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1화 (1/130)

1화 이름조차 없는 뉴비 암살자

지하철과 버스 타는 시간.

엘리베이터 기다리는 시간

화장실에서 큰일 보는 시간.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나는 스마트폰으로 소설을 읽는다.

시간에 쫓겨 사는 팍팍한 일상에서 발견한 유일한 낙이었다.

노잼 소설로 시간을 낭비할 때면 깊은 빡침이 골수를 타고 올라왔지만, 읽을 맛이 나는 보물을 찾는 날이면 그것에 푹 빠져 자투리 시간을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다,

“이건 무슨 소설이지?”

몇 년 전에 하나의 소설을 알게 됐다.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

제목부터 이상한 이 소설은 콘셉트부터 참으로 묘했다.

악당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라니.

당연히 소설의 주인공들도 전부 악당이었다.

회귀한 악당부터, 빙의된 악당, 환생한 악당 등 수많은 기연으로 강력해진 악당들이 영웅들을 농락하고 세상을 혼란에 빠트리는 이야기였다.

악당들의 욕구 충족과 세상을 멸망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변태 같은 소설.

‘확실히 병맛 소설이긴 한데….’

콘셉트는 변태 같은데, 이상하리만큼 중독성이 있었다.

악당들이 주인공이다 보니 시원한 맛이 있었다.

명분 따윈 개나 주라는 듯 막아서는 모든 것을 불도저처럼 파괴하고 밀어버린다.

현실에선 도저히 불가능한 일들이 이곳에선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세상이 망하면 어떻고, 영웅들이 죽어 나가면 어때.

‘어차피 소설 속 세상인데.’

알바 면접을 준비 중일 때, 중요한 시험을 준비 중일 때, 취업을 준비 중일 때.

‘그러다 전부 실패하고, 돈도 바닥났을 때.’

그때도 소설은 계속 연재되었고, 인생이 답답해지면 난 이 소설을 또 찾게 되었다.

잠시나마 힘든 현실을 잊을 수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힘들 때 당기는 소주처럼 이 소설이 내 인생의 일부분처럼 깊숙이 자리 잡았다.

어엿한 회사원이 된 지금까지도.

“와, 악당 새끼. 현실로 데려온 뒤 팀장 앞에 세워놓고 싶다.”

직원 화장실.

변기에서 큰일을 보던 나는 짬을 내서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을 읽었다.

악당이 영웅 하나를 묵사발 내는 장면이었는데, 피떡이 되는 영웅을 팀장으로 상상하며 행복 회로를 돌리고 있었다.

이 장면도 수없이 읽은 내용이지만, 팀장을 대입시키니 또 느낌이 색달랐다.

갑갑한 느낌에 넥타이를 풀어 헤치며 투덜거렸다.

“하, 유부남 새끼가 여직원들에게 치근덕거리기는.”

아침 브리핑 시간에 팀장이 나를 세워놓고 사원들 앞에서 창피를 준 일이 떠올랐다.

직권 남용이라고 해야 하나?

직급을 이용해서 이 여자 저 여자들을 쿡쿡 찔러보는 데 속이 거북해서 눈치를 줬더니, 그때부터 눈만 마주치면 큰소리다.

“돈만 아니었으면 턱주가리 날리고 사표 던졌을 텐데.”

학자금 대출, 자동차 대출, 카드 대금 등을 떠올리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손에 쥔 것은 쥐뿔도 없는 것 같은데, 눈에 보이는 건 빚뿐이다.

최근에 대리로 승진하면서 월급도 오른 상황이라 더러워도 참아야 했다.

난 스마트폰에 비친 제목을 빤히 응시했다.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

참으로 오랫동안 함께해 온 녀석이다.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오늘은 특히 더 현실과의 괴리가 느껴졌다.

현실이 힘들어서 그런가.

가끔은 소설 속 세상이 부럽기도 했다.

물론, 악당이 되고픈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저 자기 꼴리는 대로, 제멋대로 살아가는 삶이 부러울 뿐이었다.

그건 영웅들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소설이니까 가능한 일이겠지.’

학교 졸업 후 어엿한 회사원으로 자리 잡을 때까지, 연줄이나 돈도 없는 이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래.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인간의 상상으로 만들어낸.

현실로 돌아오니, 답답함이 느껴졌다.

“그래도 너 때문에 산다. 고맙다.”

난 피식 웃으며 허리를 폈다.

너무 오래 있었나?

엉덩이가 뻐근했다.

슬슬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고 하는데, 순간 시야가 깜박거리기 시작했다.

“어? 갑자기 왜 이래?”

전등이 미친 듯이 깜박였다.

어떤 놈이 장난을 치는 건가 생각했을 때, 시야가 푹 꺼져버렸다. 주변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난 황급히 스마트폰을 조작했다. 손전등 어플을 켜려고 한 것인데, 화면에 뜬 문구는 하나의 ‘공지’였다.

“스토리 수정 공지?”

지금껏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가 공지를 올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내용상 모든 영웅이 몰살당하고, 세상이 파멸로 치닫는 막바지 단계일 텐데?

화장실 불이 꺼진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난 멍하니 화면을 응시했다.

내게 작은 위안이 되어주었던 소설.

“뭐 상관없으려나?”

추천 버튼을 누르며 수정이든 뭐든 응원한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나쁜 놈들이 승리하는 내용이니, 소설이 인기가 있을 리 없다.

내용이 어떻게 수정될지 궁금하기도 했다.

영웅들이 오죽 불쌍해야지.

그만큼 악당들은 비열했고, 강력했다.

‘그래서 주인공들의 공략법을 수도 없이 상상하기도 했지.’

이참에 악당들의 대항마로 강력한 영웅이 등장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그렇게 댓글 완료 버튼을 눌렀을 때, 화면이 푹 꺼져버렸다.

“뭐야…?”

다시 찾아온 암흑.

인기척은 없었다.

화장실을 이용하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는 모양.

어둡다 보니, 덜컥 겁이 났다.

공지 따윈 잊고 다급히 손을 뻗었다. 마무리를 위해 주변을 더듬거렸지만 잡히는 게 없다. 소설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들어올 때 가장 중요한 것을 확인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욕설을 내뱉었다.

“…시발, 휴지가 없잖아?”

그게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야. 일어나.”

단잠을 자고 있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잠에서 깨고 싶지 않아 꿍얼거리며 등을 돌렸다.

더 자고 싶다고.

하지만 상대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퍽―!

“끄어어억!”

지독한 고통에 허리를 새우처럼 접었다.

등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

씨발, 먹을 때랑 잘 때는 개도 안 건드리는데!

두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든 순간, 큰 주먹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퍽―

“꾸엑!”

얼굴이 뭉개질 것 같은 고통.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이곳은 집이 아니었다.

그럼 어디야?

코를 부여잡고 가까스로 눈을 뜨니 사내 셋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근데 복장이 이상했다.

가죽 재질의 갑옷과 등에 걸친 살벌한 무기들, 판타지 코스프레 축제서나 보던 해괴한 복장이었다.

이 새끼들, 뭐야?

하지만 입으로 나온 말은 공손 그 자체였다.

“서, 선생님들, 누구십니까?”

“선생님? 누구십니까? 이 새끼가 미쳤나? 단장, 어떻게 할까요? 죽일까요?”

“신입이다. 정신만 차리게 해.”

“알겠습니다.”

주먹을 휘둘렀던 사내가 성큼 다가오더니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다.

정신만 차리게 하라며?

“반항하지 마라. 뼈 부러진다.”

“자, 잠깐만… 아악!”

무자비한 발길질이 이어졌다.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아니고 이 무슨 개 같은 상황일까.

여긴 어디고? 이 사내들은 왜 나를 구타하고 있는 걸까.

상황 파악을 하고 싶었지만,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일단 너무 아팠다.

“그만.”

“끄…….”

“치료하고 창고에 남겨둬. 어차피 쓸데는 정해져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때리던 사내가 다가오자, 나는 몸을 웅크렸다. 그 모습에 사내는 피식 웃더니, 뺨을 툭툭 두드렸다.

“동료끼리 너무 겁먹지 말라고.”

동료?

시발, 동료 좋아하네. 딱 봐도 일진과 빵셔틀 관계 같구만.

사내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목덜미를 붙잡힌 채 나는 창고 안으로 질질 끌려왔다.

사내는 내 몸을 살피더니, 눈앞에 병 하나를 내려놨다.

붉은 액체가 담긴 병이었다.

“마시고 쉬어. 앞으로 정신 똑바로 차려라. 임무 중에 또 헛소리하면 다음에는 이 정도로 안 끝날 거야.”

“…네네.”

뭔 소린지 모르겠지만, 일단 상황을 넘기기 위해 나는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였다.

“우린 정보 수집을 위해 하루 정도 자리를 비울 거야. 넌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어. 사람이 올 테니까.”

내 머리를 툭툭 두드리던 사내는 나를 덩그러니 남겨둔 채 자리를 벗어났다.

“…….”

사내가 떠난 자리를 난 한동안 멍하니 바라봤다.

미친 토네이도가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것 같았다.

“큭!”

창고 안에 스며든 쌀쌀한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몸을 움직이자 비명이 절로 흘러나왔다.

온몸이 저미듯 아팠다.

‘이 새끼들 전문가다.’

아프기는 한데 움직이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처맞았는데 뼈 하나 부러진 데가 없다. 사람 패는 데 도가 튼 사람 같았다.

끙끙거리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시선이 눈앞에 놓인 병에 닿았다.

움켜쥔 병 안에는 붉은 액체가 찰랑거렸다.

처음 보는 물건.

하지만 곧 그 물건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회복… 물약?’

처음 보는 정보가 뇌리에 떠올랐다. 마시면 고통을 줄여주고, 회복력을 올려주는 마법 물약.

내가 이 정보를 어떻게 알고 있지?

황당함이 몰려왔지만, 일단 병따개를 따고 원샷을 때렸다.

고통을 줄여준다는데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감기약 같네.”

시럽이 섞인 애들용 감기약 맛이 목구멍을 타고 들어갔다.

썩 좋은 맛은 아니지만, 배 속이 따뜻해지고 고통이 서서히 줄어들자 살 것 같았다.

상태가 좋아지자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제 현실과 마주할 시간이다.

“일단 꿈은 아닌 것 같고,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며 소설을 본 것까지 기억난다.

휴지를 찾다가 의식을 잃은 것 같은데, 그 이후로 눈을 뜨니 이런 상황이다.

잠시 빈 병을 만지작거렸다.

나름 인싸라 인터넷 정보에 밝은 편인데 이런 물약이 출시됐다는 정보는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일단 이름부터가 구렸다.

회복 물약이라니.

아, 스마트폰은?

현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물건이 떠오르자, 나는 서둘러 품을 뒤졌다.

이런 옷은 도대체 언제 입힌 거야?

가죽 갑옷 속을 뒤적거리길 잠시, 난 어색한 감각에 멈칫했다.

미간을 좁히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은은한 횃불이 창고 안을 밝히고 있는 상황.

난 두 손바닥을 살폈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야무지게 박혀 있다.

쇠질을 수없이 해야 만들어질 법한 헬창 손바닥이었다.

참고로 난 회사 일에 치여 운동과 담을 쌓은 몸이었다.

뱃살이 나온 몸이란 뜻이다.

그런데,

‘…내 몸이 아닌데?’

굳은살을 시작으로 더듬거리는 감촉에서 단단한 근육이 잡혔다. 가슴은 탄탄했고, 배에선 왕(王) 자가 선명히 느껴졌다.

변태처럼 다른 사람의 몸을 만지작거리는 느낌마저 든다.

“시발.”

하루아침에 몸짱이 됐는데, 욕설이 절로 흘러나왔다.

몸이 바뀌었다.

이전 몸뚱이와 차이가 너무 확연해서 부정하기도 힘들었다.

그제야 바닥에 뒹구는 빈 병이 무섭게 다가왔다.

죽을 듯이 처맞아도 이거 한 병이면 컨디션이 돌아온다.

회복 물약.

그딴 게 현실에 존재할 리 없다.

어째 여긴 다른 세상 같았다.

정신이 나간 듯 창고를 샅샅이 뒤적거렸다.

바깥에 나가고 싶었지만, 대기하라는 놈의 말이 떠오르자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표정 하나 안 변하고 사람을 죽일 듯이 패는 놈들이다. 바깥에 나갔다가 눈에 띄기라도 한다면?

그 이후는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렇다고 이유 없이 도주를 포기한 건 아니었다.

창고 안을 둘러보고 자리로 돌아왔을 때, 몇 가지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해코지를 할 의도는 없는 것 같은데.”

때린 놈들을 옹호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밧줄로 자신을 묶어둔 것도 아니고 회복할 물약도 놓고 갔다. 심지어 바깥으로 통하는 문도 잠겨 있지 않았다.

나갈 생각만 있다면 언제든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는 의미.

나는 품에서 나온 몇 가지 물건을 살폈다.

“단검, 금화 주머니, 지도라….”

일단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저들은 자신을 동료라고 했고, 창고에서 대기하며 사람을 기다리라고 했다.

‘나를 신입이라고 불렀지.’

즉, 자신은 저들과 한패란 뜻이다. 단검을 남겨둔 것이 그 증거였다.

“단검이라서 더 문제지만.”

차라리 총이었다면 현실을 떠올리며 덜 불안했을 텐데.

그리고 금화가 든 주머니.

금화는 처음 보는 이상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만약 이 금화가 화폐 용도라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나는 접힌 지도를 들어 올리며 주저했다.

왠지 지도를 편 순간, 애써 부정했던 불안감이 현실이 될 것 같았다.

“하…….”

한숨을 내쉬며 나는 결국 지도를 폈다. 다른 선택지가 존재했다면 좋았을 텐데,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지도를 펴는 것 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

난 멍하니 펼쳐진 지도를 바라봤다. 처음 보는 대륙과 지형이 조악하게 그려져 있다.

처음 보는 문자가 적혀 있지만, 신기하게도 그 뜻이 전부 이해가 됐다.

그래서 난 이 기가 막힌 현실과 마주할 수 있었다.

―엘레토르 성곽.

“엘레토르….”

너무나도 익숙한 이름이다.

화장실에서 스마트폰을 읽으며 알게 된 지명이니 모를 수가 없었다.

한 소설에서 등장하는 유명한 지명 중 하나.

그 성곽 주변에 붉게 표시된 영지가 하나 있었는데, 그 위에 적힌 메모 내용이 가관이었다.

―암살 표적, 블라이어 영지의 카멜 공자.

“좆됐다.”

카멜은 내가 알고 있는 소설 속 악당 주인공의 이름이었다.

난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의 소설 속에 들어와 있었다.

그것도 소설 속 이름조차 없는 뉴비 암살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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