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와, 카멜, 이 무서운 새끼
자유도시 베네타는 드워프 도르네프의 비호 덕에 유사인종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곳이다.
그중 남정네들의 시선을 붙잡고, 밤새 마음에 불을 지피는 종족이 있는데, 바로 미의 종족 엘프(Elf)였다.
푸른 장미는 그 엘프들로 구성된 남정네들의 로망 같은 술집이었다.
“푸른 장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입구에 마차를 세우고 푸른 장미 입구에 들어선 순간, 새하얀 원피스를 걸친 늘씬한 몸매의 여인이 다가왔다.
‘와우!’
허리까지 늘어진 금발은 움직일 때마다 살랑거렸고, 그 머리카락 틈으로 투명하고 가녀린 목선과 쇄골이 드러날 때마다 용병들의 마른침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푸른 눈동자 그리고 눈에 확 띄는 뾰족한 두 귀.
‘에, 엘프다!’
그녀를 본 내 첫 감상은 그녀가 진짜 엘프라는 것이었다. 방송 매체에서 유난 떨던 엘프녀나, 엘프를 닮은 여자가 아니라 ‘진짜’ 엘프 말이다.
신기했다.
살면서 여배우를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실제로 본다면 이런 기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움에서 느껴지는 아우라.
이쁘다.
그녀가 손짓하자 집사로 보이는 사내가 공손히 우리에게 다가와 메뉴판을 건넸다.
눈동자가 길게 찢어진 게, 수인으로 보였다. 늑대 인간인가?
호기심이 들었지만, 안내판을 펼친 순간 내 의식이 아득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첫 입사 기념으로 친구들을 데리고 꽃등심 맛집을 갔을 때, 계산서를 본 내가 딱 이 기분이었다.
‘시발, 더럽게 비싸네.’
1층부터 5층 코스가 있는데, 5층은 기본 코스부터 머릿수당 300골드였다.
여섯 명이니 무려 1800골드.
푸른 장미 5층 제안을 수락하자마자 일행이 순한 양으로 변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보통 사람은 평생 가도 구경조차 할 수 없는 곳.
“몇 층을 원하시나요?”
엘프의 물음에 가비스가 당당하게 가슴을 펴며 외쳤다.
“5층!”
난 가비스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죽여버려?
이 양심도 없는 새끼가.
하지만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했던 것도 있고, 애초에 이곳, 푸른 장미에서 확인할 것도 있었으니까.
엘프들로 이뤄진 최고급 술집.
평범할 리가 없잖아?
엘프 넬라는 일행을 빠르게 훑어봤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배시시 미소 지었다.
일행 중 물주가 나란 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
아찔할 정도로 이쁘긴 한데.
저 미소, 왠지 호구 하나 물었다는 꽃뱀의 미소처럼 느껴지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리자, 난 보석 주머니를 그녀에게 툭 던졌다.
푸른 장미는 선불 비슷한 개념으로 돈을 맡겨놔야 입장이 가능하다고 가비스에게 들었다. 그녀는 주머니에 든 보석들을 살피곤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보석을 감정하는 능력도 있는 건가?
“공자님, 이 보석들의 가치를 아시나요?”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만?”
“그럼, 5층 값을 치르고도 잔금이 터무니없이 많다는 것도 알고 계시겠네요.”
5층 여섯 명 값이면 1800골드.
2천 골드면 충분한 금액인데, 2만 골드를 맡겼으니, 그 반응이 충분히 예상됐다.
하지만 난 푸른 장미만 방문할 게 아니라서 말이지.
“맡겨둔다고 해두죠. 계산할 것이 추가로 있을지도 모르고.”
“계산할 것이라면?”
“그건 천천히 생각해보겠습니다.”
내 말에 넬라의 고운 이마가 살짝 좁아졌다. 나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는 느낌인데, 처음 접해본 호구 유형이라 생각했으면 좋겠다.
‘나도 일종의 보험이거든.’
베네타로 오는 동안 내 신경에 거슬리는 몇 가지가 있었다. 뭔가 답답한 감각 말이다.
그때 2층 계단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여인들의 웃음소리.
새로운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엘프들이 계단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들도 눈앞의 금발 엘프만큼 미모에 꽃을 피웠고, 가슴골이 보일 정도로 매혹적인 원피스를 걸치고 있었다.
유혹을 부르는 살랑이는 몸짓에 일행들은 헤죽헤죽 웃음꽃을 피웠다.
‘얼씨구?’
엘프들이 나타나자, 일행은 내 존재를 잊었다.
곁에 줄곧 붙어 있던 벤은 이미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두 명의 엘프가 양쪽 팔짱을 끼며 달라붙자 넋이 나간 표정이었는데, 꼴을 보니 내가 사라져도 내일 아침까지 모를 정도로 얼빠진 모습이었다.
용병들의 모습도 벤과 다르지 않았다.
저게 감시자라고?
‘아무리 봐도 페이크 같잖아!’
감시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지만, 빈틈이 많아도 너무 많다. 그렇다고 연기를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내가 알아본 벤이란 기사는 지능보단 육체파에 가까웠다.
실력 면에선 확실히 나를 능가하지만, 심리 쪽에선 내 상대가 안 됐다. 그래서 보험으로 용병들을 붙인 거 같은데, 저들도 엘프 꽃밭에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기회가 오면 도망쳐보라고 떠미는 느낌이란 말이지.’
학살자 카멜.
그는 무력에 큰 재능이 없는 군주였지만, 전략이나 모략 쪽에선 발군의 능력을 지닌 악당이었다.
인간의 심리를 가지고 노는 인물이랄까.
그가 나를 시험하고 있는 거라면?
‘확인 좀 해봐야겠어.’
학살자와 엮인 상황이라면 뭐든지 의심을 해봐야 한다. 보석 주머니를 저 예쁜 엘프에게 맡긴 것도 그 때문이다.
‘푸른 장미라면 내 돈을 꿀꺽할 리 없을 테고.’
만에 하나 튀는 상황이 발생한다 해도 맡긴 돈은 언제고 다시 찾을 수 있었다.
난 그녀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죠?”
“넬라입니다.”
“엘프 넬라, 당신이 ‘이곳’의 주인인가요?”
‘엘프’란 말에 잠시 멈칫한 넬라는 해맑게 웃고는 답했다.
“푸른 장미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주인이 맞습니다.”
엘프는 세계수의 뿌리 중 아스가르드의 가호를 받고 태어난 종족이라 언령에 특화된 능력을 지녔다. 한마디로 거짓말을 못 한다는 뜻.
내가 ‘엘프’를 직접 언급한 이유다.
말에 구속력이 생기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곳의 주인이냐고 물었더니, 푸른 장미를 특정하곤 주인이라 답했다.
자연스러운 대답 같지만, 말을 잘 돌려 답한다는 엘프의 특성을 잘 알고 있는 나는 숨겨진 뜻을 파악했다.
이곳은 푸른 장미이면서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일행들 모두 방을 잡고 입장하신 거 같은데, 공자께선 안 가시나요?”
“그러게요. 진짜 나만 남겨두고 갔네요.”
설마 했는데 진짜 모두 사라졌다.
내 의심이 이젠 확신으로 변했다. 저들은 ‘진짜’ 감시자가 아니다.
그럼, 진짜는?
‘진짜라면 내 주변에 있겠지.’
“바깥에 화장실 있습니까?”
“네? 바깥에는 창고밖에….”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난 넬라에게 양해를 구하곤 푸른 장미 건물을 나왔다.
해가 저문 저녁 바람은 무척이나 쌀쌀했다.
푸른 장미는 베네타 내에서 가장 큰 술집이었기에 주변에 술 창고들이 즐비했다. 난 그중 문이 열린 창고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문을 닫은 나는 바로 옆에서 바지를 내리고 오줌을 시원하게 갈겼다. 긴장했는지 바지춤이 잘 안 올라간다.
튀었다.
‘시발.’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난 욕설을 삼키며 그 뒤론 쥐 죽은 듯 서 있었다. 어둑한 창고 안은 깜깜했다. 개미 소리 하나 안 들린다.
마른침을 삼키곤 닫힌 문 너머로 귀를 기울였다. 암살자의 청각은 제법 뛰어났다. 얕게 들리는 바람 소리. 난 그 소리 사이에서 무언가를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바람 소리를 뚫고 무언가 잡혔다.
터벅― 터벅―
발걸음 소리.
그 소리는 서서히 내 앞으로 다가왔다. 제발 그냥 지나가라고 속으로 외쳤다. 하지만, 발소리는 정확히 내가 있는 창고 문 앞에 멈췄다.
난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문을 벌컥 열었다.
“……!”
활짝 열린 문 앞에 거대한 사내가 바위처럼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 그 사내는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나와 창고 안을 덤덤히 둘러보곤 내게 물었다.
“창고에는 왜 들어왔지?”
“누, 누구십니까?! 왜 이곳에?”
“자경단이다. 창고 안으로 몰래 들어간 것을 보고 따라왔다. 이곳에 들어온 이유가 뭐지?”
강압적이다.
신분을 증명하는 물건조차 내밀지 않는다. 그런데도 난 그 앞에서 신분을 요구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찌릿한 감각.
이 새끼, 벤보다 더 강한 새끼 같은데.
“소, 소변이 급해서….”
내 시선을 따라 모락모락 핀 흔적을 본 사내는 짧게 혀를 차더니 바깥을 가리켰다.
“꺼져라. 도둑으로 몰리고 싶지 않다면.”
“…….”
사내가 비켜서자, 난 허겁지겁 창고를 나와 푸른 장미로 달렸다. 뒤를 힐끔 돌아보자, 사내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난 푸른 장미 로비로 후다닥 들어왔다. 거친 숨을 탁 내뱉곤 잠시 주저앉았다.
“와, 카멜, 이 무서운 새끼.”
진짜 설마 했는데, 그 설마가 진짜가 됐다.
한눈에 본 순간 알아차렸다.
저놈이다.
카멜이 붙인 ‘진짜’ 감시자 말이다. 만약 벤의 눈을 피해 도망쳤다가 저놈에게 붙잡혔다면 어떻게 됐을까?
카멜의 눈에 난 ‘그’에게 구함을 받고 지시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였다. 그런 꼭두각시가 동맹 표시 전에 약속을 깨고 도주를 꾀한다?
“‘그’의 존재를 의심했을 거야.”
나와 나눴던 대화를 곱씹으며 수상한 점을 찾았을 테고, 그 결론 끝에 내가 ‘그’일 수도 있겠단 가정까지 도달했다면, 난 쥐도 새도 모르게 매장당했을 것이다.
감시자 뒤에 또 다른 감시자를 심어둔 것도 그 티끌만 한 의심을 털어내기 위함이겠지. 설마 3성 기사를 미끼 따위로 쓸 줄이야. 난 카멜의 치밀함에 혀를 내둘렀다.
‘혈육의 뒤통수마저 친 새끼가 누굴 믿겠냐마는.’
꽉 움켜쥔 두 주먹을 폈다.
땀이 송골송골 맺혀진 손바닥.
시발, 진짜 무섭다.
난 떨리는 몸을 추스르곤 비틀거리듯 일어났다. 이곳에 오래 있으면 또 의심받는다.
난 로비 중앙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중앙에는 넬라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묘한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일은 잘 보셨나요?”
“네. 지릴 뻔했습니다.”
“호호호, 참으로 재미있는 분이시네요.”
“…….”
“이름을 물어도 될까요?”
“알입니다.”
“알 님이시군요.”
내 이름을 잠시 중얼거리던 그녀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기억에 없는 이름이네요. 저랑은 처음 뵙는 거겠죠?”
“손님들 이름을 다 기억하고 있습니까?”
“네.”
그녀의 당당한 대답에 나도 그런가 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이쁘면 남자는 관대해지는 모양이었다.
넬라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싱그러운 향기.
아니, 체향인가?
조금 전 긴박함을 잠시 잊을 정도로 향기가 매혹적이다. 꿀을 발견한 벌이 된 기분이랄까. 일행들이 홀린 듯 엘프들을 따라나선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녀가 보석 주머니를 흔들면서 말했다.
“제가 생각을 해봤는데요.”
“네? 무슨 생각을…?”
“이 주머니 혹시 보관을 의뢰하는 건가요?”
“…….”
이런, 조금 전 행동 때문에 눈치챈 건가? 하긴 갑자기 바깥으로 튀어 나가면 수상히 생각하겠지.
“대략 2만 골드네요. 이 큰 금액을 귀찮다는 이유로 타인에게 맡길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그냥 맡아주면 안 됩니까? 5층 손님인데.”
“곤란해요.”
눈치 한번 더럽게 빨랐다. 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원하는 게 뭡니까?”
“보관료로 하루에 20골드는 받아야겠어요.”
이쁜 엘프가 갑자기 독사 같은 년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헛웃음을 흘리자, 넬라는 부드러운 태도로 또박또박 이야기를 시작했다.
“푸른 장미 안에선 모든 부탁이 돈으로 이뤄집니다. 보관 의뢰도 그 예외는 아니죠. 대신 그에 대한 책임은 확실하게 보증할게요.”
“그렇군요.”
“보관을 맡기시겠습니까?”
“일단 보류하겠습니다. 돈이 얼마가 남을지 알 수가 없어졌거든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검은 장미.”
내가 그 단어를 내뱉은 순간, 넬라의 표정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이곳의 ‘진짜’ 주인을 만나봐야겠다.