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875화
방요찬은 간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시발, 시발, 시발….’
바로 어제 넥스트 미션이 방영되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핸드폰이 없어서 무슨 내용이 나갔는지 알 수 없다는 것.
그래서 밤새 뒤척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게 설마 다 나갔을 리 없어. CP가 교체됐다고 하지만 아빠가 손을 썼을 수도 있고.’
‘아씨 핸드폰은 왜 안 주고 지랄인데. 진짜.’
‘편집… 진짜 편집이 조금은 됐겠지?’
CP가 교체가 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PD에게 면담을 신청하긴 했다.
-저, 지금까지 좀 죄송했습니다… 제가 조금 성격이 불같은 면이 있고, 솔직히 프로그램이 사람을 좀 이렇게 만드는 것도 있잖아요. 물론 저도 잘못이 있긴 해요. 그치만…….
그런 사과를 들은 메인 PD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의 말을 잘 들었다는 말과 함께.
그렇게 분명 면담은 분위기가 좋게 끝났는데…….
‘꿍꿍이를 모르겠네.’
진심 어린 사과를 했지만 딱히 먹혀든 느낌은 아니었다.
아무튼 뭔가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을 직감한 방요찬은 지난 일주일간 행동을 좀 바꾸었다.
예의 바르게.
-안녕하세요.
하지만 스튜디오 복도를 지나가던 작가에게 인사를 해도 작가들은 쌩 하고 지나갈 뿐이었다.
다른 스탭들도 별반 차이가 없다 보니 슬슬 부아가 치밀었다.
‘사과했잖아?’
쫌생이처럼 구는 스탭들을 볼 때마다 화가 치밀었지만 일단은 당장 급한 불을 꺼야 하는 상황.
오늘도 방요찬은 고개를 꾸벅하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음?”
며칠 전이었다면 휙 하고 지나갔을 조연출이 그를 바라보고 우뚝 멈춰 섰다.
그러고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요찬이 안녕.”
“네. 안녕…하세요.”
고개를 까딱하며 걸어가는 조연출의 모습에 방요찬이 눈을 깜빡거렸다.
‘왜 갑자기 인사하고 난리야?’
처음에는 의아했지만 이내 머릿속에 전구가 띵 하고 들어왔다.
바로 그거였다.
‘아빠가 손을 썼다…!’
중견기업 오너로서 나름대로 사회에서 힘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였다.
새로운 CP를 어떻게 구워삶기라도 한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스탭들의 태도가 정중하게 바뀐 것 아니겠는가.
방요찬의 기분이 롤러코스터를 타듯 금세 좋아졌다.
‘그럼 인사 안 해도 되겠다. 아니다. 그래도 잠깐 관리는 해야지.’
싱글벙글 웃으며 스탭들에게 인사를 하는 방요찬이었다.
조명감독이나 카메라 감독 등등 오늘따라 그의 인사를 받는 이들이 따스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어, 요찬이 왔네.”
“그래. 요찬이. 잘 잤고?”
며칠 전에는 개무시하더니.
새로 들어온 CP가 무슨 단도리를 쳤는지 스탭들이 그를 바라보는 표정이 따스했다.
‘어제 방송 걱정은 좀 덜해도 되겠다.’
상쾌한 기분으로 스튜디오에 입장하는 방요찬.
휘파람까지 불면서 입장하는 그의 모습에 다른 참가자들이 시선을 돌리곤 눈을 찌푸렸다.
‘왜 저래.’
싱글벙글 웃던 방요찬이 친하다고 생각한 참가자들에게 어깨동무하며 ‘야 준비 잘했냐?’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기분이 좋았다.
근처에 있던 김지혁이 그를 흘깃 쳐다보기 전까지는.
‘눈빛 봐라.’
방요찬의 기분이 확 나빠졌다.
“야.”
“네?”
“왜 그렇게 쳐다봐? 내가 띠꺼워?”
“…….”
평소처럼 시비를 걸어 대는 스물여섯 살짜리의 말에 열이 오르던 김지혁이 고개를 저었다.
‘우주 선배님을 본받아야 한다.’
자신의 우상을 떠올린 김지혁이 마음가짐을 바로 했다.
우주 선배님이 자신과 같은 상황이라면 어떤 식으로 행동을 했을까.
김지혁이 웃으며 꾸벅했다.
“죄송해요. 형.”
공손하고 예의 바른 내 이미지는 지켜 내고, 미친놈과는 격 떨어지게 맞상대를 하지 않는다.
짧은 사과의 말에 방요찬이 뭐라고 말을 하려다가 궁색해진 표정을 지었다.
방요찬이 일부러 들리라는 듯이 다른 참가자에게 말했다.
“형. 저 새끼 예전부터 나 졸라 싫어하는 거 같애. 눈빛이 마음에 안 든다니까.”
“아… 그래?”
그런 대화를 대충 흘려넘긴 김지혁이 야심찬 표정을 지었다.
지금 그에게 저런 조무래기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중요한 것은 목표.
특별 심사위원으로 왔던 우주가 그에게 박규호 대표의 명함을 건네주면서 했던 말.
-춤이 부족하다고 했잖아요? 그걸 상쇄하려면 반대급부로 큰 타이틀이 필요할 거예요.
-우승하고 가겠습니다.
그의 눈이 이글거렸다.
‘반드시 우승하고 레몬 엔터 연습생으로 들어간다.’
상상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일이었다.
레몬 엔터에서 데뷔를 하고, 핸드폰 연락처에는 우주와 뉴블랙 선배님들의 직통 연락처가 담기게 되고.
생일날에는 12시 00분에 ‘선배님 생일 축하드립니다’ 하면 선배님이 답장도 보내 주는 것이다!
-고마워 지혁아 ㅎㅎ 너가 1번으로 축하해 줬네
뉴블랙과 연락을 하고 지내는 가수가 될 수 있는 기회.
김지혁이 주먹을 꼬옥 쥐었다.
‘…그날이 올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매번 시비 거는 방요찬은 하찮은 방해물일 뿐이다.
오히려 진짜 무서운 사람은 바로 옆에 있는 계홍주 같은 연습생이었다.
DNS 미디어의 힙합 아이돌 계보를 이을 것이라고 여겨질 만큼 실력이 어마어마한 참가자.
그런 시선을 느꼈는지 계홍주가 흠칫하며 먹던 초콜릿을 반쪽으로 나눴다.
“지혁아. 초콜릿 먹을래?”
“응.”
“배고프지?”
레몬 연습생을 지망하는 꿈나무와 DNS 미디어의 연습생이 사이좋게 초콜릿을 우물거리는 한편.
‘근데….’
유달리 오늘따라 싱글벙글하는 방요찬을 보며 김지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까지 울상이더니 왜 갑자기 저러지?’
그 이유를 고민하고 있을 때 <넥스트 미션>의 MC 역할을 맡은 미남 래퍼, 리토가 들어왔다.
“안녕.”
이제 십수 명밖에 안 남은 참가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주며 인사하는 리토.
그의 시선이 방요찬에게도 향했다.
리토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요찬이도 안녕.”
“눼~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일부러 오버하듯 헤벌쭉 웃으며 답하는 방요찬의 모습에 참가자들이 ‘왜 저래?’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방요찬의 기분은 다시 업됐다.
아빠가 저기도 손을 쓴 게 분명했다.
‘그래. 역시 뒷돈 받으면 다 똑같다니까.’
하지만 그렇게 상황을 인식한 방요찬과 다르게 김지혁은 빠르게 상황을 인식했다.
무슨 일인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저런 거 때문이었구나.’
심사위원 중에서 유독 방요찬을 싫어하던 티를 냈던 리토가 오늘은 반갑게 인사를 해 주고 있다.
그 모습에 방요찬의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하지만… 김지혁은 의아할 따름이었다.
‘저거 작별 인사인 걸 모르나?’
싫어하던 친구가 있었어도 전학 가는 날이 되면 으레 ‘거기 가서 잘할 거야’ 하며 웃어 주지 않던가.
앞으로 다시 만날 일이 없다고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나오는 법이다.
처음에는 이해가 안 갔던 김지혁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눈치가 저 모양이니 우주 선배님한테 그랬겠지.’
그쯤에서 김지혁은 조무래기에게 신경을 끄기로 했다.
그러는 한편.
한껏 업된 기분으로 리허설을 마친 방요찬은 본격적으로 방송 녹화가 시작되면서 의아함을 느꼈다.
‘뭐지?’
그가 입장하면서 방청객들의 시선이 내리꽂혔기 때문이었다.
바보라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쟤야?”
“맞아. 쟤가 우주랑 동갑인데…….”
“…방송에서…….”
흐릿한 키워드들 속에서 ‘우주’ 라는 말이 들려오면서 불길해졌다.
게다가 그를 바라보는 시선도 호의적이지 않았다.
피부가 따끔따끔할 만큼 살벌하다. 마치 마차로 호송되는 대역 죄인을 쳐다보는 표정.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여자애들 어디 갔지?’
팬이라면서 플래카드 들고 꺅꺅대던 여자애들이 다 사라져 있었다.
손 흔들어 주면 좋아하고 그랬는데, 지금은 정말 눈 씻고 아무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자리를 메운 것은 다른 참가자들의 팬뿐.
방청객들이 그를 한심하거나 징그러운 바퀴벌레를 쳐다보듯이 보고 있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눈이 마주친 여고생에게 씩 웃어 보였지만, 상대가 눈이 썩었다는 표정으로 친구에게 뭐라고 속닥이면서 방요찬의 멘탈에 금이 갔다.
그가 가장 집착해 왔던 인기.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요찬아!’ 하던 팬들이 바글거렸는데… 그것이 가짜였던 것마냥 사라져 있었다.
“…….”
그를 바라보며 훈훈하게 웃어 주는 제작진들의 모습에 방요찬이 무언가를 깨달았다.
그리고.
개인전 무대가 끝나고 투표 시간이 되면서 방요찬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방요찬 [0표]
단 1표조차 없었다.
“…….”
그야말로 멍했다.
그 뒤부터는 뭐가 어찌 됐는지 기억도 안 났다. 그냥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있었을 뿐.
“요찬 씨는 여기 핸드폰이랑 짐 챙겨 가시고요. 어, 지웅아. 수고했어. 울지 말고, 잠깐 음료라도 마시고 갈래?”
평소 때였다면 다른 참가자에게는 ‘지웅아~’ 하고, 자신에게는 엮이기도 싫다는 듯 존대하는 제작진의 말에 신경 썼을 텐데.
지금은 그런 겨를조차 없었다.
그저 멍하니 스튜디오 밖으로 내쫓겨서 짐을 든 채 핸드폰을 꺼낼 뿐.
“…….”
그리고.
얼마 안 가 방요찬의 손에서 핸드폰이 떨어졌다.
툭.
운동화의 뭉뚝한 코에 핸드폰이 떨어지는 감촉이 느껴졌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미친…….’
온라인이 그야말로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평소에 누군가에게 이런 일이 있으면 낄낄댔을 텐데, 자신이 그 상황에 처하니 웃음이 나올 수 없었다.
선우주의 인성을 찬양하면서 그를 까대는 댓글들을 본 방요찬이 울먹이며 분노했다.
“으아아아아!”
이런 상황을 만든 선우주와 K넷에게 분노가 치밀었다.
분노에 찬 그가 온 힘을 다해 스튜디오의 벽을 쾅 찼다.
그런데.
‘…에?’
무언가 콰직하는 느낌.
곧이어 어마어마한 통증이 찾아오면서 그는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 * *
-[포토] ‘넥스트 미션’ 방요찬, 발가락 골절
“…….”
“…….”
심술궂게 생긴 빨간머리가 아이고 하며 바닥을 역동적으로 구르는 사진.
내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이건 뭐야. 형?”
“그 참가자 최신 근황인데 네가 궁금할 거 같아서.”
석환 형의 말에 내가 헛웃음을 보였다.
“대체 무슨 상황인 거야?”
“0표로 탈락했다고 그러던데. 화가 나서 스튜디오 벽 차다가 발가락이 부러져서 병원 갔대.”
탈락 예정인 방요찬을 취재하러 왔던 취재진이 그걸 목격하고 사진을 담은 모양이었다.
포토 뉴스 아래로 복작복작한 댓글창.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콘크리트에 대고 이불킥하는 빡대가리가 어디 있냐 요찬아..
-굴렁쇠 맛집이네 아주 잘굴러
-불꽃남자 방요찬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오늘의 영화 대 영화입니다! 여기 패가망신 끝에 자신의 발가락을 스스로 조진 한 남자가 있습니다. 한편 랩의 황제와 함께 미국을 조지고 돌아온 남자가 있죠.
-포브스 선정 대한민국에서 가장 추한 남자 1위
-요찬아ㅠㅠㅠ 그 대가리로 어케 살아왔니
비웃음 가득한 댓글창을 바라보면서 나도 헛웃음을 보였다.
“내가 어지간하면 다른 사람한테 이런 말은 안 쓰는데… 진짜 가지가지…….”
“동감이다.”
“그래서 탈락한 거래?”
“응. 당분간은 볼일 없을 거야. 지금 여론이 워낙에 안 좋으니까. 힙합 쪽 레이블들이 다 사린다더라고.”
제법 나쁘지 않은 랩 실력 때문인지 방송에 나올 때만 해도 여러 힙합 레이블이 탐낸다고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180도 달라진 듯했다.
“뭐. 러브콜을 보내는 곳이 하나 있긴 한데… 너도 이름은 들어 봤을 거야. 블랙머니 클랜이라고.”
“아아.”
“너희 디스했던 래퍼들 있잖아. 거기 사장이 트래쉬라고 너희 디스 가사 썼다가 사과한 사람이야.”
작년도 <드랍 더 비트>에서 4위를 거둔 유명 힙합가수 트래쉬.
팬덤 층이 탄탄하지만 허세 가득한 가사로 대중들에게는 비호감인 래퍼로 알고 있다.
“영입하겠다고 SNS에 글 썼다고 욕을 엄청 먹었거든. 보여 주려고 했는데 지금은 글을 삭제한 모양이네. 생긴 거랑 다르게 유리멘탈인가 봐.”
“굳이 그런 데까지는 신경 쓸 거 없어.”
사실 그것보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쪽은 내가 영입을 제안했던 김지혁이었다.
잘하고 있으려나.
왠지 과거의 나를 보는 것 같기도 해서 정감이 갔던 참가자였다.
아무튼 <넥스트 미션>의 5회차는 비호감 참가자가 데굴데굴 구르는 것으로 엔딩이 났다.
“참, 이거 받아가라. 우주야. 키즈 초이스 녹화에 쓸 메시지.”
“오케이.”
석환 형이 서류를 건네주는 걸 받을 때였다.
두 손으로 정중하게 건네주는 상대의 모습에 내가 물었다.
“왜 갑자기 두 손으로….”
“예의를 지켜야 하니까.”
“…….”
눈을 지그시 감고 부르르 떠는 내 모습에 석환 형이 깔깔 웃었다.
“진짜. 형 내가 미워할 거야.”
“예예, 아이고 무서워라.”
“나 화나면 무서운 사람이야. 이렇게.”
짐짓 화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석환 형은 짓궂게 웃을 뿐이었다.
서류를 받아 들고 나서는 내게 TF팀 직원들이 단체로 일어나 배꼽 인사를 했다.
“잘 가시옵소서.”
“……!”
“항상 낭낭하게 챙겨 주시는 성과급의 은혜에 깊디깊은 감사를 느낄 따름이옵니다.”
문을 탕 닫는 내 뒤로 깔깔 웃는 웃음소리들이 들려왔다.
* * *
학교 다닐 때 보면 유독 놀림 받는 사람이 있다.
그냥 놀리는 것에 반응하는 표정이 웃겨서 자꾸 놀리게 되는데…….
“그게 저일 줄은 몰랐죠.”
작업실에서 Y앱 화면을 바라보며 울적하게 이야기하는 내게 수플레들이 위로를 했다.
-근데 오빠 뭐라고 했어요?
-안 들었음
-ㅠㅠㅠㅠ 아무튼 위로
“…….”
-그거보다 예의를 지켜 주세요 해 주세요!
-예의!!
-오빠 예의를 지켜 주세요 한번만
-예의를 지켜 주세요 하면 저 공부 열심히 해서 서울대갈게요
서울대는 가야지.
요청대로 ‘예의를 지켜 주세요’ 하니까 꺄르륵 좋아했다.
“그럼 서울대 가시기로 약속한 거예요. 붙으시고 부모님한테 제 덕분이라고 말해 주기.”
댓글이 반짝거렸다.
-사실 이미 다니고 있지롱☆ 18학번 김현지 데헷
내 표정에 ㅋㅋㅋㅋㅋ가 무한히 올라가는 댓글창.
오늘부로 결심했다.
Y앱을 인수해서 차단 기능을 만들기로.
18학번 김현지 씨를 나만의 치부책에 197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죄명 최애 기만죄.
하지만 수플레들의 놀림을 멈출 순 없었다.
“…아니.”
라이브가 끝나고 졸개들에게 억울함을 토로했다.
“치부책 썼다고 나 보고 늙은이래잖아.“
“치부책이 뭐예요?”
막내의 물음에 내가 답했다.
“복수할 사람 적는 리스트.”
“음?”
리혁이가 갸웃하고는 핸드폰을 톡톡했다.
“…사전 검색하니까 금전출납하는 책이라고 하는데요. 그 용도가 아닐 텐데.”
“그래? 할머니는 거기다가 복수할 사람들 이름 적던데. 내 이름이 많이 적혀봐서 알거든.”
김덕순 여사가 용도를 잘못 알고 있는 건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손을 멈췄다.
다음 달 콘서트에 쓸 음원을 편곡하던 것을 멈추고 동생들과 함께 6층의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본래는 의상을 피팅하는 곳인데 오늘은 영상을 찍기 위해서였다.
“준비됐어요. 형?”
환히 웃으며 묻는 비주.
내게 못되게 굴었던 이의 탈락 소식을 들어서인지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이는 비주였다.
“준비됐어.”
“그럼 쓸게요.”
매니저들이 카메라를 세팅하는 동안 우리가 저마다 머리에 탈을 뽁 하고 썼다.
야채 탈이었다.
딸기 탈을 쓴 지호와 블루베리 탈을 쓴 리혁이.
브로콜리 탈을 쓴 중현이와 바나나 탈을 쓴 비주.
포도알의 탈을 쓴 나.
리혁이가 물었다.
“대체 여기에 야채가 어디 있다는 건데요…?”
“중현이가 있잖아.”
브로콜리가 된 중현이가 흐뭇하게 웃었다.
“자, 그럼 연습 좀 해 보자.”
오늘 우리가 녹화할 메시지는 바로 키즈 초이스의 수상 소감이었다.
Kid’s Choice.
피플스 초이스, 틴 초이스와 같은 시리즈로 어린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걸 뽑는 시상식이다.
작년도에 우리가 출연해서 슬라임 대포를 피하는 영상으로 유명해진 시상식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제작진이 칼을 갈고 있다고 들었다.
-올 거지? 뉴블랙 진짜 올 거지?
하지만 정말 안타깝게도.
“꺄르륵.”
“꺄륵.”
아쉽게도 우린 갈 수가 없었다.
-컴백 준비 중이라서 미안.
-Answer 프로모션 돈 건 뭔데…! 왜 안 오는 건데!?
콘서트와 컴백 준비 기간이 겹쳐 미국 시상식에 출연할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인지도가 부족했던 작년과는 달리 메트로 이후로는 꽤 입지를 다진 상황.
작년도에는 출연을 권장했던 미국 에이전시 측도 ‘이건 그냥 영상으로 축하 메시지 보내시죠’ 하며 제안했다.
브로콜리 탈을 쓴 중현이가 말했다.
“확실히 미국에서 잘 되긴 했나 봐요. 상도 두 개나 받았네요.”
“게다가 하나는 일반 부문이야.”
작년도에도 탔던 ‘Global Music Star’ 상과 더불어 ‘Favorite Music Group’이란 상도 수상했다.
이벤트성으로 주는 상이 아니라 그보다 더 윗급인 일반 상.
이전보다 확실히 뭔가 한 단계 올라갔다는 느낌이 들어서 기분 좋은 미소가 나온다.
“자. 그럼 녹화합시다.”
어린이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좋기로 유명한 비주가 제일 먼저 운을 뗐다.
바나나 탈을 쓴 비주가 손을 흔들었다.
“Hi, Kid’s choice!”
어린이들이 ‘Hi!’ 하면서 방방 뛰는 모습을 상상하며 우리가 소감을 말했다.
「…정말 감사하고요. 그리고 어린이 여러분! 부모님 말은 잘 듣고 과일과 야채를 많이 먹어야 해요.」
「바나나, 딸기, 블루베리, 포도, 그리고 브로콜리.」
브로콜리 홍보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아이들에게 굿즈를 사 줄 학부모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어필하는 우리의 모습에 절로 미소가 나왔다.
포도알이 된 내가 블루베리 리혁이와 하이파이브를 했다.
“캬. 자연스러웠다.”
“뭐. 제법 나쁘지 않았어요. 브로콜리가 너무 자연스럽게 섞였는데요?”
“좋았어요.”
흡족해서 졸개들과 핫핫 웃는데 매니저들이 고개를 돌리고 웃었다.
왜들 웃는 거지.
* * *
미국 시상식에 보낼 메시지를 녹화한 후.
동생들과 <백야>의 안무 연습을 마무리하고 개인 스케줄 시간에 나는 다른 층에 있는 사무실을 찾았다.
[Sound of the Sun 팀]
A4 용지로 인쇄한 임시 팻말에 적힌 선명주의 전기 영화 제목.
그걸 잠시 바라보고는 사무실에 들어섰다.
“어어! 우주 씨!”
종이컵으로 커피를 홀짝이던 김보라 감독님이 벌떡 일어났다.
“왔어요?”
“네. 다들 오랜만에 봬요. 그런데…….”
김보라 감독님을 비롯해 한국계 미국인들이 가득한 제작진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근데 왜 이렇게…….
다들 좀 볼이 빵빵해진 거 같지.
“좀 인상이 따스해졌죠?”
김보라 감독님이 종이컵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거 진짜 맛있더라고요. 한국 믹스 커피.”
“아아… 믹스 커피 맛있죠.”
“하루에도 몇 개씩 먹고 있어요.”
쓰레기통에 수북이 쌓인 믹스 커피 봉지를 바라보며 웃고는 자리에 앉았다.
김보라 감독님이 물었다.
“우주 씨도 한 잔 타 줄까요?”
“괜찮아요. 커피 마시면 가슴이 너무 두근거려서. 방금 샤워해서 땀 흘리면 안 돼요.”
탁자에 가득한 서류를 살폈다.
오늘의 안건은 전반적인 영화 미팅, 그리고 이견우 선배님을 비롯해 주연 배역들에 대한 오디션이었다.
“일단 배우 미팅은 이따가 하기로 하고…….”
제작진을 둘러보았다.
아무래도 한국 로케이션이기도 하고, 제작진들이 대다수 한국계 미국인인 관계로 한국 자료 조사가 필요한 상황.
그 때문에 얼마 전에 단체로 군산에도 다녀왔다고 들었다.
“자료 조사는 잘 하셨나요?”
“그럼요.”
김보라 감독님을 비롯해 스탭들이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 정서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에 청소년에 대한 처벌로 ‘외출금지’를 적었던 제작진.
[정말 말썽이 많구나. 명주! 너에 대한 처벌로 오늘부터 외출금지를 내리겠다!]
제작진이 내게 눈짓했다.
‘이제는 다를 것입니다.’
‘과연 그럴지 한 번 보겠습니다.’
내가 테스트하듯 질문을 던졌다.
“자! 지금부터 퀴즈 나갑니다. 왜 한국 정서에서 아이에 대해 외출금지를 내리는 것이 안 어울릴까요? 정답을 맞히는 분에게는 지호가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밥을 사 드립니다.”
번쩍번쩍 여기저기서 들어 올리는 손.
‘나! 나!’ 하듯이 손을 드는 이들 중 캐스팅 디렉터 존 덕규 최 씨를 지목했다.
“외출금지를 내리는 것이 안 어울리는 이유. 그것은 바로….”
“바로?”
상대가 근엄하게 답했다.
“아이들이 학원에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
제작진이 나를 바라보았다.
어떠냐는 듯한 표정.
그에 대한 내 대답은….
“저… 정답!”
나도 모르게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다.
“정말 한국 정서를 완벽하게 파악하셨군요…! 훌륭해요!”
“와아아! 성공했다!”
제작진과 내가 손뼉을 마주치며 반짝반짝하는 미소를 지었다.
정말이지 K 문화에 대해 제대로 조사를 한 제작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