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우주대스타 975화
잠시 내 눈을 의심했다.
[Secret Agent III]
이건 분명 나도 알고 있는 영화 시리즈였다.
시크릿 에이전트.
“?”
바닥에 떨어져 있는 대본을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는 기분을 느낄 때.
내 뺨 근처로 비주의 얼굴이 쏙 들어왔다.
“왜 그래요. 형?”
“비주야. 이거 봐봐. 지호가 탈락 후보에 넣은 대본인데…….”
내가 대본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너도 이거 알지?”
“시크릿… 에이전트?”
비주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보통 그 영화 알아? 하면 ‘전 몰라요…’ 하고 수줍게 웃던 비주마저 눈을 크게 떴다.
다른 두 동생도 모여들었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내가 대본을 들어 보였다.
“이거 지호가 탈락시킨 대본이래.”
“그게 뭐가… 잠깐만, 시크릿 에이전트요?”
“응.”
다들 눈을 깜빡이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
“??”
대체 이 영화가 왜 탈락 후보군에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모두 동시에 고개를 돌려 막내를 바라보았다.
“지호야??”
“네?”
“왜 이게 탈락 후보군에 있는 거야?”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거… 히어로 영화잖아?”
그렇다.
지호가 탈락시킨 <시크릿 에이전트>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히어로 프랜차이즈 중 하나였다.
* * *
히어로 영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잘나가고 있는 영화 프랜차이즈 중 하나다.
현지 업계에서야 영화 산업을 망치고 있네, 아니네 하면서 갑론을박이 있다지만 상업적으로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대성공!
특히나 유명 만화사 원더 코믹스에서 영화화된 시리즈들은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
시간이 없어서 영화를 잘 안 보는 나조차도 이쪽 영화들은 어쩔 수 없이 관람할 정도였으니까.
이걸 알아 둬야 예능에서도 예능인들의 드립을 따라갈 수 있고, 팬들과도 소통이 될 정도니…….
“근데 거기서도 시크릿 에이전트는 완전 메인 아니야?”
“핵심이죠.”
해당 세계관에서도 핵심이 되는 히어로 영화 중 하나였다.
에드윈 나이트(Edwin Night)라는 첩보기관 요원에게 특별한 초능력이 생기면서 히어로로 각성하는 이야기.
보통 히어로 영화는 주로 뭉칠 때만 재미있고, 하나씩 보면 ‘쿠키를 보기 위해 결제하는군…’ 하기 마련인데. 시크릿 에이전트의 경우에는 개별 영화로서의 완성도도 높은 편이다.
1편과 2편을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난다.
-혹독한 훈련 끝에 정보국의 킬러가 된 남성. 하지만 그가 속한 기관은 정보국이 아니었다…!
알고 보니 사악한 악의 조직에서 일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주인공이 잘못됐던 과거를 바로잡고, 악의 조직을 무너뜨리려고 고군분투하는 스토리.
“1편이 진짜 재미있었는데.”
“저는 2편이 더 액션이 많아서 좋았던 거 같아요. 주인공이 좀 당하는 얘기가 많아서 그렇긴 했는데….”
“그래도 1이 영화적으로 보면 더 낫긴 했어요.”
다 같이 봤던 영화인 만큼 동생들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막 오갔다.
내가 리혁이에게 물었다.
“이거 흥행 성적이 어떻게 되지?”
“꽤 히트 쳤을 걸요. 지금 찾아보니까….”
리혁이가 국내 관객 숫자를 읊어 주었다.
“13년도에 나왔던 1편이 380만 명 정도였고, 그 이후로 인지도가 확 늘어서 2편이 580만 명 정도요.”
개별 히어로 영화 중에서는 한국에서도 최상위권의 동원력을 자랑하는 영화였다.
첩보물과 현실적인 배경을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의 취향을 저격하는 시리즈이기도 하고.
그랬기에….
‘뭐지.’
‘왜 이걸…?’
우리는 이해할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리 막둥이가 했던 말이 무엇인가.
-대중적인 걸 하고 싶어요.
“지금 가장 세계적으로 대중적인 영화가 히어로 영화 아니야?”
“넹.”
“그리고 시크릿 에이전트 정도면 히어로 영화 중에서도 진짜 완전 메이저한 영화고….”
“넹.”
“거기서 제안이 들어온 거잖아. 지호야. 뭔가 형의 말에서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니?”
그럼에도 우리 막내는 별로 관심이 없는 기색이었다.
형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에 지호가 뺨을 긁적이며 답했다.
“그게 제안이 들어온 지는 얼마 안 됐거든요. 처음에는 저도 되게 혹하긴 했어요. 시크릿 에이전트 시리즈니까.”
“그런데…?”
“근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저한테는 그다지 매력 있는 선택지가 아니더라구요.”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그… 자꾸 동시에 말하지 마요. 형들. 저 어렸을 때 누나들한테 추궁 당한 기억이 떠올라서 무서워요.”
“미안. (미안.) (미안.)”
동시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우리가 머쓱한 웃음을 터뜨렸다.
지호가 설명했다.
“이거 지금 주연 캐스팅은 다 끝난 거거든요? 그니까 주조연급으로 중요한 캐릭터들은 다 캐스팅이 끝난 상황이에요. 프리 프로덕션이 언제부터 들어갔는지 생각해 보면….”
내게서 <시크릿 에이전트 3>의 대본을 가져간 지호가 팔랑 흔들었다.
“그리고 이거 대본 아니에요.”
“어…? 아니야?”
“히어로 영화가 얼마나 보안이 철저한데요. 형. 이런 회사들은 절대 캐스팅 전까지는 대본 공개 안 해요.”
그 말에 우리가 대본을 펼쳐 보았다.
대본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얇은 분량이었다.
중현이가 물었다.
“음? 대사가 있는데?”
“가짜 대본이에요. 우리가 대충 이런 느낌의 연기를 원하니까, 요런 대사들을 한 번 해 보라 그런 거죠. 물론 배역은 안 알려 주지롱! 하면서.”
“아…….”
“그래서 배우들 중에서 히어로 영화 미팅인지 모르고 합격하는 사람들도 있대요.”
그 말대로였다.
이 짤막한 분량의 대본만 가지고서는 절대 배역의 이름이나 정체를 추측할 수 없었다.
신기해하는 우리에게 지호가 말했다.
“그러니까 이런 말인 거죠. 우리 원더 코믹스인 거 알지? 배역은 안 알려 줄 건데 관심 있으면 오디션 한 번 봐봐.”
“흐음….”
“게다가 이미 주조연급은 캐스팅 다 끝났을 타이밍인데, 이쯤 돼서 찾는 건 그거죠.”
막내가 전문적으로 설명해 줬다.
“아~ 대충 영화 많이 팔고 싶은데 아시아 시장을 공략할 방법이 뭐가 있을까~? 음~? 여기 뉴블랙이 있네~? …해서 대충 구색 맞추기 배역 하나 준 다음에 내한 행사에서 ‘지호의 연기는 어메이징!’ 하면서 아시아 시장이나 공략하겠다는 뜻인 거예요.”
적나라한 해석이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근데 형들도 알다시피 히어로 영화에서 그런 식으로 나오는 배역들 진짜 많은데 보고 나면 기억도 잘 안 나잖아요. 물론 한국인들에게 얼굴을 알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긴 한데, 어차피 우리나라 사람들이야 어차피 제가 누군지 다 알고.”
“그치.”
“그렇다고 이런 배역으로 전 세계 사람들에게 임팩트를 남기는 것도 힘들구요.”
틀린 말이 아니긴 했다.
히어로 영화를 보다 보면 가끔 일본 배우가 일본도를 휘두르거나, 중국 배우들이 ‘이것이 바로 중국의 신비와 과학!’ 하며 짧은 분량으로 등장하곤 하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 저 배우가 누구지 하면서 검색하거나 얼굴을 기억하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었다.
나중에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아 그 5분 만에 죽은 사람?!’ 하며 깨달을 뿐.
“저한테는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은 제안이에요.”
지호가 손가락을 꼽았다.
“이미 한국 사람들한텐 유명하고. 형들 덕분에 외국에서도 유명한 가수가 돼서 아쉬울 거 없고. 중요도 있는 배역이라면 모를까, 저쪽에서 제안하는 배역들은 연기하는 재미도 없구요.”
“그런가?”
“앞머리 브릿지 염색한 다음에 ‘후후후’ 하면서 키보드 두드리는 해커 역할 같은 거 시킬 걸요.”
어디서 많이 본 장면에 우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야 지호의 말뜻이 이해 갔다.
“그냥 히어로 영화에 출연한다는 의미 빼고는 딱히 이득이 없네.”
“넹.”
“하긴….”
몇 년 전이라면 모를까.
최근에는 한국 배우가 외국 유명 영화에 나온다는 소식을 들어도 덤덤하게 반응하는 한국 사람들이었다.
과거에는 비슷한 소식이 들려와도 ‘와! 할리우드 진출!’ 하면서 설렜지만 이제는 한국 사람들도 경험치가 쌓였으니까.
요즘에는 ‘오? 대박~!’ 하는 정도의 반응이었다.
“그래서 제가 막 곰곰이 생각해 봤거든요. 형들이라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하고. 그러니까 이런 결론이 나오더라구요. 기왕 영화를 찍을 거라면 제대로 연기할 수 있는 한국 영화가 낫겠다.”
막내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에 결국 우리도 동의했다.
처음에는 히어로 영화라는 타이틀에 홀려서 생각을 못하고 있었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주조연급으로 캐스팅되는 미국 배우라면 ‘드디어 나에게도 무비스타의 꿈이?!’ 하고 설레겠지만 어중간한 단역 정도라면 정말 지호 말마따나 큰 메리트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조금 달랐다.
“지호야.”
“네?”
“네가 그랬잖아. 사실상 단역 출연이라고.”
“네, 아마 나와도 막 전체 분량에서 5분 정도일걸요? 이미 주조연은 캐스팅 다 끝났으니까.”
“그러면 더 좋은 거 아니야?”
“??”
나를 바라보는 동생들에게 내가 말했다.
“곰곰이 생각해 봐봐. 이거 마이너스가 없어.”
“?”
“영화가 망한다고 해도 너한테 타격이 없을 만한 분량이라는 거잖아. 그냥 단역으로 짧게 나오는.”
“그죠?”
“그럼 촬영 시간도 그리 길지 않을 거고. 네가 예상한 분량 정도면 아무리 길어 봐야 몇 주 정도 되려나. 그 정도 시간이면 다른 영화와 병행이 가능할 거고.”
지호가 ‘어…?’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득이 크지 않다 뿐이지, 이렇게 마이너스 없는 기회 흔치 않아. 굳이 걷어찰 필요가 있을까?”
영화가 망한다고 해서 주조연급처럼 ‘너희가 못해서 그래!’ 하면서 욕을 먹을 일도 없고.
촬영 시간도 그리 길지 않고.
외국 메이저 영화의 촬영 환경은 한국과 어떻게 다른지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어? 그렇게 말하니까 막 솔깃해지는 거 같네여.”
“크게 터질 수 있는 기회를 고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소소한 기회도 챙길 수 있으면 챙기는 게 좋아.”
졸개들도 내 의견에 가세했다.
“맞아. 지호야. 이것도 기회지.”
“개미위키 필모그래피에 새겨지는 <시크릿 에이전트 3>.”
“야. 합리적으로 생각해.”
절대 우리의 개인적인 욕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동네 사람들에게 우리 막내를 자랑할 기회…!’
‘히어로 영화에 우리 막둥이…….’
‘스보한테 자랑해야지. 후후후.’
다 막내 앞길 잘 되라고 형들이 해 주는 이야기였다.
지호가 점점 넘어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래도 잘 모르겠는데.”
“어려울 때는 이렇게 생각하면 돼.”
내가 후후 웃으며 손을 촤악 뻗었다.
“네가 안 한다고 했던 그 배역이 나에게 넘어온다면 어떨까?”
“!”
“별거 아니라고 생각해서 넘겼는데, 만약에 그 짧은 시간 동안 존재감이 대단해서 반응이 좋다면?”
동생들이 덧붙였다.
“우주 형이 연예가 중계 나가서 인터뷰 하고 있을 때, 그걸 기사로 보고 있다면?”
“비상구에서 떡볶이를 먹으면서 훌쩍대고 있다면?”
“과연 그래도 억울하지 않을 것인가?!”
형들의 유치한 도발에 지호가 픽 웃었다.
“아니, 형들. 이거 제가 안 한다고 해서 우주 형이 갑자기 제가 한다고 했던 배역을 가져가ㄱ…….”
그런 말을 하던 지호가 말을 멈췄다.
그러곤 리혁이를 바라보았다.
표정을 굳이 해석하지 않아도 지호의 뇌에서 어떤 소리들이 들려오는 것 같다.
-가왕 선우주… 국힙원탑 서리혁…….
과자를 빼앗길 위기에 처한 아이처럼 지호가 히어로 영화의 대본을 품에 안아 들었다.
“그,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게요!”
“?”
“그때까진 절대 건드리지 마요. 형!”
갑자기 나를 위험 분자라도 되는 것처럼 쳐다보는 막내의 모습에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리혁이가 내게 이상하단 표정으로 물었다.
“근데 쟤는 왜 자꾸 나랑 형을 번갈아 보는 거예요?”
“그….”
내가 먼 곳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런 게 있어.”
* * *
우리 막내가 <시크릿 에이전트 3>의 제안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겠다는 답을 하자 석환 형은 대만족했다.
“사실 안 그래도 아깝긴 했거든.”
“그래?”
“마이너스가 없잖아.”
석환 형도 나와 비슷한 생각인 듯했다.
“다만, 지호가 배우로서 연기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 확고하고. 또 아이돌이란 본업이 아닌 분야에 대해서 매니저가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 너무 간섭처럼 느껴질 거 같아서 말은 안 하고 있었지.”
이야기는 안 하고 있었지만 내심 반갑다는 모양이었다.
사실 지호가 지금 가수로서 어마어마하게 성공해서 인지도가 딱히 아쉽지 않아서 그런 것뿐이지.
대부분의 배우들에게 ‘너 잠깐 원더 코믹스 영화 나올래?’ 하고 물으면 OK할 것 같다.
나 같아도 나갈 테니까.
“이 부분은 내가 그쪽이랑 이야기를 해 볼게.”
석환 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후.
히어로 영화에 대한 토론을 마친 나와 졸개들은 다시 대본을 뒤적였다.
뒹굴뒹굴 구르며 대본을 읽고, 옆으로 두고.
“어려울 거 없어요. 형들!”
막내가 우리의 입에 각종 달달한 간식을 물리며 말했다.
“최대한 대중적인 거 골라 주면 돼요.”
“연기는? 그런 건 안 고려해도 돼?”
“어차피 막 연기력 뽐내는 배역은 저한테까지 안 와요.”
지호가 웃으며 말했다.
“신들린 연기 뽐내는 배역들은 다 이미 잘하는 선배님들이 가져가셨거든요. 저는 이제 그 곁에서 알짱알짱하는 역할 하려구요.”
객관적으로 말해서 우리 지호의 포지션은 현재 ‘확실히 검증된 신인 배우’ 정도의 포지션이다.
물론 여기에 전 세계적으로 형성된 팬덤 한 스푼 정도?
<슬립>의 허 의경이나 웹 드라마로 제법 싹이 보인다는 평을 받았다면, 이번에 <신이>의 주인공 신이한 역을 해내며 굉장히 좋은 평을 얻어서 그런 포지션에 안착했다.
무려 100억원대 드라마의 주연을 맡아 성공시킨 거니까.
중현이가 만족한 얼굴로 말했다.
“전체적으로 들어온 배역들이 좋네.”
그 말대로 지호에게 들어온 배역들은 대부분 좋았다.
신들린 연기를 펼쳐낼 수 있는 중요 배역들이 아니다 뿐이지, 전체적으로 다 좋다.
리혁이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일단 악역은 다 빼죠.”
“좋습니다.”
“국민 아이돌이란 이미지에 안 좋을뿐더러, 영화가 자극적일수록 왕지호에게 욕이 쏟아질 거예요.”
사회적인 영향력이 어마어마하게 커져 버린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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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타이틀이 슥슥 지나간다.
연기를 못하면 발연기라서 문제고, 잘하면 또 잘하는 대로 문제였다.
지호의 귀염귀염한 모습만 생각하던 이들이 악역 이미지에 얼마나 충격을 받겠는가.
-지호 영화에서 완전 다른 사람 같았어. 그렇다면 평소에도 혹시…?
분명 연기라는 걸 알아도 뭔가 찜찜해지는 그런 느낌!
지호가 동의했다.
“그리고 악역 들어온 배역들도 별로예요. 다 소시오패스 아니면 사이코패스 그런 거라.”
“그래도 이런 게 연기력 뽐내기엔 좋지 않아? 막 드라마 보면 범인 역할 잘했다고 칭찬 받고 그러던데.”
비주의 말에 지호가 고개를 저었다.
“제가 개인적으로 별로 안 좋아하기도 해서요.”
“그래?”
“넹. 생각해 보면 자기보다 약자만 노리는 사람들인데 되게 포장해 주는 거 같아서요. 그래놓고 취조실에서 ‘형사님… 악마를 본 적 있어요? 제 안에 있습니다’ 이러구.”
“오.”
“그리고 요새는 좀 식상한 거 같아요. 근 몇 년 동안 세계적으로 쏟아져 나와서.”
생각해 보니 미디어에서 나왔던 악역 중에서 ‘후후. 나보다 강한 자만 건드려 주지’ 하는 배역은 못 본 거 같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본을 하나씩 뺐다.
“자극성의 정도는?”
“엄마아빠랑 누나들이 기분 안 상하게 볼 수 있는 정도요. 아. 형들도 불편한 거 없이 봐야 되구요.”
슥슥.
불필요한 술집 장면이나 유혈이 낭자한 장면들도 빼고.
1페이지마다 한 번씩 ‘시발’이 나와서 아 이거 틴스 애들도 보는데 힘들겠다 싶은 것도 빼고.
“아니!!”
아. 깜짝아.
“왜?”
“감히 이런 왜곡을…!”
“…….”
역사 왜곡이 좀 들어간 사극들도 빼고.
이치에 안 맞는 걸 볼 때마다 파르르 떠는 리혁이를 중심으로 그렇게 한 차례 거른 후.
“나와라. 비주몬.”
“등장~”
연료 대신 사과를 공급 받은 비주가 집중한 얼굴로 대본을 읽었다.
비주가 지루해하는 것 같으면 바로 빼고.
“중현아.”
“넵.”
남은 대본들을 중현이가 흔들흔들 해서 바닥에 빠져나온 것들만 주웠다.
그렇게 우리가 추렸을 때.
“오. 제가 추린 거에서도 절반이 떨어졌네요.”
“그래?”
“넹. 제가 안 고른 것도 몇 개 있고.”
지호가 내게 대본을 내밀었다.
“자, 이제 형의 시간이에요.”
“알았어.”
여러 가지 복합적인 기준으로 지호의 대본을 살폈다.
현장에서 스탭들이 같이 일하기 싫어하는 욕쟁이 감독님의 대본도 슬쩍 빼고.
배역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지호의 외형적인 이미지와 안 어울리겠다는 싶은 배역도 빼고.
최근 <사운드 오브 선> 작업을 하면서 조 이사님에게 들었던 영화계에서 소문이 안 좋았던 제작사들도 거르고.
“음…….”
그렇게 두세 개 정도가 최종으로 남았을 때.
평소였다면 이제 남은 대본을 두고 치열한 토론이 벌어졌을 테지만, 오늘은 경우가 조금 달랐다.
우리에겐 ‘그’가 있었으니까.
김덕순과 더불어 One and only라는 칭호를 지니고 있는…….
지이잉-
“자, 토삼아.”
상자 안에 있는 토삼이에게 우리가 대본을 들이밀었다.
“한 번 골라보자.”
[예]
잘 모를 때면 미신의 힘을 빌리는 것이다.
“연습생 때 만났을 적에는 미신 안 믿는다고 그렇게 강조를 하더니.”
“…….”
투덜대는 리혁이에게 눈을 흘긴 후.
토삼이에게 대본을 하나씩 내밀었다.
이윽고 토삼이가 점지해 준 대본에 모두 당황했다.
“토삼아?”
[아니오]
“이게 진짜 최선이니…?”
[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치킨집 4남매 (가제)』
아무것도 거슬리는 게 없어서 최종 후보군에 남긴 했지만, 정말 애매하다고 생각한 대본이었다.
우리의 시선이 제목 아래로 향했다.
[시놉시스]
외계인이 침공한 서울.
치킨집 4남매가 위기에 빠진 사람들을 구한다.
뭐지?
정말 이게 맞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