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13화 (13/130)

13화 권력이 좋긴 좋네.

신력 각성자라면 크룩스의 마스터가 직접 그 휘하로 데려가 키운 것도 이해된다.

반대로 버린 이유도 알게 됐다.

‘운명의 아케인 때문만은 아니었네.’

1성.

마스터가 긴 시간 동안 직접 투자와 시간을 쏟아부었는데, ‘고작’ 1성이다.

수만 골드의 가치를 지닌 ‘마나과실(mana fruit)’이란 보석이 있다. 섭취 시 마나 성취에 큰 도움을 주는 연금 물질인데, 이 몸뚱이는 그 마나과실을 세 개나 처먹고도 1성을 겨우 깨친 머저리였다.

엘리트 교육과 물질적 도움을 받았으니, 동료 암살자들보단 뛰어났지만 그뿐. 가성비 면에선 최악이었다.

마나과실 세 개면 정식 기사를 암살할 수 있는 3성 암살자를 키울 수 있는 비용이었으니까.

‘최악의 마나 감응력.’

신력을 지닌 존재라 처음에는 큰 관심을 보인 것 같지만, 마스터는 투자에 실패했다고 확신했던 것 같았다.

신력의 잠재력은 마나 그릇을 기반으로 함께 성장했는데, 극악의 마나 감응력은 신력 소유자에게 저주나 다름없었다.

2성이 되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고, 또 얼마나 많은 마나과실을 처먹어야 할까.

마스터의 입장에선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로 느꼈을 것이다.

반쪽짜리 신력 각성자.

“최악의 상성이긴 하네.”

즉, 이 녀석은 신력을 타고났지만, 그 한계가 명확했다.

키우기도 버리기도 모호한 패.

계륵 같은 처지가 된 상황에서 아케인의 방문이 이 녀석의 운명을 나락으로 결정지은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 이 능력은?

‘찐 대박이지.’

무기에 속성을 담는 능력.

이 능력은 속성이 무엇이냐에 따라 누군가에겐 재앙이 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이 세계에는 ‘속성 카운터’란 것이 존재했다.

불(火)에게는 물(水)이, 물에게는 나무(木)가, 나무에겐 다시 불이, 가위바위보로 맞물리는 대표적인 세 속성 외에도 수많은 속성이 서로를 물고 뜯는 상성을 지니고 있었다.

마나 감응력이 최악이라고?

그딴 건 나와 상관없었다.

애초에 수련으로 강해질 생각 따윈 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어느 세월에 육체를 단련하고, 마나를 모으고, 깨달음을 얻는단 말인가.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

이 소설은 제목처럼 강한 악당들이 시시각각 판을 치는 혼돈 속 미치광이들의 세상이었다. 이 재앙들과 마주쳐 휩쓸린 순간, 억울하게 뒈진다는 뜻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제목대로 악당들이 강해지는 별의별 기연들이 이 세계에는 존재했다.

마나과실?

나중에는 줘도 안 먹는, 개 허접스러운 물건일 뿐이다.

‘모조리 싹싹 긁어주마.’

악당 것이건, 영웅 것이건, 기회가 되면 모조리 뺏어줄 생각이었다.

아서 클레이튼.

좋든 싫든 나도 이젠 이 세상 이름을 가진 이 세계의 구성원이었다.

먼저 주운 자가 임자였다.

* * *

“네 이름은 이제부터 ‘알’이다.”

“알?”

하루가 지나고 새벽 시간, 지하 감옥 앞에 웬 사내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난 사내가 건네는 구리 명패를 받았다.

C급 용병패.

명패에는 ‘알’이란 이름과 간략한 신상명세가 적혀 있었다.

두 눈을 끔뻑이며 난 눈앞의 사내를 바라봤다.

얼굴에 깊은 상처가 있고, 험상궂어서 급이 높은 용병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심부름꾼을 맡던 기사가 그를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이자, 내 판단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습 기사가 고개를 숙일 정도라면 그 위의 하나밖에 없다.

정식 기사.

이를 지그시 꽉 깨물었다.

‘카멜 이 빌어먹을 새끼, 선 오지게 넘네.’

학살자를 향해 원망이 쏟아졌다.

신입 암살자에게 무슨 정식 기사가 호위로 붙는단 말인가. 계획에 차질이 생긴 건 아니지만, 무식하게 강한 놈이 감시자로 붙었다. 게다가 동행할 이들은 이놈 하나가 아니었다. 기사와 함께 온 일행이 있었는데, 이들은 기사가 고용한 용병들로 보였다.

모두 넷이었는데, 하나같이 풍기는 기세가 거칠고 단단했다. 베테랑 놈들이 분명했다.

‘내가 도주할 것을 대비해서 데려온 건가?’

그렇다면 추적에 특화된 놈들일 확률이 높았다.

설마, 이놈들 말고 또 있는 건 아니겠지?

나 같은 놈에게 이 정도 전력을 붙일 정도라니, 카멜이 ‘그’를 얼마나 의식하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정식 기사 하나에 베테랑 용병 넷.

감시자들의 압박감이 상상 이상으로 강력했다.

갑자기 생존 난이도가 노멀에서 헬급으로 수직 상승한 느낌이었다.

“나와라.”

“잠깐.”

자신을 벤이라 소개한 기사는 내가 발길을 막자, 사납게 노려봤다.

무섭다. 시발.

하지만 여기서 주눅이 들면 안 된다. 앞으로 계획을 밀어붙이려면 내 위치를 바로잡아야 했다.

첫 만남은 기세로 위치를 정하는 자리. 굽신거리는 순간, 계속 끌려다니게 된다.

“내게 줄 게 있을 텐데요?”

“줄 거?”

“설마 빈손으로 온 건 아니겠죠?”

난 벤 눈앞에 손을 내밀었다.

분명 카멜에게 받은 게 있을 텐데, 어지간히 만만하게 보였나 보다.

벤이 험악한 기세를 풍기며 나에게 바짝 다가왔다.

“내가 보관하는 게 안전할 거다.”

“주군의 명입니까? 당장 가서 물어볼까요?”

“…….”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 하고 있네.

협박한다고 내가 쫄 거 같냐?

벤은 나를 노려보더니,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 건넸다. 안을 살펴보니, 알록달록한 색감을 뽐내는 손톱 크기의 보석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난 보석에 대해 잘 모르지만, 딱 봐도 엄청 비쌀 것 같은 느낌이 팍팍 들었다.

“금화로 준비하면 부피가 클 것이라고, 주군께서 보석으로 준비해주셨다. 보석 가치는 정확히 2만 골드다.”

‘…이 새끼가.’

생존과 함께 약속받은 2만 골드.

근데 이놈이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2만 골드를 언급했다. 날 엿 먹이려는 게 분명했다. 실제로 용병들의 눈빛이 변하는 게 느껴졌다.

그들의 시선이 보석 주머니로 쏠린다. 좋은 신호는 아니었다.

기사는 주군께 충성하고 약자를 보호하는 정의의 상징으로 표현되지만, 이 소설에선 그딴 모습을 기대하면 안 된다.

대악당을 주인으로 모시는 기사에게 정의를 바란다고?

지나가던 똥개가 웃을 일이다.

놈의 기세에 눌려 끝까지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내 돈을 꿀꺽했을 놈이었다.

그릇 이상으로 욕심 많은 새끼였다.

이참에 잘못 건드리면 내 이빨에 물릴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려줘야 했다.

“당신이 일러준 대로 이제부터 제 이름은 알입니다. 동시에 주군께 충성한 가신이기도 하지요.”

“네놈 따위가 어디서 감히 가신을 입에…!”

“이틀 전 저는 주군과 식사 자리를 가졌습니다. 충성을 대가로 약속받은 것이 제법 많습니다. 2만 골드도 그중 하나죠. 2만 골드가 당신에게는 우스운 금액입니까?”

“…….”

2만 골드는 정식 기사라도 평생 벌 수 없는 큰 액수였다. 이유가 어떻든 겉으로 카멜은 내게 2만 골드를 줬다.

그 사실이 중요했다.

기사 놈이 나와 카멜 사이에 주고받은 대화 내용을 알 리 없다. 알았다면 뒈져서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겠지.

어느 정도 선에서 뻥카를 쳐도 사실을 파악할 방법이 없다는 뜻이었다.

“행동에 조심하십시오. 이번 임무의 중요성을 알고 계신다면 말이죠.”

“…….”

“지금처럼 거슬리게 행동하시면 임무 실패 시 제 입에서 어떤 변명이 주군 귀에 들어갈지 모릅니다. 이름이 벤이라고 했죠? 저 혼자 죽을 것 같습니까?”

“이 새끼가….”

“또 새끼라고 부르면 당장 주군께 편지를 보낼 겁니다. 그 내용은 상상에 맡기죠.”

내 도발에 기사 벤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그는 입을 꾹 다물고 한발 물러섰다. 용병들을 둘러보니, 조금 전과 달리 나와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일단 내 도발이 먹힌 분위기였다.

2만 골드가 들킨 이상, 차라리 금액을 강조해서 카멜에게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어필하는 게 낫다.

난 벤 일행을 따르기 전에, 수습 기사에게 지도를 건넸다. 단장의 유품에서 가져온 지도였다.

“이 물건을 주군께 전해주십시오. 건네주면 뭔지 아실 겁니다.”

기사는 고개를 끄덕이곤 지도를 받아 들었다.

지도에는 카멜이 ‘그’와 접선할 장소가 표시되어 있었다.

왜 이 지도에 표시했냐고?

아주 기가 막힌 장소를 찾았기 때문이다.

난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수습 기사를 응시했다.

“목숨을 걸고 임무를 꼭 완수하겠다고 주군께 전해주십시오.”

“알았다.”

“떠나기 전에 주군께 인사를 올리고 싶습니다.”

감옥을 벗어나기 전, 나는 결심에 찬 표정으로 카멜이 머무는 집무실 방향을 향해 넙죽 예를 올렸다. 그 충직한 모습에 수습 기사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카멜, 이 개새끼야. 우리 다신 보지 말자.’

물론, 내 속마음은 행동과 전혀 반대였지만 말이다.

난 용병 복장으로 갈아입은 뒤 지하 감옥을 나왔다. 동이 트기 전 가장 어두운 시간이라, 주변은 어두컴컴했다.

일행은 나를 포함해서 총 여섯 명.

내성을 나온 이후, 일행은 벤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며칠 전 터진 내전으로 내성의 감시는 무척 삼엄했지만, 벤이 나서자 용병 복장임에도 별다른 검문도 없이 술술 통과되었다.

‘권력이 좋긴 좋네.’

카멜 말 한마디에 1공자를 죽인 암살자에서 C급 용병 ‘알’이 되었다.

고작 중소 영지의 성주일 뿐인데도, 그 권력은 말 몇 마디에 한 사람의 운명을 좌지우지했다.

학살자인 그가 한 지역의 지배자가 된다면?

대륙은 온통 피로 물들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됐고 말이다.

이번에는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겠다.

내가 끼어들게 됐거든.

내성을 나오자, 다리 입구에 마차가 대기 중이었다. 일행은 그 마차에 탄 뒤 조용히 다리를 건넜다.

내성을 지나 외성 광장을 지나는 길.

광장 중심부는 횃불로 유독 밝혀진 장소라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음.”

난 광장의 참혹한 광경에 신음을 흘렸다.

처형대가 보인다.

발가벗겨진 썩은 여섯 구의 시신과 교수형을 당한 시신 한 구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돌팔매를 수없이 당했는지, 시신들은 보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다.

목판에 적힌 글귀.

[윌리엄 공자를 암살한 극악무도한 이들을 처단한다!]

며칠 전 함께했던 암살자들이 끔찍한 몰골로 죽어 있다.

그중 나는 홀로 교수형을 당한 시신을 무거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어제 오후 교수형을 당한 암살자란다.

내게 향할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죽은 대역이었다.

대역으로 누굴 죽인 것일까.

카멜에겐 그 선택도 숨을 쉬듯 쉬웠을 것이다.

갑자기 기분이 더러워졌다.

덜컹―!

광장을 빠르게 지나친 마차는 바깥으로 통하는 성문에 다다랐다. 굳게 닫혀 있던 거대한 성문이 서서히 열린다.

마차는 그대로 성문을 통과해 서서히 밝아지는 바깥세상으로 나아갔다.

처음 계획한 대로 카멜을 이용해 암살 단체인 크룩스의 눈길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아직 카멜의 손에서 탈출할 일이 남았지만, 이도 곧 해결될 것이라 스스로 위안 삼았다.

그 이후에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으로 빠르게 묻히는 블라이어 영지가 보인다. 광장에서 본 처형대를 떠올리며, 처음으로 강렬한 욕망 하나가 피어올랐다.

‘강해진다.’

카멜이건 누구건 나를 건들 생각 못 하게 말이다.

블라이어 영토를 벗어난 마차는 넬리토리 협곡 근처에 자리한 영지, 베네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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