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818화
그래미 어워드.
미국 가요 시상식 중에서 넘사벽의 위상을 가지고 있는 시상식이다.
여태까지 우리가 참석한 빌보드, VMA, AMA 같은 시상식들도 대단한 시상식들이지만 그래미는 뭔가 한 단계 위에 있는 인상이다.
구름 위에 있는 올림포스 신전 같은 느낌?
그만큼 닿기 어려운 곳이기 때문에 미국 가수들이 꼭 상을 받고 싶어 하는 곳이기도 하다.
-2018 그래미 어워드 후보.
이번에 졸개들이 출연한 돌림픽에 이력으로 ‘그래미 어워드 후보’가 적힌 이유도 바로 그것 중에 하나였다.
수상도 아니고 후보라는 타이틀이 경력이 되는 시상식, 그게 바로 그래미였다.
어찌 보면 아카데미 시상식이랑 비슷하다.
영화 홍보를 볼 때면 그런 경험이 있을 거다. 상을 받은 것도 아니건만 홍보 문구로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라고 적힌 영화 포스터들.
“그래미가 대단하긴 하지.”
석환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너무 부담 가지진 말고. 아직 부담 가질 만한 커리어도 아니잖아. 너희 미국에서 활동한 지도 얼마 안 됐고.”
“그렇긴 하지….”
“게다가 Blue Moon은 수상확률도 높지 않은 편이야.”
객관적으로도 맞는 말이었다.
성적만 보면 60퍼센트 정도 확률이긴 한데, 그렇다고 다른 후보곡들이 별로라면 그건 아니니까.
쟁쟁한 후보들.
게다가 헤일리가 과거 히스패닉계 팝스타를 차별한 주최 측에게 ‘노망난 늙은이들’이라고 저주를 퍼부은 경력도 있다.
“그런데 자꾸 욕심이 난단 말이지.”
내가 말했다.
“내가 살면서 그래미를 또 언제 와 보겠어. 기왕 왔을 때 욕심을 조금 내 보는 거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내심 하늘에서 돈이 떨어지는 걸 바라는 게 현대인의 마음 아니던가.
꽁으로라도 상을 먹었으면 좋겠다는 내 포부에 석환 형이 웃었다.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래도 부담을 안 가졌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야. 너희 보고 상 받아 오라고 하는 사람도 없고. 굳이 말하자면… 부담 가지지 말라는 사람들이 더 많지.”
“홍보팀에 또 문의전화 쏟아졌겠네.”
“말도 마.”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전화해서 몸만 성히 다녀오면 되지, 상 욕심 내지 말라는 이야기들을 했다는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국민 아이돌이라는 타이틀이 이럴 때 참 좋다.
해외 나올 때마다 정말 든든해.
“아무튼.”
석환 형이 내 등을 떠밀며 말했다.
“시상식 참석할 때까지는 상에 대한 생각도 하지 마. 진짜 상상도 하지 말고, 그냥 편하게 마음먹어.”
“알았어.”
“이제 가서 동생들이랑 놀아.”
시상식에 대한 생각에 골똘히 잠겨 있던 내가 멀찍이 시선을 두었다.
깔끔한 인테리어.
세계적인 IT 기업에 방문한 것처럼 회사가 아니라 초호화 쇼핑몰에 온 듯한 공간이 우릴 맞이했다.
광고 영상이 흘러나올 법한 거대한 스크린이 회사 로비에 설치되어 있다.
-The New Black : Making Waves
‘N’이라는 로고가 적힌 회사 로비.
스크린에 우리 다큐멘터리 로고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와아아아아.”
감탄하고 있는 졸개들 사이에 합류해서 입을 벌렸다.
‘뉴블랙의 방문을 축하합니다’ 하듯이 다큐멘터리의 주요 장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더니…….
“헐! 헐!”
지호가 우리 팔을 찰싹찰싹 때려 가며 방방 뛰기 시작했다.
“형들! 형들! 시, 신이 예고편이에요!”
“신이 예고편?”
“네네! 저도 처음 보는데… 와아아아!”
막내가 출연한 넷플러스 드라마.
그 예고편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삐이- 삐이-]
[애애애앵!]
경보음과 사이렌이 울려 퍼지는 어두컴컴한 연구소.
붉은 등이 켜지는 가운데, 연구소에서 탈출한 무언가가 연구원들을 살해하는데 그게 무슨 괴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으아아악!]
마치 벌레가 날갯짓을 하듯이 괴물이 뜨드득 움직이는 소리.
연구원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면서 모골이 송연해지는 비명이 흘러나온다.
“미친… 연출 개쩔어.”
지호가 흥분한 얼굴로 지켜보고.
나와 중현이가 사이좋게 리혁이의 눈을 한 쪽씩 가려 주었을 때.
[Netplus Presents]
자막과 함께 구두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벅저벅.]
양복 차림의 주인공 ‘신이한’이 지켜보는 가운데, 브리핑하는 한국어 목소리들이 깔려 나온다.
영화 속 뉴스 목소리처럼.
[어젯밤 사고로 인해 실험체 007이…….]
[시간과 공간을 도약할 수 있는 실험체 007이 도망친 곳으로 예상되는 지점은 총 10곳으로…….]
[시간 여행이 필요한…….]
지퍼를 부욱 올리고.
점프수트 차림이 된 지호가 어떤 기계 위에 올라서고, 푸른빛에 둘러싸이기 시작했다.
“와아아아…….”
“저 정도면 CG팀이 통째로 갈렸네요.”
번쩍!
섬광과 함께 이제 예고편에서 주요 장면들이 짧게짧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침입자 복장을 한 채 조선의 왕궁 벽을 뛰어넘어 경비병들에게 비수를 뿌리는 주인공.
좀비 떼를 일으키는 고구려 장수와 대면한 주인공.
사람들을 납치해서 먹어치우는 유령선이 이양선으로 출몰해서 기묘한 포스를 풍기는 장면.
우물에서 거꾸로 솟아오르는 피분수와 뼈다귀들.
“우와아아…….”
한 번쯤 정지해서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은 장면들이 하나씩 이어졌다.
그렇게 긴박한 BGM과 함께 주요 장면들이 짧게 스쳐 지나갈 때.
마지막 장면이 흘러나왔다.
어딘가 악당 기지에 잠입한 듯한 주인공이 보초병들을 지켜보자, 같이 숨은 조력자가 말한다.
[두목을 암살하려면 들키지 않고 저들의 주의를 돌려…….]
피슉!
그 말이 끝나자마자 대놓고 비수를 던져 보초들을 제거하는 주인공.
‘지금 내 말 듣기는 들었냐?’ 하듯 조력자가 갓을 고쳐 쓰는 주인공에게 고개를 획 돌렸다.
[저희 암살하러 온 거 아니었습니까?]
[목격자가 없으면 암살이지.]
여기저기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마지막에 살짝 코믹한 느낌으로 끝나는 예고편이었다.
‘3월에 공개됩니다!’ 하는 자막과 함께 암전되는 화면.
“우와아…….”
박수를 치는 지호 곁에서 우리도 박수를 쳤다.
“우리 막내 연기 진짜 잘하네.”
“예고편만 봐서는 퀄리티 엄청 좋게 뽑힌 거 같은데요?”
“그러니까.”
아무리 관심 없는 사람이어도 이 예고편을 한 번 보면 본편을 꼭 보게 될 듯한 느낌이었다.
망자를 좀비로 만들어 일으키는 고구려 장수라니.
대체 어떤 식으로 내용이 전개되는 건지 궁금하기 그지없었다.
“우와아…….”
막내가 눈물이 뭉게뭉게 퍼지는 눈으로 말했다.
“저 진짜 이거 예고편 처음 보는 거거든요. 대박… 이 정도로 잘 뽑힐 줄은 몰랐는데…….”
“잘하더라. 우리 막내.”
“저 너무 행복해요. 지금.”
안 그래도 넷플러스 사옥에 방문했다고 설레던 막내는 아예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자기가 주연작으로 나온 드라마의 예고편.
수백억 예산 규모라고 어깨에 잔뜩 부담이 들어가 있었던 막내의 어깨가 이제야 스르르 풀리는 느낌이라고 할까.
뭐, 예고편만으로는 본편을 알 수 없긴 하다.
재미없는 예고편은 없으니까.
하지만 가끔 예고편을 뚫고 퀄리티를 뿜어내는 명작들이 있는데, 지금 신이의 예고편이 그런 경우였다.
「어떠십니까?」
넷플러스 사원증을 걸고 있는 한국계 미국인이 웃으며 물었다.
「뉴블랙 멤버 분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특별히 준비한 영상입니다. 예고편은 처음 보시죠?」
「진짜 최고예요. 너무 마음에 들어요.」
따봉을 연달아 날리는 우리 막내의 진심 어린 리액션에 여기저기서 화기애애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넷플러스 본사.
이번에 다큐멘터리가 세계적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특별 초청을 받았다.
“진짜 엄청 준비하신 거 같아요.”
비주의 속삭임에 고개를 끄덕였다.
주요 거래처를 극진하게 대우하듯이, 뉴블랙으로 꾸며진 로비를 비롯해 다양한 배려들이 보였다.
특별히 안내역으로 한국계 미국인을 붙여 준 것도 그렇고.
「자! 이곳으로 오시죠. 이곳은 저희 회사에서 직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복지시설이고요.」
세계 최고의 OTT 회사가 어떤 식으로 굴러가는지 체험할 수 있는 기회였다.
“우와.”
“이 정도면 회사에서 눌러 살아도 되겠어요.”
“퇴근하지 말고 회사에서 살라는 뜻을 이렇게 고급지게 말할 수 있는 거구나.”
어떻게 해야 사람들을 효율적으로 갈아댈 수 있는지 잘 보여 주는 공간이었다.
잠시 뉴블랙 TV 카메라가 꺼졌을 때.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회사 소개를 해 주는 한국계 미국인 소피아 씨에게 친근하게 한국어로 속삭였다.
“복지가 진짜 장난 아니네요. 회사 시설이 이렇게 좋으면 회사 다닐 맛이 나겠어요.”
“너무 좋죠. 회사 문화도 마음에 들고, 시설이 너무 좋아서 처음에 다닐 때는 너무 행복했는데…….”
“그럼 지금은?”
“파워볼 복권 당첨되는 게 꿈이에요.”
아무리 시설이 좋아도 회사는 회사라는 사실을 깨달을 뿐이었다.
어쨌거나.
자본주의 종주국이 ‘인간은 이렇게 굴려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인테리어나 시설을 보며 우리도 열심히 필기했다.
“우리도 회사 신사옥을 이렇게 꾸며 볼까?”
“대표님한테 톡 드리려구요.”
비주가 대표님에게 건의사항을 톡톡톡 보내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다시금 촬영이 재개되면서 생기 없던 소피아 윤의 눈이 반짝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자! 영화관을 보셨으니 이제 카페테리아를 방문하시죠!」
영화관.
구내식당.
명상실.
헬스장.
다양한 시설을 둘러보고는 회사 임원들과도 짧게 대화를 나누었다.
대충 요런 용건이었다.
-다큐 2편 찍자. 아니면 콘서트 영화라도!
1편의 성과에 고무된 건지 다큐 2편도 찍자는 듯한 뉘앙스의 제안이었다.
게다가 할리우드에 소식이 퍼졌는지 아빠 영화에 대한 제안도 있었다.
-우리가 6,000만 달러 줄 수 있는데.
한화로 700억가량 되는 돈을 선명주의 전기 영화에 투자해 줄 수 있다는 제안이었다.
그것도 아무 간섭 없이.
가슴이 두근거리는 제안이긴 했지만 이 부분도 사실상 거절을 했다.
「실무진과 함께 진지하게 고려해 보도록 할게요.」
「네, 천천히 검토해 주시고 연락 부탁드리겠습니다.」
일단 넷플러스는 최후의 선택지로 보류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아빠의 영화를 극장에 걸고 싶은데, 넷플러스와 계약하면 극장에 걸기가 좀 힘드니까.
현재 미국 영화계에서는 OTT와 주류 영화계가 치열하게 혈투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야! 이 새끼들아! 극장 다 죽는다!
-꼽냐? 니들이 꼬우면 어쩔 건데.
-이게 뒤질라고.
-에베벱! 안 들리! 안 들리!
뭐… 대충 이런 관계라서.
넷플러스 영화라고 꼭 극장에 못 거는 건 아니지만, 영화계에서 배척 받을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당장 유명 감독들이 만든 영화도 넷플러스 쪽이라고 ‘극장에 안 걸리는데 그게 영화임?’ 하면서 상을 안 주는 게 미국 영화계였다.
뭐. 벌써부터 상 받을 생각하는 게 웃기긴 한데 사람이 만약을 대비해야 하는 것 아니겠나.
그런고로 석환 형이 매듭을 잘 지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긴밀하게 소통하도록 하겠습니다.」
좋게좋게.
언젠가 다시 엮일 수도 있는 곳인 만큼 서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미팅을 마무리했다.
* * *
오전에 넷플러스 사옥 방문을 마친 후.
내일 그래미 어워드 참석을 앞둔 우리는 숙소 대신 다른 곳으로 향했다.
바로 LA 근교에 있는 대저택이었다.
“오빠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예인 씨.”
머리카락이 긴 리혁이라도 해도 믿을 만큼 똑 닮은 리혁이의 여동생이 우리를 반겼다.
꽃다발과 선물을 건네며 말했다.
“대학 붙었다면서요. 정말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브라운 대학이라고 했나.
미국의 명문 대학에 합격했다는 리혁이의 여동생을 축하해 주고는 점심 식사를 같이 했다.
졸개들과 내가 흐뭇하게 웃었다.
“와. 오빠는 사이버 대학 다니는데 동생 분은 아이비리그를 가셨네요.”
“동생 분 정말 훌륭하시네요~!”
“리혁아, 동생 분 좀 본받아라.”
언제 사람이 가장 즐거운가.
그것은 바로 아무 반격도 할 수 없는 동생을 공격할 때였다.
찌릿한 눈빛이 돌아온다.
‘이따 가만 안 둘 거예요.’
‘그래그래.’
동생 앞에서 세상 착하고 순한 오빠 컨셉을 잡아 버린 리혁이.
틴스피릿이 대중들 앞에서 시발을 쓰지 못하듯 우리에게 인상을 못 쓰는 리혁이었다.
그저 다정한 오빠처럼 동생을 챙기는 리혁이의 모습을 귀엽게 바라볼 뿐.
중현이가 물었다.
“어머님은 어디 가셨어?”
“회사 일이 바쁘셔서 아마 저녁에 올 거예요. 나가서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하자고 하던데요?”
의류업체를 운영하시는 어머님의 근황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
2층으로 따라 올라오라는 리혁이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오늘 여기서 자자고 했어?”
가족한테 신세 지는 게 싫다고, LA에 와도 매번 호텔에 머무를 것을 주장하던 리혁이었다.
그런 애가 갑자기 꼭 오늘은 자기 집에 가자고 하니 의아했다.
의문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우리에게 리혁이가 뒤돌아보며 말했다.
“찾아야 할 게 좀 있어요.”
“찾아야 할 거?”
고급스러운 카펫과 예술품으로 장식된 복도에서 리혁이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내 방 아니면 창고에 있을 거거든요. 그런데 그게 조금 중요한 물건이라…….”
“얼마나 중요한데?”
“가치로 따지면 지금 수십억에서 수백억 정도? 정확히 얼마일지는 나도 몰라요.”
“……?”
아리달쏭한 말을 하는 리혁이에게 물었다.
“일단 그래서 뭘 찾으면 되는데?”
“컴퓨터 하드 드라이브처럼 생긴 걸 찾으면 돼요.”
“대충 네모난 상자를 가져오면 된다는 거지?”
비주가 리혁이게게 물었다.
“중현이한테 냄새 맡게 할 만한 건 없어?”
“야. 김비주. 내가 무슨 강아지냐.”
“그래서 너 할 수 있어, 없어?”
“가능.”
이윽고 금속 냄새를 찾아 헤매는 중현이와 비주.
그리고 나와 지호, 리혁이가 한 팀이 되어 곳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주로 창고와 리혁이 방이었다.
“뭔 물건들이 이렇게 많아?”
“어머니가 제 물건을 다 이렇게 보관해 놨다고 하더라고요. 유치원 때부터 시작해서…….”
어머님의 애정이 느껴지는 공간들이었다.
리혁이가 아기 때부터 어머님과 같이 살았을 때까지 쓰던 모든 물건들이 정리되어 있는 방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지만, 그 양이 너무나도 방대한 탓에 원하던 것을 찾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찾았다. 하드 드라이브.”
중현이가 흐뭇한 탐지견 같은 표정으로 하드 드라이브를 가져왔다.
곧이어 그걸 자기 방에서 컴퓨터로 연결하는 리혁이.
우리가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여기 뭐가 있길래 찾아달라고 한 거야?”
수백억에서 수천억이라는 말을 들으니 뭔가 불안하기도 하다.
혹시 얘가 갑자기 ‘초등학생 때 펜타곤을 해킹해서 기밀 정보를 취득했죠. 후후’ 그러기라도 할까 봐.
중현이가 말했다.
“여기에 어마어마한 비밀이라도 있는 거야?”
“아뇨. 딱히 그건 아닌데요.”
리혁이가 말했다.
“이게 뭔지 말했는데 못 찾으면 형들이 두고두고 잠을 못 잘 거 같아서요. 지금은 찾았으니까 됐죠.”
그러고는 침을 꿀꺽 삼키더니 노트북에 연결된 하드 드라이브를 살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비트코인이에요.”
요즘 들어 투자수단으로 각광받고 있는 암호 화폐였다.
리혁이가 말했다.
“2008년인가 내가 초등학생일 때 비트코인이 처음 등장했거든요.”
“그래?”
“네, 그때 처음 등장해서 인터넷에서 시끌시끌했거든요. 차세대 화폐다 뭐다 해서… 나도 그때 인터넷에서 컴퓨터 잘하는 아저씨들이랑 토론하고 그랬던 기억이 있어요.”
그러면서 말을 이었다.
“아무튼 나는 호기심이 생기면 해 봐야 되는 스타일이라서 그때 당시에 비트코인을 채굴하고 그랬거든요.”
“……잠깐만.”
내가 멈칫하고 물었다.
“2008년에?”
“네. 초창기예요.”
그런 기사들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닌다.
비트코인 초창기에 ‘피자 한 판 값으로 채굴한 비트코인이 지금은 수천 억?’ 하는 류의 기사들.
동생들과 내 심장이 쿵쿵거리는 소리가 방에 울리는 듯했다.
콩닥콩닥.
“얼마 전까지 잊고 살았는데 비트코인이라는 키워드 보니까 이게 떠오르더라고요.”
하드 드라이브를 연결한 리혁이가 계산을 하며 말했다.
“이게 그러니까 지금 현재 가치로 따지면…….”
이윽고 리혁이의 입에서 이게 얼마인지 액수가 나왔다.
모두의 표정이 멍해졌다.
“얼마라고…?”
앉아 있어서 다행이다.
안 그랬으면 다리가 휘청거렸을 테니까.
“와.”
막내가 말했다.
“전용기는 처음부터 우리 곁에 있었던 거네요.”
“리혁아. 가수 왜 했어?”
“리혁이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
“안녕하세요. 서리혁 고객님, 혹시 선명주 영화 프로젝트에 관해 들어 보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전용기는 물론이고 우리 아빠 영화 정도는 코웃음을 치며 제작비를 투자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리혁이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딱히 나한테는 의미 없는 돈이에요. 이미 돈은 누구들 덕분에 충분히 벌 만큼 벌었고. 돈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나는 사람에 더 의미를 두는 편이어서….”
우리를 둘러보던 리혁이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사실 내가 이걸 찾으려고 한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에요.”
“……?”
하드 드라이브를 장치에서 제거한 리혁이가 내게 내밀었다.
“전에 그 이야기 했잖아요. 어머님과 아버님의 이름을 따서 은명재단으로 만들겠다고요. 그래서 그걸로 전 세계에서 음악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지원하겠다고요.”
“응.”
“내가 그 재단의 첫 번째 기금 출연자가 되어 볼까 해요.”
“……?”
그러면서 하드 드라이브를 내게 내미는 리혁이의 미소가 뇌에 각인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멍하니 그걸 받아드는 나에게 리혁이가 웃으며 말했다.
“부담 가지지 말고 받아요.”
“어…….”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뭉클함.
감동.
우정.
가족애.
그 무엇이라고 말하기 힘든 무언가가 목구멍을 타고 쭉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동생들도 놀라서 바라보는 동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 거 같아서 고개를 살짝 젖혔다.
“어…….”
리혁이에게 할 말이 정리가 안 된다.
일단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리혁아. 정말 고마워. 이, 얼마냐. 이게…….”
리혁이에게 액수를 계산해서 고맙다고 말하려고 할 때.
시세를 확인한 지호가 말했다.
“방금 5천원 떨어졌어요. 형.”
“그래?”
그럼 얼마지.
“리혁아, 네가 준 이…….”
“어? 아닌가? 만원 올랐어요. 형!”
“…….”
“헐! 지금은 또 내렸네.”
실시간으로 요동치는 비트코인 시세.
“…….”
“…….”
감동 분위기를 와장창 망친 막내를 나와 리혁이가 원망 가득한 눈으로 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