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14화 (14/130)

14화 자유도시 베네타

자유도시 베네타에 도착하기까지의 시간, 지루하다면 지루할 수 있는 시간이지만, 나에겐 하루하루가 심심할 틈도 없는 아주 스펙터클한 나날이었다.

우린 출발선부터 이동 경로를 두고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는데, 벤은 라웁 숲을 가로질러 베네타로 가려고 했고, 나는 라웁 숲을 우회하길 강력히 주장했다.

‘미쳤냐? 라웁 숲을 가로지르게?’

곧 밝혀지겠지만, 라웁 숲에는 사람을 납치해서 인체 실험을 하는 미치광이 마법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미친놈은 현재도 라웁 숲에서 실험을 진행 중일 텐데, 미쳤다고 그 숲을 기어서 들어간단 말인가.

하지만 베네타까지 라웁 숲을 가로지르면 이틀, 우회하면 사흘이 넘게 걸리는 상황이라, 내 의견은 벤보다 무게가 실리지 않았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던진 게 미끼였다. 난 그들 눈앞에 보석 주머니를 흔들며 말했다.

“우회해서 사흘 안에 베네타에 도착한다면 ‘푸른 장미’에서 거하게 쏘겠습니다.”

“푸, 푸른 장미?!”

“네. 그것도 5층입니다.”

“5층!!”

“베네타를 방문하는데, 그 유명하다는 푸른 장미 5층은 가봐야죠.”

내가 베네타의 명물, 푸른 장미를 들먹이는 순간, 불꽃 튀던 벤과의 신경전은 사막의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벤이 헛기침하며 한발 물러났기 때문이다.

내 의도대로 된 건 좋은데, 왜 찝찝함이 드는 거지?

눈앞의 벤이란 기사, 감시자로 온 것 아니었어?

미끼를 이렇게 덥석 물다니, 어떤 의도를 가지고 내 제안을 승낙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난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용병들에게 푸른 장미로 출발하라 소리쳤다.

애초에 핑계를 대서라도 꼭 방문해야 할 곳이었기 때문이다.

마차는 라웁 숲을 우회해서 숲 외곽을 따라 쉬지 않고 강행군을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복병이 나타났다.

바로 도적 떼의 존재.

이틀이란 시간 동안 숲을 우회하면서 마주친 도적 떼의 수가 몇이나 될까.

“시발, 이 개 같은 소설.”

무려 스무 번이다.

무슨 알람 설정도 아니고, 도적 새끼들은 아침 점심 저녁 텀을 두고 숲속에서 쉴 새 없이 튀어나와 마차를 막아섰다.

[으하하하핫! 멈춰라!]

“…….”

[으하하하핫! 우리는 검은 도끼 도적단이다!]

“또냐?”

[으하하하핫!]

“그만 나와!”

이딴 레퍼토리만 수없이 듣다 보니, 이젠 마차 밖에서 웃음소리만 들려도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호위 없이 달랑 마부 하나만 마차를 몰고 있으니, 쉬운 먹잇감으로 표적이 된 것 같았다.

그래도 위기나 위험에 빠지는 일은 없었다.

일단 도적 떼의 전력은 형편없었고, 마차의 전력은 3성 기사 한 명에 B급으로 이뤄진 용병 넷이었다.

용병들이 나서면 대부분 해결이 됐고, 벤이 나선 경우는 단 두 번뿐이었다.

이때 벤과 용병들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었는데, 용병들은 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벤의 경우엔 무조건 튀는 게 답이었다.

그래도 붙여놓은 감시자라고 벤과 용병들은 절대로 같이 움직이지 않았다.

벤이 나서면 용병들이 내 곁에 붙어 있었고, 용병들이 나서면 벤이 내 곁에 머물렀다.

카멜에게 감시하란 지시를 받긴 받았는지, 저 인상 더러운 기사 놈은 내 곁에서 껌딱지처럼 떨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완벽한 감시자의 모습이냐?

‘이 골 빈 새끼의 정체가 뭘까?’

내 옆에 붙어 코를 골며 자는 벤이 보인다.

인간이 잠을 자는 거야 당연하긴 한데, 가끔 용병들이 자리를 비울 때도 놈은 내 곁에서 잠을 자곤 했다.

세상 편히 자는 모습인데, 아무리 봐도 연기로 보이지 않았다.

마치 죽이고 도망가라는 것 같잖아? 감시자로 어설퍼도 너무 어설펐다.

베네타에 도착하기 바로 전날.

라웁 숲 도적 떼로부터 서른 번째 습격 횟수를 채웠을 때, 난 용병을 이끄는 가비스에게 물었다.

“라웁 숲에 도적들이 이렇게나 많습니까?”

“많긴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닙니다. 한번 물어볼까요?”

“누구한테요?”

[으핫핫핫핫! 멈춰라!]

“저놈들한테요.”

때마침 알람처럼 도적 떼가 고함을 내지르며 우르르 나타났다.

난 서른한 번째 도적들을 통해 습격이 빈번했던 이유를 듣게 되었다.

피투성이가 된 두목이 가비스에게 잡혀 내 앞으로 질질 끌려왔다.

“외곽으로 내몰린 거라고?”

“그, 그렇습니다!”

“이유가 뭐지?”

“형제들의 아지트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사건이 계속 발생해서…….”

라웁 숲에 자리 잡은 도적 소굴들이 땅으로 꺼지듯 사라지는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두려움에 질린 도적들이 바깥쪽으로 내몰렸다는 얘기였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팔뚝에 솜털이 오소소 곤두섰다. 사건의 원흉을 단박에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놈이다!’

도미닉 후아튼.

온갖 생명체를 뜯고 맛보고 즐기는 변태 같은 존재. 생체 키메라를 제작하는 그 미치광이 짓이 분명했다. 재료 수급이 떨어지면서 슬슬 밖으로 나설 준비를 하려는 건가?

라웁 숲을 우회한 건 정말이지 잘한 선택이었다.

난 벤과 용병들을 돌아봤다.

실험체로 전락하는 횡액을 면했으니, 나한테 고마워하라고.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숲을 가로질렀으면 이런 고생 안 했을 텐데.”

“그러게. 누구 때문에 숲을 우회해서 이 고생을 하는 건지.”

“닥쳐! 푸른 장미 안 갈 거야?”

“…….”

시시덕거리는 저들은 자신들이 죽다 살아난 것도 모를 테지.

저 면상 더러운 기사 놈도.

그렇게 다사다난했던 사흘이 흘렀을 때, 마차는 거대한 성을 마주했다.

“저기가 자유도시 베네타?”

난 소설을 읽으며 상상했던 베네타의 풍경을 고스란히 올려다봤다.

마차가 굴러갈수록 큰 바위를 통째로 깎아 만든 높고 가파른 성벽이 다가왔다.

예술적이면서 실용적인 아름다운 성벽. 인간의 손재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예술적 가치를 지녔다.

자유도시 베네타는 드워프 도르네프가 지배자로 있는 곳이었다. 인간 외에 다양한 유색인종들이 머물며 쉬어 가는 곳, 우린 베네타 성문 쪽으로 마차를 몰았다.

* * *

베네타는 자유도시였기에 기사나 병사가 없었다. 검문은 병사가 아닌 용병들이 맡고 있었다.

베네타의 주인, 도르네프와 계약한 A급 이상의 용병단이 주기적으로 치안대를 맡았는데, 대부분은 드워프제 무기를 허리에 착용하고 있었다.

용병 주제에 무기가 저렇게 좋다고?

“저 무기를 얻으려면 베네타의 치안대로 몇 년을 굴러야 하죠.”

용병 리더인 가비스는 부러운 시선으로 검문하는 용병들의 무기를 가리키며 친절히 설명을 해줬다.

확실히 돈이 좋긴 좋나 보다.

푸른 장미를 쏘겠다는 말에 딱딱했던 용병들이 살갑게 다가온 것을 보니.

용병들도 처음에는 눈치를 봤지만, 고용주인 벤이 가만히 있자, 가끔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로 진전이 됐다.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경쟁률이 치열합니다. 양산품이지만, 인간 대장장이가 만든 검에 비할 바가 안 되죠. 드워프제 갑옷까지 입으면 목숨을 여벌로 가지고 다니는 것과 같으니까요.”

“갑옷도 줍니까?”

“전속 계약을 해야 하는데, 그 정도면 베네타의 사병이 됐다고 봐야 합니다. 근속 연수가 최소 10년 이상이니까.”

베네타의 주인은 무구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실력 있는 용병들을 휘하로 꼬드겼다. 그중에는 3성 이상의 방랑 기사도 제법 있어서 베네타의 전력은 타 영지와 비교해도 절대 밀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강할지도 모른다. 일단 템빨부터가 지렸으니까.

나도 하나 장만해볼까?

드워프제 무기라니, 갖고 싶어지는 게 당연하잖아.

“푸른 장미로 바로 가실 겁니까?”

하지만 가비스의 인기척에 그 생각은 접어두었다. 괜히 무기를 맞췄다가 경각심을 주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저리 살갑게 굴어도, 상황에 따라 언제든 내게 검을 겨눌 수 있는 놈들이었으니 말이다.

‘무기를 맞춘다고 정식 기사인 벤을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전투 말고 다른 방법으로 저들을 요리할 방법이 있으니, 굳이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었다.

부담스러운 가비스의 눈빛에 난 빙그레 웃었다.

푸른 장미에 가고픈 마음에 직접 말고삐를 잡고 마차를 몬 장본인이 이놈이다.

푸른 장미 5층을 방문해보는 게 꿈이라고 했던가.

가비스의 물음에 다른 용병뿐 아니라 벤도 눈치를 주며 나를 응시했다.

이 새끼들 진짜 감시자 맞아?

사흘 동안 지켜본바, 빈틈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아무래도 몇 가지 확인 작업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내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학살자, 카멜 블레이저였으니까.

“마법 상점에 먼저 들러야 합니다.”

“혹시 뭘 사실지 물어봐도 될까요?”

“생활용 스크롤입니다.”

“생활용 스크롤이라, 바로 모시죠.”

베네타는 용병들의 대우가 좋은 곳이라, 용병패를 내밀자, 검문은 순식간에 통과되었다.

가비스는 대로를 따라 주저 없이 마차를 몰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서쪽 외곽에 도착한 마차는 길게 늘어진 고층 건물 중 한 곳 앞에 멈춰졌다.

“용병들이 자주 들르는 마법 상점입니다.”

“유명합니까?”

“호구 안 잡기로 유명한 곳이죠.”

“…호구?”

“마법에 무지한 용병들이 뭘 알겠습니까?”

호구를 안 잡아서 유명하다니.

마법 상점이 그렇게 무서운 곳이었나.

베네타에 대해 잘 아는 것을 보니, 가비스는 베네타를 여러 번 방문했던 모양이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상점 안으로 들어가자, 벤이 뒤를 따랐다.

로브를 걸친 소녀가 종업원인지, 그녀는 싹싹하게 인사를 해왔다.

“손님! 무엇이 필요하세요?”

“발화 스크롤 있습니까?”

“물론이죠.”

난 발화 스크롤 여섯 장을 주문했다. 발화 스크롤은 간단히 불을 피우는 마법이었다. 야영 때 들고 다니는 생활용이라, 벤도 발화 스크롤에 관해선 뭐라 하지 않았다.

푸른색 양피지로 만들어진 발화 스크롤을 구매하고, 난 잠시 고민했다.

“혹시 환상 스크롤도 팝니까?”

“물론이죠. 어떤 모형을 원하세요?”

“나비인데, 흰나비여야 합니다.”

“흰나비라… 잠시만요, 축제에서 쓰다가 남은 것이 있을 거예요. 대용량뿐인데 괜찮으시겠어요?”

“용량은 상관없습니다.”

종업원이 양해를 구하고 창고로 사라진 사이, 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환상 스크롤은 왜 구하는 거지?”

“쓸 일이 있을 거 같아서요.”

“쓸 일?”

“알려줘요? 주군과 관련된 일인데.”

주군을 들먹이자, 벤은 입을 꾹 다물었다. 확실히 핑계로는 이것만 한 것이 없었다. 녀석이 물고 늘어질 만큼 위험한 물건도 아니었고.

환상 스크롤은 말 그대로 축제에서나 사용하는 불꽃 용품 같은 것이었다.

불꽃이 아닌 흰나비가 밤하늘을 수놓는 것이지만 말이다.

환상 스크롤을 살 생각은 없었는데, 도적에게 도미닉의 소식을 듣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 미친 마법사가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보험으로 준비해두려는 것이었다.

생체 키메라의 선구자로 불리는 광기의 도미닉.

그 미친 마법사의 과거를 난 알고 있으니까.

발화 스크롤과 환상 스크롤을 구매한 나는 마차에 탔다.

“푸른 장미로 가시죠.”

그토록 기다렸던 말이 떨어졌다.

말고삐를 쥔 가비스의 손이 갑자기 다급해졌다. 마차는 전보다 빠르게 광장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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