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966화
78장. 제가 가왕입니다만?
무엇이든 좋아하는 게 생기면 무한반복을 하는 아기들!
하지만 어린이들도 사람이기에 언젠가 질리는 시점이 오기 마련이었다.
-버니… 버니…….
-엉클… 뿌에엥….
<토끼 삼촌>을 무한 반복하면서도 같은 영상을 수백 번 넘게 보면 살짝 질릴 타이밍이 오기 마련이었다.
그럴 때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부모들.
‘이러면 토끼 삼촌 놀이해 달라고 할 거 같은데.’
‘이젠 나한테 불러달라고 하는 거 아냐?’
미튜브 영상이 재미없어지면 누구를 달달 볶겠는가.
엄마와 아빠를 달달 볶는다.
달달 볶이는 운명을 피하기 위해서 부모들은 필사적으로 토끼 삼촌의 흥미를 유지하는 중이었다.
방법도 어렵지 않았다.
“토끼 삼촌 무대 영상 볼까?”
“웅!”
음악 방송에 출연한 뉴블랙의 무대 영상이 있기 때문이었다.
미남들이 동물 머리띠를 쓴 채 율동을 추고 있는 영상을 틀어 놓으면 또 순식간이었다.
‘토끼… 삼촌……!’
다시 원래 궤도로 돌아오는 어린이들.
-토끼! 삼촌! 사랑해요!
-깡총깡총 토끼춤!
그리하여 부모들에게는 암묵적으로 합의된 루틴이 있었다.
뮤비를 틀었다가 토끼 삼촌 음방을 틀었다가, 다시 뮤비로 돌아오는 식의 조련 방식.
그 덕분에 지금 뉴블랙의 얼굴을 모르는 어린이는 아무도 없었다.
‘마트 삼촌인데 동물 삼촌!’
‘알고 보니 토끼 삼촌 부하였어!’
어린이들의 세계관에 혼선이 오기는 했지만 아무튼 자그마한 머릿속에서는 정리가 다 끝나 있었다.
뉴블랙이 직접 세계관을 정리해 줬으니까.
[랄랄라라! 사실 여기 있는 마트 삼촌들은 토끼 삼촌의 부하들이란다!]
그렇게 세계관 정리가 끝난 아이들은 마음 편히 덕질을 하는 중이었다.
무한 반복.
또 무한 반복.
어찌 보면 수플레들보다 더 뉴블랙의 얼굴을 자주 보는 토끼 삼촌의 팬덤이라고 할 수 있었다.
“으음…….”
그런 면에서 지금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던 5살 하니는 누구보다 더 예리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봤어.’
검은색으로 온몸을 가린 얄쌍한 인물과 어딘가 낯설어 보이지만 눈이 익숙한 인물.
하니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아빠.”
“응?”
어린이가 손가락으로 뉴블랙을 가리켰다.
“여기 고냥이 상촌이랑 토끼 상촌!”
“!”
“!!”
뉴블랙의 두 멤버가 얼어붙는 동안 엘리베이터에 탄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고양이면 리혁이고… 토끼면 우주인데?’
아이의 아버지이자 교양국 PD인 정민철이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뉴블랙이 여기 어디 있…….”
구석에 있던 둘과 눈이 딱 마주쳤다.
“이, 있다!?”
“있다!”
직원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뉴블랙을 접할 수 있는 확률이 높을 뿐, 방송국 직원이라고 모두가 세계적인 스타를 눈앞에서 볼 기회가 있는 건 아니었다.
곧이어 두 멤버가 마스크를 벗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머…….”
방송국 직원들이 입가에 손을 올리고 있는 동안 두 멤버가 어린이에게 인사했다.
“안녕~”
“이름이 어떻게 돼?”
“정하니예요.”
TV와 핸드폰 속에서만 보던 마트 삼촌들이 인사를 해 오니 아이는 왠지 모르게 쑥스러워졌다.
아기의 눈이 상대의 미모를 스캔했다.
미끄럼틀보다 고운 턱선.
잎가에 맺힌 이슬처럼 반짝이는 눈동자.
자고 있으면 몰래 다가가서 만져 보고 싶은 콧대까지.
“상촌!”
잘생기면 삼촌이었다.
“그래, 마트 삼촌이야.”
“토끼 상촌, 진짜 토끼 상촌은 어디 갔어요?”
“미국 어린이들 만나러 갔어.”
“아….”
친절하게 대해 주는 두 멤버의 모습에 아이가 행복해할 때였다.
‘웅?’
하니가 아빠와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마치 가끔 국자라는 사람을 만났을 때 아빠가 보였던 반응과 비슷했다.
-국자님. 안녕하십니까.
-어어, 그래.
‘마트 삼촌인데?’
VIP를 눈앞에서 마주하고 긴장하는 방송국 직원들의 반응에 어린이만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딩동-
어느새 꼭대기까지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그러면서 누군가 들어왔다.
“어이구, 이게 무슨 일이야?”
캐주얼한 남방 차림으로 들어온 중년 남성에게 모두 인사했다.
‘국자님!’
TBC 교양국의 최고 권력자인 교양국장에게 다들 인사할 때였다.
엘리베이터에 탄 교양국장과 뉴블랙 두 멤버의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국장님.”
“!”
분명 마트 삼촌은 공손히 인사했는데, 갑자기 국자님이 양손을 공손하게 모으기 시작했다.
하니의 머릿속에 새로운 관계도가 새겨졌다.
[토끼 삼촌 > 마트 삼촌 >>> 국자님 > 아빠]
아빠가 작고 귀여운 최약체인 세계관이 어느 어린이의 머릿속에 만들어지고 있을 때.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던 뉴블랙 멤버들이 핸드폰을 슬쩍 보고는 말했다.
“혹시 다들 직원 분들이신가요?”
“예, 그렇습니다만….”
“실례가 아니라면 저희와 함께 같이 가 주실 수 있을까요? 지금 저희가 비밀을 지켜야 해서…….”
“?”
방송국 직원들이 눈을 깜빡였다.
* * *
TBC <미션 싱어> 제작진 사무실.
“피디님.”
“응?”
“리혁 씨한테 연락이 왔는데요. 엘리베이터에서 정체를 들켰다고 그러더라고요.”
“들켰다고? 어떻게?”
출발하기 전에 사진으로 ‘이 정도면 어떨까요?’ 하고 보내 준 톡에 그거라며 박수를 치며 좋아했던 제작진.
“들킬 비주얼이 아니었는데?”
“엘리베이터에 탑승해 있던 5세 추정의 여아가 두 멤버의 인상착의를 파악했다고…….”
“자기는 갑자기 말투가 왜 그래?”
“아, 리혁 씨가 보내 준 대로 읽었어요. 여기 무슨 경찰 사건 보고서처럼 적어 주셔 가지고.”
리혁이 보낸 톡을 읽은 박연희 피디가 웃음을 터뜨렸다.
‘애기가 알아봤구나!’
뉴블랙 담당 작가가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다 직원들이지? 다들 바쁘신 거 아니라면 잠깐 우리 사무실로 와 달라고 이야기해 줘.”
방청객처럼 비밀 유지 서약서를 쓸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이야기는 할 필요가 있었다.
같은 회사 사람들이니 긴 설명은 필요 없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뉴블랙 멤버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우르르-
예능국에 내린 이들이 정체를 숨긴 뉴블랙을 따라 사무실로 들어왔다.
“?”
“??”
생각보다 많은 인원 수에 놀랄 때.
그 속에 끼어 있는 푸근한 중년인을 바라보며 제작진은 기절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교양국장님이 왜…?’
공손하게 뉴블랙을 따라 들어온 인물.
제작진과 뉴블랙의 눈이 마주쳤다.
’일단 다 데리고 오라고 하셔서…….’
‘아니, 그…….’
말 그대로 정말 다 데려온 뉴블랙이었다.
그게 이상하지 않아서 더 이상했다.
보통 아이돌이 국장급 직원을 데리고 왔다고 하면 이상한데… 뉴블랙이라고 하니까 말이 되는 느낌.
메인 작가가 직원들에게 간단한 선물을 주면서 이야기를 할 때.
A4 용지를 꺼내 비밀 유지 서약서를 쓰고 있는 교양국장에게 담당 피디가 다가갔다.
“국장님께선 왜….”
“재미있어 보여서 왔어. 굳이 안 와도 된다고 하긴 했는데…….”
교양국장이 멀찍이 리혁을 곁눈질하며 말했다.
“이러면 리혁 씨가 좋아할 거 같더라고.”
그 말은 사실이었다.
시키기도 전에 솔선수범해서 비밀 유지 서약서를 쓰는 모습에 리혁이 호감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박연희 피디가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교양국이 왜 뉴블랙의 호감을…?’
예능국이라면 이해가 간다. 워낙 걸린 게 많으니까.
하지만….
’교양국은 딱히 얽혀 있을 만한 게 없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할 때였다.
교양국장이 속삭였다.
“박 피디.”
“예?”
“혹시 뉴블랙은 뭐 좋아하는지 아는 거 없어?”
“?”
“내년에 뉴블랙 5주년인데 5주년 다큐 찍을 수도 있잖아. 박 피디네는 어떻게 꼬드겼어?”
특집 다큐를 호시탐탐 노리는 교양국장.
“우리도 걸린 게 많거든. 지금 토끼 삼촌이 난리인데 어린이 프로그램도 있고, 우리말 겨루는 거랑…….”
“…….”
“이번에 H사 육아 예능도 최고치 찍었다며. 우리 교양국도 뉴블랙이랑 프로를 찍을 수만 있다면…….”
푸근한 얼굴 위로 피어오르는 야심!
열심히 비밀 유지 자필 각서를 쓰고 있는 국장을 바라보며 박 피디가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이래서 국장님이구나.’
아무나 국장을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직장인이었다.
* * *
비밀은 안전하게 지켜졌다.
“감사합니다.”
“감사는요. 하하, 언제 시간 나면 우리 교양국도 들러 주세요.”
바쁘실 텐데 명함까지 주면서 놀러 오라고 하는 교양국장님 등.
방송국 직원들과 사진을 찍으며 팬 서비스를 한 후, 우리는 이 자리의 가장 위험한 변수를 향해 쪼그려 앉았다.
5살 어린이 하니.
“삼촌이랑 약속해 줄 수 있어? 오늘 본 거 비밀로 해 주기로.”
“웅.”
“만약 하니가 오늘부터 일곱 밤만 참으면…….”
“참으면?”
“토끼 삼촌한테 이야기해서 특별하게 메시지 보내 줄게. 삼촌들이랑 약속 지켜 줄 수 있을까?”
아이가 헉 하고는 물었다.
“근데 내가 못 지켰는지 토끼 삼촌이 어떻게 알아?”
“토끼 삼촌 귀 보이지?”
“웅.”
“그 길쭉한 귀는 어린이들의 마음을 삐삐삐삐 들을 수 있거든. 거의 산타 할아버지 급이야.”
그 말에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만 믿어 달라는 듯 다짐했다.
이윽고 아빠의 품에 안겨 사라지는 어린이에게 우리도 같이 손을 흔들어 준 후.
“…근데 아버님 따라온 건가?”
그걸 안 물어봤네.
방송국에 애기가 있어서 왜 있나 궁금해하고 있을 때, 리혁이가 답해 주었다.
“여기 어린이집 다니는 애기 같은데요. 방송국에 어린이집 있거든요.”
“진짜?”
“상시 근로자 500명 이상 기업이면 어린이집 설치가 의무 규정이에요.”
회사 어린이집이라니.
복지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머릿속에 문득 무언가 스쳤다.
“레몬 어린이집 이런 거 있으면 좋을 텐데.”
“…오? 괜찮은데요?”
레몬 어린이집.
가끔씩 오리지널 토끼 삼촌이 등장해서 무대를 해 주는 전국 최고의 어린이집을 떠올릴 때였다.
”하지만 공간이 없군…….”
“없긴 하네요.”
회사 직원들의 숫자가 그 정도로 많지는 않을뿐더러 사옥에 남는 공간도 없었다.
결국 어린이집을 세우고 싶다면.
“회사 규모를 키우는 수밖에 없는 건가.”
“노력하자고요. 우리.”
어린이집이 생기는 날까지 더 거대한 레몬 엔터가 되도록….
그런 목표를 마음속에 새기고 있을 때였다.
“오래 기다리셨죠?”
<미션 싱어>의 연출인 박연희 피디님이 우리 담당 작가님과 함께 다가왔다.
“국장님이랑 얘기가 좀 길어져서.”
“아니에요. 오히려 저희 때문에 일이 번거로워져서…….”
“어쩔 수 없죠. 애기가 알아본 건데.”
다시 생각해도 상황이 웃겼던 터라 웃음이 감돌았다.
제작진 사무실에 마련된 테이블에 둘러앉으며 박 피디님이 말했다.
“정체를 감추는 게 불편하시겠지만 조금만 참아 주세요. 다음 주 본방송 1회 차 나올 때까지만 참으시면 되니까.”
“네.”
“그 이후로는 크게 조심하실 필요가 없구요. 깜짝 공개하는 것만 목표니까. 저희 프로그램 아시잖아요?”
우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TBC 미션 싱어.
정체를 감춘 가수들이 오로지 실력 하나로 진검승부하는 경연 프로그램.
하지만 이 프로의 정체성은 ‘저 가수는 누구일까?’ 하는 것과는 거리가 조금 있는 편이다.
그것보다는 가수들이 자신의 부캐를 가지고 활동한다는 컨셉.
본체와는 또 다른 독자적인 아이덴티티로 활동하고, 시청자들도 그런 부캐를 응원해 주는 식이었다.
굳이 정체를 크게 숨길 필요 없기에 예명은 대체로 ‘나 좀 알아 봐라~’ 하고 정하는 편이다.
-슬픈 윤리에르.
예컨대 우리 회사 발라드 가수인 윤찬혁 선배가 6회 우승을 하면서 썼던 별명이 그랬다.
뮤지컬 <베네치아의 연인>에서 본인이 맡았던 ‘살리에르’라는 배역에서 따온 별명이라나.
뮤지컬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바로 ‘윤찬혁이네!’ 하고 알아차리는 닉네임.
그렇다면 그냥 정체를 공개하고 진행하는 서바이벌과 다른 점이 무엇이냐, 라고 할 수 있겠지만.
-마음이 좀 편하던데. 져도 좀 덜 진 거 같고.
-얼굴이 안 보이잖아. 맨날 비주얼 가수라고 하던 사람들이 내가 얼굴 가리고 노래하니까 말 못하는 거 있지. 내 실력만으로 찍어 누르는 쾌감? 그런 게 조금 있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외적인 것 때문에 가창력을 인정받지 못한 가수면 이득이지.
선배들 말에 따르면 그런 매력들이 있다는 모양이다.
“일단 알고 계시겠지만 룰을 다시 한번 설명해 드릴게요.”
“네.”
“총 4라운드로 진행이 될 거고요.”
시스템은 간단하다.
8강부터 시작해서 1대1 매치를 통해 결승전까지 가고, 마지막에는 가왕에게 도전한다.
다만 보통의 서바이벌과 달리 <미션 싱어>에는 가수들이 좋아할 만한 점이 존재한다.
-1라운드의 승자는 다음 경연에도 생존한다.
일단 8강에서 한 번만 이겨도 다음 경연에서 재도전할 기회를 얻는 것이다.
“가수 소모를 최대한 적게 해야 되거든요. 바로바로 탈락시켜 버리면 나올 사람들이 급격히 줄어드니까.”
“아, 그러네요.”
“덕분에 독특한 구도들이 생기기도 하고요. 지금도 남아 있는 네 분 중에 두 분은 장기집권이니까요. 한 분은 한 달이 넘으셨고….”
최종 라운드까지 갈 실력자는 아니지만 상위권이라서 계속 잔류하는 출연자들.
이런 것 때문에 독특한 구도가 생기곤 했다.
대표적으로 장기 잔류자 중 하나인 뮤지컬 배우 장재림 씨는 온라인에서 ‘뉴비절단기’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중이었다.
-크하하하! 가왕에 도전하려고 온 어리석은 녀석들이로구나! 먼저 나부터 꺾도록 하여라!
프로그램에서 보면 대충 이런 느낌이다.
그 부분의 설명을 듣다가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가왕전까지 올라간 사람은 패배하면 바로 탈락이네요.”
“네. 안 그러면 방송에 위기감이 없거든요. 챔피언만 떨어지느냐 마느냐 여부가 되는 거니까.”
“그렇긴 하네요.”
“방송 보셔서 알겠지만 저희가 기회를 드리잖아요. 가왕에 도전할 것인지 아니면 도전하지 않을 것인지.”
실제로 ‘도전하지 않겠습니다’ 하면서 가왕의 무대만 나오는 회차도 있었다.
그날의 미션이나 주제곡이 가왕에게 너무 유리해서 자기가 불리하다 싶으면 전략적으로 다음 기회를 노리는 거다.
이런 식으로 다음을 노려서 정말로 다음번에 가왕이 되는 경우도 있고, 어처구니없게 다음 경연에서 1라운드에서 떨어지는 경우가 있는 등.
변수가 많아서 시청할 때 재미있는 프로다.
“이제 오늘 방송 진행에 대해서 설명을 드릴 건데요. 우선 VCR부터 찍고…….”
아직 본방송 녹화보다 한참 이른 시간이긴 했지만, 리혁이는 새로 출연하는 출연자라 할 일이 많았다.
“나 그럼 찍고 올게요.”
“다녀와. 잠깐 피디님이랑 얘기하고 있을게.”
제작진의 안내에 따라 이동하는 리혁이에게 손을 흔들어 준 후.
문이 닫힌 것을 곁눈질로 확인한 피디님과 내가 미소를 지으며 음료를 들었다.
“그럼 저희는 이야기를 더 나눠볼까요?”
“네.”
“우주 씨 이야기를 듣고 너무 설레더라고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용건을 꺼내는 피디님에게 나도 훈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늘 리혁이의 응원을 위해 찾아온 방송이긴 했지만.
“저번 제안에 대해서…….”
나 역시도 이 프로그램에 볼일이 있었다.
* * *
점심을 넘겼을 무렵.
<미션 싱어>의 대기실에 지난 경연의 1라운드 통과자들이 속속 도착했다.
“여기도 이제 내 방 같네.”
뮤지컬 배우 장재림이 미소를 지었다.
소파에 앉자마자 태블릿으로 ‘명품조연 장조림’이라는 닉네임을 써치하는 배우였다.
-수상할 정도로 강약약강인 장조림좌..
-우승할 것 같다가도 강자만 만나면 귀신같이 패배ㅋㅋㅋㅋㅋㅋ
-어쩌면 조림이가 진정한 승자 아닐까??? 우승자보다 더 장기집권하고 있잔슴
-희한하게 떨어지진 않음ㅋㅋㅋㅋ
훈훈한 외모의 얼굴 위로 촐싹 맞은 웃음이 떠올랐다.
‘역시 관심이 좋아.’
우승 못한다는 반응을 보아도 마냥 즐거운 뮤지컬 배우였다.
구김살이 없는 성격.
항상 뮤지컬에서도 작은 배역을 맡아 주목을 받지 못하던 때와 달리 지금은 여기저기서 관심이 오고 있다.
‘그래도 슬슬 떠나야 할 타이밍이 되는 거 같긴 한데.’
오래 출연하면서 관심을 받으니 좋긴 했지만, 이제 뮤지컬 준비에 들어가야 할 시간이었다.
매니저가 말했다.
“재림아. 저번에 네가 센 사람 좀 붙었으면 좋겠다고 했잖아.”
“응. 이젠 좀 떨어져야지. 그만 좀 나오라고 악플 다는 애들도 많고… 기왕 떨어지는 거 예쁘게 떨어지는 게 좋지 않겠어?”
떨어지는 방법은 두 가지다.
가왕전까지 올라가서 도전하거나 아니면 1라운드에서 떨어지거나.
‘내가 우승까지 할 실력은 아닌 거 같고.’
지금 챔피언인 발라드 가수 유재찬은 너무 강하다.
문제는 그렇다고 어중간한 실력자에게 떨어지기에는 가창력이 좋은 그였다.
그러니 적당한 실력자에게 패배하는 게 목표였다.
물론….
‘그렇다고 너무 압도적으로 지는 것도 싫어.’
진심을 다해 불렀지만 아슬아슬하게 밀려 안타깝게 떨어지는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다.
“근데 그건 왜?”
“아, 지금 매니저들이랑 제비뽑기 하고 왔는데. 너랑 붙을 사람이 꽤 센 거 같더라고, 제작진 반응이.”
“진짜?”
과연 1라운드에서 맞붙게 될 인물이 누군지 궁금해할 때.
인터컴을 낀 스탭이 노크하고 문을 열었다.
“장조림 님.”
“네~”
“스탠바이 하고 VCR 촬영 들어가실게요.”
“넵!”
장재림이 머리 위로 가면을 착용했다.
이제 그에게 도전할 새로운 출연자와 복도에서 맞붙는 VCR을 찍을 예정이었다.
“가실게요.”
스탭의 안내를 따라 복도로 이동한 명품조연 장조림!
“복도에서 서로 마주 걸어가는 구도로 찍을 거고요. 멘트 자유롭게 날려 주시면 됩니다.”
“네~”
“바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멀찍이 복도 건너편에 있는 인물을 바라보았다.
‘아이돌인가?’
머릿속으로 여러 얼굴이 스쳐 갔다.
‘남자아이돌 중에 잘 부르기로 유명한 사람이… 스트릿 보이즈 윤기원이랑 데이드림 차성훈이랑… 또 누가 있지?’
곰곰이 기억을 떠올린 그가 고개를 저었다.
‘뭐, 서리혁이 나올 것도 아니고.’
현 아이돌판 보컬 끝판왕으로 불리는 강자.
차우현을 한 번이나마 누르고 우승을 했던 경력이 있는 그룹의 메인보컬을 떠올리던 그가 웃었다.
‘내가 무슨 상상을.’
뉴블랙이 뭐 하러 이런 프로그램까지 나온다는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던 뮤지컬 배우가 당당하게 걸었다.
장조림 가면을 쓴 그의 눈에 맞은편에서 망토를 입고 걸어오는 인물이 보였다.
‘꽃…인가?’
해바라기를 닮은 가면을 쓴 누군가 하찮게 걸어왔다.
[으하하하!]
장조림 가면이 음성변조된 목소리로 웃었다.
[이번에도 귀여운 뉴비가 들어왔군! 네가 바로 오늘 이 ‘명품조연 장조림’에게 맞설 도전자로구나! 후훗!]
[예.]
음성이 변조되었는데도 왠지 모르게 청아한 목소리.
[제가 바로 오늘의 도전자입니다.]
우아하게 손동작을 하던 인물이 망토를 풀기 시작했다.
‘음?’
어딘가 쎄한 감각이 몰려온다.
장조림 가면의 눈에 상대가 어깨 위에 올려둔 인형들이 보였다.
어딘가 익숙한 인형들.
[후우. 동생들을 어깨에 올려 둬서 그런지 제 어깨가 무겁군요. 이게 바로 리더가 짊어진 무게일까요~? 꺄륵!]
‘자, 잠깐만! 저 웃음소리와 저 체격은…!’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선배님. 오늘 <미션 싱어>에 도전장을 내밀게 된…….]
망토가 사르륵 내려가면서 가슴팍의 이름표가 반짝였다.
[가왕 선우주라고 하옵니다. 꺄륵!]
‘서리혁이군…….’
장조림 가면은 울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