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파양초
블라이어 영지로 들어가는 성문에 많은 인파가 붐볐다.
성문 검문을 통과하기 위해 암살자들은 모두 용병 차림으로 변장했는데, 하나같이 인상이 더러워서 진짜 용병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어쭈?’
단장을 시작으로 암살자들이 차례차례 용병패를 꺼내 병사 앞에 내보였다.
설마, 진짜 용병인 거야?
요즘 암살자는 투잡도 뛰는 모양이었다.
‘그럼, 나는?’
난 왜 용병패 안 주는데?
저들이랑 친해질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왠지 소외된 기분이라 이상하게 기분이 더러웠다.
“이 녀석은 뭐지? 용병은 아닌 것 같은데.”
내 차례가 되자, 병사가 날 무섭게 내려다보며 물었다.
소설 속 ‘병사1’ 주제에 있는 척은 오지게 한다. 배알이 뒤틀렸지만, 지금 내 처지는 병사1만도 못해서 잔뜩 엎드려야 했다.
내가 어색한 미소로 단장을 바라보자, 단장이 호탕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탕탕 두드렸다.
크룩스는 연기도 가르치나, 왜 이리 자연스러운데?
“하하하, 병사님, 이 녀석은 짐꾼입니다.”
“짐꾼? 짐꾼도 데리고 다니나? C급 용병단이면 장비 맞출 돈도 빠듯할 텐데?”
“싹수가 괜찮아서, 짐꾼으로 쓰다가 용병으로 키우려고 데려왔습니다.”
“이놈을? 차라리 귀족한테 팔지 그래. 반반하게 생겼는데.”
이 ‘병사1’ 새끼가 뒈지고 싶나. 사람을 앞에 놓고 못 하는 소리가 없네?
내 얼굴이 반반하고 비율도 쩔긴 했지만, 너 같은 놈은 횟감도 안 되는 놈이라고.
표정이 와락 구겨졌지만,
“그럼, 짐꾼 가방에 든 물건은 뭐지?”
병사의 다음 말에 내 표정은 거짓말처럼 환하게 미소를 띠기 시작했다.
굴욕적이지만 참아야 한다!
가방 안을 보여주는 건 곤란했으니까.
“시, 식량이 전부입니다.”
“식량? 열어봐.”
“저, 그게….”
“안 열고 뭐 해?”
가방 안에는 식량 외에 연초 보따리가 있었다.
난 연초를 한 번 피워 본 적이 있었다.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이 평범한 풀때기가 절대 아니었다. 걱정이 들었지만, 그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대기자도 많은데 그냥 통과시켜. 귀찮게 뭘 자꾸 들춰?”
“추, 충! 알겠습니다!”
단장이 선임 병사들 주머니에 슬쩍 무언가를 찔러주자, 가방 확인은 무슨, 병사들의 인사를 받으며 성문 안으로 프리패스가 됐다.
은화를 처먹이고 처먹는, 아주 우애 좋은 뇌물 현장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회사원 시절에도 못 볼 꼴 많이 보긴 했지.
지금이 딱 그 꼴이다.
‘돈이면 다 되는 더러운 세상아.’
현실이고, 소설 속이고, 사람이 굴러가는 세상은 다 똑같은 모양이었다.
블라이어 외성 안으로 입성했다. 광산업이 발달한 블라이어는 상업 도시답게 무척 발전된 영지였다.
대로(大路)를 따라 끝없이 늘어진 물건 좌판과 상인들, 구경 나온 손님들로 득실거렸다.
단장은 주점이 딸린 큰 여관에 짐을 풀고 암살자들을 방으로 불렀다.
“넷만 움직인다.”
“남은 자들은 어찌합니까?”
“다른 소식이 올 수 있으니 대기하면서 기다려.”
“알겠습니다.”
단장은 새로 합류한 셋을 여관에 남기고 기존 멤버 넷과 여관을 나섰다. 당연히 그 멤버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는 말 다섯 마리와 함께 어딘가로 움직였다. 그중 나는 모든 말의 고삐를 잡아끌며 인파로 빽빽이 들어찬 거리를 힘겹게 뚫고 있었다.
“신입, 눈 크게 뜨고 길 잘 뚫어라. 길 잃으면 저번처럼 혼난다.”
“아, 알겠습니다!”
“큭큭큭, 서두르라고. 너 때문에 늦으면 굶길 거야.”
단장은 가만히 있는데, 뒤에 선 꼬봉들이 지랄이다. 첫 만남에 날 구타했던 코쟁이 새끼들.
죽이고 싶다.
말들을 챙기랴, 뒤에선 갈구고 인파에 치이는 상황.
난 정신없이 대답하면서도 머리를 팽팽 돌리고 있었다.
바로 생존 계획 말이다.
‘도주는 힘들 것 같고.’
블라이어 영지는 인파로 득실거리는 공간이라, 몸을 빼기 좋은 장소였다. 일행이 감시하는 것도 아니니 도주는 언제든 가능한 상황.
하지만 이틀 동안 고민하면서 뒤늦게 알게 됐다.
도주는 그야말로 최악의 판단이란 사실을 말이다.
‘당장은 탈출에 성공할 수 있어도, 그 이후에는 감당할 수 없거든.’
크룩스는 임무 중 도주한 암살자를 절대로 살려두지 않는다. 그건 다른 암살자 조직에서도 마찬가지다.
암살자가 표적 사냥 전에 도망친다?
조직의 근간을 뒤흔드는 배신행위였다. 다른 암살자 조직과 연합해서라도 끝까지 추격할 것이다.
‘암살자가 판타지 속 고블린 같은 존재라도 다굴에는 장사 없다고.’
기연이란 기연을 모조리 처먹고 강해진다면 모를까.
지금은 뼈도 못 추리고 죽는다.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거나, 나를 잊게 만들 방도가 필요했다.
나에겐 시간이 무조건 필요했으니까.
‘현재 임무를 유지하면서 생존하는 방법.’
지금으로서 한 가지뿐이다.
‘시발. 이건 진짜 피하고 싶었는데.’
바로 현 암살 계획을 이용하는 것.
나는 저 너머 내성 중심에 우뚝 선 웅장한 탑을 올려다봤다.
탑에 머무는 한 사내.
그리고 내일 새벽 내가 죽여야 할 표적.
‘카멜 블레이저.’
피에 미친 학살자라 불리는 그놈만이 암살 조직 크룩스의 눈에서 날 가려줄 수 있었다.
악당을 이용할 계획을 짜다니, 나도 미치긴 했나 보다.
하지만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카멜에 대해 나만큼 잘 아는 인간도 없을 테니까.’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
난 이 소설을 모두 읽은 독자다.
오직 나만이 악당 주인공들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악당들에게 비밀이란 누구에게도 들켜선 안 될 약점이자 능력이었다.
나는 그런 카멜 블레이저의 비밀을 파고들 생각이었다.
* * *
서쪽 성문 근처에 즐비하게 자리 잡은 옷가게 거리.
눈에 보이는 수많은 옷가게 중 일행은 한 곳을 방문했다.
크룩스의 조직원만 알고 있는 비밀 표식이 옷가게 간판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난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나를 맞이한 이를 보며 말했다.
“아, 사람이 있었군요. 몰랐습니다.”
“마구간인 줄 알았습니다.”
이 병신 같은 암구호를 장소 구애 없이 사용하다니, 암구호를 만든 새끼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게을러터진 게 분명했다.
2층으로 안내되자 뚱뚱한 중년인이 단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보니, 조직원이 아니라 암상인이었다.
암상인은 창밖의 말들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말이 다섯 마리뿐이던데. 나머지 두 마리는?”
“오는 길에 습격받아서 잃었다.”
“내가 받을 대금은 말 일곱 마리인데, 부족한 대금은 어찌할 거요?”
“금화로 충당하지.”
단장이 나를 보며 턱짓하자, 난 가방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건넸다. 주머니를 확인한 암상인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옷가게에 전시된 의복 상자 중 한 곳을 가리켰다.
확인해보니, 의복 상자 구석에 일곱 벌의 병사복이 교묘하게 숨겨져 있었다.
블라이어 내성 병사들이 입는 의복이었다.
난 병사복을 가방 안에 욱여넣었다.
그 사이, 단장과 암상인은 내성 정보를 주고받으며 대화 중이었다.
“사냥 신호는?”
“큰불이 날 거요. 그때 움직이시오.”
“표적이 지닌 아티팩트 정보는 알아냈나?”
“보호의 권능이 담긴 마법 구슬이라더군. 물리적인 피해로는 힘들 거요. 방도가 있소?”
“방도라….”
단장은 대답 대신 옷을 챙기는 신입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암상인은 더는 말하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괜한 호기심은 명을 단축할 뿐이다. 어차피 사냥은 저들의 몫이었으니까.
“난 오늘 이곳을 뜰 거요. 아, 당신의 마스터가 전해달라는군.”
“마스터가?”
“좋은 소식을 기다리겠다.”
“…….”
그것으로 두 일행의 대화는 끝이 났다. 내성 정보와 병사복을 챙긴 일행은 숙소로 빠르게 복귀했다.
* * *
이 세상에 떨어진 이후 식사다운 식사를 처음 해봤다.
육류가 들어간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살짝 고기 비린내가 났지만, 간이 되어 있어서 먹을 만했다.
“더 먹고 싶은 건?”
암상인과 거래를 끝내고 늦은 저녁에 숙소에 도착한 뒤 주점에서 식사 시간을 가졌다.
무슨 이유인지, 단장은 나를 옆에 앉혀놓고 먹고 싶은 음식들을 모두 시켜줬다.
코쟁이들이 가늘어진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부모를 빼앗긴 애들처럼 심술이 얼굴에 가득한 표정이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거, 이거, 이거, 이거요.”
“알았다.”
“술은 안 됩니까?”
“시켜라.”
숟가락을 쥔 코쟁이들의 주먹에 힘줄이 돋아났다.
꼬우면 너네도 인간 폭탄 되든가.
나는 이 식사가 사형수에게 먹이는 최후의 만찬임을 잘 알았다.
입맛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음식이 입 안으로 잘 들어갔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이상하게 불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암살자가 되더니 신경이 굵어진 건가?
그렇게 커져 버린 간땡이를 붙잡고 코쟁이들과 눈싸움을 하고 있는데,
“그거 들었어?”
“뭐 말인가?”
테이블 바로 옆자리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영주님의 병환이 점점 깊어진다는데? 어쩌지?”
“네놈이 그걸 어떻게 알아?”
“성을 방문하는 치료사와 사제의 수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고.”
“그렇게 심각해?”
“차도가 전혀 없다고 은연중 소문이 돌고 있어. 언제 돌아가셔도 이상할 게 없다고 말이야.”
“그럼, 곧 후계가 발표되는 거 아니야? 윌리엄 공자님이 후계를 승계하시겠지?”
“장자 신분이니 명분이 있겠지. 영주님이 힘을 실어주고 있다는 소문도 있고.”
“둘째인 카멜 공자의 능력이 범상치 않다고 들었는데, 자작님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실패한 모양이야.”
차기 영주를 놓고 윌리엄과 카멜을 비교하는 이야기. 하지만 이들 대부분이 윌리엄이 영주 자리에 오를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그 흐름대로 흘러가는 게 맞겠지.
‘카멜이 엄청난 대악당이 아니라면 말이지.’
영주인 리암슨 자작이 윌리엄을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영지민들이 아무리 그를 지지해도 어차피 이 영지의 주인은 카멜이었다.
그의 행보는 파격 그 자체이니까.
영주가 되는 과정을 소설로 읽으면서 소름 돋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블라이어 차기 영주가 누가 될지를 두고 도박판 같은 거 안 열리나?’
몰빵 베팅이 가능한 도박인데 살짝 아쉬움이 몰려왔다.
이딴 생각이나 하는 걸 보니, 나도 맛탱이가 간 모양이다.
‘…개 졸리네.’
눈꺼풀이 천근만근이다.
조금 전 헛생각이 들 정도로 졸음이 미친 듯이 쏟아졌다.
이틀 동안 잠을 못 자고, 눈앞의 음식을 배 터지게 처먹었으니 졸릴 만도 했다.
하지만 이건 좀 심한데, 수면제를 먹지 않고서야….
거기까지 생각을 마쳤을 때,
‘……!’
내 시선이 조금 전 마신 맥주잔에 고정됐다. 깨끗하게 비워진 잔.
그제야 잔을 비운 후 일행들의 대화가 끊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을 돌리니, 코쟁이들이 비웃음을 띤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했다!
고개를 돌려 단장을 바라보려는데,
쿵―
난 그대로 식탁 위에 코를 박았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만 올라가지. 녀석을 업어라.”
“네.”
“녀석의 가방에서 ‘파양초’를 꺼내.”
단장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귓속을 파고들었다.
‘…파양초?’
그제야 난 연초의 이름이 파양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2층 숙소로 올라가는 계단을 끝으로, 내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의식이 끊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