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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2. 딸이 생겼다 (1) >
아빠, 축구 한다
2화 딸이 생겼다 (1)
그날 밤.
끼익, 끼익-!
집에 돌아오자마자 싱크대의 찬물을 틀어 어푸! 어푸! 얼굴에 연신 뒤집었다.
찰나긴 하지만 술이 확 깨는 것 같았다.
“지랄?”
허리를 세운 그 입에선 절로 욕지거리가 터져 나왔다.
일그러진 표정은 좀처럼 펴질 새가 없었다.
“이게 뭔 개소리지?”
한참 전부터 자라난 머릿속 의문이 이제는 타이어 빵꾸가 난 것처럼 여지없이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여보세요? 인구 오빠. 잘 지냈어? 오늘이나 내일 좀 봤으면 하는데. 오빠 딸이랑 같이. 약속 장소는 이따 문자로 보내줄게.]
약 두 시간 전 낯선 여인은 그렇게 제게 전했다.
1시간 40분 전엔 약속 시간대와 장소까지 알려주었다.
[밤 9시. 수제맥에서.]
아주 짤막한 메시지였지만 이를 본 인구의 두 눈은 아래위로 크게 들썩였다.
시흥시 장현동에 위치한 <수제맥!> 이라는 작은 카페 겸 맥주 가게.
약속 장소인 그곳은 인구의 집애서 고작 몇십 초 거리에 있었다.
그의 집은 수제맥 가게 옆에 자리한 원룸 빌라였던 거다.
‘우리 집을 알고 있어.’
알딸딸한 감각은 사라지고 혼란함에 한 손으로 이마를 문댔다.
‘대체 누구지.’
무엇보다 대뜸 딸이랑 같이 보잔다.
인구는 와락 미간을 구겼다.
‘오빠 딸이라니?’
그는 결혼을 한 적이 없었다.
여자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관계는..., 가진 적이 있지만 그건 아주 오래전 일이었다.
적어도 1년, 2년 사이에 인구는 여자친구를 만들지도 않았다.
‘그럴 시간이 어딨어.’
하루 살고 하루 벌어 하루 먹기도 바쁜 판국이 아니던가.
여전히 혈기왕성한 나잇대긴 해서 혼자서 일 처리를 하곤 했지만.
‘잘못 전화한 건가.’
잘못 전화한 것 치고는..., 그녀는 분명히 자신을 향해 인구랬다.
거기에 거주지 지근으로의 약속 장소까지 일치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혼잡한 생각과 다르게 인구는 바삐 움직였다.
온종일 입어 술 냄새와 담배 냄새가 찌든 옷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졌다.
대신 빨래 건조대에 널어둔 회색 후드 티를 입었다.
음식물이 묻은 반바지도 벗어 새 반바지로 갈아입고선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존나 나 인생 포기했어요, 라는 얼굴 같네.”
구릿빛 피부에 눈 밑은 거무튀튀했고 다듬지 않은 턱수염은 아무렇게나 자라났다.
석 달째 깎지 않은 머리는 더벅머리가 되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인상은 더럽게 사나웠다.
꾸욱.
인구는 한 손으로 얼굴을 꽤 거칠게 문댔다. 세면대 수돗물을 틀어선 손에 가볍게 묻히고는 앞머리를 올백으로 넘겼다.
혼란했지만..., 그는 본능에 따라 움직였다. 일종의 마음가짐 차 나름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안 들어오고 뭐 해?”
수제맥! 건물 앞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자 가게 주인인 상철 아저씨가 반쯤 문을 열고 얼굴만 쏙 내밀어 물었다.
단골인 만큼 인구는 손을 휙휙 저으며 대충 답했다.
“예열, 예열.”
“예열은 얼어 죽을. 빨리 들어와. 오늘 만든 수제 맥주 진짜 맛있으니까.”
“사장님이 쏘는 거죠?”
“맨날 쏘냐?”
인구는 픽하니 웃으며 뻔뻔스레 말을 이었다.
“에이~ 공짜로 테스트해주는데? 아시잖아요? 저 비어소믈리에인 거. 제 입맛에 맞으면 전국민이 다~ 좋아해.”
“짜식이. 말은 참...! 암튼 빨리 와!”
“아, 예. 들어가 계셔요.”
인구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처럼 농담 반 진담 반 섞어 말했으나 기분이 영 좋지가 않았다.
‘염병. 똥마렵네.’
1분, 1분이 갈수록 호기심과 더불어 불안감만 커졌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더 지나서였을까.
또각, 또각, 또각.
막 담배를 잇새에 끼웠다가 말고 그만 턱 근육이 풀려 툭하니 떨궜다.
횡단 보도 너머로 한 여성이 걸어오고 있었다.
174cm의 큰 키에 육감적인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검정색 시스 드레스.
멀리서 봐도 푸른 핏줄이 다 보일 듯한 새하얀 피부.
계란형 얼굴에 어울리는 하나로 단정하게 묶은 승무원 헤어 스타일.
그리고 서늘하고도 큰 눈매...,
엄청난 미인이었다.
일순 인구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가은이?”
* * *
박가은은 인구가 12살 때부터 알던 동네의 여동생이었다.
어렸을 땐 친남매처럼. 성인이 되어선 사랑하는 사이로까지 발전.
그 인연은 23살까지 쭉 이어졌다.
“와, 진짜. 오래만이다. 하. 하. 하.”
인구는 수제맥 야외 테이블을 두고 마주 앉은 가은이를 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눈동자는 아까부터 자꾸만 그녀의 옆자리로 떨어졌다.
양 갈래로 묶은 머리. 큼지막한 눈망울에 앵두 같은 도톰한 입술.
찹살떡처럼 포동포동하고도 새하얀 볼살...,
이제 한 3살, 4살쯤 되어 보이는 꼬마 숙녀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빤히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스윽.
“우리 귀여운 공주님. 어딜 그리 보시나.”
인구는 괜히 머쓱해 뒤쪽을 한 번 돌아보고는 말을 걸었다.
뒤엔 그냥 빌라 단지 내 텅 빈 도로가 다였다.
앞을 보자 꼬마 숙녀는 그새 입에 딸기 음료 빨대를 물어 쪽쪽 빨고 있었다.
커다란 눈망울은 끔뻑, 끔뻑.
“허헛, 거참.”
좀, 귀여웠다.
인구는 다시 가은이게 시선을 주었다.
“이름이...”
“세나.”
“응. 세나. 성은 그럼.”
“강이야.”
“아하.”
인구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문득, 그녀를 보자니 옛 기억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한때 우리는 뜨겁게 사랑하는 사이였고, 그 활활 타는 장작은 3년 가까이 이어졌다.
하지만 돌연, 그녀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걸로 그녀와 인구의 관계는 다리가 끊어진 것처럼 단절됐었다.
‘찾으려 해도 찾을 수가 없었으니까.’
연락처도 바꿨고, 고시텔을 찾아도 갔으나 이미 짐을 빼버린 뒤였다.
딱 1년간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던 거 같다.
‘지금은 뭐.’
그저 한때의 풋사랑이라 넘길 수 있었다.
아주 미약한 미운 정이 남았지만.
그런데, 진실은 그게 아니었다.
“그때..., 임신했었어. 오빠 아이.”
가은이는 팔짱을 낀 채 사색에 잠긴 얼굴로 나직이 말을 이었다.
“우리 둘 다 실수한 거지. 어렸으니까. 뭐, 지금도 어리지만.”
그녀는 말했다.
임신 사실이 부모의 귀에 들어갔고, 그날로 반강제적으로 이별을 통보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지만 아이만큼은 지울 수가 없었다고 한다.
산부인과로 질질 끌고 가는 엄마의 손을 뿌리쳐 도망치기까지...,
“그러다 좋은 남자를 만나서 결혼도 했어. 내 과거를 다 이해해주고 보듬어줄 줄 아는 사람이야.”
“우, 와. 잘됐네.”
살짝 버퍼링 걸린 감탄이 새어나왔다.
“그런데 1년 전에 죽었어.”
“우, 으헝?”
극단적인 결말이었다. 버퍼링에 이어 오류에 걸려버렸다.
자연스레 세나라는 꼬마 공주에게 흔들리는 시선이 향했다. 다행히 아이는 나만 바라보고 있다.
“괜찮아. 우리 세나. 나이 때답지 않게 나 닮아서 똑똑하니까. 죽음이란 게 뭔지도 알아. 담담히 받아들일 줄도 알구.”
“아... 그렇,구나.”
남의 자식이니 간섭할 바는 못되어 그냥 납득했다.
비스듬히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인 그녀는 옛 정인을 생각하는 양 슬픈 눈으로 덧붙였다.
“암이었어.”
“아, 안 됐네. 안 됐어. 쓰읍...”
인구는 고개를 주억대며 갈피를 잡지 못하는 두 손을 제 허벅지에 스윽, 스윽 문댔다.
그러다 말고 그녀는 본론을 꺼냈다.
“이제와서 우리 세나를 책임지라고는 하지 않아.”
“와! 그거는 다행이네.”
순간 진심이 나온 것 같아 인구는 큼큼! 헛기침하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다행이 아니라, 네 선택을 존중한다는 거지.”
순간 가은이의 눈빛이 사납게 번뜩였으나 인구는 특유의 뻔뻔함으로 회피했다.
“또 힘들었겠다. 난 그런 줄도 모르고 마냥 널 원망만 했었는데.”
“여전하네. 오빠는.”
“뭐가?”
“예나 지금이나 뻔뻔한 양아치같아.”
자주 듣는 소리인지라 가볍게 넘겼다.
가은이는 입가에 미끈한 미소를 띠며 계속해서 말했다.
“2년간 미국으로의 발령이 났어. 나한텐 두 번 다시는 없을 기회야. 거기서 온전히 내 모든 걸 쏟아보고 싶기도 하고.”
결론은, 그동안만 이 아이를 맡아달라는 거였다.
스윽.
테이블 위로 가느다랗고 고운 손이 올려졌다.
그녀는 조금 전과는 다른 애틋한 눈으로 말했다.
“그래도, 오빠 딸이잖아.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지?”
기습적으로 심장을 훅 찌르기까지.
곧장 연타가 날아왔다.
“아빠아?”
딸기 스무디를 반쯤 비운 세나가 옥구슬같은 목소리로 불렀다.
인구는 사나운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세상 착한 미소를 띠며 방어했다.
“아니. 아니야. 삼촌. 삼촌이라고 해야지?”
“아빠 맞아.”
재차 가은이게서 정정의 화살이 날아왔다.
“아빠아!”
확인사살에 아이는 세상 해맑은 표정으로 의자에서 내려와 우다다다! 무릎에 안겼다.
“...”
포동포동한 두 팔과 자그마한 몸으로 쏙 감싸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찹쌀떡 볼까지 촵! 무릎에 밀착하자 차마 떨쳐내진 못했다.
‘이 쒸...’
당했다.
* * *
물론 마인구는 호구가 아니다.
그렇듯 인구는 짧게 숨을 한 번 내쉬고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말했다.
“친자확인을 했으면 하는데.”
“친자확인?”
가은이의 서늘하고도 큰 눈이 잠깐이지만 꿈틀거렸다.
맥주가 들어가니 점차 안정을 찾은 인구는 속으로나마 생각했다.
‘이거, 이거. 어디서 본 레퍼토리야.’
흔치 않지만 이런 주제의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욜로 라이프를 사는 와중에 돌연 자식이 찾아오는 영화.
그 외에도 여럿 있다.
‘인구야. 정신 차려. 당황하면 안 돼.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해.’
워낙 예상치 못했던지라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다발로 꽂히긴 했고, 서늘한 감촉이 뒷목 털을 주뼛서게 만들었다.
하지만 어느 때일수록 냉정해야 할 상황이었다.
‘내 인생이 걸린 문제잖아.’
이 무슨 난데없는 폭풍이란 말인가?
‘이게 말이 되냐고.’
기반이 좀 다져졌다면 모를까.
인구는 정규직도 아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중이었다.
딱히 미래에 무얼 할까 라거나 이렇다 할 목표의식도 없이 그저 하루를 노니는 거다.
와중에 머릿수 하나가 더 늘어난다?
‘어림도 없지!’
나 하나 살기도 버거웠다.
홱! 홱!
상상만으로 인구는 두 눈에 힘을 팍 준 채 고개를 거칠게 저었다.
곧 그는 비장하게 말했다.
“옛 어르신들 말씀이 그래. 식은 국도 맛보고 먹으랬다고. 솔직한 말로 얘가 내 애라는 증거가 있어? 없잖아.”
다행히, 그녀는 잠깐의 한숨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아. 그렇게 하자.”
추가 옵션도 걸었다.
“단, 오빠 딸이 맞으면 내 말대로 하는 거로.”
그렇게 3일 후, 인구의 원룸 집.
친자확인 결과지를 받아든 인구는 아직 봉투를 뜯지 않았음에도 벌써부터 실눈을 뜨고 있었다.
‘아닐 거야.’
속으론 부정하고 또 부정했다.
‘절대 내 아이일 리가 없어.’
축구를 관둔 이후로 하루살이 같은 인생을 살긴 했어도 사랑 앞에선 올바른 성생활을 이어갔었다.
‘고무장갑이 불량이지 않은 이상은 그 아이가 내 자식일 리가 없다고.’
찌이익-
느릿하게 봉투를 찢어 안에서 결과지를 꺼내 들었다.
와중에도 실눈 모드는 풀지 않았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에 기절할지도 몰랐으니.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말이 돼?’
그렇게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의 여러 그래프에 이어 마지막 하단란에서 겨우 불안하게 흔들리는 실눈이 멈췄다.
“...어?”
이내 입이 절로 벌어져 얼빠진 소리가 새어나왔다.
친자확률 <%> : 99.999 9 %
시험 결과 : 피감정인 000 대상으로 친부자 관계를 확인하기 위하여...(중략)
부/모 권지수와 종합부/ 모권지수를 계산한 결과, 99.99% 이상의 친자확률을 확인하였으므로 친자 관계가 인정됩니다.
< 002. 딸이 생겼다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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