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878화
그 이름도 아름다운 김덕순.
미모도 아름다운 김덕순.
세상에서 제일 예쁜 김덕순.
물론 영화상에서는 5분밖에 나오지 않는 아주 짧은 분량이다.
하지만!
“짧게 등장해도 김덕순은 김덕순. 결코 헛되이 흘려보낼 수 없지.”
그리하여 할머니의 중년 시절 사진과 가장 근접한 배우들을 찾았다.
1순위로 꼽은 분은 오현숙 선생님.
원조 미녀로 유명한 분인데, 속눈썹과 특유의 콧대가 우리 김덕순 여사와 참으로 닮았다는 생각이었다.
“형.”
내가 석환 형에게 두 사진을 보여 주며 말했다.
“어때? 진짜 할머니 젊었을 적이랑 지금 오현숙 선생님이랑 비슷하지 않아? 아름다우시고 지적이시고….”
“그, 그렇지.”
“정말 김덕순 역할의 적임자이실 거야.”
영화로 재현될 김덕순 여사의 젊을 적 미모에 가슴이 두근두근하다.
TF팀 사무실에서 김덕순 여사의 미모를 찬양하는 내 모습에 직원들이 웃음을 흘렸다.
바로 그때.
“잠시만.”
휴대전화로 연락을 받은 석환 형이 의자를 빙글 돌렸다.
‘예, 예’ 하는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통화를 마친 석환 형이 발을 굴러 의자를 내게 돌렸다.
“오현숙 선생님 소속사야.”
“어때? 승낙하셨어?”
“응.”
1순위로 꼽았던 분이 승낙했다는 말에 주먹을 쥐었다.
석환 형이 말했다.
“카메오 출연 정도면 충분히 가능하대. 우주 씨 부탁인데 어떻게 거절을 하겠냐고 말씀하셨대. 낚시 프로에서 그렇게 덕을 봤는데.”
오현숙 선생님은 <여보 낚시>의 고정 멤버.
기회가 되면 다시 한번 낚시 프로에 나와 달라는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네.”
“또 가게?”
“동생들 보내야지. 나랑 중현이가 갔으니 이제 나머지 셋이 갈 차례야.”
일명 비리호.
그 이름부터 비리비리한 아이들을 보내면 나름대로 재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재미있겠어. 파도가 한 번 철썩 치면…….”
철썩 하고 파도가 갑판에 휘몰아친다.
균형을 겨우 잡은 카메라맨이 카메라를 들고….
-어? 리혁 씨?
-피디님! 리혁 씨가 사라졌는데요!
-리혁이 형?
머릿속에 흑백으로 화면이 멈추었다.
“…그 뭐, 괜찮겠지.”
“무슨 상상을 한 건데, 너.”
“아무것도 아냐.”
카메오 출연에 대한 답례로 졸개들을 <여보 낚시>에 제물로 바칠 생각을 하는 한편.
석환 형이 내게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그리고 이건 부탁했던 건.”
“고마워.”
이번 에 지원한 배우들의 프로필이었다.
거의 사전만큼 두꺼운 크기.
이견우 선배가 출연을 확정지었다는 기사가 나오자마자 폭증한 오디션 신청서였다.
이름이 알려져 있는 배우들만 치면 몇 대 일에서 10대 일 정도의 경쟁률이지만 신인 배우들까지 포함하면 거의 수백 대 일에 달하는 경쟁률이었다.
“나는 우리나라에 이렇게 신인 배우들이 많은지 처음 알았어.”
“엄청 많아. 네 분야가 아니라서 너희가 잘 몰라서 그렇지. 전국의 아이돌 연습생보다 더 많을걸.”
하지만 이 많은 지원자들이 전부 다 오디션을 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배우들이 보내 준 지원 영상을 통해 1차로 거르고, 2차로 현장에서 오디션을 볼 예정이었다.
그 때문에 지금도 사운드 오브 선의 제작진은 밤을 새워 가며 오디션 영상을 보는 중이었다.
석환 형이 농담처럼 말했다.
“배우들 프로필 살펴보면서 중현이한테 부탁이라도 해 봐. 느낌이 좋은 사람이 없는지.”
“봐서 얘기해 볼게.”
“너 웃어넘기는데, 이거에 걸린 돈 생각하면 미신도 웃어넘길 게 아니야. 대표님 매일 점 보러 다니신대.”
내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이 사람들한테는 일생일대의 기회일 수도 있는데, 미신 같은 걸로 기회를 박탈하는 것도 좀 그렇지 않을까 해서.”
그런 말을 하는 나에게 석환 형이 태블릿으로 기사를 보여 주었다.
-배우 권재민, 개봉 7일 앞두고 마약 논란.. 영화사 ‘다 찍었는데 어떡하나’
“…….”
눈을 깜빡이는 나에게 석환 형이 으스스하게 말했다.
“300억짜리 영화인데 지금 개봉을 못하고 있다. 이거.”
“…….”
“기자들한테 들은 이야기로는 감독이 화병 나서 앓아누웠다더라. 감독이 예감이 안 좋다고 반대했는데, 제작사 측에서 신인 배우가 무슨 사고를 치겠냐고 밀어붙였다고.”
“…….”
내가 말했다.
“…중현이한테 꼭 얘기할게.”
끄덕.
석환 형과 내가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 뒤로는 쭉 회의의 연속이었다.
배우들의 프로필이 테이블에 흐트러져 있고, 충혈된 눈으로 믹스 커피를 홀짝이는 제작진들과의 대화.
“나는 이 배우가 영상에서 보여 준 에너지가 마음에 들어요.”
“뮤지컬 배우라고 하던데, 과연 스크린에서도 어떤 장악력을 보여 줄지가 관건이라….”
“이쪽은 현장 태도 이슈가 있다고 하던데. 얼마나 잘나가는 배우든 간에 나는 내 현장에서 감독처럼 구는 배우 용납 못해요.”
그리하여 국내 배우들 중에서 오디션 볼 사람들을 추리는 한편.
미국 배우 캐스팅을 이야기하는 제작진 사이로 익숙한 프로필 사진이 하나 보였다.
“음?”
내가 손가락을 내밀어 서류를 끌어왔다.
콧대가 어마어마하게 오뚝해서 미국 고전영화 시기의 미남 배우를 연상시키는 얼굴.
그 얼굴 위로 이름이 적혀 있다.
Roni Lucas
로니 루카스.
내게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작년 방탈출 예능에 출연했을 때, 드라큘라 백작을 연기했던 아마추어 배우였으니까.
본명은 루카스 론슨이었던가.
뒤풀이 자리에서 예명을 고민하면서 우리에게 작명법을 알려 달라고 했었다.
-일상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걸 써 보는 것도 좋아요. 예를 들면 여기 있는 이 마카로니 같은 거라든가.
-마카로니(Macaroni)… 로니 루카스. 나쁘지 않네요.
마지막으로 만난 게 빌보드에서 헤일리 블루의 남편이자 유명 배우인 크리스 카일에게 소개해 줬던 때였던 것 같은데.
“우주 씨?”
김보라 감독이 다가와서 물었다.
“왜 그래요? 아는 배우예요?”
“네.”
“어머, 신기하다. 어떻게 알아요?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신인인데.”
내가 그와 얽힌 에피소드를 설명해 주자 김보라 감독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내게 말해 주었다.
“오디션 제안을 보내볼 배우 중 하나예요. 아마 성사되기는 어려울 것 같지만….”
“왜요?”
“요즘 핫하게 띄워 주고 있는 배우거든요. 최근 할리우드가 미남 배우 기근 현상을 겪는 거 알고 있죠? 간만에 연기력 좋고 잘생긴 백인 남자배우가 나와서 푸쉬가 장난 아니에요.”
우리와 만난 이후로 독립 영화에 출연했는데 그게 대박이 났다는 모양이다.
마주치지 않아서 몰랐는데 올해 1월에 열린 선댄스 영화제에서도 최고의 작품으로 선정이 됐다나.
거의 매일매일 몸값이 높아지고 있어서 에이전트가 까다롭게 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유명 감독들이 차기작에 부른다는 말도 있더라고요.”
“신기하네요.”
작년도에 만났던 때와 너무 다른 느낌이라 신기하다.
놀이공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작년에서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유망주 배우가 된 상황.
연예계의 다이나믹함에 불현듯 감탄이 나왔다.
“아. 맞다.”
미국 쪽 배우 출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나도 할 이야기가 하나 떠올랐다.
“감독님. 혹시 콜드 브라운 아시나요?”
“어? 네.”
“콜드가 카메오 출연해 주겠다고 약속했거든요. 혹시 재즈 뮤지션 배역 중에서 카메오 출연이 필요한 배역 있으면 고려해 보시는 것도 좋을 거 같아요.”
“우주 씨…!”
감독님이 내 손을 잡고 기쁘게 흔들었다.
마치 커다란 복덩이를 바라보는 표정.
김보라 감독이 주변에다 콜드 브라운 이야기를 하면서 스탭들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자.”
그렇게 회의가 끝난 후.
감독님이 손을 비비며 말했다.
“이제 오디션을 봐 볼까요?”
주요 배역들의 오디션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평소 이름을 들어 본 배우도 몇몇 있고, 대체로는 신인 배우들이 가득한 오디션이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경쟁률이 치열한 것은 바로 우리 엄마의 배역이었다.
<사운드 오브 선>에서 아빠와 함께 서사를 중심적으로 이끌어가는 메인 역할.
아빠에 비해 엄마는 잘 안 알려진 편인데, 왜 다른 배역보다 훨씬 더 경쟁률이 치열한지 궁금했다.
요즘에 뜨고 있는 20대 배우들이 거의 다 몰려온 것 같다고 해야 되나.
얼마 안 가 한 지원자의 입에서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이렇게 극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캐릭터의 역할이 드물어서…….”
젊은 여배우들에게 연기력을 딥하게 보여 줄 수 있는 역할 자체가 적어서 몰렸다는 모양이었다.
그 때문인지 출연자의 풀이 가장 탁월했다.
연기력 좋다고 이름을 들어 본 배우들과 하나하나 미팅을 하는 가운데.
“안녕하세요.”
마침내 적임자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 등장했다.
“여은선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차분하게 이야기를 하는 젊은 배우는 작년도에 부마 항쟁을 다룬 영화 <항쟁>을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오른 신인이었다.
나와는 작년 KMA에서 올해의 앨범상 시상으로 구면인 관계.
내가 내적으로 반가움을 느끼는 동안 김보라 감독님이 턱을 매만지며 미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흐음…….”
이견우 선배와 마찬가지로 엄마와 엄청 닮은 편은 아니다.
화려한 이목구비가 특징인 엄마와 달리 이쪽은 굉장히 청초한 이목구비였다.
푸르른 나무 숲에서 흰 옷을 입은 채 요정처럼 돌아다닐 듯한 미모.
“좋아요. 그러면 한 번 볼까요?”
처음부터 내정자라 전체 대본을 받아 든 이견우 선배와 달리 다른 배역들은 대본 일부만이 있는 상황이었다.
나와 제작진이 볼펜을 들고 필기를 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담담한 표정으로 서 있던 배우가 연기를 시작했다.
“명은 씨!”
감독님이 대사를 읊었다.
“명은 씨도 와서 해 볼래요?”
“뭘요?”
담담했던 상대의 얼굴 위로 활기 가득한 미소가 그려졌다.
활달하고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는 성격을 보여 주듯, 사소한 농담 하나에도 한참을 웃을 듯한 분위기.
가만히 있어도 사랑스러운 존재를 보는 기분이다.
“뭔데요. 뭔데?”
아빠의 새로운 앨범 발매를 앞두고 친한 지인들이 얼마나 높은 순위를 기록할 것인지 내기를 하고 있다.
설명을 들은 엄마가 아빠가 적은 순위를 바라본다.
[17위]
세모꼴로 변하는 눈.
기관총처럼 남편을 타박하는 대사가 흘러나오면서 캐스팅 디렉터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빠의 대사로 ‘아니, 객관적으로 분석을 하면…’ 하는 말이 나올 때.
“사람은 꿈을 크게 가져야 하는 거야.”
17위와 함께 ‘선명주’라고 적혀 있는 쪽지에 무언가를 쓰듯 허공의 펜을 드는 모습.
찍찍.
선명주 뒤에 ‘& 이명은’이 붙으면서 17위가 1위로 수정된다.
“17위가 아니고 우리는 1위. 몇 위?”
“1위….”
실제로는 아빠의 예측이 맞았다.
17위.
하지만 결국 1위를 거두게 되면서 엄마의 예측도 맞게 되었다. 왜 두 사람이 천생연분인지 보여 주는 씬.
이어서 17위로 데뷔한 곡의 순위에 대해 새침하게 모른 척하는 연기를 하면서 웃음이 나왔다.
“…여기까지입니다.”
연기를 마친 여은선 배우가 다시금 덤덤한 표정으로 돌아오면서 작게 박수가 흘러나왔다.
잠시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왠지 모르게 반가우면서도 부끄럽다.
그러면서도 정말 엄마가 저때 저러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
이견우 선배 때와 마찬가지로 배우라는 느낌이 안 들고 그냥 실존 인물을 보는 듯했다.
“준비를 정말 철저하게 해 오셨네요.”
김보라 감독이 웃으며 물었다.
“방금 전에 보여 준 연기가 굉장히 인상 깊었는데, 캐릭터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들어 볼 수 있을까요?”
“나무를 하나 상상했어요.”
여은선 배우가 차분하게 말했다.
“뿌리가 땅속 깊이 박혀 있어서 어떤 풍랑에도 무너지지 않는 그런 나무요. 지친 사람들에게는 그늘이 되어 주고, 넘쳐흐르는 사랑을 열매처럼 나눠 주는 그런 분을 상상했어요.”
“오호….”
“전체 대본을 안 봤기 때문에 적절한 해석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니에요.”
김보라 감독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우리에게 동의를 구하듯 쳐다보았다.
영화계 관계자들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오디션을 보는데 10분 이상 걸리면 그건 그 배역의 적임자가 아니라는 뜻이라나.
바로 느낌이 왔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김보라 감독이 말했다.
“조금 더 자세하게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네.”
캐스팅이 확정되었다는 이야기에 작게 미소를 지은 배우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견우와 일하는 데 불편함은 없냐.
현재 캐스팅된 다른 배우들과의 사이는 어떤지. 혹여나 유의해야 하는 관계가 있는가.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은선 씨는 궁금한 거 없나요?”
“아. 하나 있어요.”
상대가 음악 담당인 내게 시선을 돌렸다.
“저도 노래를 준비해야 하나요?”
“네? 네.”
엄연히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빠긴 하다.
하지만 뮤지컬 영화인 만큼 아빠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의 무대도 있을 예정이었다.
선명주라는 사람의 곁에 서 있던 무수한 사람들.
“제가 노래를 하는 장면이 어떤 종류인지 궁금했어요.”
“어… 네.”
“그게 선명주 님과의 듀엣으로 부르는 건지, 아니면 제가 이명은 님으로서 솔로로 불러야 하는 것인지 그걸 모르겠어서요. 중요한 역할이지만 배역에 대해 아는 정보가 별로 없어서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
대답을 하려던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당연히 영화의 주인공 격인 만큼 엄마의 노래 씬도 들어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걸리는 게 있기 때문이었다.
“…그 부분은 추후에 알려 드릴게요.”
없다.
엄마가 주인공인 노래가 없었다.
* * *
이번 뮤지컬 영화에서 기획한 곡의 숫자는 10개.
그중에서 두세 개 정도는 선명주 없이 다른 캐스트가 부르는 독립적인 곡들이다.
당연히 이명은 역할의 배우가 솔로로 부를 곡을 하나 정도는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노래는 많은데 엄마가 주인공으로 부를 노래는 없더라.”
“어머님에 대한 곡이 없어요?”
리혁이의 물음에 내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야. 아빠가 엄마를 떠올리면서 쓴 곡은 많거든. 그런데 그게 엄마 역할의 배우가 직접적으로 부르기에는 애매해서.”
“그런가…?”
“내가 널 위해 곡을 썼다고 생각해 봐. 리혁아.”
“…….”
상상만으로도 귀가 벌게지는 우리 아이.
내가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내가 널 떠올리며 쓴 나의 곡을 네가 부르는 거야.”
“쉽게 말해서 내가 주체가 아니라 객체인 거네요.”
“그치. 서리혁이 부르는 ‘내게 있어 서리혁은 최고야’ 같은 내용인 거지. 뭐, 사실 그보다는….”
엄마만의 곡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와 아빠가 듀엣으로 부를 만한 곡들은 많다. 선명주와 이명은이 공동작곡으로 들어간 곡들.
다만 독자적인 곡은 없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날 부른 거예요?”
“응.”
“서리혁은 세계 최고의 동생이라고 해 봐요.”
“스그 츠그의 등승.”
“등… 뭐요? 발음을 똑바로 하란 말이야.”
“츠그의 등승. 아야!”
손에 든 자로 날 때리면서 비명이 나왔다.
혀를 차던 리혁이가 내 개인실에 놓인 서류더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이게 다 선명주 재단에서 보내 준 자료들이에요?”
“응.”
선명주 재단에서 보관하고 있던 엄마와 아빠에 관한 자료들이었다.
이번 곡 작업에 참고하기 위해 받아 놓은 것들인데 생각보다 양이 꽤 많다.
하지만 보관 상태가 좋을 뿐, 딱히 정리가 된 건 아니어서 정리 도우미가 필요했다.
“정리 진짜 엉망으로 했네요. 분류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분류한 것 같은데.”
“그래?”
“하지만 걱정하지 마요. 내가 있으니까.”
자객이 칼을 꺼내듯 리혁이의 손에 포스트잇과 각종 테이프가 들린다.
정리에 미친 우리 아이가 서류를 분류해서 알록달록한 포스트잇을 정갈하게 붙이는 한편.
정리를 하면서 엄마가 써둔 일기나 메모 등을 뒤적이면서 생각에 잠겼다.
“엄마 곡….”
기존에 곡이 없다면 차라리 하나를 새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
아까 전 여은선 배우에게 들었던 캐릭터 해석이 귓가에 맴돈다.
-나무를 하나 상상했어요.
-지친 사람들에게는 그늘이 되어 주고, 넘쳐흐르는 사랑을 열매처럼 나눠 주는 그런 분을 상상했어요.
정말이지 딱 맞는 해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
만약에 저런 나무에게 너의 이야기를 해 보라고 무대를 깔아주었으면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잠시 손을 들어 엄마의 사진에 올리며 눈을 감았다.
-어머, 꽃이 피었네? 엄마랑 잘 어울리지?
-우주야. 오늘 우주는 뭐 먹고 싶어? 엄마가 만든 건 맛없어서 먹기 싫어? 그럼 아빠 시키자.
-공놀이 못해도 돼. 우주야. 엄마도 못하거든! 못하는 사람이 이제 혼자가 아니고 둘이네?
어렴풋하게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기억들에 미소가 그려졌다.
엄마가 쓴 메모나 일기 등을 보며 웃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
“…….”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여러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부드럽게 허밍을 하며 손을 움직였다.
한 이미지가 떠오른다.
외딴 숲속에 홀로 남겨진 작은 소녀.
어두컴컴한 숲에서는 위협적인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불길한 그림자가 가득하다.
하지만 소녀가 부드럽게 웃으며 첼로를 들어서 자신의 음악을 연주하면서 분위기가 바뀐다.
어두운 숲속에서 떨고 있던 반딧불이가 다가와 불을 밝혀 주고, 다람쥐나 다양한 짐승들이 하나하나 다가와 음악에 화음을 더해 준다. 그리하여 어두컴컴한 숲의 위험한 존재들이 다가오지 못하는….
그런 이미지를 상상하며 노트북을 꺼내 곡을 써 나갔다.
[Here I Am]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의 노래를 하며 미소를 짓는.
첼로를 연주하면서 힘들었던 시기에 엄마가 자신을 뒤흔들려는 이들에게 보란 듯이 노래하는 장면.
어둠이 밀려오는 마음에서 그것을 몰아내며 웃는 그런 장면이 상상된다.
“여기에 재즈적인 느낌을 좀 섞어서….”
이 부분은 전문가들에게 도움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할 때.
리혁이가 물었다.
“음? 뭐라고 했어요?”
“어? 아니.”
근데 나야말로 뭐라고 하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나 불렀어?”
“네.”
“왜?”
왜 불렀냐고 묻는 나에게 리혁이가 손을 탁탁 털며 말했다.
손소독제로 손을 비비던 리혁이가 짜잔 하듯 정리된 서류들을 가리켰다.
“정리 다 했어요. 어때요? 깔끔하게 해결됐죠?”
“어. 고마워. 리혁아.”
“근데 그건 뭐예요? 아까부터 노트북 만지던데 서류 정리 작업하는 거예요?”
“그….”
노트북을 바라보는 리혁이의 모습에 내가 이실직고했다.
“미안한데 나 곡 다 썼엉….”
“…….”
“그,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
숨 막힐 듯한 침묵이 감돌기 시작했다.
아. 이거 어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