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만찬 분위기 죽이네.
‘설마…….’
지하 감옥 가장 밑바닥.
이 지옥 같은 풍경을 본 순간, 문득 ‘그곳’이 떠올랐다.
학살자 카멜 블레이저의 핵심 세력 중 하나이자, 주술사들로 이뤄진 광기 섞인 연구 집단.
‘주술사들의 둥지’ 말이다.
주술사들의 둥지는 제물을 이용해 저주와 주술을 연구 혹은 강화하는 반인격적인 조직 단체였다.
제물은 당연히 ‘인간’.
불타버린 마을에서 사라진 영지민들이 어디로 갔나 했더니, 여기 다 모여 있었다.
“따라와라.”
“…….”
난 입을 꾹 다문 채 리옹 뒤를 따라 긴 통로를 지났다. 길 사이사이 철창에는 잡혀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하나같이 텅 비어있는 눈동자, 체념 어린 눈빛이다. 그들은 살아있지만, 이미 죽은 자들처럼 보였다.
그러다 주술사들이 나타나면 살려달라 외쳤다.
비어있는 공간 곳곳에 주술사들의 흔적이 눈에 띄었다. 대부분 잔혹한 흔적으로 가득했다.
이곳은 주술사들의 둥지 혹은 그 초기 단계의 장소 같았다.
‘등장 전부터 주술사들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우고 있었어.’
소설에선 카멜이 영주에 등극한 뒤 주술사들이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설마, 카멜의 첫 장면 전부터 이렇게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을 줄 몰랐다.
암살자들의 대화를 엿들을 때부터 느끼긴 했지만, 이곳은 단순한 소설 속 세상과 달랐다.
너무나도 짙은 현실성과 인과 관계.
완벽한 하나의 세계를 보는 것 같았다.
‘소설 속 내용만 믿고 움직이다간 대가리 제대로 깨지겠는데?’
눈앞의 광경에 큰 경각심을 느끼고 있는 사이, 카멜 앞에 당도했다. 나를 본 카멜이 옆자리 쪽으로 시선을 주며 말했다.
“앉아라.”
그 통로 끝, 공터는 딴 세상처럼 꾸며져 있었다.
크고 고급스러운 원탁 테이블 위에는 화려한 만찬이 차려져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고급 음식들이 크리스탈 접시에 가득 담겨 있었고, 몽롱한 색감을 지닌 술과 와인, 눈이 즐거운 디저트로 꾸며져 있었다.
완벽한 만찬이었다.
뒤쪽에서 들려오는 처절한 비명만 아니라면 말이지.
‘만찬 분위기 죽이네. 미친 사이코 새끼.’
인간을 짐승처럼 가둔 감옥 한가운데서 식사라니.
그 어떤 산해진미를 먹어도 체할 것 같았다.
‘일부러 보여준 건가?’
심리적인 압박을 위한 장치였다면 성공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나도 갇힌 이들처럼 될 수 있겠단 두려움이 밀려왔으니까.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자리에 앉았다. 내 시선은 곧 옆을 향했다. 손님은 나 하나가 아니었다.
결박된 중년 사내가 오른쪽 옆자리에 앉아 있는데, 풍겨오는 분위기와 다부진 체격을 보니 기사처럼 보였다.
카멜을 바라보는 사내의 표정은 허탈함으로 가득해 보였다.
삶의 의지가 꺾인 느낌이랄까.
내가 도착하자, 리옹이 그 사내의 결박을 풀어줬다. 리옹이 곁에 오자, 사내의 표정이 순간 사나워졌다.
그는 원망 섞인 시선으로 리옹을 노려봤다.
“리옹 부단장, 그대는 부끄러움을 모르는가?”
“단장, 전 두 공자 중 한 명을 택한 것뿐입니다.”
단장?
난 두 눈을 크게 뜨곤 분노에 찬 중년인을 바라봤다.
저자가 블라이어 영지의 기사 단장 록터 펠리스라고?
“헛소리! 선택은 네놈이 아니라 주군이 하는 것이다!”
“주군은 돌아가셨습니다. 승계 유언조차 없이.”
“주군은 네놈이 죽인 거나 다름없어!”
“1공자님의 암살 소식에 충격을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애석한 일입니다.”
“이놈!!!”
억압이 풀린 록터는 식탁에 놓인 나이프를 낚아채곤 벼락처럼 휘둘렀다. 그는 블라이어 영지에서 가장 강한 기사다. 작은 나이프 하나만 있어도 인간병기가 될 수 있다는 뜻.
하지만 나이프는 허무할 만큼 쉽게 리옹에게 막혔다. 블라이어 영지 유일한 5성급 기사라고 보기엔 형편없는 모습이었다.
‘마나를 봉인당한 건가?’
이곳이 주술사들의 둥지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주술사 렌구아의 실력이라면 기사 단장의 마나를 일시적으로 봉인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 테니까.
제압당한 록터가 카멜을 노려보더니 짙은 탄식을 토해냈다.
“공자! 어찌 이리 참담한 짓을 벌였단 말입니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이 상황에서 저를 농락할 생각 따윈 집어치우십시오! 주군과 1공자… 당신이 한 짓 아닙니까!?”
카멜은 피식 웃고는 찻잔을 기울였다. 차를 음미하며 한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그는 잔을 내려놓곤 록터를 무심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록터 펠리스, 그대는 이미 알고 있지 않았나?”
“무엇을 말입니까?”
“부친이 날 죽이기 위해 암살자를 고용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건!”
“내가 그 시각 첨탑에 있을 거란 사실도, 그쪽 경비를 뺀 것도, 그 시각 내성 경비 정보를 제공한 것도, 전부 그대가 한 짓 아닌가?”
“…….”
“난 그저 살아남기 위해 반격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승리했을 뿐이지.”
“…설마 창고를 불태운 사람이?”
“그대의 시선을 돌리려면 그 정도 대가는 당연하다.”
“이, 이런 미친! 창고에 저장된 광물들은 영지의 1년 예산과 다름없습니다! 다 같이 굶어 죽을 작정입니까!?”
“난 성격 좋고 멍청하기만 한 형님과 달라. 아무 대비도 없이 그랬을까?”
“윌리엄 공자는 영지를 사랑했습니다. 당신과 다릅니다!”
“나도 영지를 사랑한다.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지.”
록터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감옥에 갇힌 영지민을 가리켰다.
“…저게 당신이 사랑하는 방식입니까?”
“나를 위해 희생하는 이들이다. 영광스럽지 않나?”
“다, 당신은 미쳤어!”
“그 미친 결과가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내 선택이 옳았던 거다. 난 살아남았고, 앞으로도 쭉 살아있을 테니까.”
록터는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 정도로 비틀린 신념이라니.’
그동안 발톱을 숨기고 있던 2공자가 발톱을 드러냈다.
그런데 부친과 형제를 죽인 것도 모자라, 영지민을 물건 취급하는 영주라니. 상상을 초월하는 미치광이였다.
록터는 앞으로 먹구름이 낄 영지를 떠올리며 절망에 빠졌다. 영지에 헌신했던 기사 단장의 삶이 전부 부정당한 것 같았다.
“칙칙한 대화는 이쯤에서 끝내지.”
카멜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시종들이 우르르 나와 록터와 내 앞에 식기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카멜은 나이프와 포크를 들더니, 나와 록터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대들을 위해 준비한 만찬이다.”
록터는 그런 카멜을 경멸스럽게 노려봤다.
그리고 나는?
‘시발, 이 분위기에서 뭘 처먹으라고.’
난 미간을 좁힌 채 눈앞의 스테이크를 내려다봤다. 이때만큼은 록터의 패기가 부러웠다. 하지만 난 새가슴이라서 말이지.
고민은 짧았다. 카멜이 핏물이 흐르는 스테이크를 오물오물 씹으며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으니까.
표정 없는 눈빛이 싸늘하다.
“자, 잘 먹겠습니다.”
난 어색하게 웃으며 식기를 집어 들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레드 콤보를 먹어도 토할 것 같은 분위기지만, 나한테 거부권이 있을 리 없다.
내 현재 포지션은 아무것도 모르는 ‘그’의 전달자다. 카멜의 눈에 난 돈에 욕심 많고 제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인간이어야 했다.
체할 것 같아서 소녀처럼 깨작깨작 먹고 있는데, 카멜이 내 잔에 와인을 따르며 물었다.
“렌구아가 그러더군. 심장에 자폭 벌레가 기생하고 있다고.”
“…….”
“왜 자폭하지 않았을까?”
“그분 덕에 아, 암시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아아, 그 빌어먹을 ‘가호’ 말이군. 이해했어.”
더는 질문이 이어지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 속의 식사.
속이 더부룩했다.
이 정도 식사 자리라면 앞으로 대기업 회장과 일대일 식사에서도 농담 따먹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새 식사를 끝낸 카멜이 물어왔다.
“두 사람에게 제안 하나 하지.”
‘제안?’
여기서 제안할 게 있나?
록터는 그쪽을 못 죽여서 안달이고, 난 그쪽으로부터 얼른 탈출하고픈 사람인데?
“내 밑으로 들어와라.”
“……!”
갑자기 카멜의 머릿속을 보고 싶었다. 대체 어떤 정신머리를 가지고 있어야 이런 정신 나간 제안을 할 수 있는 건지 말이다.
“그 대가로 살려주지.”
하지만 카멜의 다음 말을 듣곤 생각이 많아졌다.
동맹 표시를 위해서라도 내 목숨은 붙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살려준다라.
이게 무슨 뜻일까?
“답할 가치도 없는 제안이군요.”
록터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비웃음을 날렸다.
명백한 거절 표시.
그 표시에 카멜이 피식 웃었다.
“죽고 싶나?”
“죽이십시오.”
“그래? 그대를 따르는 이들마저 모조리 처형할 생각을 하니 안타깝군.”
“그,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1공자를 암살한 이들 배후에는 과연 누가 있었을까?”
“그건 당신이잖아!”
단장의 말투가 사납게 변했지만, 카멜은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록터, 어리석구나. 현재 블라이어의 주인이 누군지 잊었느냐? 바로 나다.”
“…….”
“배후는 지목하기 나름이지.”
카멜이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생각해보니, 난 1공자를 죽인 암살자로 잡혀 왔다. 내가 거짓 증언을 하면 역적처럼 다 엮어서 처형시킬 수 있다는 말이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거짓 증언을 못 하겠다는 개소리는 집어치우자.
난 바로 할 거다.
다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거기까진 갈 것 같지도 않았다.
록터의 표정이 무너져 내렸으니까.
“원하는 게 뭡니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충성을 맹세해라.”
“…그거면 됩니까?”
“창고를 태운 책임도 져야겠지. 광산에서 6개월간 노역을 하게 될 거다. 대신, 모두 살아남겠지.”
록터는 이를 빠드득 갈았다. 그러곤 힘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 하나를 희생해 모두를 살릴 수 있는 제안, 거절은 힘들다.
‘와, 악당 같은 새끼.’
악당에게 악당이라고 하는 게 이상한 건 아니지만, 이 새끼는 진짜 완벽한 악당 새끼였다.
또한, 그 심계(心計)가 무섭기도 했다.
‘기사 단장을 볼모로 삼아서, 남은 세력을 흡수할 생각이야.’
블라이어 영지의 주도권은 현재 카멜이 쥐고 있지만, 아직 전대 영주와 1공자의 세력이 남아 있는 상황이다.
같은 날, 같은 시각 가주와 1공자가 죽었으니, 2공자 카멜을 의심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고, 이는 자칫 큰 내전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광물 창고마저 홀라당 타버린 상황에서, 이들까지 등을 돌린다면?
영지는 순식간에 마비가 돼버린다. 카멜로서는 달갑지 않은 상황이니, 그 전에 두 세력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록터를 이용하려는 것 같았다.
‘중심을 잡아줄 존재가 없으면 두 세력은 힘을 잃게 되니까.’
록터와 그 지지 세력이 광산에 고립된 사이, 카멜은 회유와 겁박을 통해 잔여 세력을 완벽히 흡수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포섭하려고 하지?’
내 가치는 전달자 외엔 쓸데가 없었다. 의문이 길었지만, 답을 기다리는 카멜의 시선에 바로 고민을 접었다.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록터의 경우를 보니, 애초에 거절은 불가능해 보였다. 회유냐 협박이냐의 차이겠지. 차라리 넙죽 엎드린 후 기회를 엿보는 게 낫다.
일단 사지(四肢)가 멀쩡한 채로 이곳만 탈출하면 될 것 같았으니까.
“눈치가 빨라서 좋아. 동맹 표시를 전달하고 영지로 복귀하면 네 심장에 기생 중인 벌레를 제거해주지.”
주술사를 통해 붐의 존재를 파악한 모양인데, 이 벌레의 작동 원리는 카멜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니 벌레를 회유 카드로 내밀었겠지.
다만, 벌레는 내가 자살하고 싶지 않은 이상, 내게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
‘돌아와? 내가 왜 돌아와? 미쳤냐?’
탈출하는 대로 블라이어 영지로는 오줌도 누지 않을 생각이었다.
“호위를 붙여주마.”
“…네?”
“목적지를 들른 후 곧장 복귀하도록.”
뭐 이 새끼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카멜이 어떤 인간인지 잘 알고 있다.
안전하게 복귀할 수 있도록 호위를 붙여준단다. 말이 좋아 호위지, 이건 감시다.
놈의 목적은 뻔했다.
나를 붙잡아 이곳으로 끌고 오는 것.
그 전에 딴 생각 하지 못하도록 회유하는 척 친절을 베풀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왜?
‘……아!’
카멜의 의도를 파악했다.
가호!
‘그’가 건 가호가 영원할 리 없으니, 가호의 힘이 끝나면 기억을 뽑아내서 ‘그’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려는 것이다.
기억이 뽑히면 죽거나 백치가 된다.
‘이 미친 새끼가!’
벌떡 일어나 머리를 들이박고 싶었지만, 카멜 곁을 지키는 리옹과 눈이 마주치자 몸이 절로 웅크려졌다.
진짜 몸을 터트리고 같이 죽어?
물론, 말뿐이란 걸 나도 잘 안다. 짧게 숨을 뱉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괜찮아. 예상 못 한 것도 아니고.’
미행이 아니라 대놓고 옆에 붙일 줄은 몰랐지만, 일단 밖으로만 나가면 기회가 있을 것이다.
정 안 되면 ‘그곳’으로 가버리면 되고.
대략 보름 정도.
시간은 충분히 있으니, 고민은 접어두고 눈앞의 상황부터 얻을 게 있는지 생각해야 했다.
왜냐하면, 옆에 있는 사내.
‘록터 펠리스가 내 곁에 있으니까.’
블라이어 영지의 기사 단장, 록터 펠리스.
처음 본 순간 어쩌면 큰 기회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록터에게 제안한 카멜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괜히 악당이겠는가.
록터가 볼모로 광산에 갇혀 있는 동안, 록터의 지지 세력들은 하나둘 숙청당해 사라진다.
피의 숙청.
이를 계기로 록터 펠리스의 인생은 180도 바뀐다.
‘배덕의 기사 록터 펠리스.’
광산을 탈출한 뒤 그는 ‘배덕의 기사’라 스스로를 칭하며 카멜 블레이저에 대항하는 저항군의 수장으로 등장한다.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에서 등장하는 첫 번째 영웅.
배덕의 기사와 인연을 만들 기회가 만들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