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정글 속 임팔라들
“으으….”
의식이 돌아왔다.
지독한 두통에 인상을 찡그리며 신음을 토해냈다. 그러자, 머리맡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단장, 이 녀석 깬 거 같은데요?!”
“뭐? 그럴 리가….”
당혹감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내가 지금 깨어나면 안 되는 건가? 분위기를 파악한 나는 다시 의식을 잃은 척했다. 월급쟁이로 살아온 눈칫밥이 얼만데.
내 얼굴을 만지작거리는 거친 손길이 느껴졌다. 순간 얕게 들리는 호흡 소리. 느낌을 보니 단장 같았다.
“무의식중에 움직인 것 같으니, 하던 일 계속해.”
“분명 의식을 차린 것 같았는데….”
“파양초를 이만큼 흡입하고 제정신을 유지한 인간을 그동안 봤었나?”
“모, 못 봤습니다.”
“신경 끄고 파양초나 계속 피워.”
“알겠습니다.”
다행히 넘어간 것 같았다.
파양초?
내 머리맡에서 뭔가를 계속 태우는 것 같았는데, 전에 한 번 맡아본 냄새였다.
창고에서 만난 사내가 건넨 연초.
‘그거였나?’
가방에 연초 꾸러미를 넣고 다녔는데, 그 연초의 이름인 모양이었다.
소설 속에서도 파양초는 처음 들어본다.
무슨 효과이기에 내 머리맡에 피우는 거지?
두 가지는 확실했다.
좋은 효과는 절대 아닐 것 같다는 거. 그리고 내게 쓰기 위한 용도로 가져온 풀때기라는 거.
“단장, 한 줌 분량을 다 태웠습니다.”
“다음 교대자가 올 테니, 녀석의 머리맡에 파양초를 추가로 더 올려놔. 중독되면 두통이 심해지니까, 서둘러.”
“다, 다 했습니다.”
“바로 교대한다.”
잠시 후, 단장 일행이 나가고 두 명이 새로 들어왔다. 코쟁이 녀석들이었다. 그들은 머리맡에 놓인 파양초를 조심스레 태우며 대화를 나눴다.
“이런 건 어디서 구한 거야?”
“주술사에게 구한 거라고 하던데.”
“주술사?”
“파양초를 장기간 흡입하면 영혼이 나가서 텅 빈 인형이 된다고 하더라고. 바보가 돼버리는 거지.”
“그런 걸 왜 신입한테 쓰는 거야?”
“단장이 흘린 말로는 암시를 건다고 했어.”
“암시? 무슨 암시?”
“진짜 몰라서 묻는 거야? 이번 임무에서 이 녀석은 버리는 패야.”
“확실해? 이 녀석, 마스터 직속 휘하라고. 훈련 성적이 역대급이라 마스터가 직접 키운다고 데려간 거 몰라?”
“그딴 게 뭐가 중요해? 암시잖아, 암시. 뻔하잖아. 붐(Boom).”
“…….”
“입 다물고 시간이나 정확히 재. 파양초를 과다 흡입하면 정신이 오락가락해진다니까.”
“아, 알았어.”
긴장한 듯 파양초를 태우던 코쟁이들도 시간이 지나자, 다른 이들과 교대했다.
이번엔 새로 투입된 암살자들이었다. 그들은 코쟁이 녀석들과 달리 조직의 소문에 더 밝았다.
이들의 대화 주제는 당연히 나였다. 유망주가 갑자기 버린 패로 취급되니 호기심이 동한 모양. 분위기를 보니, 단장 빼곤 이 사실을 모두 몰랐던 것 같았다.
“간부들 사이에서 차기 마스터로 촉망받던 녀석인데, 무슨 일이지?”
“아케인의 예언 때문이란 소문이 있어.”
“아케인? 그 점성술사?”
“마스터가 그쪽에 귀가 얇잖아. 아케인에게 이 녀석과 관련해서 안 좋은 예언을 들은 모양이야.”
“예언 한마디에 버려지다니, 이 녀석도 재수 어지간히 없는 놈이네.”
“이크! 다 탔다. 얼른 나가자.”
난 반나절 동안 기절한 척하며 저들의 대화 내용을 유심히 엿들었다.
메인 스토리만 알고 있는 나에겐 무척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이름 없는 캐릭터들의 서브 스토리를 엿보는 느낌이랄까.
내가 알던 단순한 소설이 아닌, 이곳도 크고 작은 이야기로 만들어지는 하나의 세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화 내용에서 유독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다.
‘점성술사, 운명의 아케인.’
인간의 운명을 예언하는 점성술사로 유명한 인물이다.
악당 혹은 영웅의 그릇을 판단할 때 그는 운명의 구슬로 그릇을 점지했는데, 그 내용에 따라 인물들은 소설 속 세상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카멜 블레이저가 받은 점지 내용이 [두 길을 걷는 탐욕 군주]였지?’
그의 점지는 소설 속에서 큰 파문을 불러왔기에 아케인은 메인 캐릭터로 취급되는 인물이었다.
악당도, 그렇다고 영웅도 아닌 중립적인 인물.
그런 그가 크룩스의 마스터와 인연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의 말 한마디에 내 운명이 나락으로 가는 중이었다.
‘언제고 만난다면 호되게 따져야겠네.’
암살자들은 파양초의 효과를 맹신하고 있었다. 내가 깨어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건 단장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맥주에 약을 탔어. 시벌놈.’
맛있는 거 사준다고 넙죽 받아먹는 건 다섯 살짜리 코흘리개도 안 하는 짓인데, 개 쪽팔렸다.
다행인 건 단장의 의도대로 상황이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파양초가 정신을 바보로 만든다고?
‘정신이 이렇게 또렷한데?’
조금 전 약을 탄 맥주를 마시고 기절한 듯 잤더니, 모든 피로가 풀린 것처럼 상쾌했다.
난 코로 깊게 숨을 마시며 파양초의 매캐한 연기를 흡입했다.
길빵을 당한 것처럼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저들이 말한 것처럼 정신이 나간다거나, 이성이 마비되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오래 기절하는 척했더니 허리가 아픈 정도?
‘유통기한이 지난 거 아니야?’
조금 전 코쟁이들이 구토를 해대며 도망치듯 빠져나간 것을 보니, 그런 건 또 아닌 것 같았다.
그럼 파양초가 나한테만 안 통한다는 건데.
둘 중 하나였다.
이 몸의 원래 능력이거나, 아니면, 내가 이 몸에 빙의하면서 어떤 능력을 얻었거나.
지금은 알아볼 방법이 없으니, 참고만 해둘 생각이었다.
잠시 후, 파양초를 모두 태우자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단장이 나를 내려다보며 암시를 걸기 시작했다.
표적 제거.
표적 제거.
표적 제거.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난 표적에게 달라붙은 후 스스로 자폭하게끔 암시가 주어졌다.
와, 이런 식으로 흘러가는 거였어?
소설 속에선 ‘암살자 한 명이 카멜의 눈앞에서 자폭했다.’ 이거 딱 한 줄로 요약됐는데, 준비 과정은 무슨 전설급 아티팩트 제조 과정 수준이었다.
‘단점도 좀 치명적인 것 같고.’
이 벌레 폭탄에는 명확한 단점이 있었다.
바로 원격으로 벌레를 터트릴 수 없다는 것.
벌레를 삼킨 대상에게 암시까지 걸어야 하는 번거로운 과정이 이해가 안 됐는데, 벌레를 터트리려면 숙주의 마나 운용이 필요했다.
즉, 세뇌나 암시가 아니면 벌레를 터트릴 수 없다는 뜻이었다.
‘원격 폭발이 가능했다면 크룩스가 그저 그런 암살 조직으로 남아 있을 리 없겠지.’
나에겐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일단 살아남기만 하면 벌레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졌으니까.
눈을 오랫동안 감고 있었더니 슬슬 졸리기까지 했다.
암시를 거는 단장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다.
졸음을 참으며 난 묵묵히 신호를 기다렸다.
“일어나라.”
“…….”
기다렸던 신호가 왔다.
드디어 시작된 연기 타임.
흐리멍덩한 눈으로 난 단장 앞에 섰다. 침을 뚝뚝 흘리며 흐느적흐느적 그를 따라다녔다.
이성이 마비되어 단장의 목소리에 인형처럼 움직이는 모습.
내가 연기에 이렇게 소질 있었나?
크룩스 조직원은 확실히 연기도 교육을 잘 받는 모양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연기 흉내가 자연스레 잘됐다.
베테랑 배우처럼 영혼이 없는 바보처럼 움직이길 잠시, 고개를 끄덕인 단장은 더는 내게 신경 쓰지 않았다.
정확히 앞으로 벌어질 임무에 집중하는 것 같았다.
“빠르게 정비한다.”
암살자들은 각자 준비에 들어갔다. 나를 포함해 모두 병사 복장으로 갈아입었으며 옷 안으로 날카로운 무기를 숨겼다.
새벽으로 넘어간 시간, 병사로 위장한 암살자들이 거리 밖으로 나섰다.
상업 도시답게 새벽 거리인데도 건물 곳곳은 시끄러웠다.
다만, 소란을 부리다가도 우리를 보면 조용해졌다.
눈치를 보는 모습이 역력하다.
‘옷발 죽이네.’
내성 경비대는 블라이어 영지의 정예군이라 영지민들도 어려워한다더니 사실이었다.
당연히 경비대로 위장하다가 걸리면 즉결 사형이었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저, 저게 뭐야?”
“불? 부, 불 아니야!?”
“내성 쪽에 불이 났어! 불이야!”
작은 소란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영지의 주인이 머무는 성에서 벌어진 큰 화재.
내성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얼마나 큰 불인지, 매캐한 연기 위로 컴컴한 하늘이 붉게 물들 정도다.
[큰불이 날 거요. 그때 움직이시오.]
신호가 떨어졌다.
“사냥을 시작한다.”
단장을 시작으로 암살자들은 내성으로 민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표적을 사냥하기 위한 암살자들의 눈빛이 날카롭기 그지없다.
오직 나만이 멍한 눈빛으로 그들의 뒤를 쫓을 뿐이었다.
‘사냥 좋아하네. 정글 속 임팔라 새끼들 주제에.’
물론, 그 두 눈동자 속에는 짙은 조롱이 담겨 있었다.
* * *
“병사들은 모두 이쪽으로 모인다!”
“물통을 준비해. 서둘러!”
내성 안으로 진입하는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큰 화재로 혼란에 빠졌는지, 열린 성문 사이로 사람들이 정신없이 북적거렸다.
내성에 들어서자, 화재 모습이 눈에 담겼다.
큼지막한 보관 창고에서 번진 불이 그 주변 건물을 태우며 빠르게 번지고 있었다.
작정하고 벌인 짓 같았다.
“물통을 들고 우물로 움직여! 어서!”
기사들의 성난 지휘에 병사들, 시종들 가릴 것 없이 물통에 물을 옮기며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모든 시선이 화재에 집중되어 있을 때, 보관 창고 반대편으로 빠르게 사라지는 일곱의 병사들이 있었다.
암살자들이었다.
그들은 성벽을 따라 빠르게 내달렸다. 성벽 끝자락에 솟구친 웅장한 첨탑이 그들의 목표였다.
“거기!”
그때 반대편에서 기사들이 뛰어오더니 우리를 막아섰다.
기사의 수는 고작 셋.
하지만 그들이 앞에 서자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침이 바짝 마를 정도.
어깨에 달린 푸른 휘장이 보이자, 그들이 정식 기사임을 알게 됐다.
정식 기사는 소설에서 괴물 같은 실력을 뽐내는 클래스로 표현된다.
최소 오라 3성급.
능숙한 마나로 초인 같은 능력을 내는 괴물들이란 뜻이다.
참고로 난 이제 갓 오라를 깨친 1성급 암살자 뉴비였다.
단장이 2성급이었지 아마?
이곳 멤버로는 대응 불가능한 전력. 그런 기사들이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앞에 선 단장에게 물었다.
“혹시 윌리엄 공자님을 봤나?”
“1공자님 말씀입니까?”
“그렇다.”
“못 봤습니다.”
“이런….”
기사들은 짧게 혀를 차곤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그들의 목적이 1공자의 행방인 것 같았다.
“그런데, 너희들은 지금 어디로 가는 중이지? 소집령이 떨어진 곳은 이 방향이 아닐 텐데?”
“아, 그게…….”
“화재 대응 중 아니었나?”
“저희는 따로 명을 받고 첨탑으로 가는 중입니다.”
“첨탑?”
“인위적인 화재라 불미스러운 세력이 있을 수 있다고 하여, 첨탑에서 감시를….”
“아. 그렇군.”
일리가 있다고 판단했는지 기사들은 크게 의심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은 지금 다른 곳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잠시 자리를 비운다던 1공자가 갑자기 사라졌다. 호위 기사로서 1공자를 서둘러 찾아야 했다.
“혹여라도 1공자님을 찾게 되면 우리에게 바로 알리도록.”
“충!”
거수하는 동안 기사들은 벌써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엄청난 몸놀림.
더럽게 빠르네.
인간 맞아?
정식 기사와의 조우로 잔뜩 긴장했는지, 암살자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기사들의 존재감이 확실히 컸던 모양. 호랑이 굴이 따로 없었다.
“시간이 지체됐다. 서두른다.”
밤하늘을 가른 듯 까마득한 높이의 첨탑이 우릴 반겼다. 블라이어 영지 전역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블라이어 영지의 랜드마크였다.
입구를 감시하는 병사들은 화재 진압에 동원됐는지 텅 비어 있었다.
우리는 표적이 머무는 꼭대기 층으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탁. 탁. 탁. 탁. 탁!
첨탑은 무척이나 조용했다.
계단 밟는 발소리만 허공에 조용히 울렸다.
카멜 공자는 이 시간, 첨탑 꼭대기에 있을 것이란 정보가 있었다.
암상인이 확언할 정도로 확실한 정보라고 했는데, 그는 누구에게 이 정보를 얻게 된 것일까.
‘카멜은 진짜 첨탑 꼭대기에 있거든.’
그리고 난 조금 전 기사들이 애타게 찾던 윌리엄 공자의 위치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순식간에 첨탑 꼭대기에 다다랐다. 숙련된 암살자답게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
실력은 없지만, 체력 하난 좋은 녀석들이었다.
첨탑 꼭대기와 이어진 통로는 모두 세 곳. 단장은 그중 중앙 계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진입한다.”
콰앙―!
계단 끝, 닫힌 철문을 부수듯이 열고 들어간 순간이었다.
“아, 기다렸던 손님들이 왔군.”
맑되 무미건조함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머리, 짙은 회색의 눈동자를 지닌 건장한 청년이 우리 쪽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