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내 이름은….
배덕의 기사는 학살자의 세력 확장을 저지해줄 강력한 대항마였다.
카멜의 공포 정치에 희생당한 이들 대부분이 배덕의 기사를 중심으로 한, 저항군에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기간은 짧았다.
불과 2년.
배신자의 존재로 배덕의 기사가 암살당하면서 저항군은 그 중심을 잃고 삽시간에 무너졌고, 카멜 세력은 그때부터 엄청난 성장세를 보이며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그만큼 배덕의 기사가 카멜의 성장세에 큰 걸림돌이 된다는 소리였다.
‘이 사실을 카멜이 알았다면 눈앞의 록터는 바로 죽었겠지.’
하지만 카멜은 1회차 회귀를 한 악당일 뿐이고, 난 그런 카멜의 회귀 스토리를 전부 알고 있는 독자였다.
‘정보를 알려줘야 하는데.’
소설 속에 들어오면서부터 나는 이미 카멜과 웃으며 지내긴 그른 상황이었다. 아니, 미래엔 같은 하늘을 두고 살기 힘들지도 모른다.
‘그’가 나란 사실마저 나중에 알게 된다면?
‘날 죽이려고 미친 듯이 달려들겠지.’
그의 비밀을 알고 있는 날 절대 살려둘 리 없었다.
다른 말로 하면 학살자의 세력이 커질수록 내 목숨이 위태롭다는 의미였다.
그 세력을 견제해줄 강력한 카드가 바로 옆에 있는데, 어떻게든 도움을 주는 게 맞았다. 하지만 눈앞에 학살자가 두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는 상황이라 대화는커녕 시선조차 주기 힘든 상황이었다.
‘배신자에 대해 어떻게 알려주지?’
광산 내에 카멜이 심어둔 배신자에 대해선 꼭 알려 줘야 했다.
록터에겐 두 명의 배신자가 존재했는데, 그중 첫 번째 배신자인 광산 동료에게 오른팔이 잘리면서 무력을 크게 잃게 된다.
본신의 무력만 유지해도 미래가 달라질 수 있는 일이라, 첫 단추를 끼우는 것처럼 아주 중요했다.
그렇게 눈치를 살살 보며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데, 푸른 휘장을 단 기사 하나가 다급히 입구에서 나타나더니, 리옹 곁으로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뭐?”
리옹은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장 카멜에게 이 사실을 귓속말로 알렸다.
역시나, 카멜의 눈썹도 살짝 올라갔다.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놈이 반응을 보였다. 생각보다 중요한 일이 터진 모양.
기사의 등장으로 시선이 다른 쪽으로 쏠린 사이, 난 재빨리 발끝으로 록터의 정강이를 툭툭 찼다.
록터의 시선이 잠시 나를 보더니, 다시 카멜에게 향했다.
카멜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기 때문이다.
“기사 단장, 그대를 지지하는 세력이 예상보다 많았던 모양이야.”
“…….”
“내가 건넨 제안, 슬슬 답을 내려줘야겠어. 그래야 나도 손을 달리 쓸 테니까.”
가주와 1공자의 세력이 기사 단장의 구금 사실을 듣고 병사들을 움직인 것 같았다.
다만, 록터의 충성 맹세만 받으면 알아서 무너질 세력들이라, 카멜의 표정에는 여유가 넘쳤다. 반대로 내 속은 검게 타들어갔다.
저 제안은 거짓이다. 하지만 이를 타개할 방법도, 말을 해줄 수도 없는 상황.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그저 그의 정강이를 툭툭 건드리는 것밖에 없었다.
묵묵한 바위처럼 두 눈을 감고 있던 록터가 잠시 후 카멜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 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
“현명한 선택이다.”
“배가 고프군요.”
록터는 만찬을 내려다보며 쓰게 웃었다.
“광산으로 끌려가면 이런 만찬은 구경도 못 하겠지요. 전 최후의 만찬을 즐겨야겠습니다. 그러니….”
록터는 카멜을 사납게 올려다보며 나직이 말을 내뱉었다.
“잠깐이라도 좋으니, 그 더러운 면상 좀 치워줄 수 있겠습니까?”
“……이!”
도발적인 언사에 리옹이 발끈하면서 검을 뽑아 들자, 카멜이 이를 저지했다. 대신, 카멜은 록터를 향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두 사람을 위해 준비한 만찬이니, 실컷 즐겨라.”
“…….”
“잠시 후 사람을 보내지.”
카멜은 리옹을 데리고 문밖으로 나갔다.
이 아저씨, 저놈 성질을 제대로 건드렸네. 광산에서 바로 뒈지는 건 아니겠지?
그럼에도 제 할 말 하는 사내가 멋져 보였다. 이런 모습을 동경하게 돼서 소설에 빠지게 됐는데, 어째 내 삶은 이곳에서도 크게 변한 것 같지 않았다.
‘달라지는 날이 올까?’
문득 든 상념을 접고 나는 록터를 바라봤다.
그래도 록터가 기지를 발휘한 덕에 단둘이 대화할 기회가 생겼다.
뒤쪽에 기사들이 감시를 서고 있었지만, 카멜이 자리에 없으니, 눈치 볼 필요가 없었다.
록터는 우악스럽게 음식들을 씹어 삼켰다. 술과 와인을 입 속에 병째로 들이붓기도 했고, 과일 서너 개를 한입에 넣어서 아작아작 부숴 먹기도 했다.
툭―
그러다 과일 바구니를 툭 쳐서 내 쪽으로 떨어트렸다.
과일들이 바닥에 쏟아지자, 난 과일들을 주워서 록터 곁에 올려놨다. 록터는 나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그 곁에 살짝 붙은 나는 작게 속삭였다.
“당신은 곧 황금 광산으로 끌려갈 겁니다. 그곳에서 에펠로아란 사람을 조심하십시오.”
“오렌지 좀 먹겠나?”
“전 오렌지보단 ‘말린 사과’를 더 좋아합니다. 하루에 열 개도 먹을 수 있지요.”
“…….”
“에토르에 표식을 남기십시오. 찾아가겠습니다. 그리고…… 아, 아닙니다.”
차마 앞으로 벌어질 참담한 현실을 알려줄 순 없었다. 알려주는 순간, 록터는 이 자리에서 죽음을 택할 테니까.
끝말을 쓰게 삼킨 나는 자리로 돌아왔다.
대화는 순식간에 끝이 났다.
그 뒤로 나와 록터는 조용히 만찬을 즐겼다.
‘이젠 그의 선택에 달렸다.’
난 전대 영주였던 리암슨 자작의 그림자인 척 연기했다.
영주의 최측근인 록터도 그림자들의 존재를 알고 있었기에 암구호 ‘오렌지’로 물어왔고, 그 암구호에 대한 답이 ‘말린 사과’였다. 리암슨 자작이 가장 좋아하는 간식 말이다.
하루에 열 개도 먹을 수 있다는 건, 내가 열 번째 그림자란 뜻이었다.
굳이 열 번째를 들먹인 건, 록터도 얼굴을 모르는 그림자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은밀한 전력이지만, 그림자들은 회귀자인 카멜에게 모조리 죽었다.
그 사실을 록터가 이미 알고 있다면 날 신뢰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도 알지 못하는 황금 광산을 언급했고, 나중에 접근하는 인물 중에 에펠로아란 사람이 있다면 경계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다 광산을 탈출하게 된다면?
‘에토르 영지를 떠올리겠지?’
필요한 정보는 다 건넨 셈이다.
카멜이 없어서일까.
분위기는 여전히 최악이었지만, 음식을 먹어도 전처럼 속이 더부룩하거나 토할 것 같진 않았다.
그건 록터도 마찬가지였던 모양. 잠시 후, 복도 바깥쪽에서 리옹이 모습을 드러내자, 록터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나를 바라봤다. 처음으로 그의 시선이 느껴진 순간, 난 알 수 있었다.
조금 전 건넨 대화가 통했다는 것을.
하지만,
“이름이 뭔가?”
뒤이어 흘러나온 질문에 내 이성은 마비가 됐다.
……이름?
나에게 큰 파문을 던지는 질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떨어진 뒤 난 ‘신입’으로 불렸다.
내 이름은 뭘까?
기억을 살필수록 내 얼굴은 점점 당혹으로 물들었다.
없다.
이름이 없어?
록터는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 한동안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잠시 후, 리옹이 지척까지 다가왔을 때, 록터는 아쉬운 듯 숨을 내뱉으며 등을 돌렸다.
서서히 멀어지는 록터.
그 뒤로,
“아, 아서, 아서 클레이튼입니다.”
아서 클레이튼.
하나의 이름이 내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아서라….”
록터는 내 이름을 잊지 않으려는 듯 잠시 서서 중얼거렸다.
리옹이 도착한 순간, 만찬이 끝이 났다.
이 만찬에서 수많은 자의 운명이 결정됐다.
그중에는 나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난 리옹과 함께 복도로 사라지는 록터를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봤다.
“이름이라….”
암살자의 기억에는 이름이 없었다.
부모 없는 새끼.
비루한 노예 새끼.
인간 백정 암살자.
이름이 필요 없는 인생이라니.
이 몸의 주인은 참으로 기구한 인생을 살아온 것 같았다.
그래서 불현듯 떠오른 이름 하나를 이 몸의 주인에게, 그리고 내게 선물했다.
그저 생각 없이 정한 이름.
“하필 떠오른 게 아서 클레이튼이라니.”
소설,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의 최종 후반부.
악당들의 손에 인류가 몰락의 길을 걸었을 때, 타 종족 왕국들이 하나둘 멸망했을 때, 종국에 세상이 멸망으로 치달았을 때, 살아남은 인류는 ‘영웅들의 묘지’ 앞에 모여 소망의 노래를 불렀다.
그저 절망을 잊게 해줄 ‘절대 존재’를 상상하며 불렀을 뿐이다.
악당들에게 말살당한 영웅들에게 바치는 노래.
그리고 새로운 구원자를 바라는 희망의 노래.
누군가에겐 희망으로, 절망으로, 공포로 군림하는 절대 존재.
아서 클레이튼.
아서는 소설 속에서 존재하지도 실존하지도 않은 영웅이다.
그저 희망을 담은 노래 한 구절에 등장하는 상상 속의 인물.
그래서 이 이름을 선택했다.
주인 없는 이름이었으니까.
난 입맛을 다시곤 포크를 내려놨다.
“그래도 이제 좀 사람 같네.”
스스로 지은 이름이지만, 존재를 증명하는 이름이 생긴 셈이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소설 속 세상에서 난 ‘이름’을 얻었다.
하지만,
“이름이랑은 전혀 안 어울려. 빌어먹을….”
난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보며 짧게 욕설을 내뱉었다.
아서 클레이튼은 희망을 노래하고픈 이들이 소망을 담아 지어낸 주인공이지만, 그 이름을 빌린 현재의 나는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
난 말없이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 * *
“꿇어라! 기사 단장 록터 펠리스여!”
성벽 성루 중앙.
검은 망토를 둘러쓴 카멜 블레이저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오연히 허리를 펴곤 외쳤다.
그 당찬 외침에 기사 단장 록터는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곤 천천히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성문을 두고 대치 중이던 이들은 그 광경에 신음을 흘리며 무기를 떨궜다. 대부분 슬픔과 당혹감이 섞인 눈빛이었다.
배신감에 치를 떠는 이들도 있었지만, 눈앞의 현실이 말해준다.
기사 단장이 가문의 승계자로 2공자 카멜을 택했다. 그의 충성 맹세로 블라이어의 기사단은 카멜을 모두 따르게 될 것이다.
이길 수 없는 싸움.
“쯧, 싱겁게 끝나겠어.”
렌구아는 혹시 모를 충돌에 대비해 주술을 준비하고 있다가 아쉽다는 듯 수정구를 거두었다.
새로 개발한 주술을 실험해볼 좋은 기회였는데, 분위기를 보니 이대로 정리가 될 듯 보였다.
그는 성벽을 내려와 첨탑으로 향했다.
그리고, 지하 감옥으로 내려가는 계단.
우우우웅―!
“……!”
렌구아는 수정구에서 느껴지는 격한 떨림에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도 없다.
그는 재빨리 수정구를 품 안에서 꺼냈다.
성스러운 빛이 수정구에서 흘러나온다. 예고 없이 흘러나오는 그 빛에 렌구아는 감탄을 토해내며 두 눈을 부릅떴다.
“시, 신명!”
신명은 일종의 ‘신의 점지’다.
뛰어난 주술사나 마녀 혹은 예언자가 지닌 물건에서 희박하게 발현되는 기적인데, 신명은 세상을 변화시킬 인물의 등장을 예지했다.
‘또 다른 신명의 주인이 탄생한 건가?’
렌구아는 흥분한 표정으로 수정구를 살폈다. 자신의 물건에 신명이 발현되는 건 육십 평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런 자신의 물건에 신명이 찾아올 정도라면 엄청난 인물이 각성했다는 뜻과 같았다.
렌구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정도 반응이라면 전 대륙의 이름 있는 주술사나 마녀들도 모두 신명을 받았을 것이다.
“도대체 누구기에….”
그 순간 수정구에 떠오른 점지.
렌구아는 숨을 쉬는 것도 잊은 채 두 눈을 크게 뜨고 수정구를 응시했다.
[XX XXXX – XX XX XXX]
[X XX XX.]
“…….”
하지만 곧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지닌 능력으로는 단 한 글자도 해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렌구아는 이를 해석할 만한 이들을 떠올리며 힘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대부분 두 사람을 떠올릴 것이다.
모든 신명을 받드는 신의 사자라 불리는 신비의 두 존재.
점성술사 운명의 아케인.
그리고,
“오르도르 숲의 마녀, 릴리.”
* * *
“리, 릴리!!!”
문이 부서지듯 펑퍼짐한 로브를 걸친 여인들이 우르르 그녀의 방으로 몰려들었다.
그녀들의 손에는 각자 개성 있는 물건이 쥐어져 있었는데, 모두 똑같은 색의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신명의 빛.
“뭔가 나타났어!”
“이 바보! 이건 신명이야! 신명!”
“오늘 의식은 어떡해!?”
1년에 한 번 마녀들이 모여 오르도르 숲의 결계를 치는 중요한 의식이 있는 날.
전신이 드러나는 커다란 거울 앞에 선 소녀는 ‘도르타’란 상급 마녀들의 방문에도 큰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저 말없이 거울만 뚫어지게 응시했다.
허리까지 치렁치렁 늘어진 흑발.
그 흑발을 가지런히 묶은 붉은색의 큰 리본이 눈에 띈다.
거울에 비친 투명한 피부의 소녀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평소에는 그런 자신을 거울에 비추며 외모에 대한 만족감과 격한 자랑을 늘어놓으며 주변 마녀들을 피곤하게 만들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우, 우리 중에 내용을 해석한 이가 한 명도 없어!”
“단 한 글자도!”
“릴리라면….”
마녀들의 시선이 쏠린 자리.
릴리의 시선은 거울을 물들이고 있는 검붉은 문자에 닿아 있었다.
예고 없이 찾아온 신명이지만, 그 어떤 때보다 강력한 느낌을 받았다. 묘한 이끌림이 들었다.
왜냐고?
“…….”
그녀는 거울에 나타난 점지를 손가락으로 슥슥 문질렀다.
숲의 마녀 그 누구도 해석할 수 없었던 점지 문자.
하지만,
[아서 클레이튼 ― 균열 속의 은둔자]
[제3의 정신 방벽]
“누구야. 너.”
릴리는 정확하게 그 점지가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