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039. 멋진 아빠란 (16) >
아빠는 축구인생 2회차
39화 멋진 아빠란 (16)
뉴캐슬에게 제공받은 인구의 작은 집은 우즈번에 위치해 있었다.
원래라면 홈구장과 가장 가까운 제스먼드야 했으나 인구가 사정사정한 끝에 세나와 가까이 붙을 수 있었던 거다.
그리고 지금에선 어느 정도의 입장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화창한 하늘 아래,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이 푸르른 나뭇잎을 흔드는 오후.
인구는 자연과 어울리는 고딕식 건물의 카페 실외 테이블 앞에 앉아 말했다.
“나는, 너랑은 그때 이후로 더는 진전적인 발전을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 지금 당장은 말이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맞아.”
마주한 가은이의 표정엔 조금은 씁쓸한 감이 머물렀다.
하지만 인구는 확실히 선을 그었다.
“이미 지난 일이긴 하지만 굳이 다시 언급하는 건..., 결국 우린 만났고, 아이 때문에라도 대면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잖아.”
인구는 딱 잘라 말했다.
“그러니까, 다시 결합하고 그런 건 생각지 말자. 한 번 깨진 인연, 억지로 붙이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
그녀의 고개가 살포시 수그러진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허나, 이렇게라도 노선정리를 할 필요가 있었다.
‘더는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잖아.’
시작도 해보기 전에 촛농의 불이 꺼졌다.
아이가 있다고 해서 재결합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4년, 5년이라는 시간은 가은이를 향한 이성적인 감정을 메마르게 하기에도 충분했고 말이다.
‘오지게 원망했었지.’
인구는 쓰디쓴 에스프레소를 한 입 들이키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아빠 된 도리는 할게. 영국에서도.”
“...진짜?”
힘없이 수그러졌던 고개가 번쩍 들렸다.
가은이의 놀란 표정에 인구는 살포시 미간을 좁혔다.
“그 반응은 뭐야?”
“아니..., 언제는 귀찮아했잖아.”
“허? 누가 귀찮아했다고?”
인구는 황당한 얼굴로 받아쳤다.
귀찮아 한 적은 절대 없었다. 지금에선 노선정리 차 다시금 세나와 가까이 붙어있고자 협상 테이블에 앉은 격이었고 말이다.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면서.
“어쨌거나 저쨌거나 세나는 내 딸이잖아. 책임질 수 있을 때까진 책임지는 게 맞지. 아, 뭐 내가 바쁘긴 해도..., 너보단 여유로울 것도 같고. 크흠! 그리고 너, 이번에 새로 발령나서 적응하고 일하느라 바쁠 거 아니야.”
“응. 그래서 보모를...”
“내가 봐줄게.”
“...정말?”
“경기나 훈련 없는 날에는 뭐. 시간이 남으니까. 그때 세나를 내 집에 데려가던, 내가 너네집에서 돌보던 하면 되지 않을까?”
이게 진정한 목적이었다.
한국에서와 달리 인구는 세나와 함께 지낼 명분이란 게 없었다.
그렇듯, 가은이와의 관계는 딱 선을 그으면서도 이전보단 못하겠지만 조금이나마 더 세나랑 가까이 지내고 싶은 바람이었다.
한편 가은이는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툭 내뱉듯 먼저 제안한 이 남자의 모습에서 미안함과 함께 가슴 언저리가 먹먹해지기까지 했으니까.
‘오빠...’
1년 6개월 전만 해도 눈앞의 남자는 자신의 제안을 억지로 떠맡듯이 응했었다.
암만 딸이라 해도, 4년 만에 나타난 격이니 그녀는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잘못한 거니까...’
그래서 이번만큼은 먼저 말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남으면 우리 세나랑..., 함께 해줄 수 있어?
라고.
자신이 딸을 돌볼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음을 떠나, 딸에게도 듬직한 아빠가 항상 곁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솔직히 지난 일이 후회스러웠다.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과거처럼 눈앞의 남자를 멀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에서 그녀는 하루에도 수 어번 후회하고, 또 여전히 이기적인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이 순간에도 한창 날아올라야 할 이 남자의 어깨를 강제로 누르는 것 같았으니까.
‘오빠가 원하는 꿈을 이제야 이뤄나가고 있는 거잖아...’
그런데 그는 먼저 제안해왔다.
퉁명스럽게, 아무렇지 않게.
지금도 그는 한쪽 뺨을 손끝으로 슬쩍 긁적이고는 말했다.
“아니, 뭐. 우.연.치.않.게 집도 거의 맞은편으로 배정 났고. 또 세나 나이 때는 부모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야 정서 건강에도 좋은 법 아니겠어?”
“...”
“또 낯선 환경이잖아. 동양인이라고 무시하는 놈 있으면 우째? 나 같은 덩치 큰 남자가 옆에 있어야 시비도 덜 걸지. 근데 다시 생각해봐도 참 우.연.치.않.게. 이렇게 딱 가까이 붙었다, 그치?”
“...”
“거기다, 세나가 날 좀 많이 좋아해. 잠깐 나랑 떨어졌다고 울지 않던? 아빠 보고 싶다고? 응? 솔직히 말해봐. 그랬지? 하루에 한 수어 번도 울고 그러지 않았어? 모든 것에 의욕을 잃었다던가?”
가은이의 눈시울은 붉어졌다.
‘옛날이랑 크게 달라지지 않았구나...,’
눈앞의 남자, 마인구는 감정 없이, 차갑게 툭툭 내뱉는 것 같으면서도 실상 그 속은 따스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스윽.
인구의 테이블에 올려졌던 손등 위로 가느다란 손의 감촉이 전해졌다.
흠칫!
인구는 예상치 못한 그녀의 행동에 잘게 어깨를 떨었다.
‘뭐, 뭐야. 왜 울려고 그래?’
어느덧 그녀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 인구의 손등을 감싸쥐고는 말했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오빠...!”
* * *
파팟, 파팟!
입단식 기자회견장에 자리하자마자 여러 곳에서 카메라 스트로보가 번쩍, 번쩍 터졌다.
“와.”
인구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한강에서의 입단식 당시엔 기자라고 해봤자 단 두 명에 지나지 않았건만...,
‘8명이나 왔네?’
명찰엔 제스먼드, 고스포스, 바이커, 히턴 등, 뉴캐슬어폰타인 지역이 표시되어 있었다.
‘지역 내 기자들이구나.’
축구에 살고 축구에 죽는 나라라더니, 마주한 기자들은 곧장 제게 질문을 속사포로 던졌다.
“마인쿠 선수! k리그2에서 40골이 넘는 경이적인 공격포인트를 달성하셨던데요. 이곳, 잉글랜드 챔피언십에서도 그러한 공격포인트 생산이 가능하리라 보십니까?”
“글쎄요. 일단은, 까봐야 알지 않을까요.”
“뉴캐슬로 이적하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래전부터 뉴캐슬에서 뛰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영화 스코어의 영향도 적잖게 받았고요.”
사실은 이적이 결정되고 나서 해당 영화를 접했다.
‘오지게 재밌더만.’
없던 팀의 애정과 자긍심이 무럭무럭 자라날 정도였다.
영화 속 주인공인 산티아구 무네즈와 개빈 해리스 같은 선수가 되고 싶다! 는 요상한 열망도 피어올랐고 말이다.
인구의 영어 실력은 날이 가면 갈수록 늘었다.
매일 같이 영 단어 100개씩 외웠으며, 발음 부분에서도 연습을 꾸준히 해왔으니까.
물론 영국인들 입장에서야 어눌하게 들릴 수야 있지만 듣고 답변하는 데는 그리 큰 문제가 없었다.
“...”
그렇듯 뉴캐슬이 배려 차원에서 고용한 옆 통역사는 입을 벙긋대다가도 꾹 다물었다.
통역하기도 전에 인구가 답변을 이어갔으니까.
“새로운 환경, 무대에 발을 들인 만큼 감회가 어떠신지요?”
“솔직히 굉장히 떨립니다.”
웅장한 자태를 뽐내던 세인트 제임스 파크를 시야에 들인 순간부터 심장은 나댔다.
옛 높은 곳을 바라보던 청대시 절의 열망이 다시금 파도처럼 몰아치는 것 같았고 말이다.
‘내가 여기까지 오다니...’
처음엔 한강에서 대충 뛰다가 은퇴하거나, 도중에 잘리겠거니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와버렸다.
‘이게 다 우리 딸 덕이야.’
얼마의 시간이 지나서였을까.
“k리그2는 변방 중에서도 변방으로 알고 있습니다. 상당수 툰들은 지금, 구단의 영입 방식에 의문을 표함을 넘어 질린 상태죠. 인쿠. 당신 생각은 어떠십니까? 뉴캐슬이 영입한 선수들이..., 챔피언십 수준에 어울린다고 보십니까?”
한 머머리가 질문을 건넸다.
처음 자리했을 때부터 자신을 깔보듯이 바라보던 놈이었다.
‘글랜 하미슨.’
명찰 속 이름을 확인한 인구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축구공은 둥글잖아요. 뚜껑을 까보기 전까진 아무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법 아닙니까?”
“하지만 그 뚜껑을 까기 전부터 이미 그 외관이 별 볼 일 없으면요? 싸구려 노상 가게에서 파는 비닐에 담긴 음료처럼.”
“하, 이 새끼 봐라.”
인구는 그만 한국어로 황당하니 욕지거리를 터뜨렸다.
눈앞의 기자가 대놓고 비꼬고 있잖은가.
‘그러니까 내 외관이 비닐이라는 거지?’
까보든 말든.
“예?”
느닷없는 한국어에 하미슨은 의아한 얼굴로 반문했다.
그러면서도 입가엔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인구는 그런 녀석의 면상을 빤히 보더니 한숨을 푸욱 쉬었다.
‘이 새끼가 시작부터 내 성질 건들어버리네.’
누구든, 외국어를 배우는 과정 중 제일 먼저 쉽게 접하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욕일 것이다.
그렇듯 대놓고 무시하는 저 인간을 향해 인구는 고개를 한 번 끄덕거리곤 말했다.
“fuck you, stupid, Ah. Yippi kaye mutherfu000.”
일단 영화에서 배운 단어랑 일부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어어?”
“저, 저런...!”
자리한 기자들의 얼굴에 당혹감과 함께 분노가 어린 건 한순간.
하미슨의 얼굴도 대번에 시뻘게졌다.
“지금 뭐라고...!”
그러거나 말거나 인구는 그래도 부족한 것 같아 가감 없이 가운데 손가락을 들먹였다.
“이거나 먹어라.”
* * *
[뉴캐슬의 새로운 이적생! 입단 인터뷰에서부터 논란...!]
[마인쿠! 시작부터 기자들과 좋지 않은 관계로...!]
[마인쿠는 뉴캐슬 사상 최악의 영입으로 남을 것!]
초장부터 기자들과는 척을 졌으니, 한동안은 좋은 기사가 나오긴 글렀다.
반면에 일부 선수들에겐 좋은 인상으로 비쳤나 보다.
“인쿠. 너 강단 있던데?”
“그 빌어먹을 타자기들 상대로 도발이라니. 내 속이 다 시원했어!”
오전. 첫 훈련장에 출근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선수들이 자신을 향해 친근하게 다가와 몇 마디씩 건넸다.
인구는 이 상황이 낯설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와, tv에서 보던 애들이라 그런지 연예인 보는 것 같네.’
방금도 주장인 자말 라샐스가 제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칭찬하지 않았는가.
물론 몇몇은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떤 녀석은 스치듯이 지나치며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렸다.
“무슨 빽으로 들어왔는지는 몰라도, 나랑 경합하는 순간 네 숨통이 꽉 막혀버릴걸?”
경쟁 포지션에 있는 이들은 자신을 향해 아직 아는 체조차 않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거슬리는 한 명.
‘라파엘 배니테즈.’
그는 인구가 가장 보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이스탄불의 기적은 진짜 대박이었는데.’
적어도 인구가 직접 마주한 사람 중에선 가장 뛰어난 감독이 아닐까 싶었다.
굵직한 커리어도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코치진과 이야기 중인 그를 보자 일전에 스카우트, 로보트 파이기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어지간히 잘해선 안 돼.]
[그럼요?]
[무지막지하게 잘 해야하지. 훈련이든, 연습 경기든, 실전이든. 그래야지만 라파엘의 환심을 살 수 있을 테니까.]
[그 양반, 챔피언십에 남는데요?]
[남고 싶어서 남는 게 아니라. 계약이 묶여 있어서..., 그건 그렇고 자네. 참 제 할 말을 다하는 스타일이구만?]
지금도 봐라.
‘눈길 한번 안 주는 것 봐라.’
결국은 첫 단추부터 잘 잠가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것도 아주 잘.’
그리고 지금이 딱 그 타이밍이었다.
“자, 다들 모여!”
때마침 라파엘 배니테즈의 지령이 떨어졌는지 수석코치가 외쳤다.
오전부터 간단한 러닝 후 a팀과 b팀을 나눠 공개 경기가 예정되어 있었으니까.
< 039. 멋진 아빠란 (16) > 끝
ⓒ 강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