 국내 미디어에서 소식을 전했으니까.
“그럼 가수는요?”
“음…….”
“이름을 알고 있는 아시아계 가수가 있나요? 보통 가수들 말고 TV에서 막 띄워 주는 가수들. 헤일리 블루 같은.”
“어… 없네요?”
미국에서 활동하는 아시아계 뮤지션들의 이름은 아주 많이 알고 있다. 이 자리에서 바로 스무 명은 답할 수 있다.
하지만 메인스트림에서 활동하는 가수라고 하면….
정말 한 명도 없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상한 일이긴 했다.
“정말 한 명도 없네요.”
“그죠? 이상하다니까. 노래하는 목소리만 들으면 가수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잖아요. 그럼 비율이 다양해야 하는데, 아시안 팝스타는 정말 한 명도 없거든요.”
“그러네요.”
“그냥 얘네가 안 끼워 주는 거예요.”
미국 대중음악의 메이저 가수의 인종 구성을 보면 백인, 흑인, 히스패닉은 자주 봤는데.
아시안 쪽은 정말 못 본 것 같다.
빌보드나 VMA, AMA 등에 가서도 무대에서 한 번도 못 보기도 했고.
“그런 대중음악 업계에서 메인스트림으로 활동하셨던 게 선명주 님이에요. 그야말로 대중음악과 재즈계의 레전드로 대우를 받으셔야 할 분인데. GOAT라고요. GOAT.”
“염소요?”
“Greatest of All Time이요.”
그런 말을 남긴 김보라 감독님이 후 하며 레모네이드를 마셨다.
열을 조금 식히셨나?
어찌나 휘몰아치며 말씀을 하시는지, 그 울분이 나한테도 전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마 이 자리에서 풀지 못할 에피소드들이 수백 개는 넘을 듯한 느낌이었다.
“고충이 많으셨군요.”
석환 형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쯤 되니 이해가 되지 않으십니까?”
“네?”
“왜 저희가 감독님에게 감독직을 제안하는지 말입니다. 지금쯤 그 이유를 깨달으셨을 것 같은데.”
곁에서 나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미국 놈들한테 맡기면 어떻게 될지 아시겠죠?
그녀가 몹시 수긍한 얼굴로 말했다.
“처음에는 부담감 때문에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생각이 바뀌었어요. 이거 내가 만들어야겠어요.”
“좋은 생각이십니다.”
“후… 진짜 큰일 날 뻔했네요.”
긴 머리를 쓸어 넘기는 감독에게 내가 말했다.
“단순히 감독님이 한국과 관련이 깊기 때문에 부탁을 드리는 건 아니에요. 저는 정말 감독님이 잘 만드실 거라 믿어요.”
“음? 정말요?”
“네. 애정이라는 게 정말 중요하거든요.”
솔직히 할리우드 대형 제작사의 노하우나 자본력은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애정이다.
“포토그래퍼 분들과 작업하다 보면 가끔 듣는 이야기가 있거든요. 아무리 사진을 잘 찍어도 아기 사진 찍는 데 있어서는 부모들을 이길 수 없다고요.”
애정을 가지고 누구보다 유심히, 주의 깊게 보기에 가장 뛰어난 사진을 찍어 낸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저희와 미팅했던 곳들 모두 동문서답을 하더라고요. 최근 아버지 공연에서 가장 좋았던 곡이 뭐냐고 묻는데… 다들 대답을 못하거나 심지어 제가 작곡한 Answer를 언급하는 곳도 있고.”
“세상에.”
“그런 의미에서… 저희 아버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감독님이 잘 살리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옆에서 듣던 유건 감독도 동의했다.
“애정이 진짜 중요하지. 그래서 감독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배우랑 작업을 하는 거야. 피사체에 애정이 담기면 카메라 앵글부터 달라지거든.”
김보라 감독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감독님?”
“잠시만요.”
혼자 골똘히 무언가를 생각하던 감독님이 이내 입을 열었다.
생긋 웃으면서.
“우선 감독 제안은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고 싶어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어요.”
그녀가 날 바라보며 말했다.
“우주 씨도 제작에 참여했으면 좋겠다는 조건이에요. 음악 작업 관련해서 꼭 필요하기도 하고.”
“저요?”
“네. 방금 말했잖아요? 애정이 담겨야 좋다고. 아버님의 곡에 대해 가장 애정이 큰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런 이유로 나를 음악 작업이나 제작에 참여시켜 달라고 한 모양이었다.
사실 말씀 안 하셨어도 당연히 참여할 계획이었는데.
내가 알았다고 말을 하려고 하는데, 옆에 있던 유건 감독이 쿡쿡거리며 웃었다.
김보라 감독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그래. 건아?”
“보라 너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응?”
“우주는 어차피 제작에 참여할 거야. 쟤가 제작사 오너거든.”
“……?”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감독님에게 내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모회사 지분을 조금 가지고 있어요.”
“조금이요?”
유건 감독님이 뭐라고 속삭여 주는 말에 김보라 감독님이 허억 하며 입가에 손을 올렸다.
확실히 미국인이라 그런지 제스처가 크다.
눈을 동그랗게 뜬 김보라 감독이 내게 물었다.
“가수 왜 해요?”
“좋아서요.”
“아, 그건 그렇지….”
그 말에 잠시 다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쨌거나.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감독직에 대한 구두계약을 마치고는 자리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
한국인 하나 없는 곳이긴 하지만 듣는 귀를 우려한 까닭이었다.
“건배!”
“건배!”
그래서 찾은 곳은 파크 시티에 있는 작은 펍.
“한국에서 이걸 뭐라고 한다고 했지?”
“낮술.”
“낮술 너무 좋아.”
유건 감독의 자문과 김보라 감독의 주도 하에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눴다.
아직 예산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래도 대략적인 개요는 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회사로부터 이 부분에 대해선 대주주로서 전권을 위임 받기도 했고.
“일단 촬영 스케줄이나 배우 오디션 등은 이렇게 하면 좋을 거 같고.”
“촬영 기간이 되게 짧네요?”
“편집이 좀 걸리지, 미국에서는 촬영 기간이 짧아요.”
보통 한국에서는 촬영 기간이 꽤 긴 편인데 할리우드는 일하는 방식이 좀 다르나?
유건 감독이 속삭였다.
“미국인들 인건비가 거어어업나 비싸.”
“…….”
“하루하루 촬영일정 길어질 때마다 그거 다 돈이거든. 한국처럼 사람 갈았다가는 제작사가 갈려 나가.”
“웃기긴 한데 뭔가 슬픈 이야기네요.”
카메라 감독을 비롯한 현장 인력들의 인건비에 대한 이야기가 도마 위에 올랐을 때.
내가 말했다.
“일단은 감독님을 도와줄 스탭들 구하는 게 일이겠네요.”
“그죠.”
감독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부분이 제일 문제긴 하죠. 할리우드 메이저 제작사들이 재수 없긴 하지만 틀린 말을 한 건 아니거든요. 한국계 미국인도 아니고 한국인 주인공이 미국에서 활동하는 영화니까.”
씁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할리우드 업계 사람들이 보았을 때, 굳이 잘 될 것 같아서 참여하고 싶을 만한 프로젝트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 부분이 조금 우려되긴 했다.
아무리 감독 놀음이라고 해도 영화는 혼자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다.
흔히 천만 영화로 꼽히는 영화들을 보면 스태프들의 많은 수가 업계 최고의 전문가들 아니던가.
좋은 스탭이 와야 좋은 영화가 될 수 있을 텐데…….
내가 그런 생각을 할 때, 상대가 생긋 웃었다.
“하지만 그 부분은 Don’t worry.”
“왜요?”
“좋은 인력들을 구하는 방법이 있거든요. 처음에는 이거 어떻게 사람 구하나 고민했는데… 지금은 그것도 확실하게 데려올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어요.”
의문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나에게 김보라 감독이 윙크를 했다.
“우주 씨가 방금 그 방법을 알려 줬어요.”
“제가요?”
* * *
그린 스크린이 가득한 할리우드의 거대한 촬영장.
어느 가정집을 고스란히 옮긴 듯한 스튜디오에서 고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런 썅!”
늙은 감독이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어떤 새끼가 문에다 저 지랄을 해 놓은 거야? 당장 튀어나오지 못해? 세트팀! 세트팀 어디 있나?”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명감독이자 욕쟁이, 로버트 맥기니스 감독이 핏대를 세우고 욕을 하고 있었다.
영화를 만들 때마다 전 세계 박스오피스를 석권하는 최고의 감독.
그런 까닭에 현장에서 고성을 지르거나 욕을 해도 무방한 포지션이긴 했지만… 그가 화를 낼 때면 다 이유가 있긴 했다.
“감독님 왜 저러신대요?”
보조 촬영 감독의 질문에 한기영이 영어로 답했다.
“세트팀이 문을 붉은색으로 칠해 버렸거든.”
“그게 왜요?”
“지금 씬 봐봐. 곧 있으면 은행 강도들끼리 서로에게 총격전을 시작할 거잖아?”
“그죠.”
“그런데 문이나 인테리어 소품에 빨간색이 있으면 피가 튀기는 게 보이겠어?”
“아…….”
은행털이에 성공한 강도들이 서로에게 총질을 하면서 ‘지미! 시발 죽어라!’ 하며 탕탕탕 하는 장면.
스크립트상으로 ‘문에 피가 튀긴다’ 라고 되어 있는데.
문을 붉은색으로 칠했다는 건 욕 먹어도 무방한 짓이었다.
“30분간 쉬겠습니다!”
결국 촬영이 딜레이되고, 맥기니스 감독이 소품 팀을 탈탈 털어 대며 닦달하는 동안.
올해 하반기 최고의 기대작으로 꼽히는 <웨스트 할리우드>의 촬영감독 한기영이 스튜디오를 나섰다.
“후우…….”
잠시 바깥 공기를 쐬면서 기지개를 켜는 그였다.
고되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감돌았다.
‘오래 걸렸다.’
업계에 처음 들어올 때부터 할리우드 레전드 감독의 영화에 촬영감독으로 들어오기까지.
영화업계에 진출한 한국계 미국인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커리어를 지니고 있는 인물이 바로 그였다.
깔끔한 영상미와 뛰어난 실력.
업계 최고의 감독들로부터 ‘정말 뛰어나다’는 칭찬을 마르고 닳도록 받고 있는 그였다.
그 때문에 한 번 같이 작업한 감독들을 비롯해 지금도 촬영감독에 대한 제안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제 웨스트 할리우드 촬영도 슬슬 끝물인데… 올해 스케줄을 어떻게 한다.’
좋은 제안들을 두고 저울질을 하며 고민할 때였다.
지이이잉-
핸드폰이 울리면서 그가 전화를 받았다.
최근 촬영장에서 쓸 일이 없던 한국어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기영 오빠! 잘 지냈어요?
독립영화 쪽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보라였다.
한국계 영화인들이 업계의 네트워크를 조직하기 위해 모인 파티에서 만났던 인물.
친화력이 좋고 서글서글한 성격이라 인기가 좋은 인물이었다.
“무슨 일이야? 지금 선댄스 가 있는 거 아니었어?”
-맞아요. 지금 선댄스에 있어요.
“작품 제출했어?”
-아뇨. 이번에는 그냥 게스트로 들어온 거라서…. 오빠 맥기니스 감독이랑 촬영한다면서요? 늦었지만 축하해요.
그런 식으로 스몰 토크가 이어진 후.
-혹시 바쁘시지 않으면 제안할 게 하나 있어서요.
“제안?”
-네. 저 이번에 상업영화 들어가요.
“축하한다. 제작비는 얼마짜리야?”
-한 사천만에서 오천만 달러 정도?
“꽤 소규모로 찍네.”
간단한 블록버스터 제작비가 기본 1억 달러가 넘어가니 그 정도면 소규모 영화였다.
대충 장르들이 짐작이 간다.
“그 정도 스케일이면 음악이나 뮤지컬 영화?”
-네!
“요즘에 유행이긴 하지.”
작년에 P.T. 바넘을 주인공으로 한 뮤지컬 영화가 흥행을 한 이후로 할리우드에서 눈독 들이는 분야였다.
-선명주 님 전기 영화 찍어요.
“오, 그래?”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긴 했다.
-네. 그래서 오빠한테 제안할 게 하나 있는데… 혹시 촬영 감독 생각 있으세요?
“나를?”
-당연히 페이는 맞춰드릴 수 있어요. 그치만 우리 한기영 감독님은 페이만으로 섭외가 불가능하니까.
그건 맞는 말이었다.
페이야 지금 업계 최고 수준으로 받고 있으니 그는 아쉬울 게 없었다.
그랬기에 그가 원하는 선택지를 고르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흥행하기가 힘들 것 같은데.’
선명주 영화는 딱히 메리트 있는 선택지가 아니었다.
‘너무 마이너해.’
아무리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해도 중요한 건 현재의 커리어였다.
“스케줄이 안 되는 건 아닌데, 솔직히 지금 들어온 프로젝트가 많아서… 고민을 좀 해 봐야 할 것 같다.”
에둘러서 ‘No’를 표현하고는 물었다.
“그런데 어디서 제작하는 거야?”
-스튜디오 레몬이라는 곳일 거예요. 아마도.
“처음 들어 보는데.”
-한국 회사거든요.
그럼 더더욱 사양이었다.
-뉴블랙의 우주가 소유하고 있는 회사예요.
“뉴블랙?”
-네. 이번에 제안 들어온 게 뉴블랙 우주한테서거든요.
뉴블랙이라는 말에 순간 다시 솔깃했다.
아들딸을 위한 사인 부탁을 하면서 ‘실물 어때?’는 후기를 물을 때.
신이 나서 썰을 풀던 김보라 감독이 은근슬쩍 운을 띄웠다.
-사실 저도 진짜 부담스러워요. 독립영화 찍다가 갑자기 상업영화 찍으려니까 후….
“잘할 거야.”
-그럴까요?
“오히려 늦은 감도 있지. 진작 갔어야 했는데.”
빼어난 연출력과 재능.
상업영화로 진즉 진출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영화계 후배였다.
한기영이 웃으며 말했다.
“평생 독립영화만 찍을 거라더니. 그나저나 왜 생각이 바뀐 거야?”
-제가 안 하면 남이 망칠 거 같더라고요.
“남이 망친다니?”
-우주 씨한테 그런 말을 들었어요. 할리우드 메이저에서 선명주 님 영화 제안이 들어왔는데…….
한기영 감독의 귓가에 그 말이 들려왔다.
-선명주 님을 흑인 배우로 하겠다고.
“…Sibal.”
-네?
“뭐라고 했다고?”
그가 이를 악물고 물었다.
방금까지 비워져 있었던 한기영 감독의 여름 스케줄이 채워지는 순간이었다.
* * *
전체 3억 인구에서 150만 명 정도로 미국인의 극히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한국계 미국인들.
비록 숫자는 적을지 몰라도 사회 곳곳에서 다양한 활약을 하고 있었다.
그건 할리우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배우나 가수 등 셀러브리티로 한정 지으면 별로 없긴 했다. 스크린으로 향하는 길을 가로막는 장벽들이 있으니까.
하지만 스크린 너머에 있는 기술 직군이나 전문직을 들여다보면 정말이지 많은 이들이 존재했다.
대본을 쓰는 시나리오 작가.
음향 엔지니어.
그래픽 효과 담당.
편집 감독 등등.
그중에서는 업계에서 최고 수준의 인력으로 꼽히는 이들이 심심찮게 존재할 정도.
그리고.
“뭐라고?”
그렇게 최고로 꼽히는 이들은 지금 모두 비슷한 반응을 하는 중이었다.
“Sibal…….”
“다시 한번 말해 봐. 뭐… 뭘 어쩐다고?”
“하다하다 이제는 내 정체성까지 건드리네. 미친 새끼들이.”
선명주의 배역을 어떻게 한다는 이야기에 급상승하는 혈압!
영어와 한국어로 다양하게 울려 퍼지는 욕설 속에서 전화기를 내린 이들이 심호흡을 했다.
몰려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이거 내가 안 하면 남이 조지겠구나.’
재능 넘치는 유망주 감독 곁에 드림팀이 모이는 분위기.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월드 아트 스튜디오가 협상장에서 했던 망언이 할리우드 최고의 스탭들을 불러 모으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