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866화
현장에서 떠들썩한 웃음이 터지는 동안 내가 마이크를 들었다.
-지혁 씨.
-네! 선배님!
눈을 똘망똘망 뜨고 존경한다는 제스처를 보이는 참가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벌써부터 저의 마음이 덕순덕순하네요.
-영광입니다. 선배님.
-어찌하여 이런 인재가 초야에…….
극찬을 하는 내 모습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김덕순에 대한 이야기라면 2절, 3절을 넘어 100절을 하고 싶었지만 방송이라 참았다.
그렇게 모두가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무대가 시작됐다.
-OK.
콜드 브라운이 마이크를 들었다.
-DJ. Drop the beat.
곧이어 시작되는 4조의 싸이퍼 무대.
방청객들이 환호하는 동안 4조의 첫 번째 참가자가 마이크를 들었다.
From the KLV
yeah 내 꿈의 크기는 항상 커져왔지
작아지진 않았어
아마추어 힙합 클랜 소속이라는 참가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싸이퍼가 시작됐다.
심사위원들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마음에 든다는 뜻이다.
콜드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친구들 마음에 들어.」
전체적인 협업도가 높은 팀이었다.
「적절한 타이밍에 치고 빠지고… 좋아. 좋아.」
콜드가 중얼거리며 심사평을 메모하는 동안 나도 무대를 지켜보았다.
싸이퍼(Cypher)는 래퍼들이 차례대로 랩을 보여 주는 미션.
그 때문에 각자의 마지막 랩이 끝나면 다음 참가자가 바로 치고 들어가는 게 중요했다.
지금까지의 팀 중에서 계홍주의 팀 다음으로 그게 잘 이어지는 것 같다.
“괜찮은데?”
“예상했던 것보다 더 좋은데? 홍주네만큼 잘해.”
“잘하네.”
심사위원들이 코멘트를 주고받을 때, 마지막으로 김지혁이 나왔다.
헤이션이 자기 레이블로 데려올 거라고 침을 바르던 참가자.
확실히 그 말대로였다.
이거 보러 오기 전에 마지막 편에서 보았던 심사위원 머신건의 코멘트가 떠오른다.
-지혁아. 랩은 공간이 핵심이야. 공간을 둬야 운율감을 살릴 수 있어. 지금 너무 비좁다. 좀 넓혀야지.
빈 공간을 만들어서 랩의 리듬감을 더 살리라는 조언.
그걸 반영했는지 확실히 더 발전해 있는 참가자였다.
콜드 브라운의 눈썹이 기분 좋게 올라간다.
「흔치 않은데.」
피드백을 받아들여서 빠르게 발전한 모습을 고평가하는 듯했다.
솔직히 실력으로 따지면 3강 구도에서 방요찬과 계홍주보다는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편이었다.
한쪽은 재능과 잠재력 하나는 인정한다는 평을 듣고, 벌써부터 팬을 가득 모은 참가자고.
한쪽은 DNS 미디어에서 키워 낸 결전병기 같은 연습생이었다.
그 둘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지혁이는 진짜 가르칠 맛이 난다니까.”
“확실히 그래.”
심사위원들의 말마따나 가르칠 맛이 나 보이는 참가자였다.
기본기가 탄탄한 랩.
음색이 반은 먹고 들어간다는 랩에서 묘한 느낌을 주는 발성.
성실함.
여러 가지 요소들을 조합하고 보니 왜 헤이션이 탐내는지 이해가 간다. 힙합 쪽만 아니었다면 나도 조금 탐났을 것 같으니까.
My 너희에게 나의 것을 소개하지
Me 그리고 내게 뭐가 의미 있는지
랩 구성도 제법 괜찮다.
리스너에게 직접 다가가는 만큼 가사 전달이 핵심인 랩.
서두에서 자신이 무엇을 말할지 개요를 늘어놓아 관객들의 이해를 높이는 부분에 가산점을 주었다.
평소 중현이에게 자주 들었던 조언이었다.
-랩은 반드시 잘 들리고 잘 이해되어야 해요. 형. 제가 농사 빼고 다른 건 잘 모르지만 이건 확실해요.
-중현아. 농사 빼고 다른 걸 모르면 안 되지…. 너는 가수인데….
이윽고 I, My, Me, Mine으로 이어지는 랩.
나는 누구고.
나는 무엇을 가졌고.
내게 의미 있는 것은 무엇이고.
그리고 나는 이 대회의 모든 것을 내 것(Mine)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힌 벌스가 이어진다.
자신에 대해 솔직하게 소개하는 랩.
이니미니 마이니 모 같은 영어 구어를 넣어서 리듬감도 살리는 랩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가사 내용을 듣던 콜드가 점수를 적으며 내게 물었다.
‘어때, 써니?’
‘같은 의견이에요.’
콜드 브라운과 내가 서로를 바라보며 점수판에 점수를 적었다.
[우주 & 콜드 브라운]
25점
만점이었다.
이윽고 무대가 끝나면서 방청객들이 박수를 보냈다.
우리만 좋게 들은 것이 아닌지 다른 심사위원들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네. 멋진 무대 잘 보았습니다.
MC인 리토가 마이크를 들면서 심사위원들도 한마디씩 했다.
-이야. 너네 연습 진짜 많이 했겠는데? 언제 그렇게 연습들을 했대?
-잘하네.
-이거 진짜 리스펙.
심사위원들의 칭찬에 참가자들이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대체로 호평이었다.
멘토링을 맡은 헤이션이 ‘나의 제자들이다! 후후후!’ 하면서 웃고 있는 동안 다들 한마디씩 했다.
나와 콜드 브라운의 평가까지 끝난 후.
-참가자들 너무 고생 많았습니다. 각자 하고 싶은 이야기 있다면 한마디씩….
심사를 마치고 나서 한마디씩 하는 시간에 각자 고맙다며 말을 했다.
그리고 마이크를 든 김지혁이 자신의 팬들에게 인사를 하며 말했다.
-저도 보니까 드디어 팬분들이 생긴 것 같은데… 저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뭐라고…….
방청석에서 누군가 ‘아니야아악!’ 하면서 웃음이 한 차례 나왔다.
그러고는 흐뭇하게 웃는 헤이션에게 시선을 돌리는 참가자.
-선생님 조언 덕분에 이번에 정말 더 발전한 것 같습니다.
가장 먼저 팬.
그다음 고마워해야 하는 사람들.
정석적인 순서를 지키며 소회를 밝히는 이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에게 배운 건지, 본인이 깨우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대로 가면 잘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드는 참가자였다.
흐뭇하게 웃고 있을 때.
-저… 그리고 우주 선배님께도.
-저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바라보던 참가자가 내게 말했다.
-제가 한때 아이돌 연습생 준비하면서 레몬 엔터 오디션을 봤는데 번번이 낙방했거든요.
-아…….
-뉴블랙 선배님들처럼 되고 싶은 게 꿈이었는데.
1000대 1의 경쟁률이었다는 말을 하던 전직 연습생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되진 못했지만 선배님께 칭찬받으니 기분이 정말 좋은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숙이는 참가자에게 나도 웃으며 박수를 쳐 주었다.
뭔가 내게 말을 하려다 마는 분위기였는데… 무엇을 망설이는지 짐작이 가서 웃음이 나왔다.
방송 끝나고 이야기나 조금 나눠 봐야겠다.
* * *
곧이어 발표되는 종합 순위표.
심사위원들의 점수에 이어 관객들의 투표가 합산되면서 탈락자가 결정됐다.
-네. 그럼 안타깝게도 탈락자를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MC 리토가 엄숙한 목소리로 탈락자를 소개했다.
서바이벌 특유의 긴장감을 살리기 위해 BGM이 흘러나오고 저마다 자신들이 지닌 하트 카드를 내놓았다.
이 프로그램에서 생명을 상징하는 카드.
-1조.
1조가 제출한 카드가 담긴 항아리.
곧이어 초록 불이 들어왔다.
-생존하였습니다.
방요찬과 다른 팀원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4조의 생존도 발표됐다.
김지혁이 안도했다.
‘살았다….’
짜릿한 아드레날린이 스쳐 지나가면서 바로 급격한 피로감이 몰려올 때.
2조와 3조가 자리에 섰다.
-두 팀 중 한 팀이 탈락을 하게 됩니다.
탈락자는 바로 3조였다.
카드가 담긴 항아리에 붉은빛이 들어오며 카드가 모조리 불타올랐다.
여기저기서 나오는 탄식.
곧바로 개인전으로 싸이퍼 대결을 한 이들 중 낙오자들이 선정되면서 랩 배틀의 녹화가 마침내 끝났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방청객들에게 작별 인사를 마친 후.
빈 녹화장에서 참가자와 심사위원들끼리 인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울기 시작하는 탈락자들과 포옹을 하거나 달래주는 사람들.
그곳에서 탈락자들에게 위로의 말을 한 콜드 브라운과 우주가 참가자들에게도 팬 서비스를 해 주었다.
사진 촬영.
포옹.
콜드 브라운에게 잘하고 있다는 조언을 들은 김지혁이 한숨을 돌리고 있을 때였다.
“저기.”
듣기 좋은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김지혁이 고개를 돌리자 선우주가 서 있었다.
“…엇, 선배님!”
꾸벅 숙이는 그에게 우주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오늘 무대 잘 봤다고 말하려고 왔어요. 대단하던데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생글생글한 웃음을 띤 얼굴이 그에게 물었다.
“오늘 무대 끝나고 나서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맞죠?”
“네. 맞습니다.”
이미 다 아는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에게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레몬 엔터 오디션 보고 싶습니다.”
아마추어 래퍼들을 경쟁시키는 서바이벌.
어떻게든 연예인이 되고 싶어 출연을 결정하긴 했지만, 이곳에서 자신의 미래가 잘 그려지지 않았다.
-난 1년 후에 뭐 하고 있을까?
그래서 상상을 해 보았지만 딱히 그려지는 게 없었다.
아무리 국민적인 인기를 끌었던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라고 해도 화제성이 지속되는 기간은 최대 6개월.
특히나 힙합 같은 마이너 장르는 더더욱 그 기간이 짧다.
그렇다면 화제성이 꺼지기 전에 힙합 쪽에서 성공을 거두어야 하는데 말은 쉽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다시 눈앞에 아른 거리는 원래의 꿈.
-아이돌 쪽으로 가자.
프로그램에서 괄목할 만한 성적을 거두거나 인지도를 쌓는다면 대형 기획사에도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틴스피릿같이 외모 요구치가 지나치게 높은 MOP는 어렵겠지만….
힙합을 중시하는 KM 정도는 가능할지도 모르니까.
“우리 회사 오디션을 봤다고 했죠?”
“네. 한 대여섯 번 정도…. 한 번은 조규환 이사님께서 진행하는 3차까지도 간 적이 있었는데.”
“음. 그렇구나.”
선우주가 그의 얼굴을 요모조모 살피더니 말했다.
“조 이사님이 못 알아보셨을 리가 없는데.”
“네?”
“혹시 춤이…?”
“…….”
“춤이구나.”
잠시 동질감을 느끼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는 선우주.
김지혁이 어리둥절한 기분을 느꼈다.
‘뭐지.’
아이돌 댄스 랭킹에서도 최상위권에 뽑히는 뉴블랙의 리드댄서.
댄서들이 항상 1순위로 질색하는 비주 다음으로 춤을 잘 추는 멤버가 춤에 고통 받을 일이 뭐가 있을까.
잠시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는 우주.
“랩 말고 다른 특기가 있나요?”
“작곡… 쪼금 할 줄 알아요. 물론 선배님이 보시기엔 부족하시겠지만 이번 비트도 제가 짰습니다.”
“그래요? 어떻게 만들었어요?”
“그게…….”
과정을 설명하자 주의 깊게 듣는 우주.
그러다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거기에 딜레이를 걸었다고요? 중심 리듬에는 보통 딜레이를 잘 안 거는데 이상하네. 초기 반사음을 주려고 한 건가요? 아니다. 그럼 숏딜레이를 썼어야 하는 건데….”
“저는 초보라서요… 선배님…….”
“아. 미안해요. 제가 작곡 얘기만 나오면 흥분해서… 그리고 재능 있는 것 같은데요?”
작곡 이야기를 나누던 우주가 어딘가 마음에 드는 노비를 바라볼 때처럼 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맑은 눈이 그에게로 향했다.
“실례가 아니라면 혹시 나이가? 고2 맞나요?”
“네. 열여덟입니다.”
“진짜 어른스럽네요… 리혁이나 지호가 이랬으면 정말 소원이 없을 텐데…….”
그런 말을 하던 우주의 눈동자가 무언가를 계산하듯이 움직였다.
그러고는 지갑에서 명함을 하나 꺼냈다.
“만약에 <넥스트 미션> 끝나고도 여전히 연습생이 해 보고 싶다. 혹시나 그런 마음이 들잖아요? 그럼 이 번호로 연락 주세요.”
“……!”
“물론 제가 추천은 하겠지만 오디션의 합격 여부는 엄연히 지혁 씨에게 달려 있다는 점을 꼭 기억해요.”
기회는 주겠으니 성과는 네가 얻어 보라는 선배 가수의 말.
명함을 멍하니 바라보는 김지혁에게 선우주가 맑게 웃었다.
“말 나온 김에 조언도 하나 해 주자면… 춤이 부족하다고 했잖아요? 그걸 상쇄하려면 반대급부로 큰 타이틀이 필요할 거예요.”
우리 회사에 들어오고 싶으면 넥스트 미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라는 조언.
그 말에 김지혁이 말했다.
“우승하고 가겠습니다.”
“기대할게요.”
그 말을 남기며 사라지는 선우주.
무언가 홀린 것처럼 잠깐 명함을 본 사이에 선우주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런데…….’
김지혁이 명함을 바라보면서 멈칫했다.
‘선배님이 주신 명함의 상태가…?’
그가 받은 명함의 연락처가 반짝거렸다.
[박규호]
레몬 엔터 대표이사
‘전화… 절대 못 걸 것 같은데…….’
고등학생의 심정이 벌렁거렸다.
* * *
“어디 다녀왔어?”
“잠깐 참가자 좀 하나 만나고 왔어요.”
원석이 형의 물음에 대답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퇴근 준비로 부산스러운 대기실.
스타일리스트들이 짐을 챙기는 동안 나는 쓰레기봉투를 찾았다.
원석이 형이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아까 쓰레기봉투는 왜…?”
“아. 이게요.”
“우주야. 너 맨손으로 그러면…….”
내가 봉지를 뒤적이면서 목표물을 찾아냈다.
비닐에 쌓인 비주의 수제 쿠키.
쓰레기통에서 갑자기 비주의 쿠키가 나오면서 대기실에 정적이 흘렀다.
내가 설명했다.
“누가 받자마자 버리는 걸 봤어요.”
곧이어 터지는 비명.
“어떤 새끼가 신성한 비주의 쿠키를…!”
“나도 한 번밖에 못 받아본 건데!”
“어떤 놈이야? 그놈을 쓰레기통에 넣어야…!”
영애님이 구운 쿠키를 함부로 버린 놈을 없애 버리자는 발언들이 오갈 때.
자세한 설명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내가 설명을 해 주었다.
“……그렇게 된 이야기예요.”
다시 정적.
“…….”
“…….”
그리고 2차 괴성이 터져 나왔다.
가만 안 두겠다. 백만 수플레과 함께 그놈의 SNS를 침공해야 한다 같은 격한 발언들이 터져 나올 때.
원석이 형이 말했다.
“이건 진짜 아닌 것 같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 보는 앞에서…. 이건 내가 어떻게 따로…….”
“이야기하지 마세요. 형.”
너무 없어 보이지 않는가.
내가 웃으며 말했다.
“넌지시 전할 방법은 무궁무진하니까요.”
“……그래도.”
“이런 일은 절대 우리가 직접 말을 하거나 손을 쓰지 않는 게 중요해요. 형도 잘 알잖아요.”
그래서 다른 방법을 쓸 예정이다.
솔직히 그냥 넘길까 하는 생각도 하긴 했지만… 비주의 쿠키가 쓰레기통에 담긴 걸 보고 마음을 바꾸었다.
다른 건 몰라도 우리 애가 만든 건데.
콜드 브라운이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어떻게 하려고?」
「일단 몇 가지 떠오른 게 있어요.」
슬기롭게 이번 사태를 해결하는 방법.
몇 가지 떠오르는 게 있었다.
이윽고 퇴근 준비를 마친 콜드 브라운과 우리 일행이 복도로 나왔다.
“어어! 벌써 가시나요!”
바쁘게 뛰어 온 피디님이 말했다.
“지금 제작국장님 오셨거든요. 우주 씨와 콜드 브라운 씨에게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아…….”
마침맞게 멀리서 누군가 뛰어오고 있다.
한 번 얼굴을 본 적 있는 사람이었다.
“아이고! 안녕하세요! 우주 씨! 저번에 레몬 엔터 오픈 파티에서 뵀죠? 저 제작국장 이한수라고 합니다.”
K넷의 프로그램 총괄을 맡고 있는 이한수 제작국장.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내 머릿속에서 있던 시나리오 중에 하나가 반짝반짝거렸다.
이거다.
“네. 안녕하세요. 국장님.”
“벌써 가시네요. 인사 좀 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오늘 녹화는 잘 하셨습니까? 하하하!”
적절한 타이밍.
그 말에 내가 입을 열었다.
“그…….”
마음속으로 5초 정도를 셌다.
그러면서 아련한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
아주 짧지만, 이런 순간 특유의 숨 막히는 정적에 제작국장이 목울대를 꿀꺽였다.
“그….”
“예?”
“아니에요.”
내가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 즐거웠습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그, 그렇군요.”
내 눈짓에 원석이 형이 빠르게 나섰다.
“실례지만 다음 스케줄이 바빠서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에 제대로 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 국장님.”
“엇… 예. 예. 그러시죠.”
“그럼.”
정중하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인사한 내가 발걸음을 옮겼다.
터덜터덜.
10인조 사기단처럼 우리 스탭들도 힘없는 발걸음으로 이동했다. 그 속에 맞장구를 치던 콜드가 조용히 물었다.
「뭐야?」
「방금 문제를 해결했어요. 콜드.」
「응? 그걸로?」
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곧 알게 될 거예요.」
* * *
국민 아이돌이 떠난 직후.
K넷 제작국장의 눈동자가 지진을 일으켰다.
‘뭐지? 뭘 실수한 거지?’
‘그때 내가 좀 너무 치근댔나…? 아니야. 그건 아닐 텐데… 아니… 왜 반응이 저렇지?’
‘아니다. 뭔가 촬영장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이돌 팬들의 돈과 관심으로 먹고 사는 케이블 방송에게 가장 중요한 고객이자 슈퍼 갑인 뉴블랙.
그런 뉴블랙의 리더가 보여 준 이상 징후에 그가 아래의 CP를 불렀다.
“야. 봉철아. 우주 씨 기분이 그냥저냥이던데 촬영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 그런 표정은 처음 본다. 꺄르륵…이 아니고 가르륵? 그런 느낌이던데.”
곧이어 CP에서 PD로 전해지는 외침.
“얌마. 너 현장 관리를 어떻게 했길래 우주 씨가 열이 오른 거야?”
거기에서 증폭 또 증폭.
“우주 씨가 정말 열이 오를 대로 올라 버렸단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건데? 어? 아니 그 착한 사람이…!”
“우주 씨가 앓아 누웠다더라!”
“우주 씨가 열이 났대! 열 받아서! 고열이라더라! 너네 뭘 한 거냐고!”
어느 곳에서든 지켜보는 눈과 귀가 있는 연예계.
카메라에 찍힌 것도 아니건만 낮에 있었던 일들의 자초지종은 금세 밝혀졌다.
결국 제작국장의 귀에도 들어온 사연.
K넷 프로그램 제작의 전권을 휘두르는 제작국장의 서슬 퍼런 추궁과 협박에 CP가 이실직고를 했다.
“그러니까 중견기업 사장이라는 지인이 아들 좀 챙겨달라고 떡고물을 줘서 받아먹었고, 봉철이 너는 그 참가자를 비호했고?”
“그, 진짜로 무슨 대가를 받았다기보다는…….”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CP나 PD들이 중간에 해 먹고 그러는 건 알 바 아니다.
실무진들이 일으키는 사소한 문제들은 제작국장인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선우주다, 봉철아. 선우주. 그동안 얼마나 뒤를 봐줬길래 겁대가리 없이 면전에다 음식을 던져? 그거 아무도 제지 안 했어?”
“그게… 음식은 아니고 쿠키……. 던진 건 아니고 쓰레기통…….”
“뭐?”
“…….”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꾸하는 CP에게 제작국장의 눈이 호랑이처럼 변했다.
고심이 깊어지는 눈.
‘이걸 어쩐다.’
그냥 참가자 실수라면 괜찮다.
철딱서니 없는 인간들이야 워낙 이 바닥에 널리고 깔렸으니 그건 당사자들의 문제니까.
하지만 그간 CP가 뒤에서 비호한 것 때문에 참가자가 그런 돌출행동을 한 거라면 문제가 다르다.
아무 대처가 없다면 그게 K넷의 뜻이라고 오해를 하게 만들 수 있는 사건.
제대로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 주지 않는다면 앞으로 K넷의 방송에서 뉴블랙을 보는 게 요원할지도 모른다.
“으음…….”
그랬기에 제작국장은 다소 과격한 결단을 내렸다.
* * *
샤워실에서 나온 방요찬이 씨근거렸다.
“에이씨.”
오늘 촬영에서 느꼈던 일들을 떠올리며 그가 벽을 때렸다.
“악!”
그러고 손을 부여잡았다.
아프다.
하지만 오늘의 아픔을 동력으로 삼아… 언젠가 성공할 것이다.
‘어쨌든 편집은 될 테니까.’
머리가 차갑게 식으면서 잠시 후회가 되기도 했다.
분명 인터넷으로 현장 어땠다 하는 이야기가 돌 테니까. 팬이라던 애들도 좀 떨어져 나갈 수도 있고.
하지만 프로그램 내부적으로는 편집이 될 테니 일단 살았다고 할…….
“야. 그거 들었어?”
합숙소에서 수군거리는 참가자들.
“우리 프로그램 CP 날아갔대.”
“날아갔다고?”
“몰라. 갑자기 CP 교체된다던데? 다른 프로 하는 CP가 우리 프로그램도 맡기로 했대.”
방요찬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CP가 바뀌었다고?’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말리던 중이었던 그가 그대로 굳었다.
‘왜…?’
왜 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답이 예상 갔다.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어느 국민 아이돌의 얼굴.
방요찬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CP를 그렇게 날릴 수 있는 거였어?’
무소불위의 권력자 같았던 CP가 하루아침에 교체되었다는 말에 비현실적인 기분을 느꼈다.
이런 일이 가능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으니까.
무언가 거대한 것을 잘못 건드렸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머릿속에 들면서 두려움이 엄습했다.
‘어, 어떻게…?’
하지만 얼마 안 가 방요찬은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CP가 사라졌다는 것의 의미.
그건 지금까지 그를 보호해 주고 있던 강력한 방패막이가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
“…….”
그런 그를 싸늘하게 바라보는 참가자들.
그리고 카메라를 들고 흉흉하게 웃는 제작진.
이 자리에는 없지만 목을 뚝뚝 꺾고 있을 심사위원들.
“…….”
실드 없이 맨몸으로 남겨진 방요찬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앞날에 암운이 드리우고 있었다.
* * *
연예계.
그 어느 곳보다도 소문이 빠른 곳.
-뉴블랙 우주 때문에 K넷 프로그램 CP가 교체됐다더라.
하지만 소문이 퍼지는 속도만 빠를 뿐.
정확하진 않았다.
“K넷 CP가 교체됐다면서요?”
“진짜?”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내부적으로 치부가 좀 있는지 소문이 안 새어 나왔지만 CP가 바뀌었다는 소식에 모두 입을 벌렸다.
지상파만큼은 파워가 강하지 못한 게 케이블 프로그램의 PD라지만 이런 식의 일은 드물기 때문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왕설래할 때.
“엥?”
곧 런칭할 넷플러스 드라마 <신이>의 프로모션을 위해 방송국을 방문한 뉴블랙의 막내가 갸웃했다.
‘뭐지. 사람들이 왜 일케 친절해졌지.’
예전에도 친절했지만 한층 더 친절해진 사람들.
예전에 형들이랑 왔을 때와는 또 다른 태도였다. 지호를 볼 때마다 크게 반겨 주는 방송국 사람들.
‘이봉철 CP의 사례를 잊지 말자.’
‘CP도 날아가는 마당에… 조심하자.’
그런 친절을 지켜보던 막내가 결론을 내렸다.
“역시.”
단서들을 조합하니 확실했다.
지호가 확신에 찬 얼굴로 거울을 새침하게 들어 보였다.
‘나 쫌 많이 귀여운 걸지도…?’
늘상 그러하듯 잘못된 결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