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인챈터(Enchanter)의 재능
“아니, 충성을 맹세했는데, 왜 또 독방이야?”
만찬이 끝난 후 기사 하나가 나를 안내했는데, 그 끝이 지하 감옥이었다.
난 인상을 찡그리곤 나를 안내한 기사를 돌아봤다. 어깨에 휘장이 없는 것을 보니, 수습으로 보였다.
카멜과 대면하고 와서일까.
간땡이가 부었는지, 눈앞의 기사가 만만하게 느껴졌다.
물론, 날 해코지 못 할 것이란 확신도 있었기에 난 현재의 불만스러움을 표정으로 전부 드러냈다.
기사는 미간을 구기고는 천천히 답을 했다.
“넌 1공자를 죽인 암살자로 지하 감옥에 잡혀 왔다.”
“그런데요?”
“널 노리는 이들이 바깥에 깔렸다는 얘기지. 1공자 세력만 해도 널 잡아서 1공자를 죽인 주범을 확인하고 싶어 하거든.”
“…….”
“널 빼내기 위해선 작업이 필요하다고 부단장님이 말씀하셨다. 그때까진 감옥이 안전할 거다. 붙잡혀서 고문당하고 갈가리 찢겨 광장에 버려지고 싶나?”
“잘 부탁드립니다!”
난 군말 없이 독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바깥에 날 노리는 이들이 좌판 물건처럼 깔렸단다. 영지를 벗어나기 전까진 확실히 지하 감옥이 안전할 것 같았다.
철문이 닫히자, 난 주변을 둘러봤다.
‘대우가 확실히 좋아지긴 했네.’
첫날은 묶어놓고 복날에 개 잡듯이 때리더니, 지금은 구속도 없이 자유로웠고, 내부 환경도 무척이나 깔끔했다. 게다가 안내한 기사를 심부름꾼으로 붙여줬는데,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를 통해서 얻을 수 있었다.
‘충성을 맹세한 대가라는 건가?’
신뢰를 주기 위한 카멜의 작업일 것이다.
현재 나는 ‘그’와 접점이 있는 유일한 존재, 어리숙한 암살자 따윈 쉽게 구슬릴 수 있다고 확신했겠지.
근데, 내가 카멜 블레이저의 시커먼 속내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서 말이지.
‘일단 호의에 반응을 보이며 상황을 이용해야겠지.’
빼먹을 수 있는 건 모조리 빼먹을 생각이었다. 나는 철문을 탕탕탕 두드렸다. 철문 위로 시선을 교환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이 탁 열리자, 난 재빨리 말했다.
“언제쯤 나갈 수 있습니까?”
“나도 모른다. 주군께서 정하실 거다.”
“최대한 빨리 나가야 한다고 전해주십시오.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그’에게 동맹 표시를 알릴 장소를 카멜에게 이미 전달한 상태였다.
넬리토리 돌산 협곡.
블라이어 영지에서 사흘 정도 떨어진 곳에 큰 바위로 이뤄진 거대한 협곡이 존재하는데, 동맹을 알리려면 그곳으로 가야 한다고 말해놨다.
많은 고민 끝에 정한 장소다.
그리고 시간에 쫓기면 넬리토리 돌산 협곡을 선택한 이유가 사라진다. 최대한 여유 있게 그곳에 도착해야 했다.
‘보름 중 벌써 이틀이 지났어. 내일이면 사흘째, 서둘러야 해.’
넬리토리 협곡 어딘가에 있을 ‘칼바람의 저주’를 찾으려면 여유 시간이 필요했다.
동맹 표식이야, 저들이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내가 원하는 장소와 시각에 터트리면 그만이다.
난 동맹 표식을 터트린 후를 생각하고 있었다.
‘분명 강제로 끌고 가려고 할 거야.’
감시자가 붙은 이유는 내 복귀와 관련되어 있었다.
동맹 표식 이후부턴 내 맘대로 움직이기 힘들다. 감시자를 떨구려면 신호를 터트리기 전이나 직후여야 한다는 뜻.
칼바람의 저주와 맞물리는 협곡을 찾아 도주로를 확보해야 했다.
‘운이 좋다면 ‘그것’도 얻을 수 있을 테고.’
협곡에 숨겨진 고대 문양 하나가 떠올랐다.
세이렌의 비명(Siren's Scream).
훗날 카멜의 핵심 전력이 될 흑주술사 도네콜린트가 얻게 될 능력인데, 그 정보는 대략적으로 파악한 상태였다.
계획이 잘만 풀린다면 고대 문양까지 노려볼 생각이었다.
“죽은 암살자들의 물건을 볼 수 있겠습니까?”
“그놈들의 물건을?”
“확인할 것이 있습니다. 제 ‘임무’에 꼭 필요한 일이라 전해주십시오.”
“기다려라.”
기사가 다시 돌아오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인기척과 함께 철문이 끼익 열리더니 큰 보따리 하나가 툭 던져졌다.
“암살자들의 물건을 모두 담았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모두 가져도 된다는 명이 떨어졌다.”
“가져도 된다고요?”
“그래. 그리고 이틀 후 움직이게 될 거다.”
“이틀 후라….”
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시기가 적당했다.
말을 마친 기사는 철문을 쿵 닫았다. 보따리는 제법 묵직해 보였다.
보따리를 집어 든 나는 기분 나쁜 감촉에 눈살을 찌푸렸다. 끈적이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피?’
보따리 밑으로 핏물이 뚝뚝 떨어진다. 난 짧게 숨을 뱉고는 보따리를 풀었다.
역한 냄새가 훅 올라오자, 코를 틀어막고 가져온 물건들을 살폈다.
빌어먹을 새끼들, 물건을 가져다 달라고 했더니, 옷까지 다 벗겨서 가져왔다.
난 보따리 안에서 단검을 꺼내, 검 끝으로 옷가지부터 휙휙 치웠다. 물건을 살피길 잠시, 난 짧게 혀를 차곤 고개를 절레 저었다.
‘약초는 싹 다 긁어갔네.’
파양초와 독초가 있다면 몰래 챙겨두려고 했는데, 주술사들이 전부 챙겨간 모양이었다.
남은 건 죽은 암살자들이 쓰던 무기와 옷가지뿐.
단장이 쓰던 단검 세 자루와 석궁만 따로 챙기고 나머지 무기는 그대로 놔뒀다. 옷가지는 단장의 옷만 골라서 뒤졌다. 쓸 만한 것이 나온다면 단장의 소지품에서 나올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주변 지리가 그려진 지도가 있길래 지도 한 장을 챙겼고, 바지 주변을 살필 때였다.
“응?”
피로 물든 구겨진 쪽지 하나를 발견했다. 중요한 내용은 아닌 듯 바지 속에 그대로 들어있었지만, 내용을 읽어보니, 내겐 민감한 내용의 쪽지였다.
[아기새 죽음 확인. M.]
‘아기새라… 이건 난데?’
‘아기새’는 은어로 신입을 가리킨다.
즉, 단장에게 내 죽음을 반드시 확인하라는 지령이었다. 그 지령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M’, 크룩스의 마스터 되시겠다.
“내 죽음을 확인까지 한다고? 무려 마스터란 양반이?”
나와 마스터 사이에 무슨 악연이라도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바로 죽이지 않은 것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 망할 아케인이 운명이니 뭐니 하면서 내 죽음을 종용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쪽으로 귀가 얇은 양반이라고 했으니까.
‘대체 뭐라고 씨부렁거린 거야?’
갑자기 아케인이 미워졌다.
영화나 소설에 자주 나오는 전설 속의 마법사, ‘멀린’ 같은 존재를 떠올리며 봤던 인물이라 나름대로 호감이 있었는데 말이지.
이유가 어쨌든 크룩스의 마스터는 내 죽음을 원하고 있다. 그럼, 크룩스를 향한 나의 포지션은 명확해진다.
크룩스는 이제부터 내 적이다.
“일단 이 정도인가?”
난 바닥에 놓인 단검 세 자루와 석궁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파양초를 얻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무기를 얻는 것도 나름 괜찮았다.
지하 감옥에서 최소 하루 이상은 머물 것 같으니, 몸을 제대로 움직여 볼 생각이다.
지금은 조직에서 버려졌지만, 마스터가 눈여겨보고 차기 마스터로 지적될 만큼 뭔가가 있는 몸뚱이였다. 그 특별함이 무엇인지 알아볼 생각이었다.
난 단검을 양손에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자리에서 통통 튀며 눈앞의 벽을 향해 자세를 잡았다.
단검을 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보쌈을 썰 때 빼곤 내가 검을 쥐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정말 인생은 모를 일이었다.
“잘 되려나….”
오늘 같은 여유가 또 찾아온다고 장담할 수 없다. 기회가 있을 때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봐야 했다. 그게 내 생명과 직결되어 있다면 더더욱.
난 전력을 다해 단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 세계에 들어와 단검을 움직이는 첫 발걸음.
텅 빈 독방 안, 칼바람 부는 소리가 들려왔다.
* * *
이 세계의 무력은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소설만 읽어도 쉽게 알 수 있는 정보이기도 했다.
태초의 기운, 마나를 바탕으로 각기 파생되는 네 가지 힘.
강화의 기운, 오라.
역행의 기운, 마력.
심연의 기운, 영력.
그리고 이 셋에 포함되지 않은 신비의 기운, 신력.
마나를 깨친 이들은 3성에 이르면 가진 운과 재능에 따라 이 네 기운 중 하나를 익히게 된다.
참고로 이 몸의 기운은 1성이었다.
이제 막 마나를 깨친 뉴비란 뜻이었다.
암살자는 3성이 되면 강화의 기운, 오라를 대부분 익힌다.
육체에 특화된 직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희박한 확률로 신력을 익힌 암살자도 존재했다.
신력은 특별한 힘이다.
얻는 방법도 두 가지뿐이었다.
하나는 선천적인 재능을 타고난 경우. 초능력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계승자의 신기’를 얻는 경우.
각 대륙에 숨겨진 비밀 장소에는 수천 년 전부터 내려오던 절대자들의 비기가 담긴 계승자의 신기가 존재한다.
다만, 계승자의 신기는 발견도 어렵고, 승계 조건이 극악이라서 기연이 닿지 않은 이상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알려졌기에 대부분의 신력은 선천적인 경우가 많았다.
“와, 이 몸으로 올림픽을 나가면 금메달 다 휩쓸고, 연금 받아서 평생 떵떵거리며 살 텐데.”
UFC에 나가도 모든 경기를 다 휩쓸 것 같았다. 그러다 보면 라운드걸과 스캔들도….
“아.”
밑도 끝도 없는 잡생각을 털어버리곤 다시 집중했다.
고작 1성의 마나지만, 마나를 사용한 순간 육체 능력은 일반인의 신체 능력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지금 스파이더맨처럼 독방 천장 구석에 착 달라붙어 있는 것도 마나를 사용한 육체 능력 덕이었다.
가볍게 바닥에 내려온 나는 다시 단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한계까지 가볼 생각이다.
“헉… 헉….”
얼마나 휘둘렀을까.
팔다리가 덜덜 떨리고 정신이 멍한 것을 보니, 제법 오랫동안 움직였던 것 같았다.
처음에는 딱딱한 마네킹처럼 엉성했는데, 지금은 자세가 자연스레 교정되며 날카롭고 정확하게 원하는 곳으로 단검을 움직일 수 있었다.
‘조금만 더….’
뭔가 잡힐 것 같은데, 잡히지 않았다.
내가 멈추지 않고 단검을 끊임없이 휘두르는 이유가 있었다.
몸을 한계까지 움직이니, 암살자 신입으로 수련했던 과거 기억들이 명확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스위치가 켜진 듯 신입 수련 과정의 장면 장면들이 뇌리에 떠올랐다가 천천히 사라지는 기분.
그중.
[넌 특별한 재능을 지녔다.]
크룩스의 마스터와의 대화도 기억났다.
그가 개인 지도를 할 만큼의 재능.
꿈에 부푼 기대감.
그리고,
[빌어먹을, 네놈의 재능은 쓰레기야! 내 눈이 틀렸어!]
짙은 좌절감.
냉혹한 시선으로 나를 버리고 떠나는 마스터의 뒷모습이 보였다.
번뜩 정신을 차린 나는 제자리에 우뚝 섰다. 젖은 땀에 온몸 위로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올랐다.
운동과 담을 쌓고 지내와서일까.
이런 고양감이 어색하면서 좋았다.
간질간질 올라오며 잡힐 듯 잡히지 않았던 하나의 감각.
난 조금 전 떠오른 기억 속에서 그 실마리를 잡았다.
바로 특별한 재능.
“후….”
짧게 숨을 내뱉고, 나는 단검을 앞으로 겨눴다. 이를 지그시 깨물고 눈앞의 단검에 신경을 집중한 순간,
우웅!
작은 떨림이 느껴졌다.
기억 속에서 각성한 이 몸뚱이의 재능.
처음 말을 탔던 때처럼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펼쳐졌다.
난 옅은 푸른색으로 덮인 단검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1성인데, 무기에 기운을 담을 수 있다고?
물론, 5성 이상의 전유물인 오라 소드와는 완전히 달랐다.
마나가 아닌 특별한 기운을 싣는 능력이라고 해야 하나?
다만 1성이라 속성이 아닌 그저 기운만 담겼다.
벽을 향해 단검을 던지자, 벽에 단검이 반쯤 박혔다. 단검만 던졌을 땐 흠집만 났던 벽인데, 기운을 담자 날카로움이 강화된 것 같았다.
“이 녀석, ‘신력’에 재능이 있었네.”
벽에 박힌 단검에는 여전히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나였다면 던지는 순간 사라졌을 것이다.
특별한 기운.
태어났을 때 숨 쉬듯 알게 되는 선천적인 재능인 신력이 분명했다.
무기에 속성을 부여하는 ‘인챈터(Enchanter)’.
떠오른 기억 속에서 답을 찾았다.
이 녀석은 인챈터의 재능을 깨친 신력 소유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